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비움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사진전에 오래된 추억들이 떠올랐다.
유행가에 나오는 눈물의 미아리 고개가 아니라, 슬프기도, 우습기도 한 “희비쌍곡선”이다.






고등학생 시절 영화에 미쳐, 미아리 있었던 ‘서라벌예대’에 들어가려 안달한 적 있었다.

울 아부지는 “줄만서면 들어가는 딴따라대학 들어가 딴따라 될끼가?”며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도망쳐 할부 책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눌한 주변머리에 책 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팔았다 하면 망하는 회사에 풀어, 돌려받느라 혼 줄 난적도 여러 차례다.






친구 자취방에서 잠은 끼어 잤지만, 굶기를 밥 먹듯이 하여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모른다.

그래도 틈만 나면 미아리 학교 주변을 기웃거렸다,

고갯길의 중국집에서 공갈빵 하나 사서 간신히 허기를 메웠는데, 그 공갈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공갈빵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사서 고생 하다 결국 집으로 잡혀 갔지만, 몇 달 동안 미아리 주변을 맴돌았던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다른 추억 하나는 20여년 후, 사진에 미쳐 두 번째 야반도주했던 때 이야기다.

인사동 친구들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시다, 단체로 미아리 택사스에 몰려 간 것이다.

박ㅇ수 시인 덕에 누린 호사였는데, 정말 죽이더라. 그때 난생 처음 계곡 주를 맛 보았다.

그래서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열 명이 넘는 사내와 계집이 발가벗고 술 마신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난다.

이정환씨의 ‘미아리 이야기’가 그만 내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정환씨의 전시가 열리는 ‘비움갤러리’가 충무로 대한극장 주변에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진 한다는 놈이 사진전문 갤러리 위치를 모른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대한극장 주변을 맴돌다 결국은 이정환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시장이 마치 미아리 택사스 촌처럼 어두컴컴했다.

전시장에는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가 있었는데, 푸르스름한 조명이 좀 야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전시된 사진들은 그리 야하지 않았다.





이정환씨는 미아리에서 태어나 55년의 세월을 미아리에서 살아 누구보다 미아리를 잘 알고, 추억과 애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사진가이기 전에 한 때 영화 전문가였다. 30대부터 컴퓨터 그래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각종 CFCG작업을 했다.

신 씨네와의 인연으로 국내 최초의 CG영화 구미호CG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늦게 사진을 시작해 옛날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사진을 했다면, 완전한 미아리 역사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사진마다 미아리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옥상 난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개를 찍어 추억을 상기 시키기도 했다.





점집 앞에 제수로 엎어 놓은 돼지가 비정한 오늘의 현실을 말했다.

아파트가 미아리를 잠식해가는 사진에서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절절했다. 

비닐 막을 통해 보이는 꽂집 풍경과 택사스촌 입구를 지키고 앉은 여인, 음습한 유흥가를 지나는 발길들,

가로등이 조는 밤늦은 뒷골목 등 하나같이, 오랜 기억을 불러들이는 쓸쓸한 풍경이었다.






그는 골목에 대한 애착도 대단하다.

그동안 '국제 골목사진전'과 '골목은 살아있다'에서 보여주었듯이 '골목'에 대한 그의 철학이 남다르다.

그의 지난 사진들은 보지 못했지만, ‘북촌’, ‘사라지는 교남동’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장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 해 보여 준, '우연한 의도'전과 '미아리 이야기' 모두 장소에 대한 기억의 연장선상이다.





사진 속 공간 공간에는 사람 살아가는 끈적한 인간애가 배어있고, 변해 가는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이 묻어 있었지만,

작가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사랑과 미움의 갈등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릴 때부터 살아 온 미아리 전경의 사진에서는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긴 하지만, 아직은 골목골목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언젠가는 아파트 무리에 밀려나겠지만, 마지막 파수꾼처럼 묵묵히 지키며 기록하는 것이다.

예술 한다며 멋 부리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바라 본 것이다.
사진에서 만나는 것들은 지나치다 우연히 발견했지만, 늘 찾는 대상이었다.

그 미아리의 아픔을...






아래는 이정환씨 ‘미아리 이야기’ 전시 서문 일부다.

