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랭크가 향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진계의 거장 로버트 프랭크가 별세했다. 향년 94세.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로버트 프랭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인버네스의 한 병원에서 지난 9일 눈을 감았다.
1924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부터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 스틸 사진가로 활동하던 그는 1947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가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때는 1950년 중반 이후다.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재단 기금을 받아 미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1958년 ‘아메리카인들’(The Americans) 사진집을 펴냈다.

로버트 프랭크가 펴낸 사진집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 중심으로 최고조를 달리고 있던 미국의 가난과 인종차별,

어긋난 애국심 등을 가감 없이 프레임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사회를 오로지 여행자적 관점에서 미국 주류들이 무관심했던 것들을 박제했다.


로버트 프랭크, 호보큰에서의 거리 행진, 1955


당대 사진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의 사진집을 보고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이라고 평했다.

미국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보고 반감을 가지는 미국인들 역시 적지 않았다.

로버트 프랭크는 ‘아메리카인들’ 출간 후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사진계로 복귀했다.

그는 1972년 자전적 성격의 사진집 ‘나의 손금’(The Lines of My Hand), 1976년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를 펴냈다.

로버트 프랭크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먼저 사망했다.

딸 안드레아 프랭크(Andrea Frank)는 1974년 12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로버트 프랭크는 딸을 기억하기 위해 콜라주 형식의 ‘라이프 댄시스 온’(Life Dances on)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파블로 프랭크(Pablo Frank)는 림프종에 걸려 정신병원을 오가다 1994년 11월 사망했다.

이후 로버트 프랭크는 죽음과 관련한 작업을 이어갔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노출과 구도, 포커스를 제대로 맞추지 않고 사진 속 메시지를 강렬하고 상징적으로 담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격적인 형식은 담은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현대 사진의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했다는 평을 받았다.
 
[스크랩] 스포츠경향 & 경향닷컴





그 지긋지긋한 더위가 물러가니, 어김없이 추석이 다가왔다.

다들 귀성 준비하며 선물을 보내거나 음식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돌아갈 고향마저 잃은 동자동 사람들은 마음도 몸도 한가롭다.


 

인생 막장인 쪽방촌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명절만 되면 여기저기 돈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다 포기하고 나니 잡다한 걱정은 끼어 들 틈조차 없다.


 

힘들어도 살아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지켜보며 추억이라도 떠 올리지 않는가?

이젠, 세상에 대한 원망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다 타버린 촛물처럼 내려앉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나은가?

모진 목숨 차마 끊지 못할 뿐, 저승을 그리는 사람이 더 많다.

술 한 잔에 모든 근심걱정 내려놓고, 실없는 웃음만 흩 날린다.


 

지난 9일은 동자동 멋쟁이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 잡고 동네 마실 나왔더라.

그래도 이 분들은 의지하고 사는 분이 있어 행복한 편인데,

요즘 할멈 건강이 신통찮아 운동 삼아 자주 나오신다.


 

골목에선 틈틈이 모아 둔 깡통을 손 수레에 옮겨 싣는 이씨의 표정이 넉넉했다.

고물 판돈으로 추석 장보러 갈 것이란다.

이 정도가 동자동의 희망적인 소식이라면 희망적이다.


 

지난 10일 오전에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로 골목이 소란스러웠다.

옆 건물에 사는 젊은이가 갑자기 호흡에 문제가 생겨 119를 불러 놓고, 병원가려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미안해 내려와 기다렸으나, 구급요원 보기는 좀 떨떠름한 모양이다.


 

태풍 링링도 동자동에선 나뭇가지 정도만 부러트리고 도망쳤다.

삶의 의욕을 잃은 쪽방 사람들은 태풍도 두렵지 않다.

방에서 꼼짝 않거나, 술에 모든 것을 맡긴 체념한 사람들이다.

길바닥에 잠든 이들, 꿈이라도 행복 했으면 좋겠다.


 

지난11일은 오전10시부터 동자희망나눔센터'2층에다 추석명절 공동 차례상을 차렸다.

서울역쪽방상담소김갑록 소장과 주민 송범섭씨 등 몇 명이 차례를 지냈는데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고향을 잃어 조상까지 잊었단 말인가?

