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여파 이주원씨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잘 모르는 분이라 궁금했는데, 칡뫼선생과 함께 가겠다는 말에 나만 모르는 주변 분 같았다.




12일 오전엔 김명성씨 따라 장호원에 갈 일이 있어 일찍부터 차를 끌고 나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약속시간인 다섯시가 임박해 차 돌려 줄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인사동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주원씨와 약속한 ‘화인갤러리’로 간 것이다.




그 자리는 옛날 이해림씨가 운영한 술집 ‘평화만들기’ 자리였다.
수안스님 전시 뒷풀이를 비롯한 많은 일들이 생각나는 예사롭지 않은 장소였다.



쌈지 뒷골목은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는데, 이름도 반가운 '정선곤드레쌈밥'집도 생겼더라.



'화인갤러리'로 바뀐 후 첫 걸음인데, 마침 전시작을 철수하고 있었다.
칡뫼 김구, 여파 이주원 선생 등 여러 명이 참여한 단체전이었다.



칡뫼선생이 먼저 와 있었는데, 걷어내기 직전의 출품작 두 점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개인전을 못 봐 아쉬웠는데, 두 점이라도 봐 천만다행이었다.



뒷골목 밤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에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칡뫼선생 이야기로는 몇 년 전에 한 작업으로, 그 때는 작품도 제법 팔렸다고 한다. 
왜 주제를 바꾸었는지 모르지만, 계속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그리움에 병든 세상이 아니던가?




뒤 이어 여파선생이 나타났는데, 서울이 아니라 천안에서 왔다고 했다.
하기야! 칡뫼선생도 김포서 왔지 않았는가? 서울역 부근에 사는 거지 팔자가 상팔자가 아닌가 싶다.




난, 이주원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는 우리 집 숟가락이 몇 개인 것 까지 다 알고 있었다.
블로그 ‘인사동 사람들’ 단골손님으로 가끔 정다운 댓글로 위안도 준 분이다.
온라인 인연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진 몇 안 되는 귀한 인연이었다.




뒤늦게 임경일씨가 나타나 술 마시러 갈 때가 되었는데, 끌고 온 차가 골칫거리였다.



'툇마루'로 가기 위해 골목을 나서는데, 정영신씨가 지나가다 손을 흔들었다.

사진으로 본 정영신씨보다 더 젊어보인다는 여파선생 말에 내가 사진을 잘 못 찍은 것 같았다. 




술 마시려면 차는 어쩔 것인가?  일단 마시고 보자.
‘툇마루’에서 녹두빈대떡 안주로 막걸리 한 사발 마셔버렸다.
이 좋은 날, 술 한 잔 마시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이차로 간곳은 벽치기 골목에 있는 ‘유목민’이었다.
요즘 술 마시러 인사동에 잘 나오지 않아 몇 달 만에 들렸는데, 대개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화가 여파선생은 사진 작업도 병행한다는데, 그 작업들이 궁금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인섭선생과 주인장 전활철씨가 나타났다.



술은 땡기지만, 몸에서 그만 마시라는 신호가 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지만,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대리운전을 부르라며 여파선생이 따라 나섰지만, 손을 흔들었다.
주차비도 제법 나왔을 텐데, 여파선생이 계산해 버렸다.
차를 끌어 내 ‘아라아트’ 옆 빈자리에 세워두고 지하철 타러 간 것이다.



내일 새벽 다시 나올 생각하면 귀찮지만, 어쩌겠는가?
“성질 마이 죽었다. 음주면허증으로 그 술 마시고 두 번 걸음하다니...”

사진, 글 / 조문호






























남북정상 회담하는 뉴스에 가슴이 벌렁 벌렁했다.
꿈도 꿀 수 없었던 통일이지만, 이젠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지 것 살아오며 티브이 없는 것을 이처럼 안타까워 한 적도 없었다.
페북에 올라 온 뉴스로 보았으나, 큰 화면에서 보고 싶었다.