"추석 즈음, 모 교수의 칼럼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걸 따라 하자면 나에게 "미아리는 무엇인가?"
나에게 미아리는 태어난 장소, 곧 자궁이요, 고향이다.
나에게 미아리는 놀이터요, 나에게 미아리는 삶의 터전이요,
나에게 미아리는 사회성을 키워준 공간이요,
그러고 보니 미아리는 내 삶 그 자체인 거다.
나는 미아리에서 태어나서 55년을 살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5일부터 3일간 열린 포항 아트페어 사진의 섬 송도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참여했다.

요즘 지방에서 열리는 사진행사에 찾아다닐 여건이 아니지만, 지역에서 일으키는 사진 바람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포항지역 장터를 돌아보아야 할 정영신씨를 꼬드겨 찾아 간 것이다



  

 


서울에서 참여한 사진가들이 작년보다 줄기는 했으나, 케냐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김병태와 한병화씨 작품도 나왔고,

시골서 은둔하는 박진호씨 작품 내가 저 달을 움직였다와 정영신씨의 한국의 장터사진도 나왔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참여한 양재문씨의 춤사진 ’Korea Fantasy”와 조성기씨의 "함께 일하는 사람들사진도 만날 수 있었다.

    


 



5층에 마련된 유소피아 방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는데, 갑자기 서울역에서 자주 보던 태극기부대가 연상되었다.

우리의 소중한 태극기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태극기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준비해 둔 아버지의 사진앨범이었다.

아버지의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어 두었는데, 솔직히 그보다 더 소중한 사진이 어디 있겠는가?



 


하필이면 태풍 콩레이가 지나가는 때를 맞아 야외 행사를 치루지는 못했지만,

호텔연회장에서 치룬 개막식이라 다른 행사에 끼어 치룬 작년보다 오히려 실속 있는 자리라 생각 되었다.

둘째 날은 태풍으로 손님이 없어 여기 저기 쏘다녔지만, 마지막 날은 새벽 일찍 일어나 홍해장을 다녀왔더니,

관객이 몰려들어 전시장이 붐비기 시작했다.




 

이번 아트페어는 사진경매가 없어지는 대신 일층에 작품 판매 특설 전시장을 만들어

참여작가 작품을 한 점씩 걸어 일반인들의 작품 구매가 쉽도록 만들었다.

또한 외국서적을 판매하는 부스도 마련되었고,

옛날 사진을 가져오면 스튜디오에서 가족사진을 무료로 찍어주는 이벤트도 벌였다



 

 


둘째 날 저녁 730분에 열린 세미나는 양재문씨의 특별강연이 있었다.

작가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대상과 어울리며 순간적 느낌을 표현하는 작업 방법을 들려주었는데,

춤의 영상이 펼쳐지는 가운데 부른 양재문씨의 판소리는 자칫 딱딱한 강연이 되기 쉬운 분위기를 부드럽고 여유 있게 만들었다.

이어 아티스트 토크에서는 차재훈교수가 여러 작가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가며, 사진이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첫 날 개막식에서는 촌놈이 와인을 홀짝 홀짝 마시다 완전 맛이 가 버렸다.

부추김에 덩달아 봄날은 간다노래까지 불러 쪽팔리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정영신씨 방과 내방이 따로 있어, 어디로 갈까 헤메기도 했다. 이 잡놈 근성을 어찌할까?

그러나 호텔방보다 서울역에 있는 쪽방이 훨씬 편하더라.

방에서 담배를 피워도, 밤새도록 컴퓨터와 놀아도 아무도 탓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틀 날은 늦잠으로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조반까지 놓친 채, 전시된 작가들의 방을 돌아보았는데,

솔직히 다른 객실을 방문하는 심적 부담도 따르더라.

잘 아는 작가의 방은 쉽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방에 사람이 있는, 잘 모르는 분의 방은 멈칫해 지는 것이다.

좁은 객실에서 마주치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바꾸어 생각한다면, 구매자나 일반 관람객의 입장은 어떠할지 염려되었다.





작가가 없는 빈방은 찬찬히 살펴 볼 수 있었는데, 더러 문이 잠겨 놓친 작가도 있었다.

그런데 전시되어 있는 대개의 작품들이 너무 빼곡하게 늘어놓아 산만해 보였다.

보고 나와도 무엇을 보았는지 머리에 남지 않았다.

작품을 구입할 소장자를 위한 별도의 포토포트폴리오 박스를 준비해 두고, 핵심 작품들만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더라.

차재훈 교수의 강의처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장기적인 지역 사진축제로 자리 잡으려면 지역 사진가들의 열정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매년 최소한의 기본적인 사업비는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포항시나 문화지원 단체에 신청하여 일정 사업비는 확보되어야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전국적인 아트페어로 자리매김 하려면 좋은 작가를 많이 유치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한 점이라도 팔려 진행경비는 나온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야 가능할 것이다.

