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한잔하는 셋째 수요일은 캘린더에 빨간 글로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대통령선거일’이라고 적혔는데, 지난 일들에 만감이 교차했다.
교도소에서 떨고 있을 적폐무리 생각하니 통쾌하긴 했으나, 한 편으론 불쌍했다.
마약 같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것이지, 한 인간으로서는 가여울 수밖에 없다.






모임 있는 날은 폭설이 내려 걱정스러웠다.

전날 밤 정영신씨 생일 술에 곯아, 온 종일 방바닥을 기었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모임은 송년회를 겸한 달이기도 하지만, 윤병갑씨를 만날 일도 있었다.






잔뜩 챙겨 입고 미끄러질까 조심스레 지하철로 갔는데, 삼십분이나 늦어버렸다.
눈 때문인지 사대문 방향에서 나오는 지하철은 만원인데, 들어가는 지하철은 텅텅 비었다.
많이 못나올 것으로 여겼지만, 인사동 ‘유목민’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신용시인도 나와 있었다. 



 


그는 사는 곳이 소래부근이라 한번 나오려면 차를 몇 번이나 갈아 타야하는데다,
옛날 노가다 시절에 골병든 다리에 문제가 생겨 인사동에 안 나온 지가 일 년이나 되었다.
또 하나 고마운 것은 화가 전강호씨다. 여지 것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지만,
송추에서 목발로 눈길 헤쳐 오려면 예사 일이 아닐텐데 말이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강찬모, 이명희, 공윤희, 김완기, 김수길, 강성봉, 이재민,
김재홍, 강경석, 전활철, 박혜영, 김대웅씨 내외 등 많은 사람들로 술집은 시끌벅적했다.
하기야 술꾼들이 날씨 따지겠냐? 더구나 눈 오는 날이라 술 맛 나기 딱 좋은 날 아니던가.
그런데, 윤병갑씨는 보이지 않고 전활철씨가 ‘미술기행’ 일동이라 적힌 돈 봉투를 건내주었다.






망년회 모임에 안주라도 몇 개 시켜드시라고 보냈다는데, 엄청 미안했다.
윤병갑씨도 같이 어울릴 것으로 생각하고 늑장 부렸는데, 이일을 어쩌랴!
통장이 없는 처지라 봉투 전해주려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에 나왔다는데,
‘유목민’ 문이 닫혀있었다고 했다. 이 추운 날 얼마나 고생하였을까?






그런데, 입장 곤란한 일이 생겨버렸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고마운 마음을 총대 맨 조준영씨에게 전했는데,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흔 넘은 노인네는 회비를 받지 않는데, 탁발한 돈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자기네들도 내일 모래면 일흔 일 텐데, 더럽게 기분 좋더라.






일흔 넘은 사람이레야 나와 김신용씨 뿐이니, 둘 다 개털이라 봐주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인사동 출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장려차원에서 안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비 안 받는 것은 차지하고, 안주 사라고 보낸 성의까지 거절했는데,
한마디로 거지 돈은 치사해서 받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뻔뻔스럽지만 길도 미끄러운데 택시 타고 가자며 김신용씨와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미술기행’ 회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훈훈한 년 말이었다.





뒤늦게 정영신, 김명성, 김상현, 최종선, 임태종, 김각한, 이회종, 김영선, 노광래씨가

차례대로 나타나 판이 무르익어갔다.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의 노래도 크게 일조했다.
마침 그 날이 김명성씨 생일이라 공윤희씨가 생일 케익도 사 왔다.
매년 정영신씨 생일과 하루 차이라 같이 생일잔치를 치루었는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 날은 안주도 푸짐했지만, 김완기씨가 양주를 한 병 가져왔더라.
몇 잔 마시지도 않았으나, 술 취해 똥오줌 못 가린 엊저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동안 이가 빠져 삼가 했던,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지랄발광을 떨었으니,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망할 년 보내는 날, 어찌 돌지 않으랴!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박제동 그림



지난 15일, 가난한 작가들을 돕는 취지의 색다른 전시가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렸다.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전시로, 채현국선생께서 주변 작가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를 내세워 마련한 단체전이다.






처음엔 전시 성격이나 명분이 모호해 망설여졌으나, 평소 존경하는 분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인기작가 몇을 뺀 참여 작가 모두가 가난한 작가들이라 결국은 우리를 위한 전시가 아니던가?

다들 그런 생각으로 작품을 내 놓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불경기에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팔린다고 해도 잘 나가는 작가 몇 명에 한정될 것이라 전시 명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관료와 팜프렛 제작비, 뒤풀이 비용만 고스란히 선생께서 안게 될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오랜만에 인사동이 들썩이겠다는 기대감은 있었다.






