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서울문화투데이’에서 호출령이 떨어졌다.
조사할게 있으니 인사동으로 나오라는 데, 그것도 공범인 아내 정영신과 함께 오라는 것이다.

70년대 취조 당할 땐, 잡힌 현장 부근의 고려호텔에 끌고 가 물고문하였는데,

지금은 적당한 장소를 스스로 선택하라니, 엄청 민주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인사동 거리는 뜨거웠다.
관광버스에서는 중국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햇볕에 시달리는 가시적인 것보다,

인사동의 정체성이 사라진 현실이 더 덥게 만들었다.

관청이나 인사동보존회의 사려 깊지 못한 관리에다, 돈만 쫓는 상인들 욕심으로

인사동 본래의 문화와 낭만적 정서가 사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잡화점에 밀려 난 화랑들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취조 당하기 전에, 그 날 끝나는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황세준선생의 개인전부터 들렸다.

에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그 넓은 전시장을 작가 황세준선생 한 분이 지키고 있었다.

작품을 둘러본 후 “좀 팔렸냐?”고 여쭈었더니,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무 차례나 개인전을 연 베테랑작가의 현실이 비참했다.

 

 

 

 

 

 


조영남 대작사건과 이우환 위작사건이 연이어 터진 요즘은 미술거래가 뚝 끊겼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라, 모든 예술가들은 국고지원이 따르는 농사나 지어야 할 것 같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게 먼저고 예술은 그 다음이니, 전 국민이 미개인으로 살아야 할 게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현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정쟁에만 눈이 뒤집혀 있다.

 

 

 

 

 


취조시간이 되어 ‘허리우드’로 내려갔다.
경찰서장급인 이은영 기자가 임동현 기자를 대동하고 나왔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왠 만 한건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아내는 조근 조근 말을 잘했다.

묻지도 않는 말까지 실토했다.

난 최민식사진상 문제를 폭로하고, 춘천기획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거짓 진술은 하지 않았으니, 좋은 판결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

 

 

 

 

 

 

 

 

 

 

술집 “유목민”에서 빨리 오라는 호출이 빗발쳤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노동자시인 김신용씨가 모처럼 인사동 나들이를 했더라.

일찍부터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대작해 술이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인디프레스’에서 열리는 삼인전 보러 나왔다며 주인공 장경호화백도 불러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김명성 시인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모두들 인사동 마지막 등불이 꺼졌다고 한탄했으나, 모든 걸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돌아 갈 차비로 신사임당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반가운 벗들과 맘 편하게 마시니 술이 땡겼다. 모두 주량 초과다.
나는 소주를 두병이나 마셨고, 장경호는 막걸리를 두병 초과했고,

김신용씨와 김명성씨가 마신 맥주는 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지나치던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가 신세진 게 많았던지,

장경호씨를 대접하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더 마실 상황은 아니었다.

 

 

 

 

 

 

 

 

'다우문화' 김각환 대표도 김명성씨로부터 불려 나왔다.

인사 나눈 김신용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경호씨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었다.

지난 번 소래포구에서 장경호씨가 찔러 준 돈 봉투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단다.

아무리 어려워도 벼랑에 선 장경호씨의 돈은 쓸 수 없었던가보다. 정말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런데, 술판을 마무리 하는 퍼포먼스가 좀 썰렁하지만 재밋다.
김명성씨가 뒤늦게 나온 김각환씨를 장경호씨에게 소개하자, 김각환씨는 장화백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경호의 시비성 답이 김각환씨 염장을 질런 것이다.
“당신이 날 어떻게 아는 데요?” 그 뒤부터 날 선 말이 몇 마디 오가다 모두들 뿔뿔이 헤어졌다.

그냥 헤어지면 재미 없잖아...



사진, 글 / 조문호

 

 

 

 

 

 

 

 

 

 

 

 

 

 

 

 


갤러리카페 '숨'에 걸려 있는 고 현재호화백이 그린 이선관 시인의 초상



지난 27일, '아라아트'김명성씨와 마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시를 앞두고 걱정이 많아, 김명성씨 출장길에 따라 붙은 것이다.

9월초순 창원서 사진전을 열기로 했으나, 무엇을 보여 주어야할지 마음을 굳히지 못한 것이다.