즉, 지원 단체에서 일정 작품을 구입 소장하여 공익사업에 다양하게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



 


비록 포항만의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기록의 중요성이 표현주의 사진에 밀려 난다는 점이다.

사진에서 인기가 더 중요한 건 아니지만, 주객이 전도된 아쉬움이다.

다큐멘터리사진으로 시작된 동강사진축제도 그 명맥을 잃은 지 오래지 않던가.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씨가 마르지 않을까 걱정된다.

밥벌이가 되지 않아 밀려나는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이 한 둘이 아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노력한 사진가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소식조차 알 수 없다.

다들 남의 집 이야기처럼 뒤짐만 진채, 눈치만 보는 사진인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부에 당당히 요구할 통로가 될 수 있는 사진단체 하나 결성하지 못하는 개인주의에 간이 뒤집어 진다.




 

유행이란 시대적 흐름에 따르지만, 언젠가는 달라지는 게 유행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진작가협회에서 오래 동안 고집해 온 공모전 스타일의 사진은 유행도 타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까지 그런 사진을 선호하는 층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구매자들의 사진안목을 키우는 것도 시급한 일이지만,

공모전스타일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사진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교육도 시급하다.



 


마지막 날은 짐을 싸두고 하루 밤 더 묵었다

그 이틀 날 구룡포시장을 비롯해 몇몇 지역 장터를 돌아보기 위해서인데, 또 술에 녹초가 되어 버렸다.

모처럼 정영신씨 기분 맞춘다고 송도 회 센타까지 데려가 한 잔 빠는데, 안성용씨와 조성기씨 전화가 연락부절이다.

모처럼 영감탱이 연애 한 번 걸라는데, 훼방 놓고 그러샀네.”

술이 취해 꽁치 한 마리 싸들고 찾아 갔더니, 안성용, 조성기, 박진호, 이묘순씨를 비롯하여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몇 분들이 모여 포차에서 마시고 있었다, 쪽~쪽~ 원 샷을 해대는데, 다들 잘 마시더라.

도저히 따르지 못해, 비겁하게도 정영신씨를 남겨두고 혼자 도망쳤다.


늙으면 죽어야지, 별 수 있겠나?”




 

포항 사진아트페어 참여 작가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기, 권순종, 김남효, 김병태, 김수정, 김인술, 김 훈, 김혜련, 나호권, 문성국,

박상화, 박양채, 박영길, 박우철, 박종효, 박진호, 서경애, 서상숙, 손진국, 신병문,

양재문, 오상칠, 유소피아, 이근무, 이다나, 이두순, 이묘순, 이인식, 이정철, 임향숙,

장문식, 정영신, 장정아, 정광수, 조근식, 조문호, 조성기, 지용철, 최흥태, 최희우,

하정은, 한병하, 홍상돈,


개막식 사진은 아래와 같이 별도로 올리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blog.daum.net/mun6144/4930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포항 아트페어 ‘사진의 섬 송도’가 지난 5일부터 7일까지 포항 송도 코모도호텔에서 열렸다.

포항예술문화연구소(소장 안성용)가 마련한 ‘제2회 사진의 섬 송도-송도, 미래를 만나다’ (대회장 이인식)는

호텔 룸에서 전시 판매가 이뤄지는 호텔아트페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포항, 경주, 대구, 부산, 서울 등 전국의 사진가 43명이 참가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으나,

전시작의 판매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이는 지역민들의 사진 소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이라,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역작가들 친분에 의해 팔린 작품들은 더러 있어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5일 오후7시 30분에 열린 개막식에는 대회장 이인식씨와 운영위원장 조근식, 기획자 안성용 소장을 비롯하여

참여작가와 초대인사 등 100여명이 참가하여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이도협, 원지현씨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은 대회장 이인식, 안성용씨의 인사와 내빈의 축사가 이어졌다.

한 잔 마시며 들었으면 훨씬 덜 지루했을 텐데, 자꾸 옆자리에 차린 술상에 신경쓰였다.

대금연주와 작가들의 기념사진 촬영이 있은 후에야 와인파티가 시작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6일은 전시장이 한가했으나, 마지막 날인 7일은 많은 분들이 들려 작품을 감상했다 .

