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조준영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 같은 모임이다.






모이기로 한 ‘유목민’으로 가다 ‘갤러리 이즈’ 앞에서 아르바이트하는 Lucy양을 만났다.
언제나 쉴 틈 없이 초상화를 그리는 그녀지만, 마침 혼자 있었다.
모처럼 이런 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홍익대 3학년인데, 학비 마련하러 인사동에서 일 한다는 것이다.
한 장 그리는데 팔천 원씩 받지만, 그리는 량이 많아 수입은 짭짤하단다.
돌콩 같은 조그만 녀석이 참 기특했다.






그래서 나를 그려보라며 Lucy양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Lucy양은 나의 사진모델이 되었다.
얼굴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연신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참 예뻤다.
낯선 소녀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쳐다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소녀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유목민’으로 가던 장경호씨와 안원규씨에게 덜미 잡힌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 꼬라지가 하도 지랄같이 생겨서인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보니 너무 미화시켜 놓았더라.
대개 예쁘거나 근사한 자신의 모습을 원하겠지만, 대 실망이었다.




 


이가 빠지면 빠진 데로 주름살이 있으면 있는 데로 리얼하게 그려야 하는데,
닮은 것이라고는 안경테와 콧수염뿐이었다.
주변에 그려 넣은 색이나 카메라도 산만하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돈은 벌지 모르겠으나, 본인 작업에는 도움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김상현, 이한성, 전강호, 장경호, 안원규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씨가 나타났다. 번개 팅도 아닌데 참석률이 저조했다.






더욱 김빠지게 하는 것은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여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래야 기껏 연극하는 이명희씨와 사진하는 정영신씨 정도겠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구석자리에 사진하는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한기현씨가 두 차례나 인사하며 언질 주었건만, 이야기하느라 가보지 못했다.
아마 그날 희수갤러리에서 열린 박경태씨의 ‘마주한 기억’ 전시를 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하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니, 다들 나가려고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한옥란교수를 닮아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한참 젊은 미녀였는데,

뒤늦게 페친 신청한 이름을 보니 노미경씨였고, 안명현씨도 있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부랴부랴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송구스러웠다.
다음 만날 기회 있으면 꼭 술 한 잔 올리리다.






술이 얼큰해지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나만 조는 것이 아니라 장경호씨도 졸았다.
지난 밤 너무 더워 잠을 못이루어, 둘 다 졸음이 몰려 온 것이다.
먼저 가 쉬라는 조준영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행랑쳤다.
같은 버스를 탄 장경호씨와 번갈아 졸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내릴 곳을 놓치지는 않았다.






구월 모임에는 많이 불러 모아 좀 재미있게 놀아 봅시다.

그리고 모임의 이름이나 인사동에서 해야 할 일을 의논하는 등 모임의 틀도 짭시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토요일 자정무렵, 갑자기 전기가 나가버렸다.
여름 쪽방에서 정전된 건 처음 있는 일인데, 숨이 턱턱 막혔다.
더운 바람이라도 돌려주는 선풍기의 고마움을 새삼 절감했다.
그런데, 건물 전체가 정전된 것이 아니고, 내방만 나간 것이다.

다들 잠 잘 시간이니, 연장 빌릴 곳도 없었다.
라이터 불을 치켜들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천정의 배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지긋지긋한 밤을 보내려면 노숙하는 방법 뿐이었다.

잘 곳을 찾아 공원 주변을 돌아보니, 자는 모습도 다양했다.
어떤 이는 폐지 모은 리어카 위에서 자는 이도 있고,
돌 난간에서 아슬아슬하게 자는 사람도 있었다.

옆 사람 배에 다리를 걸치고 자는 등 각양각색이었다.






쓰레기터 옆에는 유정희, 정용성씨가 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고,
용성이 모친 황춘화씨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윗옷을 벗어 보기가 그런지 유정희씨가 이불로 슬쩍 덮었다.


