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고석정(孤石亭)을 찾았다.

고석정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30여년 전 철원의 직탕 폭포와 고석정을 찾았던 아련한 추억에 끌려 갔는데,

그때의 소담한 자태와 달리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고석정이야 그대로지만, 강물 위를 가로지르는 은하수교를 비롯한 부대시설이 생경스러웠다.

 

 

고석정은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바위절벽이 둘러싼 중간에 사람 팔뚝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솟았다.

소나무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암봉 주변으로 강물이 흘러들어 가히 신선이 놀 만한 선경을 연출했다.

고석정은 신라 진평왕 때 세워진 정자다. 하지만 지금 정자는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역사적 의미는 없다.

오히려 정자보다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경치에 의미를 둔다.

그 절경이야 진평왕 때 세워진 정자보다 훨씬 오래된 풍치가 아니던가?

 

그 밑의 바위 동굴에서 조선 명종 때 의적이었던임꺽정이 숨어 지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임꺽정이 이곳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본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주로 황해도 봉산과 재령 일대에서 의적 활동을 했다.

주활동무대인 황해도와 떨어졌지만, 그가 피신했다고 전해지는 곳이 강원도 철원의 고석정이다.

물론 그가 한양의 정규 토벌대를 상대했던 일급 현상수배범이었으니 숨어 지낸 비밀 아지트가

한 두군데가 아닐텐데, 그 가운데 가장 비주얼을 갖춘 은신처가 바로 고석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찌 도망 다니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경에 피신할 생각을 했을까?

피신이 아니라 풍광을 즐긴 신선놀음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선이 놀 만한 풍광은 대개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단다.

첫째 바위 절벽이 있어야 한다. 넓적한 바위 암반이 있고, 그 옆에 물이 흘러야 한다.

그런 물가의 바위 암반 옆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다음은 하늘에 달이 떠야 한다.

달에서 나오는 음기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 양기만 성하고 음기가 부족하면 균형이 깨진다.

성질이 급하고 저돌적인 스타일은 달의 기운을 받아야 한다.

바위 암반에서 지구 자력 에너지인 불기운을 받고, 이를 식혀 주는 수 기운을 강물에서 받고,

소나무를 보며 풍류를 느끼고, 달을 보면서 감정을 순화한다.

고석정은 이러한 네 가지 요건을 두루 갖춘 선경이다.

 

전국 명산 계곡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4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은

거의 옛날 신선이나 도인, 학자들이 놀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바위 정상의 정자에서 노닐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왕이 놀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석정은 그 풍광이 소문났던 곳이 틀림없다.

 

 

백정 출신이었던 임꺽정은 당쟁으로 조정이 어지럽고 사회기강이 혼란스럽던

1559년(명종 14)부터 대적당을 만들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두목이 된다.

그로부터 3년인 1562년까지가 임꺽정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황해도 구월산과 서흥, 신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관청이나 토호·양반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함경도와 황해도 곡물이 조정으로 운반되는 길목을 지키다 진상품을 약탈하여 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임꺽정 관련 문헌에 고석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석정 자료에도 나오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임꺽정 피신장소인 셈이다.

 

지금도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을 꺽정 바위로 부르며

고석정의 형상이 마치 임꺽정이 신고 다니던 장군화를 닮았다고 한다.

관군에게 쫓기던 임꺽정은 피할 재간이 없게 되면 재주를 부려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신해

강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고 한다. 임꺽정의 재주가 비범했음을 전해주는 대목인데,

이 고장 철원사람들은 아직도 임꺽정은 관군에 잡혀 죽은 게 아니라

물고기 꺽지로 변해 깊은 강물로 들어가 영원히 몸을 숨겨버렸다고 믿는다.

 

안내인의 말로는 한탄강의 지질구조가 특이해 이 근처에 바위 동굴이 많다고 한다.

강바닥에는 1억년 전의 화강암이 깔려 있고, 그 위에 30만 년 전의 화산폭발로 현무암이 덮였다.

화강암과 현무암은 서로 암질이 다르기 때문에 두 개의 암반층 사이에 자연 동굴이 많이 형성된 것이다.

바위의 기, 즉 암기(岩氣)는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에너지다.

화강암과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협곡이니까 입체적으로 기가 들어오는 위치에 있다.

거기에다 강물까지 있으니 음양이 버무려진 명당인 셈이다.

 

 

30년 만에 다시 본 고석정은 변함없으나, 주변환경과 인심은 많이 변했더라.

고석정 동굴에 숨었다는 임꺽정을 다시 불러내고 싶었다.

정치 모리배와 사기꾼이 우글대는 더러운 세상,

의인 임꺽정이 세상을 한 번 휘저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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