지난 20일엔 아침부터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녹번동 정영신씨 다락방에 있는 대형 프린트기를

'한국스마트협동조합' 사무실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 기계가 인사동 '아트 온'에서 녹번동 다락방까지 온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정 몇 명이 달라붙었지만 좁은 방 턱에 끼어 힘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나갈 때는 '앱숀'사무실에서 온 젊은 분들이 쉽게 빼낼 수 있었다.

협동조합르로 옮겨 놓은 프린트기를 보니 지난 일이 생각났다.

우리 손에 들어 온 사연은 뜻밖이었다.

 

8년 전 영일만친구 최백호씨가 인사동에서 그림 전을 열었는데,

그 개인전을 아라아트김명성씨가 추진한 것이다.

전시를 끝낸 최백호씨가 전시경비 보태라고 천만 원을 내 놓았는데,

김명성씨가 기어이 받지 않은 것이다.

 

그 돈이 왔다 갔다 하다 결국 내 프린트기 사주기로, 뜻을 모은 것 같다.

후배들의 고마운 뜻에 앱숀 프린트기가 생겼는데, 원님 덕에 나팔 불게 된 것이다.

 

정영신씨의 손놀림에 의해 정선 산천이 줄줄이 펼쳐 나왔고,

전국 장터가 왁자지껄 난장을 만들어냈다.

돈 버는 기계가 아니라 돈 쓰는 기계였다.

만만찮은 잉크와 종이 값 날려가며 어지간히도 떠벌렸다.

 

이제 그 기계도 8년차가 되니 내 몸처럼 골골한다.

얼마 전부터 컬러 사진이 안 되고 흑백만 된 모양인데,

문제 생긴 헤드를 수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단다.

이제 수리하던, 새로 사던, 주사위는 스마트협동조합에 넘겨졌다.

 

그 날은 스마트협동조합 식구들이 함께 밥 먹는 수요일이었다.

처음으로 차린 공동 밥상인데, 주방 일을 도운 게 문제였다.

밥에 물을 많이 부어 죽밥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책임질 주방장이 없어 그렇다며 혼자 변명해댄다.

 

황경아씨가 가져 온 갓김치와 칼치구이,

정영신씨가 가져온 두룹나물에, 입만 가지고 간 나만 맛있게 먹었다.

함께 먹는 밥이 맛있는 거야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 날 저녁부터 이틀에 걸쳐 정영신씨 집 환경미화작업이 펼쳐졌다.

방을 차지했던 프린트기가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아무리 코 구멍한 집이지만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변화를 즐기는 정영신씨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을 거다.

 

미화작업이라 해도 이쪽 책장이 저쪽으로 가고

저쪽 책장이 이쪽으로 오는 수준이지만, 여간 신경 쓰는 일이 아니다.

김명성씨가 가져가야 할 대형 작품 여덟 점이 남아 마무리를 못했으나

다락방 삼면은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동안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책들을 버렸다.

일부는 정선으로 옮겼으나, 이젠 정선도 둘 곳이 없다.

그 날도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구분하는

정영신씨의 판단에 따라 많은 책들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렇지만, 자의든 타의든 또 다시 책은 들어 올 것이다.

대개 버려지는 책은 사지 않고 얻은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지 않는다면, 공짜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자칫, 쓰레기 양산하는 일에 일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 버려지는 책이 아까워 고물상에 팔려고 모았는데,

정영신씨는 없는 사람 가져가게 그냥 밖에 내놓으란다.

세상에 니보다 없는 사람이 어딧노?”라고 했더니, 비시시 웃는다.

그래! 돈은 없어도 마음이 부자니, 니가 더 부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에선가 우리가 만든 책들도 이처럼 버려질 걸 생각하니,

세상만사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끼던 책도 싫어지면 버리듯이 모든 것은 언젠가 버려진다.

결국 인간조차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던가?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터넷 뒤져가며 책을 주문할 것이다.

제 버릇 개 못준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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