어쨌든, 인사동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 60여명을 규합한데다, 백낙청씨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 90여명이 뜻을 같이 하여, 마치 창당 대회 같은 대규모 전시였다.

한편으론 우려 섞인 주변 분들의 지적도 있었지만,

서로 잘 만나지 못하는 인사동 사람들을 모아, 한데 어우러지게 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가히 이산가족전이라 할 만큼 많은 지인들이 모였는데, 근간에 우리가 이렇게 많이 모여 본 적 있었는가?






작품보다 사람을 더 기다린 전시였지만, 개막시간을 오후6시로 잘 못 알아 한 시간이나 늦어 버렸다.

도착하니 뒤풀이 장소로 옮기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 축하공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반가운 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사 나눌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카메라부터 들이댔다,

그게 내 인사법으로 여겨,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전시장은 작품 반, 사람 반이었다. 그 많은 작품을 어떻게 다 걸지 걱정했는데, 용케도 다 걸려 있었다.

한정된 공간이라 유치원생 사생대회처럼 다닥다닥 걸 수밖에 없었으나, 좋은 작품이 산만한 주변에 묻혀 아쉬웠다.

분단풍경을 보여 준 신학철선생의 ‘가야할 길’을 비롯하여 발길 잡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사진 찍기 바빠 작품 감상도 제대로 못하고 뒤풀이 장소로 옮겼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낭만’과 ‘아리랑’으로 갈라져야 했다.

술 마시고 사진 찍기도 바쁜데,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느라 불알에 요령소리 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하나 둘 빠져나갔고, 잔당들만 유목민으로 몰려들었다.





매월 셋째 수요일마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술 마신지가 몇 개월 되었지만,

이 날은 채현국선생 덕에 완전 대박 난 것이다. 뒤늦게 나타난 손연칠씨는 전시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이 인사동사람들 만나는 셋째 수요일이라 나왔다고 했다.

‘부어라 마시어라’ 얼마나 흔들며 온 몸으로 놀았던지, 그 이튿날 죽어났다.

죽어도 좋았던 그 많은 이야기가 절절하나,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하얗더라.






그 날 만난 분들을 떠올려야 하는, 이 부분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머리 아프다.

사람은 생각 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를 뒤적일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많다.

그 날 카메라 총알이 떨어져, 김재규가 박흥주 권총 빼앗아 박정희 쏘듯,

정영신이 카메라까지 빼앗아 갈겼으니 오죽하겠나? 더러는 정영신이가 찍은 사진도 있다.





낮 시간에는 강민, 방동규, 구중서, 이행자, 김승환, 장봉숙선생 등 연세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겠다.


먼저 채현국선생 내외분을 비롯하여 주재환, 임재경, 유홍준, 신학철, 이애주, 서정춘, 장경호, 박불똥, 이인철, 이인섭,

김 구, 김명성, 노형석, 전강호, 이명희, 구중관, 김상현, 임계재, 조준영, 박상희, 황외성,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정명수, 고선례, 신미라, 백남이, 배평모, 강고운,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전종덕, 김영복, 이두엽,

임경일, 전활철, 이만주, 이지녀, 김종근, 김태서, 박 건, 덕원스님, 박 철, 김봉준, 김효성, 정영철, 최명철, 김이하, 장순향,

김대희, 공윤희, 강선화, 홍석화, 임경숙, 편근희, 유진오, 김형구, 박수영씨 등이다.

이 전시는 21일까지 열리고, 유카리화랑에서 12월12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2차전도 있는데,

벌써부터 전시에 대한 구설수가 많아 걱정이다.

가난한 작가 돕는다는 핑게대고 재미는 엉뚱한 곳에서 본다는...


사진, 글 / 조문호






























































































































































'인사전통문화축제인 인사동 박람회'가 지난 달 28일부터 3일까지 인사동 전 지역에서 열렸다.

마지막 날인 3일에서야 구경 갈 수 있었는데, 좀 늦었던지 이미 거리 행진 퍼레이드가 끝나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던지,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릴없이 거리를 떠도는데,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타나 정영신씨를 보더니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가워했다.






이번 축제는 전통문화업소들을 소개하는 인사동 박람회와 인사동 주민ㆍ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여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인사전통문화축제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인사동 전 지역의 전통문화업종 업소 171개 모두가 박람회장이 되었는데,

고미술업체와 화랑에서는 특별전을 열었고, 표구ㆍ지필묵ㆍ공예업소들은 각 업소 특화 품목을 50% 할인하여 팔았고,

전통차음식업소(총 30개소)도 주 메뉴를 50% 할인하는 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나 사람들이 몰렸는지, 얼마나 팔았는지는 모르겠다.





박람회장인 대개의 업소들을 아는데다, 마땅히 구입할 물건도 없는 터라

전인경씨의 ‘비욘드 만다라’전시가 열리는 'ARTSPACE H'에서 이광수교수를 만나보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갔다.