유정희씨는 일 년도 더 된 일을 나만 보면 노래를 불러댄다.
김원호씨와 밥 한 끼 사준 적이 있었는데, 그 된장찌개 맛을 잊을 수 없단다.
사실, 잦은 술자리에서 나눌 이야기가 뭐 있겠는가?
사는 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마시고 자는 일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 곳은 주변이 어지러워, 명당으로 꼽히는 DB빌딩 쪽으로 옮겼다.
1층과 2층 통로로 맞바람이 불어 더위 먹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단지 건물관리인이 없는 자정에서부터 새벽 4시 반까지만 가능하다.
술 좋아하는 자들은 엄두를 못 내지만, 잠 잘 사람만 모인다.






열두 명이 더러 누웠으나, 한 쪽 구석에 자리 펼 곳이 남아 있었다.
빌려 온 파지박스를 깔아 누워보니, 천국이 따로 없더라.
이렇게 시원한 맞바람이 부는 곳에서 언제 자본 적이 있었던가?


칼잠 자는 버릇에 귀를 바닥에 대고 누웠더니, 자동차 바퀴 소리가 요란했다.
땅에서 울리는 진동이 입체음향으로 들려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잘도 잤으나, 초짜라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니, 소음도 음악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엔진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도 리듬이 있었다.


갑자기 “뿌드득 뿌드득“하는 개구리 울음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귀신도 못사는 요지경 서울에 어찌 개구리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자세히 들어보니, 옆자리에서 이빨 가는 소리였다.

세상살이 무슨 원한 그리 많아 이빨까지 갈아 샀는가?


잠 잘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도 남지 않았다.
소음을 자장가 삼아 서둘러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름하여 ‘서울 야상곡’ 들으며 잠시 눈을 붙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다들 떠날 채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쫒겨나기 전에 전기공사하러 쪽방에 올라갔다.
천장에 손 들어갈 수 있는 구멍부터 후벼 팠는데,
땀과 합판 부스러기가 범벅되어 죽을 맛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끊어진 전선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청소하랴! 물 뒤집어쓰랴! 바삐 정리하고 나니,
그때사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오기 시작했다.
전기가 똥개 훈련시켰다고 투들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다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잠을 깼다.
한동안 다리를 부여잡고 꼼짝을 못했는데, 왜 갑자기 근욕 통이 왔을까?
시멘트 바닥의 찬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난공사에 용을 쓰서 그럴까?

더운 날씨에 병원 오 갈 생각하니,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씨발!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사진, 글 / 조문호










28일까지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려...    




['오마이뉴스'에서 스크랩]

노회찬의원 장례식장에서 침통한 표정의 심상정의원 옆에 유시민씨가 오열하고 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전시리뷰를 작성하려 컴퓨터를 열어보니, 노회찬의원 자살 소식이 떴다.

눈을 의심했으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우리나라에 그만한 정치인이 과연 있었더냐?

 

지난 일요일엔 여야 원내대표 다섯 명을 싸잡아 욕하기도 했다.

미국을 방문한 원내대표들이 워싱턴DC 의사당 앞에서

연예인들처럼 뜀박질하는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연출시킨 사진기자 탓으로 여기며, 잘 다녀오기를 바랬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더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온 종일 밖에 나가 공원을 싸돌아다녔으나

도저히 슬픔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어찌 좋은 사람은 먼저 데려가고, 나쁜 놈들이 잘 살게 할 수 있는가?

세상을 원망하며 분노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난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노회찬씨를 정치인으로 보지 않고 지도자로 본다.

정치를하는 장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기에,

인간적으로 가슴이 따뜻한 분들은 그러질 못한다.

 

이제 그 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이 기회에 정치자금법의 대수술과 함께 정치개혁을 이루어 내야 한.

슬픔은 뒤로하고, 우리모두 냉정을 되찾자.




당신이 추구해온 가치가 꼭 실현되길 바라며,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산사견록'에 참여한 사진가 / 좌로부터 정남준, 문진우, 김동진씨



부산 사()견록전이 지난 20일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부산의 중견 사진가 김동준, 문진우, 정남준씨 등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의 시선으로 바라 본 부산이다.