큰 절 올리고 약과 하나 얻어 내려오니, 공원에선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더라.




그런데, 용성이네 두 모자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애미는 허벅지와 정갱이가 벌겋게 피멍이 들었고, 용성이는 온 얼굴에 상처투성이였다.

술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5층 옥탑 방 까지 오르내리다 보니, 수시로 넘어져 몸이 성한 날이 없다.


 

얼마전만해도 아들 용성이가 술 끊었다는 말을 전하면서,

자식 자랑보다 술친구를 잃은 허전함의 그늘이 더 짙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둘다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정은 얼마나 많은지, 큰 컵에 소주를 벌컥벌컥 따라주고, 안주하라며 사과까지 나눠준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과 살기 위해 죽지 못한다는 말은 어느 것이 정답인가?

정답은 없다그냥 꼴리는 대로 살자.

 

사진, / 조문호















세상에! 어찌 이리 간이 컬 수 있을까?
정선 집 방문 앞에다 벌집을 만들고 있는데,
천장도 아닌 정면에 보란 듯이 작업 중이다.
이건 쪽발이 아베 신조가 하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산중에서 벌이나 뱀은 가급적 손대지 않으나
이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전 같으면 벌집을 때내 멀리 버렸겠으나,
아베 신조 생각에 살충제로 씨를 말려버렸다.
빈 벌집은 도발의 표본처럼, 보란 듯이 붙여두었다.




찢어진 차양막은 점령군 깃발처럼 펄럭이고, 축대는 산사태 난 것 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사는 데는 지장 없는 오래된 집이다, 쪽방에 비하면 대궐이지...
집을 비울 때는 찾아 올 손님을 위해 따뜻한 물도 준비해두고, 책장이 비좁아 오래된 책은 밖에다 내놓았다.
다들 그런 건 관심없고, 필요한 물건만 가져가는 야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젠 전기세가 부담되어 온수기는 꺼버리고 오지만,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책장은 주저앉아버렸다.
오래된 책은 다들 버리라지만, 오래된 책일수록 버릴 수가 없다.
요즘 일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오래된 소식은 옛날 잡지에서나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두 번 들리는데, 이번에는 이박삼일로 좀 여유 있게 잡았으나 금방 가버렸다.
옆집에서 술 한 잔 하라는 인정도 마다한 채, 혼자 동동거려야 했다.
날이 어두워져야 주변도 보이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서울이던 정선이던 한 곳에 눌러 살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 된다.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정선 집이나 동자동 쪽방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아직은 할 일이 남아 결정하지 못한다. 죽고나면 아무 필요없는 이 욕심을 어쩔까?
서울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도, 또 다시 가야 한다.




그 이틀 날은 새벽부터 서둘렀다.
늙어 버린 상추는 다시 파종하고, 지킴이로 봉숭화 한포기만 남겨 두었다.
무성한 잡초를 뽑아가며 농산물을 거두었는데, 한참 일하다 보니 안경이 없어졌다.
흐르는 땀에 밀려 잠시 벗어 두었는데, 어디다 벗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만 지체되어 나중에 찾을 생각으로 산소부터 올라갔다.




지난번 떡갈나무 아래 수목장한 햇님이 외할머니와 어머니 무덤 앞에 무릎 꿇었다.
두 분이 생전에는 상면한 적 없으나, 햇님에게는 조모와 외조모라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손자를 지극히 좋아했으니, 모처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다.
혼자 걱정하는 것 보다 두 분이 하니, 햇님이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젠 갈 일만 남았는데, 사라진 안경이 걱정이었다.
풀밭을 이 잡듯이 세 시간이나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돌아왔으나, 흐릿한 초점으로 운전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별 탈 없이 오기는 왔으나, 좌우지간 명줄 하나는 길다.




길에 뿌린 기름 값에다 안경 맞출 돈까지 생각하니, 머리 아프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편한 날이 없다.


