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지로부터 지방 촬영 떠난다는 연락이 왔다. 전라도 김제장터에 들렸다가 모악산 귀신사에 간단다. 이십여 년 전 불교유적 촬영할 때 간적이 있는데, 요즘들어 부쩍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치매로 가는 수순인지도 모르겠.

 

 

 

한 때는 귀신사를 혼백인 귀신으로 쓴 적도 있다지만 돌아갈 귀자를 쓰는,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말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귀신사에 기억나는 단 한 가지는 그 곳이 비구니스님 절인데, 남근 같은 석주가 꽂인 석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 귀신사에 가서 모든 액운을 털어버리고 오자.”

대적광전에 모신 삼신불께 쌓아 온 악업의 용서를 빌 작정으로 길을 나섰다.

 

 

 

일요일 새벽 녘, 정동지를 태우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해대교를 건너가니 하늘에 떠 오른 구름이 장관을 이루었다. 행여 비올까도 걱정 했으나, 그 날 날씨는 화창했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며 졸음을 쫓았는데, 오죽하면, 정동지가 제발 아는 체 하지 말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하겠는가?

 

 

 

김제장터에서 내려 촬영하는 동안 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일요일이라 장이 신통찮다며 돌아왔기에 내비를 귀산사로 쳤는데, 이놈의 네비가 늙은이라고 깔보는지, 산길을 돌고 돌아 어려운 길로 끌고 갔다. 차라리 금산사를 경유해 가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가다보니, 좁은 산길에 터 잡고 있는 청도리 삼층석탑이 반겼다.

 

 

 

이 절은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하지만, 처음 세워질 때에는 화엄종이었다고 한다. 지방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전주 일원을 관장하던 사찰이었다. 한때는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을 정도로 사세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퇴락하여 대적광전,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가 있고, 대적광전 뒤편 언덕에는 삼층석탑과 석수가 있다.

 

 

 

도착해 보니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 다느라 분주했다. 아무도 없는 대적광전에 들어 가 삼신불께 절을 올렸다. 제발 악업을 지워 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이제 버릴 것은 육신뿐이라며 속죄했다. 삼신불은 묵묵부답이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은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정면 5, 측면 3칸으로 되어있었다. 앞쪽 처마는 겹처마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이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법당을 복구했다는데, 그 안에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모시고 있다. 건물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서 법당이 꽉 차보였다.

 

 

 

법당에서 나와 뒤편 언덕에 있는 삼층석탑 터로 올라갔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귀신사 삼층석탑은 귀신사 창건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탑선이 정밀하고 옥개석 곡선이 평행을 이룬, 신라시대 석탑형식을 그대로 드러낸 석탑이었다.

 

 

 

석수 또한 독특하다. 쪼그려 앉은 사자 등에 남근 같은 석주가 꽂혀 있다. 절 안에 이런 조형물이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데, 석수의 자태에 위용이 엿보였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라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금산사로 발길을 돌렸다. 모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금산사는 호남 미륵신앙의 도량이다.

 

 

 

넓은 경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노주, 석련대, 오층석탑, 방등계단, 혜덕왕사 진응탑비, 당간지주, 석종, 육각다층석탑, 석등 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대적광전, 대장전, 명부전, 나한전, 일주문, 금강문, 보제루 등의 건물과 심원암, 용천암, 청련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다.

 

 

 

금산사가 세워진 계기도 흥미롭다.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했던 후백제 왕 견훤이 이 절을 스스로의 복을 비는 원찰로 삼아 중수했다는 설이다. 견훤은 말년에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을 비롯한 세 아들에게 붙잡혀 이 절에 유폐되기도 했다. 신검은 아버지를 유폐하고 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석 달 동안 유폐 생활을 하던 견훤은 감시자들에게 술을 먹이고 도망 쳐 왕건에게 투항하며 자기 아들을 쳐줄 것을 청했다. 왕건이 마침내 그의 아들을 쳐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견훤은 번민과 울화에 싸여 여산에 있던 황산사에서 죽었다고 한다.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지어졌고 신라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었는데,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종파라 이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는 대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다.

 

 

 

기둥이 유난히 높아 보이는 일주문을 지나 금산사로 들어서니, 금강문 동북쪽에 당간지주가 보였다. 장방형의 지대석과 기단, 당간을 버티던 간대 등 각 구성 부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두 지주 삼면에 새겨진 조각 등 각부의 양식 수법으로 볼 때 현존하는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그리고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 법요(법회의식)와 강설당으로 이용된다.