 



김동진의 '해운대'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범5동 매축지의 골목풍경을 찍은 문진우의 매축지

마치 죽음의 그림자처럼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정남준의 영도 수리조선소조선소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노동의 의미을 일깨운다.

삶의 본질을 비틀지 않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김동진의 해운대는 소외, 외면, 박탈, 욕망, 갈등 등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자기만의 목소리로 기록했다.

각기 다른 삼색의 부산사견록갤러리 브레송’ 3-3시리즈 두 번째 기획전이다.



문진우의 매축지



부산사견록이란 제목 차체가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추진한 '부산참견록'을 떠올리게 한다.

'부산참견록'은 매년 중견사진가 한 명을 선정해 부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개인적 친분에 의한 작가선정으로 결과가 들죽 날 죽 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부산의 사진가가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은 지역작가들의 소외감을 살 수도 있지만,

자칫 뿌리 없는 사진일 수도 있다.



정남준의 노동자



때로는 외지인의 낯선 시선이 필요할지 모르나, 바닥에 뿌리내린 자의 익숙한 눈빛에 따르지 못한다.

문진우의 매축지의 소시민들과 해변에서 잡아 낸 김동진의 부조리한 장면,

정남준이 찍은 조선소 노동자 정면사진은 또 다른 부산의 모습이다.

각기 사진들이 갖는 의미나 우열은 풀이하는 바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일단은 부산참견록을 의식한 전시라는 느낌도 든다.

전시 기획자는 사견록의 자가 생각 사()자라 했다.

생각하고 보고 기록한다는 의미로 세 사람의 작품 성격을 한 마디로 나타내고 있다.

    


김동진의 '해운대'



문진우의 사진은 부산의 아주 오래된 마을, 아직도 그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매축지라는 장소를 기록한 것이다. 문진우가 기록한 그 장소성은 사람이 이 땅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슬픔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림자 안에 있거나 온전치 않은 형태로 나타난다. 사진가의 슬픔이 배어 있으니 슬픔으로 읽어내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그 읽기는 과학적 읽기가 아닌 문학적 읽기다.


정남준은 노동자의 삶을 담았다. 인간은 일 하는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임을 말하는 전형적인 사회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노동이 정당하게 인정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사는 노동자의 모습을 어둡게 그리지 않은 것은 역설적이거나 그들이 세계의 주체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김동진의 사진은 역사 인식이 강한 사진이다. 세상은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개별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보편이란 과학성을 숭모하다 보니 사람이 소외되고 세계가 비정상이 되어 감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세계를 그렇게 보지만 나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의 사진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진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은 바로 그런 그의 역사 인식 때문이다.”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가 서문에 적고 있다.




문진우의 매축지



지난 20일 오후630갤러리브레송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김동진, 문진우, 정남준씨 등

부산에서 상경한 사진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서울 사진가들이 함께 어울린 사진축제의 자리였다.

김남진 관장을 비롯하여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Area Park, 강제욱, 고정남, 권 홍, 임종선, 노은향, 오현경

이동준, 권병준, 신락선, 이수철, 박춘화, 김 헌, 남 준, 최인기, 곽명우, 곽윤섭, 이규철, 석재현씨 등이

충무로 조방낙지로 알려진 해물탕집에서 마셨고, 이차는 해나루’에서 보냈.




정남준의 영도 수리조선소



이 전시는 28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02-2269-2613)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진즉 알려야 하는데, 인터넷도 없는 정선서 삼일을 개기다보니, 늦은 소식이 되어버렸네요.