동자동에서 일을 보고 저녁에는 강제훈씨의 “THE PLANET"전이 열리는 강남 ‘스페이스22’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강제훈씨 사진전에서 반가운 분들 만나 뒤풀이장소로 옮겨 한창 술판이 벌어졌는데, 김명성씨의 전화가 빗발쳤다.

빨리 인사동으로 넘어 오라는 것이다.

전주로 이사 가신다는 송상욱선생과 기다린다기에 마지막 이별주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 또 다시 인사동으로 갔다.

 




유목민에는 반가운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윤승길씨와 박영수씨도 있었고, 안 쪽 자리에는 노형석기자도 있었다.

김명성씨와 송상욱선생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인사동을 떠나는 송상욱 선생이나 떠나보내는 김명성씨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인사동 골방 얻어 사무실로 쓰며, 없는 돈에 ‘멧돌’이란 시지까지 펴내며 인사동 골목골목을 풍미한 세월이 어언 몇 십 년이던가?





인사동을 짝사랑하는 분이 어디 송상욱선생 한 분 뿐이겠냐 마는, 인사불성된 인사동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변하는 세상, 변하는 인심을 누가 잡을 수 있으랴!

옛 시인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고 한탄했지만, 산천도 인걸도 간 데 온 데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어찌 취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의 인사동은 초가을에 접어든 수요일이라 그런지 전시장마다 사람들로 넘쳤다.
난, 전시 열림식에 가야 할 곳도 한두 군데 아닌데다, ‘유목민’에서 사진인과의 모임도 있었다.

문제는 전시 오프닝이 대부분 비슷한 시간대라는 거다.

연락이 와 인사차 들리지만, 다들 사진 찍어 주기를 바라니 작품만 보고 나올 수도 없다.

바삐 인사동 거리를 가다보니 화가 김구씨도 바삐 지나간다. 나만 바쁜 것이 아닌 것 같다.





먼저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설숙영씨의 도예전과 네팔드림팀 그림전, 장흥래씨 인물전을 차례대로 들렸다.

눈도장과 함께, 사진 한 두 컷 찍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강찬모 초대전에 들렸다.

그곳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빠져 나가고 아는 분으로는 작가 강찬모씨와 신성준선생, 노광래씨 뿐이었다,





작품을 보려고 작정했던 ‘나무화랑’의 최경선씨 전시에 서둘러 달려갔다.
이미 김진하관장과 장경호를 바롯한 화가들이 뒤풀이에 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다들 ‘낭만’으로 가자지만, ‘유목민’에서 기다리는 분들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사진가 김문호, 이정환, 최승희씨가 와 있어 반갑게 술잔을 나누었다.

이정환씨가 준비해 둔 11도짜리 다랭이 막걸리가 별로 독하지 않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며 홀짝 홀짝 맛있게 마셨다.





마침 강찬모씨 뒤풀이도 ‘유목민’이라 고중록, 김명성, 조해인, 조준영,

이명희, 최유진, 강경석, 조명환, 임태종씨 등 많은 분들이 옆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 인사 나누느라 바빴는데, 뒤늦게 주인공 강찬모화백이 등장나자,

화가 이인섭, 전형근씨, 그리고 구로구청장인 이성씨도 나타났다.




그런데 술이 슬슬 취하기 시작했다. 마구초로 다독였으나 소용없었다.

정영신씨가 나타나자 찍던 카메라 내 맡기고 줄행랑쳤다.

도저히 지하철을 탈 수 없을 것 같아, 김명성씨에게 택시비까지 구걸해 집에 왔다.




집에 들어오자 말자 큰 대자로 뻗어버렸는데, 다시는 11도 막걸리 먹지 말아야겠다.
난, 역시 소주 체질이야!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자는 뜻으로 시작된

첫 ‘주삼수(酒三水)날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나, 너무 과음했다.
‘학고제’에서 화가 송창씨의 개막식이 있었지만, 삼청로라 갈 수도 없었다.
많은 주당들이 그 전시뒤풀이에 퍼지겠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인사동 길거리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제주로 내려 간 김호근씨를 만났는데, 오랫만의 서울 나들이라 했다.

종각 부근에서 약속이 있어 그 곳에서 마시자고 했으나 양해를 구했다.

인사동에서 이차를 약속하고 ‘낭만’으로 갔지만 거긴 아무도 없었다.

이 날은 핸드폰까지 고장 나 아무와도 연락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하는 곽명우씨를 만났다. 언제나 웃는 표정이 정겨운 친구다.