 

 

 

보제루를 통해 계단을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널찍한 절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오른쪽 마당을 지켜 선 건물이 바로 국보로 지정된 미륵전이다.

 

 

 

이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으로 겉보기에는 3층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모두 트인 통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이며, 3층은 정면 3,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어 매우 장중하고 든든한 느낌을 준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거대한 불상 좌대 아래 철수미좌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3(1635)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소실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옥내 입불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미륵입상과 그 좌우에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인조 5(1627)에 진표율사에 의해 모셔졌던 불상은 보처불이 없는 독존의 철불이었는데,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미륵전은 태우고 철불은 뜯어갔다고 한다. 지금 조성된 미륵불은 1938년 석고로 복원된 것이다.

 

 

 

미륵전 북쪽에는 송대라 불리는 높은 대가 있다. 절에서는 이 일대를 방등계단이라 부른다. 이는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이자 수계의식을 행하는 계단이다. 계단의 한가운데는 부처 사리를 모신 범종 모양의 화강암 부도로, 흔히 석종형 부도라 불리는 보물이 있다.

 

 

 

방등계단 남쪽에는 석등 대신 오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후백제의 견훤이 공양탑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보이는 고려 초기 탑이다. 형식은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지만 하층 기단이 좁은 편이다.

 

 

 

그 옆의 대적광전은 단층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로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과 1986년 화재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다.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 마당에는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받침대인 석련대가 있는데, 석조연화대의 준말로 불상을 모신 석대를 말한다. 위쪽에 만들어진 네모난 구멍으로 보아 미륵장륙상을 받쳤던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전 앞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탑도 서 있다. 우리나라 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인 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으로 조성한 점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차분하면서도 상당히 장식적인 탑이다.

 

 

 

대적광전과 대장전 중간쯤에는 노주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용도로 쓰이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맨 아래 기단석 위에 하나의 돌로 된 방형 하대석을 놓았는데, 각 면의 중앙과 양모서리에 기둥을 나타냈고, 한 면마다 두 개의 안상을 새겼다. 안에는 꽃문양을 조각했고 윗부분에는 복판 연꽃잎을 새겼다. 위에 올려 진 연봉형 보주를 뺀다면 방형 대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로수 병을 받치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미륵전이 마주보이는 절 마당 건너편에 자리 잡은 법당이 대장전이다.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존하려고 만든 목탑양식의 전각으로 앞마당에 석등 한 기가 있다. 

 

 

 

대장전에는 목조삼존불을 모셨다'불상 뒤에 배치된 화려하고 정교한 광배가 눈길을 끈다. 마치 부처님 몸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미륵전 앞에 있던 석등은 고려 시대 작품으로, 1922년 대장전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방형 판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원형 하대석을 두고 복련으로 장식했다. 지붕돌이 다른 부분에 비해 너무 커서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에 비구니 만택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곳곳을 돌아보는 중에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제에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든 걱정을 여행길에 다 털어버리고 오란다

 

 

 

귀신사에 들려서인지 정동지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했다. 오래 전 절에서 마음에 드는 스님을 만났는데, 자칫했으면 파계승 만들 뻔 했다는 등 안하던 소리도 했다. 하기야! 내가 시시껄렁한 소리를 자주하니 전염된 것 같았다. 아무튼, 근심 걱정을 귀신사에 털어버리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서울로 돌아 온 이틀 날, 사진을 정리하는 중에 정동지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화가 박건씨가 페북에 올린 글을 보았냐?”는 것이다. 내용인 즉 정선 집에 불이나 모든 것을 태운 내용을 페북에 소개하며 페친들에게 도움을 청했단다, 지난 번 나무화랑전시 때 알려 주었던 자신의 계좌번호까지 공개해 몇 몇 사람으로부터 돈까지 입금되었다는 것이다.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냥 둘 수도 없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몇 시간을 고민하다 정동지에게 전화 걸어 내 생각을 상의했다.

 

 

 

정선 만지산에 공유공간을 만들어 도와 준 분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좋은 생각이란다.  다른 분들과 의논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잘만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더라.

 

 

 

어쩌면 귀신사 발원에 화답이 돌아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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