소원이라면, 죽기 전에 정영신씨와 북한 장터나 한 번 돌아보는거다.




이른 시간부터 축배 들자는 장경호씨의 호출이 있었지만,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가려는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둘러 나가다 인사동 돌 턱에 앉아 노닥거리던 공윤희, 민영기씨를 만났다.
둘 다 술시를 기다리는 듯 했으나, 난 기다릴 겨를이 없었다.




몇 발자국 가다 이번에는 죽은 줄만 알았던 까딱이를 만난 것이다.
진짜, 죽은 사람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인사동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근 이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숙자라 길거리에서 객사한 줄 알고, 인사동 골동 하나 사라진 것을 아쉬워 했다.




전에는 그를 만나면 도망치기 바빴고, 그는 쫒아오느라 정신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둘 다, 너무 반가워 손을 덥석 잡고 멀건이 쳐다보았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꼬라지가 많이 상했네. 이빨은 어데 팔아 묵었노?”라기에
“자슥, 많이 칼 컬어 졌네, 어디 돈 많은 할마시라도 하나 걸렸나?” 서로 안부만 물었다.
그런데, 또 하나 바뀐 것은 평소처럼 돈 내라며 손을 벌리지 않았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으나,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녹차에 중독되어, 어렵게 탁발하여 녹차를 사 마시는 중놈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보자며, 툇마루로 올라가니, 장경호씨와 박세라씨가 앉아 있었다.
옆 자리에는 테너 이동환씨가 젊은 친구들과 앉아 있었는데,
오늘 ‘통인오페라’를 마치고 후배들과 한 잔한다고 했다.
다들 축하주 마시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기분이 좋아 오늘 통일 만찬주는 내가 쏜다며 페북에 날렸는데.
댓글 올라오는 것 보니, 의외로 통일에 겁먹은 사람이 많더라.


갑자기 죽은 김용태씨가 생각나, 이차로 ‘낭만’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는 성기준씨 패거리가 큰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보영, 박영애씨 두 모녀를 세워두고, 죽은 용태한테 보낼 사진이라며 한 장 박았다.
그런데, 나올 때 박영애씨가 술값을 받지 않더라. 거지라 불상하게 여겼을까?
그나저나, 용태 주소를 몰라 어디로 부쳐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 3차는 ‘유목민’에 들려 임경일씨와, 임태종씨를 만났는데,
다들 기분 좋아 싱글벙글했다.
경상도 성주장 갔다 오는 정영신씨를 불러들여 마지막 축배로 끝냈다.




김정은이 덕분에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멋진 놈 인줄, 진정 난 몰랐네.


이러다 내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바뀔지도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인사동거리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인사동의 색깔은 보이지 않고, 상혼만 들끓는다.
다들 뭘 보고 뭘 느끼는지 모르겠으나, 걱정스럽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미술품에도 별 관심 없다.
인사동이 미술의 메카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냥 인사동의 전통성이 뭔지, 기웃거릴 뿐이다.





지금도 인사동 주변에 호텔은 계속 생겨나지만,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릴 일은 아무도 생각 치 않는다.
인사동 골목문화를 알릴 노력조차 없다.






관광객들이 사라진 내일의 인사동이 궁금하다.
호텔은 가난한 예술가들 작업실이 되고,
거리는 온통 예술품이 들 끊는, 그런 날이 올까?

괜한 헛꿈에,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30일은 이른 시간부터 인사동을 기웃거리다가,
오후5시 무렵에는 임옥상씨 전시 보러 평창동으로 갔다.





개막행사가 끝난 후,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왔더니,
전시장에서 만난 박진화, 송 창, 김태서, 박홍순씨가
‘유목민’에 먼저 와 있었다.





