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병원에서 퇴원하여, 정선 떠날 채비로 인사동에 나갔다.

꼭 봐야 할 전시도 있었지만, 전시 DP에 필요한 자재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일을 마치고, ‘유목민’ 골목으로 들어서니 반가운 분이 손을 흔든다.
낭만주먹 방동규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연갑씨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왔는지 모르나, 방선생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을 항상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적으로 돌변하여 뒤통수치는 것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라,

김명성씨에게는 꼭 필요한 충고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불신할 일만은 아니라, 말처럼 쉽지는 않다.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으로 화가 장경호씨와 서길헌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명성씨와 장경호씨는 살이 끼었는지 술 취한 막판에는 꼭 언쟁이 붙어 좀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장경호씨가 조용히 드릴 말이 있다며, 방선생님을 모셔갔다.






좀 있으니, ‘평화만들기’에 있다는 전화가 와 다들 그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장경호씨가 슬그머니 술값을 계산하고 일어나 버렸다.
방선생님도 사모님의 호출을 받아,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는 비전향 장기수 장의균씨가 와 있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강제로 옥살이를 한,

그의 근황을 들어보았는데. 다들 힘들게 살고 있었다.





다시 핸드폰이 울려 펼쳐보니, 장경호씨 전화였다,
그런데, 시끄러운 음악소리만 들리고,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나만 오라는 뜻인지 모르겠으나,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의 자존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간히도 피곤하게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7일 저녁 늦게, 모처럼 김명성씨의 전화를 받았다.
작년 연말 열었던, 내 전시에서 만나고 처음이라 반가웠다.
별 일 없으면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오라 했다.
마침 동자동 상가의 술자리가 끝난 뒤라 서둘러 나갔다.

유진오씨와 함께 있었고, 다른 좌석에도 반가운 사람이 많았다.
어떻게 일은 잘 풀려 가는지 걱정되었지만,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눈빛으로 짐작하며, 케케묵은 이야기 안주삼아 술 한 잔했다.

그런데, 꼬깃꼬깃 접은 신사임당 지폐 두 장을 내 손에 집어주었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짐작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침 옆에 가난한 지인이 술 마시고 있어, 한 장씩 나누어 가졌다.

그 친구는 기분이 상했는지, 돈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나갔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지만, 주는 사람 자존심은 생각치도 않냐?
결국 찢어 버린 돈 주워 모아, 자기 먹은 술값 계산하게 하면서...

뒤늦게 서길헌씨와 송미향씨도 왔지만,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주인장 전활철씨가 챙겨 준 반찬도 잊은 채, 그냥 나와 버렸다.
도대체 돈이 뭐 길래, 사람 기분을 이렇게 나쁘게 만드는가?
옛 유행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돈 돈, 돈이 원수다”

사진, 글 / 조문호















비가 내린 지난 토요일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동자동 쪽방사람들의 행렬이 인사동을 메웠다.

‘남인사마당’에 집결한 빈민들은 북인사 마당을 돌아 광화문으로 향했는데,

그들이 외치는 “박근혜 방 빼!”라는 함성이 인사동 거리에 울려퍼졌다.

빗길 나들이의 외국 관광객이 박수를 보내기도 했고, 지나치는 행인들은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시냇물이 강물 되듯, 광화문으로 몰려든 시민들의 물결은 광화문 일대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곳곳에 울려 퍼지는 퇴진 함성과 음악소리에 들떠 추위도 잊게 했다.

어두워지자 경찰이 진을 친 청운, 효자동 주민센터 앞까지 행진했으나,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오히려 전경을 위로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전경들도 몸은 묶였으나 마음은 똑 같다는 듯 서로 일체감을 보였다.

밤늦은 시간, 인사동에서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 어디 있어? 광화문에 있으면, ‘여자만’으로 와”
빵조각으로 끼니는 메웠으나, 추위를 녹여줄 술 생각이 간절했던 터라 잽싸게 달려갔다.