지난 16일 외국 출장 간 김봉규씨가 김문호씨 자당께서 소천하신 가슴 아픈 사연을 페북에 올렸는데,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상주 김문호씨는 하는 수 없이 댓글로 하소연 했습디다.
행여 걱정할까, 편안하게 돌아가신 호상이라지만,
자신의 몸을 잉태한 어머니의 임종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불효막심한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정선 가려던 일정을 바꾸어,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안양 장례식장 부터 들렸다.
찜통같이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은 문상객들로 넘쳐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 을의 입장이었던, 김문호씨 보고 찾아 온 문상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김문호씨가 독자이거나 남매 한 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집 안에 형을 비롯하여, 딸만 넷이나 되는 딸부자였다.
김문호씨를 알게 된지가 어언 30여년 가깝지만, 그동안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큰 절로 예를 올리고 나니, 그 많은 문상객 중 사진가는 부산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 뿐이었다.
뒤늦게 사진가 강제욱씨를 비롯하여 김남진, 이규상씨가 나타났지만,

그 밖에 아는 분이라고는 중문학자 임계재선생이 유일했다. 
이광수교수의 쌍스럽고도 시원한 농아리를 안주삼아 졸라 빨고 싶었으나,
정선 갈려고 차를 끌고 갔으니, 어찌 술을 넘 볼 수 있겠는가?

소주 한 잔을 보약삼아 입만 적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리의 화두는 이광수교수가 다음 달 펴낼 사진 소설 ‘구보의 하루’였다.
눈이 나빠 글은 다 읽지 못했지만, 소설 형식을 따른 사진인들이 꼭 읽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런데, 실린 사진이 장난이 아니었다. 언제 그 좋은 사진들을 찍었는지 깜짝 놀란 것이다.
얼마나 바쁜 사람이던가? 동에 뻔쩍 서에 뻔쩍 종횡무진 하는 양반이 사진까지 잘 찍어 바리면,

사진에 목숨 건 찍사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역시 사진은 사진을 전공한 사진가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의 사진이 더 좋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기계의 장난에 불과한 사진에 전전긍긍하는 것 보다, 생각이 앞서고 규범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오는 8월30일부터 충무로 '반도카메라'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 

김문호씨 사진집 제작과 함께, 열반하신 범어사 관조스님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을 주었다.
사진판을 좌지우지하는 갑들이 긴장하게 될 김문호씨 사진집도 사진집이지만,

불교사진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좋은 일들이니 쌍수로 환영할 뉴스였다.






그 무렵, 사진하는 양아치 한 놈이 나타난 것이다.
눈앞에 있는 선배들을 무시하고, 다른 자리에서 마신 후,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져버렸다.
못난 놈, 그러니까 양아치 소리 듣는게지.

열차 예약시간을 놓쳐 난감해진 이광수교수 따라 일어나니, 그 많던 문상객은 대부분 사라졌고,
눈에 보이는 건, 국화로 뒤덮인 조화였다.
세상에! 저 많은 꽃 값을 돈으로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했는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이광수교수가 말했다.
때로는 명사가 주위에 있다는 가오도 좀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가오 좋지! 그럼 난, 뭣으로 가오 세울 수 있을까?
돈도 명예도 인물도,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가오 세울 것이 없었다.
차마 입으로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나도 한 때 가오 좀 세웠지. 요 모양 요 꼴 만든 계집 질로..,.”

내가 미쳤나보다. 문상와서 계집 질 타령이라니..

어머님 죄송합니다.
웃어려고 한 이야기니

그냥 웃어 넘기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 심야산보(深夜散步) Midnight Balade in Seoul