벽치기 샛길의 주막으로 접어드니, 찻집 앞에는 김명성씨가 앉았고,

불화가 이인섭씨는 제자와 함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날의 첫 술잔은 이인섭씨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성기준씨와 송용민씨도 다녀 갔지만, 이차는 화가 김 구, 장경호씨와 마셨다.

장경호씨는 이미 술에 취해 왔는데,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하자며 바람 잡았다.





칠뫼 김구씨와 함께 따라간 곳은 ‘국악 라이브’였다.

장경호씨는 요즘 술만 취하면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이집으로 자주 데려왔다.

여자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어 찾는 것 같은데, 만만찮은 그 술값은 어쩔거냐? 

난 너무 취해 소파에 잠시 골아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임경일씨도 와 있었다.






장경호씨는 자기의 십팔번인 뒷동산 아지랑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제목을 몰라 못 찾고 있었다. 그토록 노래를 자주 부르면서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나저나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는데. 일산 사는 장경호씨는 또 백상사우나에서 신세 질 팔자였다.

나도 지하철 끊기기 전에 줄행랑쳤지만, 뒤가 편치 않았다.


에고~ 사는 것도 힘들지만, 노는 것도 힘들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다들 자기 집에서 지내다, 큰 맘 먹어야 나오는데 나와도 잘 만나지지 않는다.
가끔 주변 전시오프닝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기회마저 많지 않다.

일 때문에 인사동에 나가도 미리 약속 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술꾼들이 방앗간처럼 들리는 ‘유목민’에서 가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나들이가 잦지 않으니, 대개 해가 바뀌어도 얼굴 한 번 못 보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고, 만나면 몇 번이나 더 만나겠는가?
예전에는 ‘인사동 사람들’이라는 ‘창예헌“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판을 벌여 왔으나
그마저 물주 김명성씨의 사업이 쇠락하여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를 애석하게 생각해 온 조준영시인이 가끔 연락해 만나기야 하지만 10여명에 불과하다.
이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회비를 조금씩 걷어 그런지 모르지만, 많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 한 사람이 맡아 여기 저기 사발통문을 보내지 않아 그럴거다.






그 날, 내가 제안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날짜를 정해두고, 일 없는 분들은 인사동으로 나오자고 했다.
시간은 정 할 필요가 없지만, 장소는 인사동 낭만의 마지막 보루인

벽치기 샛길에 있는 ‘유목민’도 좋고,  인사동 11길에 있는 '부산식당',  

인사동 8길의 '사동집'이나 '낭만', 아니면 6길의 '툇마루'던, 어디던 들려보자.

특정한 분들끼리 만나려면 장소를 페북이나 카톡에 알려, 함께 놀자는 것이다.


어느 한 집을 지정하여 약속하는 것도 좋지만, 약속 없이 만나는 즐거움이 더 좋다.

매월 몇일로 날자를 정하던지, 아니면 전시들이 열리는 몇째주 수요일로 택해도 좋다.

어느 특정한 날은 인사동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는 날로 정하자는 것이다.

지방에서 오는 분들도 약속을 그 날로 잡아두면 님도 보고 뽕도 따지 않겠는가.

인사동에 애착을 가진 많은 예술가들의 의견들을 한 번 듣고 싶다.






몇 일 전 조준영 시인의 연락을 받았다. 27일 오후6시30분경 ‘유목민’에서 얼굴 한 번 보자는것이다.

요즘에는 가야할 전시나 일이 몰려 시간내기가 어렵지만, 다행히 그 날은 약속이 없었다.
시간 맞추어 나갔더니,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화가 장경호, 전강호씨가 판을 벌여 놓았다.
뒤이어 음악인 김상현씨와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등장하였고,

김명성, 공윤희씨가 차례로 나타나 술자리가 두 패로 갈라졌다.






음악인 김상현씨가 나를 위해 부른다며 ‘봄이 오면“이란 신곡을 열창했는데,
이 노래 역시 짠한 슬픔을 남겼다. 왜, 봄은 와도 슬프고 가도 슬픈가?


전복안주가 나오니, 전강호씨가 몸 보신하라며 전복을 권했다.
농담으로 ‘몸 좋아져 거시기 발동하면, 책임 질거냐?’니까 조준영시인 말한다.
"남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정력 타령이고,
여자는 밥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화장을 한단다."
꽃은 나비를 불러 들여야 하고, 나비는 씨를 뿌려야 하는 엄정한 자연의 이치를 어찌 할거나...






자리에 앉기 전에는 이승철, 김이하 시인이 마시다 갔고,

뒤늦게는 화가 김정헌씨와 최유진, 이상훈씨도 등장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뒤져보니, 전 날 찍힌 장경호, 성기준, 강기숙, 홍인호씨의 모습도 들어있네.

좌우지간,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에서 만나, 못 다한 시름 풀어보자.

사는 게 별거냐?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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