전시장이 확정되어야 그 규모에 맞추어 사진을 제작할 수 있는데,

문제는 사진을 원하는 분들의 취향과 내가 보여주고 싶은 사진이 전혀 다른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아무리 작품을 팔기 위한 전시라지만, 새로운 메시지를 전 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쪽 팔리면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는 중에, 열차는 어느새 창원역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였는데, 마중 나온 아종호씨의 모습에 여러 번뇌가 단숨에 사라졌다.

그것은 시원시원하고 유쾌하게 사는 그의 삶이 가져다 준 천복이었다.

그 이후부터 마산에서의 일정은 종호씨가 이끄는 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집에서 맛있는 볼락회로 배를 채우고, 고급 위스키에 취했으며, 호텔에 몸을 맡기는 칙사대접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는 이종호, 김명성씨 외에도 김의권, 이종재, 김보현씨 등 마창 지역의 지인들까지 함께 했으니

어이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외동횟집에서 남성동으로 옮기다 오동동 거리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오랜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젊은 시절 그 곳에서 ‘바람개비’라는 학사주점을 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님이 밀려들어 주체할 수 없었던 나날 들, 의자를 던져 음악실 유리창을 박살내며 행패를 부렸던 오동동 건달들,

아구찜 집에서 밤참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장면 장면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또 대마초 단속요원에게 고려호텔로 끌려가 물고문 받던 지긋지긋한 일까지 다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난 여지 것 마산을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해 왔다.
그건 고향인 창영 영산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청춘의 대부분을 마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잠재적 욕정을 일으키게 했던 곳이 마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구마산 역 뒷골목의 사창가였다.

이름을 잊어버린 그 녀의 애절한 노랫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차라리이~ 만나지나 않았더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몰 라앗 을 것을”으로 나오는 “왼손잡이사나이”란 유행가 가사 말이다,

가사도 가사지만, 노래를 불렀던 그 녀의 눈빛을 영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녀는 언제나 애틋한 사랑을 실어 온 몸을 불 태워줬다.

어쩌면 나를 원시의 성을 쫓는 잡놈으로 만들어 놓는 스승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오랜 세월 동안, 내 기억 속의 마산은 뜨거운 욕정의 도시로 각인된 것이다.
남성동의 ‘베니베니’커피집에서 자판기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했더니,

커피마저 사랑의 하트문양으로 덮인 달콤한 커피를 갖다 줬다.

커피 잔을 놓기가 무섭게, 그 옆의 갤러리카페 ‘숨’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술집 벽에는 고인이 된 현제호선생을 비롯하여, 곳곳에 알 만한 분들의 작품들이 걸려있고,

주인마담 민정씨가 치는 피아노 음률이 귀족적 분위기로 끌었지만,

나혼자 저질스러운 밑바닥 인생의 원초적 본능에서 헤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끄는 여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김성훈씨가 그린 누드화의 음모에 꼴렸다고 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겠다.

평소에도 많이 취하면 잠재적 본능이 꿈틀대긴 했으나,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술이 취해 다들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은 없었으나, 호텔에 들어서도 뜨거운 욕정은 식지 않았다.

정말 인간도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건, 김명성씨는 걱정거리가 있어 혼자 바다 가를 거닐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없단 말인가?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길 뿐이었다.

그 때부터 신들린 무당처럼 대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신이시여! 이 악업을 어찌 하리오.
아무런 이유도, 대상도 없이, 욕정에 시달려야 합니까?“
단 하나 있다면 ‘욕정의 도시’라는 기억에 대한 답 입니다.


힘없이 벌컥거리는 눈물 닦으며, 개같이 쓰러져 잤다.

사진, 글 / 조문호










































































헌 옷가게 주인에서 세계적인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변신한 미스터 브레인워시가 인사동에 나타났다.

6월21일부터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개최되는 그의 ‘라이프 이즈 뷰티풀(Life is Beautiful)’전을 위해서다.


지난 20일 오후5시부터 열린 '아라아트' 기자간담회에 들렸더니, 전시장은 기자들로 꽉 찼다. 

우리나라에 기자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한 전시에 이렇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딴 전시 오프닝에는 좀처럼 기자들을 만나기가 어려운데, 200여명이나 몰려 든 까닭이 도대체 뭘까?

"똥파리 근성을 가진 기자들"이라며 투덜댔으나, 나 역시 똥파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라아트'김명성씨를 만나려 어렵사리 들어갔는데, 박인식, 오세필, 전인미씨도 만났다.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다 물감을 칠하기도 하고, 심지어 기자들의 신발에도 물감을 칠했다.