한 쪽에는 공윤희씨와 이지연씨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좀 있으니 장경호, 이승철, 임경일씨 등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미 술에 젖어 온 장경호씨는 막걸리를 마시며, 다른 곳에서 한 잔 더 하잖다.
‘월하의 공동묘지’? 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꺼떡이며 일어났다.
난, 동자동으로 가야해 남은 술을 마시며 자리를 지켰다.






종로3가 지하철로 가는 길에 ‘국악’에 잠시 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장경호씨가 있었다.
빈털터리 주제에 왜 비싼 술집에서 여인네들 접대를 받아야하는지 모르겠다.
여자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건만, 외로워서 그럴까?
혼자 두고 오려니 마음에 걸렸으나, 더 취하기 전에 나와야 했다.






낙원상가 앞길에는 성기준씨 일행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밤이 되면 인사동 곳곳에 반가운 사람들이 박혀 있어 좋다.
새로운 인사동 풍류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사진,글/ 조문호























인사동에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자는 뜻으로 시작된

첫 ‘주삼수(酒三水)날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으나, 너무 과음했다.
‘학고제’에서 화가 송창씨의 개막식이 있었지만, 삼청로라 갈 수도 없었다.
많은 주당들이 그 전시뒤풀이에 퍼지겠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인사동 길거리에서 반가운 분들을 만났다.
제주로 내려 간 김호근씨를 만났는데, 오랫만의 서울 나들이라 했다.

종각 부근에서 약속이 있어 그 곳에서 마시자고 했으나 양해를 구했다.

인사동에서 이차를 약속하고 ‘낭만’으로 갔지만 거긴 아무도 없었다.

이 날은 핸드폰까지 고장 나 아무와도 연락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진하는 곽명우씨를 만났다. 언제나 웃는 표정이 정겨운 친구다.





벽치기 샛길의 주막으로 접어드니, 찻집 앞에는 김명성씨가 앉았고,

불화가 이인섭씨는 제자와 함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날의 첫 술잔은 이인섭씨와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성기준씨와 송용민씨도 다녀 갔지만, 이차는 화가 김 구, 장경호씨와 마셨다.

장경호씨는 이미 술에 취해 왔는데,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더하자며 바람 잡았다.





칠뫼 김구씨와 함께 따라간 곳은 ‘국악 라이브’였다.

장경호씨는 요즘 술만 취하면 ‘월하의 공동묘지’같은 이집으로 자주 데려왔다.

여자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노래 부를 수 있는 곳이 없어 찾는 것 같은데, 만만찮은 그 술값은 어쩔거냐? 

난 너무 취해 소파에 잠시 골아 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임경일씨도 와 있었다.






장경호씨는 자기의 십팔번인 뒷동산 아지랑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만,

제목을 몰라 못 찾고 있었다. 그토록 노래를 자주 부르면서 제목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나저나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는데. 일산 사는 장경호씨는 또 백상사우나에서 신세 질 팔자였다.

나도 지하철 끊기기 전에 줄행랑쳤지만, 뒤가 편치 않았다.


에고~ 사는 것도 힘들지만, 노는 것도 힘들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7일은 인사동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 같으면 핸드폰을 꺼두어 대부분의 전화를 받지 않았으나,
요즘은 너무 덥고 힘들어, 도망갈 핑계부터 찾는다.
인간이 어찌 이리 간사한지 모르겠다.






인사동 큰 길로 들어가다 뜻밖의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화가 장경호씨와 민예총 사무총장 배인석씨를 만났는데,
장경호씨는 마치 죽은 여편네 돌아 온 듯 반겼다.
20여일 전 ‘유목민’에서 얼핏 보았지만, 
오월 ‘노모현 추모제’ 때 보고 못 만났으니, 두 달 가까이 되었다.