김동욱展 / KIMDONGWOOK / 金東旭 / photography
2018_0721 ▶ 2018_0730 / 월요일 휴관



김동욱_충무로5가 20-12018 Chungmuro 5(o)-ga 20-1_종이에 안료_30×24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309c | 김동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721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탐독(耽讀): 김동욱 사진-서울, 심야산보(深夜散步)01.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김동욱 작가.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김동욱 작가가 있다. 1995년. 정읍 농민들을 향해 진중하게 셔터를 눌렀던 무거운 작가다. 그는 사진에 현재를 담았지만, 그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탐색하려고 했다. 파노라마 카메라의 수평적 프레임 속에 담긴 평범한 농민들 속에는 한반도 최초로 '아니다'라고 외쳤던 100년 전 농학농민군들이 스며 있었다. 피사체와 이심전심으로 소통하면서 작업하는 '눈 맞춤의 사진(eye contact photo)'을 통해서 역사의 맥락을 이으려 했던 작업이었다(육명심 1995). 그는 이 작업에서 인물을 찍은 것이 아니라 토지라는 배경 속의 농민을 찍었다. 한국 산수화(山水畵) 기법의 활용이었다. ● 그의 카메라는 한국 부천, 중국 심천, 일본 시요와에 있는 미니어처 테마파크로 이동하였다.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세계 랜드마크 미니어처를 카메라로 담았다. 현실 공간을 모방한 거짓 공간을 프레임 속에 담는 작업은 시뮬라크르를 포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적 의미의 이데아를 역추적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가상과 현실이 착종(錯綜)하고 있는 우리 시대를 해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김동욱_을지로4가 49-1 Euljiro 4(sa)-ga 49-1_종이에 안료_30×24cm_2018


계속해서 그는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와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로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영화 세트 공간은 또 다른 시뮬라크르이며 역사적 네러티브를 극단화시킨 상징공간이다. 앞의 작업이 「그림엽서」라는 표제를 달았다면 뒤의 작업은 「오래된 사진첩」이란 제목을 달았다. 「그림엽서」가 표상을 모방한 가상 표상들을 통해 원본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면, 「오래된 사진첩」은 영화라는 서사 장르와 관계 맺음으로써 역사적 내러티브를 복원하려 한 작업이었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현실 재현능력과 암시만으로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는 이 난제를 카메라의 정체성을 살짝 비틀어서 극복하려 하였다. 전형적인 시점으로 피사체들을 촬영하면서 의도적으로 핀을 틀어 촬영한 것이다. 몽롱한 작품들은 사진의 재현성을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원본에 근접했고 많은 역사적 내러티브를 복원시켰다. 과거는 말을 할 때마다 바뀌지만 사진에 찍힌 과거는 언제나 자기 모습을 지키고 있다는 상식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이경률 2006, 이관훈 2008).



김동욱_소공동 112-20 Sogong-dong 112-20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그의 카메라가 이번에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세계로 틈입(闖入)했다. 겸재가 그려 낸 한양 산수를 사진으로 방작(倣作)하는 엉뚱한 작업이었다. 표제가 「강산무진(江山無盡) 」Ⅰ·Ⅱ였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속의 작품들이나 「인왕제색(仁王霽色)」은 눈에 보이는 풍경(風景)이 아니라 겸재 가슴 속에서 구성된 산수(山水)다. 진경(眞景)이란 현실이 아니라 현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참(초)현실인 것이다. 사진으로 겸재가 그려낸 한양을 방작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 있다. 지필묵/문인화 대 카메라/사진, 오감(五感) 대 시각(視覺), 자연과 우주를 관조하는 문사적(文士的) 판타지 대 실재를 묘사하는 디테일의 차이는 서로간의 교섭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김학량 2009). 또한 한양과 서울의 시간적 거리감과 공간적 변모를 어떻게 연결하는가도 관건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생이 발견한 '우리의 美'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 또한 우리 국토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히 기록하려 했다."라고 정직하게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가 노트」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진 미학의 임계점을 넘으려는 욕망이 드러난다. 겸재의 시선을 통해 발견한 서울 풍경(風景)은 그의 내면 풍경이 반영된 또 다른 산수(山水)였다. 공간의 무한과 인간 조망 속에서 현실의 단편이 어떻게 미적 현실로 구성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다(류철하 2012-2013). 그의 작업은 불연속적이며 단편적인 실험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발전적인 실험이었다. ● 그리고 그의 카메라는 겸재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늘의 서울로 향했다. 필연적인 이동이었다. 