사인하랴 기념사진 찍느라 정신없었으나, 그는 신나는 일이었다.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스트리트 아트의 거장 뱅크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의 주연을 맡아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10여 년 동안 예술 활동으로

길거리부터 스크린, 갤러리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2006년 부터 페인트, 붓, 스프레이 등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수많은 아이콘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하며 거리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수 마이클잭슨과 마돈나의 앨범 디자인을 하고, 벤츠와 코카콜라, 레이밴, 앱솔루트 보드카 등의

기업과 콜래보레이션을 진행하는 등 ‘스트리트 아트'의 선봉에 서있다.

일명 '낙서 그림'인 '스트리트 아트'는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겨났다.

러시아 혁명 후 시인인 마야코프스키가 '거리를 우리의 붓으로 만들자.

광장이 우리의 팔레트가 되게 하자'고 부르짖으며 시작해 급속도로 퍼져 나간 장르다.

브레인워시는 "예술은 바로 우리 심장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며

자유분방한 그의 그림처럼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기도 했는데,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기쁨과 재미를 보여 주겠다"고도 말했다.


그동안 LA, 뉴욕, 마이애미, 런던 등지에서 순회전을 했으나,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전시다. 
'스트리트 아트'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아라아트'전시장도 파격적으로 연출되어 있었다.

국내 전시를 위해 작업된 새로운 작품을 합해 총 300여점이나 된다고 했다.

특히 스트리트아트라는 장르를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선보이려는 기획에 따라

다양한 디스플레이 방식이 시도되었으며, 대형 조형물과 그래피티 작품들, 미디어 아트가 어우러져

미술관이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변신되었다.

전시장 벽과 천장, 바닥 곳곳에 페인트와 스프레이를 뿌려 공간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요한 예술 총감독은 "미술관이라기 보다는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스튜디오를 보는 것처럼 꾸몄다"고 설명했다.


KBS 미디어, 인터파크, 아트 투 하트(ART TO HEART)가 주최하는 ‘미스터 브레인워시 전’은 

9월 25일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성인 1만원, 청소년 7천원, 초등학생 이하는 5천원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만에 인사동에 나갔다.
지난 14일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리는 마동욱씨 사진전도 도와야 하고,

인사동 사진축제에 대한 논의도 있었으나, 장모님 병원 모시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오후 6시 무렵의 인사동 거리는 여느 때와 달리 한산하였는데,
길거리에서 퓨전피아니스트 윤강욱씨를 만나기도 했다.






‘토포하우스’에 들렸더니 이미 DP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작가인 마동욱씨를 비롯하여 엄상빈, 이규상, 박진화씨 등 몇몇 분이 계셨다.
작품들이 크고 많아 다소 답답한 느낌은 들었으나, 잘 정리되어 있었다.
좀 있으니, ‘한겨레’ 노형석기자도 들렸다.









그러나 서둘러 모임이 있는 ‘허리우드’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그 자리에 엄상빈, 이규상씨를 비롯해, 이규철, 이한구, 강제훈씨도 나왔다.
사진전에 대한 다양한 제안들이 나왔고, 일할 사람들도 추천했다.
구체적인 기획안은 나오지 않았지만, 큰 틀만 짜고 헤어졌다.







엄상빈, 이규상, 강제훈씨와 마동욱씨가 있는 '토포하우스'로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 있던 노형석씨와 함께 ‘사동집’에서 만두전골에 막걸리 한 잔 했다.
신방과에 제학 중인 마동욱씨 아들 마일훈군도 함께 했다.

마동욱씨의 파라만장한 삶과 사진이야기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문 닫으려 기다리는 주인장 송점순씨가 안 서러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같은 방향으로 가던 노형석씨와 ‘유목민’에도 잠시 들렸다.
그 곳에서 김명성, 전활철씨와 어울려 소주 한 잔 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으나, 막차시간이 임박해 더 머물 수 없었다.


사진,글 / 조문호
















내일 인사동 ‘토포하우스’에 열리는 마동욱씨 전시개막식에서 한 잔 합시다.