홧김에 쪽바리 아베에게 욕이나 퍼부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장흥군물축제에서 열린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를 알리는 현수막 (오마이뉴스 스크랩)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적이다 간 뒤집어지는 기사를 읽었다.
장흥의 '정남진장흥물축제'에서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로 물의을 빚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까지 이러한 몰상식한 짓거리가 예술이란 이름을 달고 버젓이 열린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언제 적 일이냐? 수 십 년 전부터 아마추어 사진인을 대상으로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해 왔는데,

아직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버젓이 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회원이나 늘리려 저질스러운 행사를 추진하는 단체의 저급함이야 오래 전부터 알지만,

이에 동조하여 대포 같은 장비를 차에 실고 몰려다니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형태가 추하기 짝이 없다.



2019년 신탄진에서 열린 제27회 대전 세미누드 전국사진 촬영대회 장면 (중도일보 스크랩



지난 27일 장흥댐 인근에서 벌어 진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라는 이름을 건 행사에서

네 명의 여성 모델을 발가벗겨 나체 쇼를 벌였는데, 결국 말썽을 일으켜 막을 내리게 되었단다. 

물놀이장 안팎을 오가며 십 수 미터 위에 설치된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을 뒤집어쓰거나 우산을 펼치기도 하고,

붉은색 물감을 온몸에 끼얹기도 했는데, 물과 물감으로 흥건한 바닥은 미끄러워 위험 했다는 것이다.

수심이 얕은 물놀이장이나 높은 계단, 다리 등의 공원 곳곳에서 온갖 포즈를 취했다는데,

돈 벌이로 나선 모델들을 탓할 수야 없으나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형태나 언행이 가관이었단다.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여성을 빙 둘러싼 채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반말로 포즈를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위에서 피켓팅하는 녹색당원과 지나치는 사람에게 호통을 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한 남성은 촬영대회를 항의하는 자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기는 등 행패도 부렸단다.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니들이 예술을 아냐?", "우리는 돈 내고 예술 사진 찍으러 왔다"는데, 정말 쪽팔려 못 살겠다.

“예술 좋아하네. 여자 알몸 찍는 것이 예술이냐? 차라리 호텔 가서 포르노나 찍던지...”

문제가 된 ‘세미누드사진촬영대회’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장흥지부' 주최라는데,

올 해가 처음이 아니라 '정남진 장흥물축제'가 열리는 해마다 열었다는 것이다.

장흥의 청정 수자원을 기반으로 깨끗하고 바른 지역의 이미지를 알려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시작축제가 고작 여자나 발가벗겨 상품화하는 이 따위 짓거리나 벌이냐?

더 웃기는 것은 이 축제가 한국관광공사의 우수축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다행스럽게도 이번 누드촬영대회가 물의를 빚자 "내년부터 누드 사진촬영대회는 안 한다고 했다지만,

문제는 '누드사진촬영대회'가 장흥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진협회는 이제부터라도 전국에서 열리는 누드촬영대회를 없애고, 사진인들 교육에 힘쓰야 할 것이다.

하기야! 구성원 자체가 그렇게 배워온데다, 대개 그 나물에 그 밥이니 무슨말을 하겠는가?

그리고 이름도 '한국사진작가협회'가 뭐냐? 개가 들어도 웃을 이게 작가냐?

차라리 아마추어 사진단체 자체를 해산하는 것이 답이다.



글 / 조문호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Paul Massey

Marty Feldman filming Yellowbeard 1984

The London Evening Standard



외국 사진기자 보도연감을 뒤적이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사진 두 장을 만났다.
비록 연출에 의한 표정이지만, 표정과 자세가 자연스러워 마음이 따뜻해진다.
갑자기, 나도 이처럼 바보스러운 표정으로 낄낄거리고 싶어진다.

기계처럼 끌려 다니며 거룩한 표정으로 사는 사람들 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는지
불쌍해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이 볼 때는 오히려 내가 불쌍해 보이겠지만...
폴 메시의 사진처럼 혼자 비실거리며 지나가면 아마 미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그 무장이 해제되어 다들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다.
몸이 아파 보름동안 술 한 잔 마시지 못했는데, 오늘은 한 잔 빨며 혼자 낄낄거릴 란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열나게 하고 날씨까지 부채질하지만, 그냥 웃고 살자.


글 / 조문호


Nick Rogers

Lief Bruylant, mural artist. 1987

The Times



[사진 스크랩] ASSIGNMENTS 1 

THE PRESS PHOTOGRAPHERS’

ASSOCIATION YEARBOOK





성북동에 있는 갤러리카페 ‘탭하우스 F64’에서 이재정씨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7일 사진가 이정환씨의 문자메시지에 영문도 모르고 나갔는데, 이재정씨 사진전 오프닝이 열리고 있었다.