특히 아티스트 토크에 참여해 주신 서울의 차재훈교수를 비롯하여, 

부산의 사진가 노재학, 박경민씨 등 타 지역에서도 많이 다녀가셨다. 






아트페어를 끝낸 7일 밤에는 '제3회 사진의 섬 송도'를 기약하는 축배를 들었다.  


참여사진가 : 권기철, 권순종, 김남효, 김병태, 김수정, 김인술, 김  훈, 김혜련, 나호권, 문성국, 박상화,

                 박양채, 박영길, 박우철, 박종효, 박진호, 서경애, 서상숙, 손진국, 신병문, 양재문, 오상철,

                 유소피아, 이근무, 이다나, 이두순, 이묘순, 이인식, 이정철, 임향숙, 장문식, 장정아. 정광수,

                 정영신, 조근식, 조문호, 조성기, 지용철, 최흥태. 최회우, 하정은, 한병화, 홍상돈,






아래는 개막식을 비롯하여 이런 저런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이 너무 많아, 세미나와 아티스트 토크, 전시 객실, 뒤풀이 사진을 바롯한 본인의 참견문은 아래에 별도로 올립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931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부터 짖는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이름에 목숨 건다.
명예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것은, 폼 잡아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기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세상은 이름 남긴 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만든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우연히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 ‘무명독립군 용사’란 꼬리 글이 달린 사진을 만났다.
독립을 위해 싸웠던 늠름한 독립투사의 모습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루한 차림의 말단 병사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을 것이다.
총검과 탄약을 지키고 선 무표정한 자세는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 같은 친근감도 느껴졌다. 주연이 아닌 엑스트라처럼...

독립운동을 한 투사만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동학이나 이후의 한국전쟁에서도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칼집이나 총알받이가 된 무명용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비단 전장만이 아니라 삶의 전선도 마찬가지다.
부와 명예를 누리지 못한 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끌어가는 것이다.
산업전선의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술자나 예술가도 이름 한자 남기지 못하고 열심히 사는 다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희생 속에 대통령도 나오고 장군도 나오고 유명작가도 나오는 것이다.
세상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것이다.

“이름 없는 무명용사 만 만세다!”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같은 화보에 실린 사진이다.]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의 환송기념사진 (1941년 3월6일)
앞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 구, 이시영, 차이석
2열 왼쪽부터 최동오, 김문호, 신정숙, 김응삼, 이지일, 김봉서
3열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선서하고 있는 광복군 지하공작대원
1942년 봄, 일본군이 점령한 후방지구 지하공작을 위해 떠나는 광복군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부터 지대장 이범석, 구대장 안춘생, 대원 백정현, 이욱승, 김천성, 서 암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서 스크랩]





제2회 '사진의 섬 송도'가 오는 10월5일부터 7일까지 포항 송도 코모도호텔에서 열립니다. 
조문호의 '사람들' 사진전은 218호에서 열리는데, 시간 되는 분은 놀러 오십시오.

 223호에서 열리는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을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참여합니다.
,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정보교류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성과 정은 메말라가고,
돈이 없는 사람은 정을 나누며 재미있게 살아가는 걸,
동자동 추석 한마당 잔치를 보며, 다시 한 번 느낀다.

아무 것도 아닌 돈이, 인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추석을 이틀 앞 둔, 지난 22일 동자동 새꿈 공원에서 동자동 주민 잔치가 열렸다.
다 같이 명절 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올 해로 아홉 번째인 이 행사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마련했다.
주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주민들의 손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가난한 사람들 끼리 함께 나누고, 즐기는 좋은 자리다.






투호, 윶놀이 등의 민속놀이와 함께 노래자랑까지 즐기고,
닭개장, 송편, 파전, 돼지고기에다 반주까지 곁들인 잔치상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걸 보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배가 불렀다.






사실 가난한 쪽방주민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더 어려운 노숙자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






내가 동자동에서 이 행사를 맞은 지가 벌써 세 번째지만, 해마다 연이 맞지 않았다.
첫 번째는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몰랐고,
두 번째는 행사 날 전해주기로 한 사진 제작이 늦어 못 보고 말았다.
그 이튿날 별도의 빨래줄 전시로 약속은 지켰지만...





올 어버이날 행사 때도,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나누어 주었지만,
사랑방 조합 이사 한 분의 시비로 더 이상 빨래줄 전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찍을 때마다 수시로 사진을 만들어 주기로 했으나, 그게 말 처럼 싶지 않았다.