‘여자만’에는 김명성씨와 김용국씨가 있었지만, 연락을 받았는지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고중록, 이강군, 김영배, 정영신, 신상철씨에 이어 인사동 어르신들도 오셨더라.

방배추로 통하는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과 강 민시인, 구중서, 전태수선생 등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모두들 시위현장에서 오신 것 같았다.

이미례씨가 차린 술상 옆에는 박기성씨와 김여옥씨도 있었지만, 긴 시간 퍼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급히 마신 탓에 취기도 올랐지만, 시위현장에 복귀하기 위해서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인사동 거리는 붐볐다. 오히려 종로 방면은 사람이 빠져나가 보행이 다소 수월했다.

광화문 군중대열에 합세하여 또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근혜 방 빼! 박근혜 방 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오후7시부터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이사회가 인사동 '이모집'에서 열렸다.

2012년 에 이사회가 열리고 처음이니 근 5년 만에 열리는 이사회였다.

사단법인의 이사회를 5년 만에 연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신문에 기고하기 위해 여기 저기 정보를 묻고 다닌 터라, 그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지 것, 천상병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자가 사무국장에서 부이사장 직함까지 맡아 혼자 갖고 논 것이다.

그동안 매년 봄마다 의정부에서 천상병예술제를 개최하고 천상병문학상도 여러 군데서 시상했으나,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감사는 제대로 받았는지, 임원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김명성, 김병호, 구자홍, 목영태, 길상호, 공윤희이사 등 나까지 일곱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자기가 이사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관심이 떠났는지 흐지부지됐다.

김병호 부이사장에게 물었다.“5년 만에 여는 이사회인데, 그동안 어떻게 처리했냐?”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감사가 두 분이나 있으나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관심 없는 사람을 앉혀 두었으니, 제대로 감사 했을 리가 없다.

“회계나 업무처리에 관해 조사를 의뢰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죠?”라고 물었다.

하기야, 혼자 독주하도록 방치한 김명성이사장의 책임 또한 크다.

그러나 개인의 잘못보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활성화시켜 인사동 발전에 기여하게 하는 게 급선무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회의진행을 지켜보았다.

회의록에는 천상병문학관건립을 위한 천상병선생의 저작권과 유품관리 권한을 의정부시에 넘겨주자는 안건과,

내년 4월22일부터 열릴 ‘제14회천상병예술제’ 준비를 비롯해 임원개선 및 사업회 활성화 방안이란 명목만 적혀 있었다.

천상병예술제 계획안도 십 여 년 넘게 해온 방식에서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참석 이사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천상병 선생 조카인 목영태이사는 아직 저작권이나 유품을 넘길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고,

김명성이사장은 의정부 행사도 좋지만, 인사동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그동안 벼랑에 선 ‘아라아트’를 살리기 위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부터 인사동과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함께 발전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먼저 기념사업회 사무실부터 인사동에 옮기려고 좋은 장소를 물색해 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천상병선생은 의정부보다 인사동과 더 연이 깊은 분으로, 인사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천상병시인의 창작무대였고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로구청’이나 ‘인사전통문화보존회’에서는 특색 없는 관광지로 변해버린,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리는 문제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천상병시인께서 돌아가신 20주기를 맞은 3년 전, 인사동‘아라아트’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가지며,

인사동에 천상병선생 동상건립을 위한 구체적 제안이 있었으나 해당 관청에서는 마이동풍 격이었다.

이제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모태로, 인사동을 사랑해 온 ‘인사동사람들’이 힘을 모을 때가 된 것 같다.

인사동 다운 문화와 풍류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풍류 깃던 문화1번지를 다시 살리기 위해 새바람 한 번 일으키자.

사진, 글 / 조문호








천상병선생의 어릴 때 모습으로, '귀천'에 걸린 사진이다. (위측 가운데)










지난 18일엔 일찍부터 김신용 시인을 만났다.

양동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인사동 거리를 쫒아 다녔으나 목추길 곳이 마땅찮았다.


문 걸린 유목민앞에서 서성이다, 툇마루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들어서다, 박중식시인의 처남이 굽는 빈대떡에 쏠렸다.