카페에는 이재정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이정환, 임성호, 변성진, 권 홍, 이미리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임성호씨의 사회로 이재정씨 작가의 변과 이정환씨 건배사도 있었다.
작품들은 제주4,3에 관한 사진이었다.






탁자에는 맥주와 피자가 놓여 있었으나, 통풍 때문에 맥주를 마실 수가 없었다.
마침 이정환씨가 페트병에 담긴 소주를 준비해 마시고 있었다.
‘제사보다 제사떡에 관심이 많다’는 말처럼 소주만 축냈다.






그런데, 처음 가본 ‘탭하우스F64'는 사진가 변성진씨가 운영하는 갤러리카페로 소품전 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에서 300미터정도이니 교통도 편리한 편이었다.






실내장식에 카메라나 확대기 등 사진을 상징하는 장식이 많았다.

사진가의 고충이 느껴지는 가게인데, 나 역시 오래전에 술집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사진을 이용한 장식은 일반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감격시대’에서는 해방되어 서대문교도소에서 만세 부르며 나오는 대형사진을 메인 사진으로 활용하였고,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는 판자 촌 같이 만들어 임응식선생의 피난 시절 사진으로 장식하였으나,

술집은 손님 자체가 장식이었다.





처음부터 손님이 많으면 계속 몰려오지만, 없는 집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그래서 매상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젊은 여인들을 불러 모아 술집에서 노닥거리게 만들었다.

실내장식 같은 사업수단이 손님을 끌어들이는데 반을 차지한다면 반은 운이 따라야 한다.






이차로 이정환씨를 따라 지척에 있는 ‘혜화 칼국수’로 갔다.
약 8년 만에 찾아 간 맛 집이지만, 육수 맛은 변함이 없었다.
임성호, 이미리씨 등 네 명이 갔으나 술을 과음한 것 같았다.





술이 취해 지하철역까지 무임승차 한다며 청소차 뒤에 메달렸는데,

청소부에게 들켜 내려와야 했다.
왜 이리 술만 취하면 나이 값을 못하고 어린애가 되는지 모르겠다.
철들자 노망한다는 소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부터 이틀동안 남해와 광양으로 떠났다.

더구나 이번에는 꿈에도 그리던 금산의 보리암도 들릴 수 있었다.


 

그동안 남해에 있는 인근 오일장은 여러차례 다녔지만,

30여 년 전에 보았던 금산 보리암은 들릴 겨를이 없었는데,

그 곳에서 내려다 보았던 아스라한 바다풍경을 영 잊을 수 가 없었다.


 

지방 갈 때 마다 휴게소에 들리지만, 사람들이 내 차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지난 겨울 만지산 눈길에 미끄러져 묵사발 되었지만, 운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폐차장에서 끌고 나왔다고 생각되는지 다들 유심히 처다보는데,

차 한번 처다보고, 차에 탄 사람 한 번 처다본다.

이동수단에 불과한 자동차를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맨 먼저 들린 '이천 휴게소'70년대 생활상을 재현한 풍물관이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이러한 풍물관이 있는 것도 처음보았는데,

어려웠지만 훈훈했던 옛 추억을 떠 올리게하는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구멍가게, 영화관, 헌책방 뿐이지만, 잊었던 지난 날을 일깨웠다.


 

또 하나 놀란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가수 송가인이가 완전히 접수했더라.

'여산휴게소'에서는 송가인의 용두산 엘리지만 반복해서 울려 나왔고,

'섬진강휴게소'는 단장의 미이리고개가 흘러 나왔다.

'미스트롯'이 만들어 낸 송가인 열풍으로, 방송후 그녀의 페이가 20배 뛰었단다.

'TV조선'에서 노인층을 겨냥해 만들어낸 '미스트롯'은 완전 대박이었다



남해대교를 건너 제일먼저 찾은 곳은 남해 이동장이었다.

오전 아홉시 무렵 도착했으나 장터에 사람이 없었다.