빨래줄 전시를 하면 억지라도 밀어붙여, 한꺼번에 사진을 만들지만,
거지 주제에 수시로 사진을 만든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빚쟁이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사진은 언제 주냐고 물었고,
잔치에서는 사진전시는 왜 안 하냐고 물었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음에~만 노래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도 자칫하면 추석 잔치를 놓칠 뻔했다.
의례 추석 전 날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틀 전으로 바뀐 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날이 토요일이라 빵 타러 공원에 내려갔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받은 빵은 먹을 틈도 없이, 반가운 사람만나 인사 나누며, 사진 찍느라 바빴다.
봉사하는 주민들은 음식 나르느라 눈코 뜰 새 없었지만, 다들 맛있게 먹었다. 






난, 배가 고프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먹을 시간도 없지만, 먹는 게 귀찮았다.
이 쯤 되면 밥 숟가락 놓고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행사가 끝나면 방에 올라가 빵으로 해결할 작정이었는데,
나를 눈여겨 본 사랑방 선동수간사께서 나를 위해 한 상 차려 온 것이다.
곧 노래자랑 할 시간이라 먹을 시간이 빠듯했지만, 너무 고마웠다.






따뜻한 배려에 감동 받아, 한 쪽 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시간이 없어 허급지급 먹다보니, 그만 입술을 깨물어버렸다.





아이쿠! 이건 분명 천벌 받은 것이다.
밥을 우습게 여겼고, 일도 돕지 못하면서 새로운 밥상을 차리게 한 죄였다.






이어, 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손님들은 다 떠나고, 동자동 새꿈공원을 주름잡는 단골주민과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만 남았다.
천 원씩으로 노래 신청한 사람은 스물 다섯명인데, 다들 한 가락 하는 분이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춤을 추었는데, 참 잘 놀았다.
돈이 없어 그렇지, 신명 하나는 끝내 주었다.






노래자랑이 끝나고 심사결과가 나왔는데, 예상을 뒤엎었다.
다른 사람처럼 멋 부린 노래가 아니라,
다소곳하게 부른 황옥순 할머니가 최고상을 받은 것이다.






그 분은 '새꿈 공원'의 지킴이나 마찬가지다.
공원의 트레이드마크 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신다.
온갖 술꾼들의 거친 행동을 통제하고, 주변 쓰레기까지 정리 한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준 인기상이 아니라, 노래를 잘 불러 받았는데, 다들 좋아하며 축하했다.





황옥순 할머니 외에도, 여러 가지 대회에서 상 받은 분들이 많다.

이대영, 이정애, 강동근, 조인형, 김성현, 조창현씨 외에도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 여러명이 더있다.





사람 사는 것이란, 아무 욕심 없이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노는 게 답이더라.
그 답을 보여준, 동자동 사람들, 화이팅! 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금요일 은평구청 앞에서 농성하는 부부가 있었다.
명절을 눈앞에 두고, 생존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나 가능성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짓고 있는 아파트를 이제와 어떻게 하겠나?
가진 자들의 놀음에 없는 자들만 내 몰리는 세상이다.


사진,글 / 조문호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토록 무자비할 수 있을까?
사람 목을 무 자르듯 잘라 메달아 놓았다.
이광수교수의 ‘인간은 악이다’란 말을 무색케 한다.






이 사진은 로일전쟁 당시 집단처형 장면이라는데,
사람을 죽이면 눈깔이 뒤집힌다는 말이 딱 맞다.
인간이 맹수나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들 정선 산중에서 무서워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
짐승이나 귀신 따위는 무섭지 않지만, 한 밤중에 나타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사람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아니던가?






이 사진은 김옥균을 처형장에 효수해 놓은 장면이다.
망명한 김옥균이 일본정부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중국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이다,
파란과 풍운으로 일관된 43년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죽였으면 그만이지, 시체를 다시 능지처참해 목을 매다는 건 무언가?
바로 살아있는 백성을 고문하는 짓이다.






몽둥이로 사람을 치는 곤장이라는 태형은 형의 경중에 따라 다른데,
많이 맞으면 초주검이 되는 무자비한 형벌이다.
그리고 중죄인은 옥중에서도 이처럼 나무로 만든 칼을 씌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을 무참히 죽이는 인간백정은 많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대표적인데, 앞의 둘은 이미 천벌 받았지만,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 전두환은 언제가지 두고 볼 것인가?
곤장 백대만 치면 그냥 갈 텐데...

[사진은 1978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서 스크랩했다]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