‘유목민’에서 보자며 헤어졌는데, 공윤희씨가 먼저 와 있었다.
공윤희씨는 맥주, 난 소주를 시켰는데, 하소연 할게 많은 것 같았다.
아우처럼 도왔던 후배의 배신감에 속이 상한 모양인데, "형이 참아야지 어쩌겠냐"고 했다.
나 역시 동자동에서 받은 배신감과 무례에 마음을 다쳤으나,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참고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만을 잘 털어놓지 않는 그의 성격으로 보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하소연 들으며 홀짝 홀짝 마신 술이 정량을 두 배나 초과해 버렸다.
단 둘이 앉아 대작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이렇게 많이 마신 적은 좀처럼 없었다.
그동안 술이 너무 취하면 사고를 쳐, 철저하게 조절해 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임경일씨와 방인철, 김대웅, 강선화씨가 나타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강선화씨 모습에 그만 마음이 동했다.






환갑이 다된 할머니더러 강양이라 부르며 주접을 떨어댔다.
내 딴엔 젊은 여인으로 보인다는 알랑방구였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다방 종업원 부르는 것처럼 들렸으니, 기분 좋을 리가 없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맞아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게 용하다. 
대개 앞에서는 웃어넘기지만, 돌아서서는 개망나니 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십 오년 전,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고부터 술도 절제하고, 오버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잡놈으로 여겨 온, 오래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적인 밝힘증이 고쳐진 것은 아니지만,

마음껏 마시거나 노골적인 처신은 집에서만 하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어떤이는 사람이 바뀌었다며, 서운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술이 많이 취하면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최고의 희열인 성을 왜 터부시하냐는 것이다.

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추하게 생각하고, 욕으로만 여기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냐?

물론 불륜을 저지러자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성을 숨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 바꾸어야 할 법이나 관습이 한 둘이 아니지만, 남들이 외면하는 아래 세가지는 꼭 바꾸고 싶다. 

첫째 마약으로 잘 못 인식시켜 온  ‘대마초합법화’문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둘째는 식물인간처럼 의식 없이 사는 이들의 ‘안락사’문제다. 가족들의 고통이나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병원업자들 손바닥에서 놀고 있다. 오죽하면 살리지는 못해도 죽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가? 

셋째가 인간의 아름다운 성생활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리자는 것이다.

전자의 두 가지는 공감하는 분들이 많지만,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원죄가 도대체 무엇인가?






술이 너무 취해, 담배 피우러 밖에 나왔다.
보슬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는데,  장경호씨도 따라 나와 3미터 간격으로 쪼그려 앉았다.

쪽방이 더워 고생한다는 것을 눈치 챈 장경호씨가 “쪽방에서 그만 나와요”라며 말을 꺼냈다.

“야! 쪽팔리잖냐.”는 한 마디로 끝냈으나,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씨의 ‘시간지우기’사진전이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열렸다.

난, 오래전부터 인사동에서 김수길씨를 보아 왔지만, 사진을 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80년대 중반무렵 인사동에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란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를 운영한 주인이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일단, 그림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사진들이 그림 같았다.

오래된 활동사진이 돌아가는 느낌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중첩된 이미지는 작가의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낸 것들인데, 암울하고 처연한 풍경이었다.

앙상한 가로수가 펼쳐있고 그사이에 실루엣의 사람이 부각된 가운데. 저 멀리 버스도 보인다.

작가의 기억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뭔가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해진다.

또한 꽃 위로 웅덩이가 있는 시골길이 정겹게 펼쳐져 있다. 애틋한 고향에 대한 기억인 것 같다.

모든 사진들이 숨은 그림 찾는 퍼즐 같다.

작가는 왜 시간을 지우는 것인가? 사라져가는 시간을 지운다고 말할 때는 잊기 위함인가?
아니, 그는 잊기 위함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지운다고 한다.


한 때는, 서울 사대문 안의 이화동 낙산 뒷골목을 기록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엔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라 정반대의 추상적인 기억의 기록을 선보인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현실기록보다 창의적 기록으로, 한 걸음 나아갔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난다면 이화동의 현실기록이 더 빛나지 않을까?