 


김동욱_소공동 112 Ⅰ Sogong-dong 112 Ⅰ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02. 시민들이 사라진 서울 밤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건물. ● 늦은 모임을 마친 후 시민들이 사라진 어두운 소공동 거리를 걷다가 그는 낯선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 건물이 이 거리에 서 있었지 의아해하며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사진으로 호명(呼名)된 낡은 건물을 보는 순간 절실하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표정을 읽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놀랍게도 낯익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기 속에는 젖살 통통했던 아이 하나가 삼일빌딩을 올려다보며 놀라기도 하고 눈망울 초롱초롱한 소년이 맞춤 양복점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가기도 했다. 정읍 농민들 속에 동학농민군들이 스며 있었듯이 우중충한 건물에는 지나간 서울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는 기계적인 재현과 암시와 상징의 고안물(考案物)을 넘어서려는 사진의 또 다른 욕망을 감지(感知)했다.



김동욱_을지로2가 101 Euljiro 2(e)-ga 101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03. 건물 초상사진(肖像寫眞)의 탄생 ● 그의 카메라가 서울 밤거리를 분주하게 배회(徘徊)하기 시작했다. 을지로-퇴계로-충무로-소공동. 대로를 벗어난 뒷골목에는 주눅이든 듯 고개 숙인 토박이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과거 서울을 소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우울했다. ● 세상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기 속에 소멸하는 것이니 건물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파괴적 창조를 일삼는 서울에서 오래된 건물들은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마지막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흔적 하나 남지 않는다. 전통을 이야기할 수 없는 허망(虛妄)한 상황이다. 그는 동류의식(同類意識) 비슷한 걸 느꼈다.



김동욱_남대문로5가 63-17 Namdaemunno 5(o)-ga 63-17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그는 예전처럼 '눈 맞춤의 사진' 작업을 시도하였다. 사람도 아닌 건물과 소통을 하면서 셔터를 누르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은 작업이었다. 매혹적인 이성(異性)의 전화번호를 따내듯이 건물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고, 3.3 제곱미터 당 가격을 조사하고, 입주한 가게나 기업들을 탐색하다 보니 건물들이 자신의 속내를 조금씩 털어놓았다. 한양(漢陽)에서 한성(漢城)이 되었다가 다시 경성(京城)이 되고 지금은 서울이 된 도시에서 천천히 낡아가고 있지만 자신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황금시대도 있었다고. 마치 "조우는 푸른 등불아래/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 밤/목매어 부른다/그리운 그 밤을 부르누나 부르누나"라는 이난영의 애절한 노랫소리 같았다.



김동욱_남대문로5가 63-9 Namdaemunno 5(o)-ga 63-9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카메라 셔터 소리가 부드러워지자 사진 속에는 건물들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가 강세황(姜世晃) 초상을 그릴 때처럼 이형사신(以形寫神)과 전신사조(傳神寫照)를 활용한 작업이었다. 건물의 외관만이 아니라 품성(品性)과 지나온 세월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건물 초상사진(肖像寫眞)의 탄생이었다. 그동안 축적하였던 실험의 결과였다. 그의 실험은 이제 임계점에 근접한 것 같다. ● 그런데 초상사진 속 건물들은 도도하지도 않고 근엄하지도 고색창연하지도 않았다. 그냥 수수했다. 모두 푸르스름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치 이청준 소설에 등장하는 매잡이 같다.