마동욱의 ‘고향의 사계’ 사진전
장소 : 인사동 ‘토포하우스’
일시 : 2016년 6월15일부터 21일까지
초대일시 6월15일 오후5시





지난 7일 오후 무렵 ‘아라아트’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형! 이성 구청장이 오셨는데, 이제하선생 모시고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그 전화 한 통에 밀린 일을 정리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30여 년 동안 형제처럼 지냈기에, 마음 한 쪽에 그에 대한 걱정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인사동에 ‘아라아트’를 세우며 시작된, 그의 십년 세월은 지옥 그 자체였다.
무리한 투자로 매달 돈을 빌려 이자를 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아슬아슬한 곡예에서 금방 추락할 것 같았으나 십년이나 버텨 낸 끈기는,
인사동 르네상스를 이루겠다는 꺾을 수 없는 그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가까웠던 사람에 의해 감옥 까지 가야했던 지난한 세월을 책으로 엮는다면 몇 권은 될 게다.

그런 와중에도 돈과는 무관한 좋은 전시를 기획하지 못해 안달했고,

가난한 인사동 예술가들의 술값과 용돈에 거리낌 없이 주머니를 털어온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없는 것 같다.

사업가는 세상의 가치나 사람보다 돈이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자본주의 세상에 돈 벌려는 자체가 인간성을 버리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될까?

가끔은 인연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할 때가 있다.
호연이던 악연이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거나 헤어지며 인연을 맺어왔다.
함께 사는 아내를 비롯하여 가까운 벗들의 만남은 필연적인 숙명일 거라는 생각을 해 온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좋은 일이나 싫은 일이나 이토록 가슴 조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발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길 바랄 뿐이다.

먼저, 아라아트’에서 열리는 이제하선생 그림부터 보고 싶었으나 ‘안동국시’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그 곳에는 이제하선생 내외를 비롯하여 청백리 이 성 구청장도 계셨다.

이제하 선생은 20여 년 전 대학로에서 한 번 뵙고 처음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으나, 내가 생각해 온 모습과는 달랐다.

이제하선생 얘기가 숱한 술자리에 회자되었으나, 추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선생 역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계셨다.

전시오프닝 때는 지방에 있어 찾아뵙지 못한데다, 전시장에도 잘 나오시지 않는다고 했다.

어렵사리 만나뵈었으나, 그 날은 마무리 할 원고가 있다고 하셨다.

술을 드시지 않는 선생께서는 식사가 끝나자 곧 바로 차를 몰고 떠나버려,

선생의 문학과 미술세계에 대한 인터뷰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좌우지간 이제하선생과는 연이 맞지 않았다.










김명성, 이 성씨와 함께 안국동 ‘로마네 꽁티’로 자리를 옮겼다.
박인식씨가 꾸려 온 ‘농심마니’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30주년 기념행사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 모임이라는데, 20여명이 모여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봄가을 매년 두 차례씩 전국에 산삼을 심어 왔으니, 이젠 곳곳에 산삼이 뿌리 내렸을 게다.

삼십년 전에 심은 산삼은 내 거시기만큼이나 컸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뜻밖에도 그 자리에 ‘한겨레’ 노형석 기자가 나타났다.

박인식씨는 올해의 사업계획을 알려 주었고,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노래도 들었으나,

흥이 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자정이 가까워 송상욱, 김명성, 노형석, 서길헌, 황예숙, 송미향씨 등 여러 명이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부터 신바람 난 송상욱선생의 가요 반세기 메들리가 이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지나치던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씨도 합류하였다.

세시까지 소주를 퍼 마셨으니, 그 다음 날은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 흥겹던 자리가 진주기생 산홍이의 애환이 담긴 ‘세세연연’이 나오자 돌변했다.
처량한 구절구절들은 산홍이에서 자신의 생으로 오버랩 되었는지, 다들 슬퍼보였다.
김명성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말로만 전해들은 산홍이의 비극보다 훨씬 진하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아라아트’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준영 시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큰 일 날 뻔 했다는 것이다.
대형 트레일러에 받힌 큰 사고였으나,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한다.
함께 다친 아내와 50일간이나 병원에 있었다는데, 그동안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남의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챙긴 그가, 정작 자신의 일엔 입을 다문 것이다.

걱정스러워 인사동에 나갔더니, 청진동 ‘청일옥’으로 오라했다.

피맛 골 화재로 그 쪽 방향의 길이 확 바뀌었던데,
시골노인 서울 김서방 집 찾듯,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다리가 아프더라.

지금은 집에서 가료중이나, 근일간 인사동에 한 번 나온다 했단다.