어찌 보면, 그 가치기준 자체가 허망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잡지 ‘카페人’ 발행인 손한수씨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컷을 위해 작가는 오늘도 지운다.
 잊지 않기 위해 시간을 지운다.
 그렇게 응축된 순간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크다.
 지우면 여운이 깊다”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정영신씨가 오프닝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작가를 비롯하여 이순심관장, 노광래, 김구, 임경일, 편근희씨 등 낮익은 분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지난 21일의 일이다.

전통시장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하재은씨와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를 인사동에서 만났던 일을 깜빡 잊어버렸다.

요즘 정신이 빠져서인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진파일을 들여다보니 정리하지 않은 사진들이 너무 많았다.

이까짓 사진들을 정리하면 뭐하고, 블로그에 올리면 뭐하냐는 생각도 들지만,

일기처럼 찍어 온 사진들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미국, 캐나다 등 세계 10대 글로벌명품시장을 연구 분석하여 사진집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려는 하재은씨의 부탁으로 이규상씨와 만찬의 시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각종 전시들이 시작되는 수요일의 인사동은 관람객들로 전시장마다 붐볐다.
아내와 함께 약속장소인 ‘귀천’에 갔더니, 탐스러운 국화꽃이 반겨주었다.
‘귀천’은 천상병선생의 사모님이신 목순옥여사께서 좋아한 꽃들이 가득했다,

이젠 조카가 이어받아 꽃밭을 만들어 놓았는데, 꽃을 보니 돌아가신 목여사가 그리워졌다.

모과차로 추억을 달래고, ‘부산식당’으로 옮겨 생태찌개를 안주로 술 한 잔했다.
하재은씨가 이번에 다녀 온 맨하탄의 파머스마켓, 캐나다 토론토의 쎄인트로렌스 마켓 등

선진시장의 모범사례들을 귀동냥하며 오붓한 만찬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하재은씨는 사진가이기 전에 시장경영을 연구하는 박사로 신한경영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통시장 특성화 육성사업에 많은 사업 실적을 가지고 있다.

세계10대 글로벌 명품시장을 대상으로 연구 촬영한 사진으로

올 11월 초순경 전시회와 사진집을 출판한다니, 기대하는바가 크다.


돌아오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임경일씨가 반겨주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날씨는 봄인데, 나들이객들의 옷차림은 아직 한 겨울이다.
어저께만도 추워 싸매고 다녔는데, 곧 바로 여름으로 접어드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지난 16일 오후6시 무렵, 카메라를 메고 사냥꾼의 심정으로 인사동을 돌아 다녔다.
약속시간이 좀 이른 것 같아, '툇마루‘ 앞 벤취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무는데,
카메라 화인더에 반가운 분들이 등장했다.

강선화씨와 김구, 임경일씨가 골목에 접어들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반가워 ‘툇마루’에서 막걸리 한 잔 했는데,

임경일씨는 ‘청량리588’ 책에 사인해 준 내용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여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마누라 열심히 꾹꾹 눌러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는데, 취중에 쓴 글이라 기억도 없었다.

‘화신포차’에서 빨리 오라는 전화가 득달같아 오래 머물 시간은 없었다.
약속장소에는 장경호씨와 배성일씨가 먼저 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장경호씨의 모습이 확 달라졌다. 취기가 올라 홍조 뛴 얼굴에 부티가 났다.
이야기인 즉 선, 없었던 치아를 복구해 제 모습을 찾았다는데, 참 부러웠다.
나도 썩어 문드러진 이빨 다 뽑아버리고, 틀이라도 해 넣으면 좀 나아질까?

뒤이어 장 춘씨가 합류해 ‘무다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반주로 노래까지 한 곡씩 불렀으나,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전시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셔서 그런지, 요즘 조금만 취해도 맥을 못 춘다.
늦게까지 마셔야하는 장경호씨가 마음에 걸렸으나, 장 춘씨와 먼저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는데, ‘인사동사람들’로 옮겼다는 장경호씨의 기별을 받았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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