김동욱_을지로3가 250-1 Euljiro 3(sam)-ga 250-1_종이에 안료_30×24cm_2018



04.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아야 할 김동욱 작가. ● 오래 전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는 김동욱 작가에게 서울은 각별(各別)한 곳이다. 그 때문에 옛날 서울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 정다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업에서 그의 카메라 앵글 대부분은 수평적이었다. 또한 한밤의 건물들인데도 어둡지가 않다. 불 켜진 창을 하나쯤 가지고 있거나 건물 옆의 가로등이 별처럼 반짝 빛나기도 한다. 사진의 기계적인 재현력은 무정(無情)하지 않다. ●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가치 있는 대상을 찍는 것이 아니라 찍힌 대상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일관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권위주의적인 착한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작업도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상사진 모델로 건물들을 불러내자 그들은 비수(匕首) 같은 질문들을 마구 토해놓았다. 조만간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는 건물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600년 고도(古都)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담론을 폐기하고 파괴적 창조로 달려온 서울은 과연 전통이 있냐고.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 그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셔터만 눌렀다. ● 건물 초상사진들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질문이 정말 우문(愚問)이란 것을. 이제 자신들이 조만간 서울의 전통이 되리라는 것을. 사진은 그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 장두식


* 참고문헌김학량, 「전설 또는 길목-김동욱의 「방겸재」 작업에 대한 단상」, 노암갤러리, 2009류철하, 「강산무진(江山無盡)-공간의 무한과 현실의 점경」, 나무화랑, 2012-2013육명심. 「민중. 삶. 사진」, 『농민: 또 다른 백 년을 기다리며』, 눈빛, 1995이경률, 「미니어처 세상과 시뮬라크르의 향연: 그림엽서」(2006), 『사진에 관하여』, 눈빛, 2010이관훈, 「가설(假設) 풍경 속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사진첩」(2008), 『사진에 관하여』, 눈빛, 2010


김동욱_을지로3가 346-3 Euljiro 3(sam)-ga 346-3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서울, 심야산보(深夜散步) Midnight Balade in Seoul ● 도시에 밤이 오면 낮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분주히 움직이던 자동차의 행렬, 생계를 잇기 위해 바쁘게 오가던 사람도 사라지고 간간이 보이던 취객의 흔들리는 걸음마저 어둠에 묻히면, 한낮에 위용을 자랑하는 신축빌딩 사이에서 남루하게 서있던 오래된 건물이 당당한 자태로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가 어떻게 생기고 바뀌어 왔는지를. ●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 나는 바람에 흩어진 이야기들을 주우려, 거리를 이리저리 목적지 없이 걸었다. 작품 제목 밑의 사족(蛇足)은 방향 없는 나의 걸음만큼이나 흐트러진 생각의 파편이다. ● 작품 제목 「서울, 심야산보(深夜散步)」를 "Midnight Balade in Seoul"로 영역해보았다. 'Balade'는 프랑스어로 '산책(散策)', '산보(散步)' ('산보'는 일본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말로 원래 약학 용어였다. 종유석(鍾乳石), 유황, 흰 석영(石英), 자석영, 적석지(赤石脂) 등 다섯 가지 광물성 약재를 처방한 약을 오석산(五石散)이라 하는데, 이 약은 허약체질 개선에 쓰인다. 그런데, 이 약을 복용하면 금방 효과가 있어 몸이 따뜻해지지만 이 약을 복용해도 몸이 따뜻해지지 않으면 약의 독(獨)이 가득 차 해가 된다. 따라서 몸이 빨리 따뜻해지게 하려고 걸었는데, 이를 '산보'라 한다. 이것이 일상용어가 된 '산보'의 어원이다. 따라서 '산책'이라 써야 한다." 정진한, '일본에서 온 낱말 몇 가지', 말과글 71권 1997년 여름호, 56~57쪽)의 뜻이다. ■ 김동욱