오븐에서 던져, 돌려 눕히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 빈대떡은 바싹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빈대떡 한 장과 김신용씨가 마실 맥주와 막걸리를 시켰다.

이 집 막걸리는 뒤늦게 취하는 것을 알지만, 맛에 꽂혀 마냥 들이켰다.

두 시간 동안 홀짝 홀짝 마셨으나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양동에 있다는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부르고, 김명성시인도 불렀다.

된장비빔밥으로 마무리하고 유목민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 유목민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 집 앞에 퍼져 앉아, 안주는 푸른별 주막에서 배달시키고,

술은 옆집에서 가져와 마셨다.

김명성씨가 등장하니, 젊은 사업가들도 줄줄이 나타났다.

이상훈, 김민수씨가 등장했고, 뒤늦게는 김태서, 신상철씨도 나타났다.

푸른별이야기에 잠시 들렸더니, 이미례, 박기성 내외도 있었다.

 

! 큰일 났다. 툇마루에서 마신 취기가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입에서 걸러지지 않은 소리가 마구 나오기 시작했고,

술에 잠들지 않으려고, 여기 저기 쫒아 다녔다.

심지어, 사진 찍는다며 담장 위에 기어오르는 지랄발광도 했다.

 

그 때 마침, 인사동을 떠도는 악사 강다식씨가 지나갔다.

한 곡 켜라고 불러 세웠는데, 역시 분위기를 가라앉혀 주었다.

무슨 곡인지 기억에는 없지만, 가날 픈 바이얼린 소리가 마음을 건드렸다.

구슬프다 못해 슬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니기미~

김태서씨의 막춤이 어울리진 않았지만, 마치 사회를 향한 조롱 같았다.

 

 

사진, / 조문호





















































 

 


[스크랩] 서울문화투데이 2016년 9월9일

▲ 조문호 기자/사진가



약3조원의 중국 돈 폭탄으로 제주도를 공습해 60만여 평의 땅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3년 전이다.

제주에 집중된 공세가 강남에서 홍대 등의 유명상권으로 퍼지더니, 이젠 문화예술가의 1번지인 인사동마저 공략하기 시작했다.

전, 혜정병원과 몇 몇 건물이 중국자본에 넘어가더니, 인사동 최고의 갤러리 ‘아라아트 센터’까지 접수한 것이다.

뺏고 뺏기는 자본의 논리야 어쩔 수 없으나, 그 밑에 빌붙어 법까지 무시해 가며 예술을 짓밟는

매국노 같은 인간들이 더 얄미운 것이다.

얼마 전, 경영난으로 은행에 저당 잡힌 ‘아라아트’가 여섯 차례의 유찰 끝에 내정 가의 반값에 불과한 290억에 낙찰되었는데,

낙찰자는 중국인의 하수인격인 조그만 기업 이사였다.

그런데, 아무런 절차도 없이 건물을 접수하려 든 것이다.

건물이 낙찰되기 오래 전부터 전시 일정이 몇 개월간 짜여 있었는데, 그 계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억울하게 건물 뺏긴 주인이 어디 ‘잘 해 보세요“라며 위약금까지 물고 순순히 물러 날 사람 있겠는가?

최소한, 비켜달라는 양도소송을 해도 6개월은 족히 걸린다.

지난 달 23일, 정영신의 ‘장날’ 전을 치루기 위해 사진을 실어 갔는데, 화물칸 에리베이터를 걸어 잠그고,

현수막 업자를 돌려보내는 등 전시를 방해하고 나섰다. 돈으로 예술을 밀어 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을 불러 업무방해죄로 고소하는 등, 간신히 전시는 치렀으나, 기간 내내 주위를 맴돌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그런데 전시가 끝나는 날, 또 다시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그걸 우려한 조각가 부부는 한 밤중에 짐을 실어 갔으나, 난 방심하다 걸려던 것이다.