손님이 없어 새벽에 열렸다가 일찍 끝났다는 것이다.

텅 빈 장터를 한 바퀴 돌았는데, 뒤편에 세워 놓은 공덕비만 자리를 지켰다.


 

그 다음에 들린 곳은 금산 보리암 인데, 오르다 큰일 날뻔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갑자기 차 시동이 꺼져 버린 것이다.

에어컨을 켠 채 올라 힘이 달린 것 같았다.

움찔 움찔 뒤 바퀴 질만 하다 간신히 옆으로 꺾어 올랐지만, 간이 콩알만 했다.


 

온통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금산은 언제보아도 절경이었다.

원효대사가 보광사를 지어 보광산이라 불렀다지만, 이성계가 금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있는데,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절경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다음에 들린 곳은 가천 다랭이 마을이었다.

가천 다랭이마을은 손바닥만 한 논이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바다까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길, , 논 등 모든 것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곡선 위의 오선지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요즘은 관광사업으로 장사하는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실망감도 따랐지만,

우리나라에서 성기바위로는 제일 큰 암수바위가 있는 곳이다. 

숫 바위는 발기한 남자 성기 모양새고, 암 바위는 잉태한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양이다.

바다를 등진 채 비스듬하게 세워진 숫 바위의 귀두와 힘줄이 너무 사실적이다.


 

광양으로 차를 몰아 광양 읍수와 이팝나무가 있는 '유당공원'부터 들렸다.

'유당공원'은 중종23년에 광양읍성을 쌓고, 바다에서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었단다.

나무를 심을 때는 성을 가린 군사보안림이었으나, 바람을 막는 방풍림 역할도 톡톡히 했다고 한다.

지금은 성이 없어지고 고목들만 남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팝나무다.



그 이틀 날은 매실을 수확하는 농가를 찾아 아침부터 나섰는데.

남해의 마늘도 풍년이었지만, 광양의 매실도 풍년이었다.

사 먹는 입장에서는 좋겠지만, 농민들은 죽을 맛일게다.



광양오일장은 갈 때마다 모습을 달리했다.

처음 왔을때는 역전에 난장이 펼쳐졌으나 몇 년 전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초가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또 다시 장옥을 바꾸었더라. 문제는 돈을 많이 들일 수록 장이 더 못하다는 것이다

돈이 많아 탈이다.



광양 옥룡사지를 가는 길은 비릿한 밤 꽃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밤 꽃 냄새는 남자의 정액 냄새와 비슷하여 옛사대부 집안은 밤나무를 모두 베었다고 한다.

안방마님부터 며느리까지 음풍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는데,

이 동내 과부들은 어찌 견디는지 모르겠다.



광양은 도선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출신으로 광양 백계산에 옥룡사를 지어 이곳에 입적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옥룡사 옆에 운암사를 지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흔적이 남은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부도탑, 주춧돌, 우물, 토굴만 남았고,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동백나무숲의 운치가 일품이었다

입구에 있는 운암사는 우리나라 황동 불상 가운데 최고로 높은 약사여래 입상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컷 던 속리산 법주사 청동미륵대불보다 더 크다.


 

남해서는 전국에서 가장 큰 숫 바위를 만났고, 광양에선 가장 큰 대불을 만났으니,

이번 여행길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큰 것만 만난 셈인데, 좆도 타불이다.

 

사진, / 조문호






















































 

 




안 간다던 인사동에 또 나갔다.
갈 곳도 없고 만날 놈도 없지만 좀이 쑤셨다.
한 때는 정 주었던 고향 같은 년이 아니던가.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데.




인사동서 붓글 쓰는 사내가 한 소리 한다.
초지일관이란 글만 휘갈긴다.
초상화 그리는 꼬맹이도 열심히 그린다.
변함없이 열심히 하라는 말이다.




바람난 딸년이 갈보처럼 놀지만,
바람난 딸년은 딸이 아니던가.
돈에 눈멀고 유행에 맛이 갔지만,
둘도 없는 내 딸이고 정들었던 년이다.




눈치만 보는 아우들은 보이지 않고
천상의 천상병선생이 한 마디 하셨다.
미워도 내 새끼고 고와도 내 새끼란다.
몽둥이로 잡지 말고 사랑으로 잡어라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