'청일옥'에는 황명걸시인을 비롯하여 양평의 송화백, 횡성의 김영호선생,
김명성, 이희종씨 등 여러 명이 계셨는데, 몇 분은 먼저 가셨다고 했다.
어떤 모임이었는지는 모르나, 다들 일찍부터 거나하셨다.


황명걸선생은 마시다 졸기를 반복하셨는데,
김명성씨가 쓴 민병산선생을 기리는 시에다,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김영호선생은 모든 게 양면성이 있다며,
알려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짜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나 때문에 술자리가 지연되는 것 같아, 급히 몇 잔 들고
인사동 ‘여자만’으로 넘어왔는데, 그 곳에서 신상철씨를 만났다.
나오는 길에 ‘귀천’을 들여다보니 심우성선생께서 맥주를 드시고 계셨다.
오는17일 오후4시, 강남 ‘한국문화의집’에서 ‘귀천하는 마음’이란
넋전 공연이 있다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의존하다보니, 아날로그 소식이 너무 어두웠다.
인사동을 그렇게 들락거리지만, 모든 소식이 깡통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마눌님 책 심부름으로 '정독도서관'에 갔다.

무식한 나는 책 볼일이 별 없지만, 아내 때문에 가끔 들린다.

지난 11일 오후 여섯시의 도서관은 벚꽃에 뒤 덥혀 있었다.

화려한 꽃 천지가, 지는 햇살에 숨죽이고 있더라.

그렇게 놀다, 실없이들 가겠지!’

인사동의 봄은 오는 듯 가는 듯, 맥아리가 없다.

 

인사동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을 거리에서 만났다.

왜 그리 안 벼~ 심심해 미치것어! 봄 가기 전에 한판 놀아야제

퇴근 하시는 걸음에, 날 보고 반색하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을 못 만나, 점심 드시며 툇마루서 막걸리 한 잔

걸치는 게, 유일한 위안 주란다. 다들 힘들어하는 김명성을 그리워했다.

그랬다. 그는 인사동 유목민에게 유일한 위안이었고, 한 가닥 희망이었다.

 

오늘 끝날 내숭작가전 본다는 아내 연락에, 그 앞을 서성거렸다.

얼마나 짐이 많은지, 차가 여러 대나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동에 돈을 뿌리고 가는 구나!'.  푸념에 전시장 나온 아내가 답했다.

돈이란 저렇게 쓰는 거야.부러운 듯, 들렸다.

간이 적어 도적질도 못하고, 아둔해 사기도 못 치니,

내 죽는 날까지, 저런 호강은 못 시켜줄 것 같았다.

 

모처럼 인사동서 만났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잖다.

아내 좋아하는 사동집만두전골 먹으러 갔다.

주인장 송점순 여사가 반갑다며 굴전까지 서비스하는데,

카메라 전지가 다 돼, 인증샷도 못 찍었네.

배 터지도록 먹고 남아, 도시락까지 싸야 했다.

이 정도 호사면, 인사동 봄도 결코 서럽지는 않더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8일 오전 무렵, 별 볼일 없이 인사동에 나갔다.
주말은 봄나들이 나온 관광객들로 붐빌 것 같아 금요일을 택했는데,

포근한 봄 볕 탓인지 거리가 유난히 정겨웠다.

유치원 어린이들의 재잘거림도 여기저기 들리고,
장대만한 흑인이 피에로처럼 머뭇거리는 모습도 만났다.
‘이즈갤러리’ 건물은 한국화가 김현정의 전시 광고로 뒤 덥혀 있었다.
4개 층 전관을 한 달 가까이 빌려 ‘내숭놀이공원’이란 전시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인사동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예스러움은 만날 수 없었다.


한 때, 80년대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추진된 적이 있었다.

‘아라아트’를 운영하는 김명성씨가 사재를 들여, 벤취에 앉히거나
골목 어귀에 세우기 위해 조각가 최옥영씨에게 맡겨 시안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김명성씨가 빚더미로 벼랑에 내몰리며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서울시에서 물려받아 재추진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금 국적불명의 관광지가 된 인사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물꼬를 터야한다.
인사동만의 문화와 풍류를 위한 다양한 사실적 스토리텔링이 절실한 것이다.
그 분들의 동상을 만들어 앉혀, 인사동 거리분위기부터 바꾸어보자.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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