갑자기 문을 걸어 잠가 도우미와 10여분 동안 짐칸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뿐 아니라 '한국관광공사'에서 치르기로 한 ‘관광상품공모전’에도 제동을 걸었다.

고용한 건달들이 연약한 노인들을 방패삼아 건물 접근을 막는 야비한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멀쩡한 건물의 보안장치 교체 공사를 강행하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을 쫓아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란 말처럼, 고소할 테면 하라는 것이다.

다급한 행사 주최 측이 그들과 재계약 하는 것으로 고비는 넘겼으나, 앞으로 남은 전시들이 걱정스럽다.

아무튼, 이젠 인사동마저 풍전등화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 문화예술의 요충지가 넘어 간다는 것은, 국민들은 물론 작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추측컨데, 그들이 직접 운영하면 중국 그림들이 몰려 올 것이다.

그 건축물은 용도변경을 할 수 없어 갤러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적자운영을 지켜 본 그들이 돈 없는 한국 작가들 대관에 의지할 리 있겠는가? 

 끼리끼리 밀어주는 근성을 활용해, 중국작가의 국내진출 교두보로 삼을 것이다.

세계화시대에 무슨 고리타분한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땅을 뺏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 나라의 문화예술이 잠식 당하는 것이다.

문화는 그 민족의 정신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싼 값에 팔려나가는 중국미술을 지켜봐야하는 국내작가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또 어떻겠는가?

‘아라아트’를 운영해 온 김명성씨는 인사동을 예술 메카로 만들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연 면적 1,500평 전 층을 갤러리로 운영했으니, 적자운영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태껏 경영난에 허덕이면서도 가난한 작가들을 돕는 자선을 많이 베풀어 왔다.

이번에 난리를 겪은 정영신의 ‘장날’전이나, 3개 층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 부부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한 AEV’전도 무상으로 빌려 준 것이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힌 힘없는 작가들의 한 가닥 불씨마저 꺼져버렸으니, 이제 살아갈 의욕조차 잃었다.

정부는 벼랑 끝에 몰린 예술인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살아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지난 6일의 인사동거리 풍경이다.
더위가 한 풀 꺾인 인사동은 오 가는 나그네들의 발길이 한결 여유로웠다.
간간히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었는데, 전시 준비하는 날이라 그림을 들고오는 작가들이 많았다.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은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학생들도 몰려 나왔다.

손자 안고 온 신세대 할머니의 행복한 모습도 보였고, 분주한 스님들의 발길도 눈에 띈다.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씨 아저씨! 거기서 뭐 하노?”
돌아보니,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사업가 오세훈씨가 웃고 있었다.

김명성씨는 엊저녁에도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낮에는 뒷 수습하느라 정신없고, 밤이 되면 술로 위안하니, 그의 몸이 버텨 줄지 걱정이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몸을 망치면 끝인데 말이다.
난, 그가 다시 살아나야 인사동이 한 가닥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발 재기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경영난으로 은행에 저당 잡힌 ‘아라아트’건물이 중국사람에게 넘어갔다.

경매액은 495억이었으나, 여섯 차례의 유찰 끝에 반 값에 가까운 290억에 낙찰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낙찰 받은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잔금을 치루고 나타 난 사람은 중국인 하수인인 조그만 기업 이사였다.

그런데, 절차도 없이 막무가내로 건물을 접수하려 드는 것이다.

건물이 낙찰되기 오래 전부터 대관전과 기획전 일정이 몇 개월이나 짜여 있는데, 그 계약들은 어쩌란 말인가?

억울하게 건물 빼앗긴 주인이 어디 ‘잘 해 보세요“라며 위약금까지 물어가며 순순히 물러 날 사람이 있겠는가?

최소한, 비켜달라는 양도소송을 해도 6개월은 족히 걸린다.

문제는 중국 자본이 인사동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를 비롯해 곳곳의 요지가 중국인 손에 넘어간 것은 알고 있으나, 인사동마저 풍전등화 신세가 된 것이다.

문화예술의 요충지가 넘어 간다는 것은, 국민들은 물론 작가에게 심각 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 혜정병원과 몇 몇 건물이 중국자본에 넘어가더니, 이젠 인사동 최고의 갤러리 ‘아라아트’까지 접수하고 말았다.

뺏고 뺏기는 자본의 논리야 어쩔 수 없으나, 그 밑에 빌붙어 법까지 무시하는 매국노 같은 인간들이 더 얄미운 것이다.









지난 23일, 아내의 ‘장날’ 사진전 DP를 해야 하는데, 화물칸 에리베이터를 걸어 잠그고,

현수막을 걸러 온 업자를 돌려보내는 등 전시를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돈이 예술을 밀어 내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명성씨가 경찰을 불러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늙은이가 들어 올리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으로 전시는 치루었으나,

전시기간 내내 갤러리 주위를 맴돌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그런데 전시가 끝나는 날, 또 다시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작품철수를 우려한 조각가 김운성, 김서경 부부는 한 밤중에 짐을 실어 갔으나, 난 방심하다 그만 걸려던 것이다.

갑자기 문을 걸어 잠가 도와주던 조카사위 김중호와 함께 10여분 동안 짐칸 에리베이터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라아트’ 김명성대표 지시로 열쇠 고리를 잘라 나오긴 했으나, 괘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이튿날, 마무리하러 다시 인사동으로 나갔다.

인사동거리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왠지 거리 분위기가 침울했다.

‘아라아트’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3,4,5층에서 치르기로 한 관광상품공모전에 다시 제동 걸고 나선 것이다.

다급한 주최 측은 '아리수'에서 작품을 접수하며, 갤러리 측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했다.

더 웃기는 것은 건달들이 일당주고 모아 온 연약한 노인들을 방패삼아 건물 접근조차 막았다는 것이다.

너무 늦어, 야비한 그 꼴을 기록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멀쩡한 전 층의 보안장치 교체 공사를 강행하며,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을 내 쫓았다는 것이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고소할 테면 하라는 것이다. 

쫓겨나온 여직원들과 대표 김명성씨는 ‘허리우드’에 퍼져 앉아 밀고 당기는 협상을 했지만,

계속 약속을 번복해 상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김명성, 박인식, 전인경, 이태규, 정영신, 전인미, 이상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앉아 술 잔에 시름 달랬지만.

대안은 없었다. 돈이나 힘이 딸리니 마음까지 딸렸다.


체념하고 돌아오다 배우 오광록씨를 만났으나, 친구가 옆에 있어 하소연 할 처지도 못됐다.









이튿날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화에, 다시 인사동으로 나가야 했다.

나간다고 뽀족한 수는 없겠으나, 불안해 하는 여직원들의 힘이라도 되어주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통인가게’대표 김완규씨도 만났으나, 인사동은 평소처럼 관광객들의 발길만 분주했다.








‘아르아트’에 도착하니 어떻게 되었는지, '한국관광공사'에서 짐을 들이고 있었다.

전시 주최측이 다급해, 그 네들과 재계약을 한 것 같았다.


또 한 고비 넘겼으나, 앞으로 남아 있는 전시가 걱정스럽다.


추측컨데, 그들이 직접 운영하게되면 중국 그림들이 몰려 올게 뻔하다.
그 건축물은 용도변경을 할 수 없어 갤러리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적자운영을 지켜 본 그들이 가난한 한국 작가들 대관에 의지할 리 없다.
저희 끼리 서로 밀어주는 근성을 활용해, 중국작가의 국내진출 교두보가 될 것이다. 





찬 바람 부는 미술시장에서, 9개층의 전층을 갤러리로 운영한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그동안 '아라아트' 김명성씨는 경영에 허덕이면서도 가난한 작가들을 위해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어왔다.

이번에 전시한 정영신의 ‘장날’전과, 3개 층에서 전시한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 부부의 평화전도 무상으로 빌려 준 것이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밟혀 온, 힘없는 작가들의 한 가닥 불씨마저 꺼져버렸으니, 이제 살아갈 의욕조차 잃었다.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린 예술인들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살아 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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