김동욱_을지로2가 101-2 Ⅱ Euljiro 2(e)-ga 101-2 Ⅱ_종이에 안료_24×30cm_2018


Reading: Dongwook KIM's photographic works - Midnight Balade in Seoul01. Photographer Dongwook KIM, who has lived in Seoul for a long time. There is a photographer, Dongwook KIM, who has lived in Seoul for a long time. In 1995, he carefully pressed the shutter for Jeongeup farmers. He capture the present in the picture, but he tried to explore the past through it. Ordinary farmers in the horizontal frame of the panoramic camera were imbued with a Donghak peasant forces 100 years ago, the first 'no' on the Korean Peninsula. It was an attempt to connect the context of history through an eye contact photo, which communicates with the subject matter with the mind(Myong-Shim Yook 1995). He did not photograph only just as men and women but rather as the farmers in front of the background of land. It was the application of Korean landscape painting aesthetics. ● His camera moved to miniature theme parks in Bucheon, Korea, Shenzhen, China, and Shiyowa, Japan. He photographed the world landmark miniature developed as a tourist product. The task of putting a false space that mimics real space into a frame was not to capture the simulacrum. It was an attempt to trace the ideology of the Platonic meaning and to dissect our era of virtual and real complexity. ● He continued to move the camera to Puchon Fantastic Studio and Shanghai Film Studio. The movie set space is another simulacrum and symbolic space that has an extreme historical narrative. If the previous work was titled "Postcard", the work behind it was titled "Old Photo Album". If "Postcard" was the task of tracking the original through virtual representations imitating the representation, "Old Photo Album" was a task to restore the historical narrative by estpblishing relations with the narrative genre of the movie. It was a difficult task to accomplish only by the ability which photography has had to reproduce the reality and the implication. He tried to overcome this difficulty by twisting the camera's identity. It was taken by intentionally unfocused while shooting subjects at a typical point of view. The blurred works broke the reproducibility of the photographs, but they were closer to the original and restored many historical narratives. It was a work that broke the common sense that the past changed every time it was spoken and also the past in the photographs always kept its image (Kyung-Ryul Lee 2006, Kwan-hoon Lee 2008). ● His camera has now penetrated into the world of Gyeomjae Jeong Seon. It was an unusual work to photograph the Hanyang[old Seoul] Mountain and River painted by Gyeomjae Jeongseon. The title was "Endless Nature(Gangsanmoojin)" Ⅰ · Ⅱ. The works in "Gyung-gyo-myung-seung-chup[Picture book of notable sights of Seoul and environs]" or "Inwang Jesaek[Clear shape of Inwang mountain after a heavy rain]" are not the scenery that is visible but the mountain and water which is composed in the heart of Gyeomjae. "Jin Gyeong(眞景)" is not a reality but a true(sur) reality that exists deep in reality. It could be a reckless act to photograph Hanyang drawn by a photographer with a picture. It could be a reckless act for a photographer to take homage work of Gyeomjae's Hanyang painting with a camera. There was also a concern that the differences in details describing the reality of the fantasy versus contemplating the nature and the universe, five senses versus sight, paper and writing brushes and ink stick/literary paintings versus camera/photograph would be difficult to negotiate with each other(Hak-Lyang Kim 2009). However, also, how to connect the temporal distance and spatial transformation of Hanyang and Seoul was the key. Therefore, KIM said, "I wanted to feel and see what 'beauty' Gyeomjae discovered. I also tried to record exactly how changed the present state of our land." However, once again carefully reading "Artist's Note" reveals the desire to cross the threshold of photography aesthetics. The scenery of Seoul, which was discovered through the sight of Gyeomjae, was another landscape draw in black and white reflecting KIM's inner scenery. It was an experiment of how the fragments of reality can be composed of aesthetic reality in the infinity of space and human vision (Chul-Ha Ryu 2012-2013). His work was not discrete and fragmentary, but continuous and progressive. ● And his camera moved away from the sight of Gyeomjae to Seoul of today. It was an inevitable move. ● 02. The building met by chance at night in Seoul where the citizens disappeared After the late meeting, he walked through the dark Sogong-dong street where the citizens disappeared and he found a strange building. He wondered when this building stood on this street and unconsciously pressed the shutter. And when he saw the old building with a photo call, he read the expression that it desperately wanted to tell something. he was embarrassed, but as he listened to it quietly, familiar stories were pouring out. In the story, a chubby child looked up at the Samil building and was surprised and a limpid boy trudged down the streets of a tailor's shop. Just as the Donghak peasant forces had permeated the farmers in Chung-eup, the old Seoul remained in a dingy building. He sensed another desire for photography to overcome mechanical representation and suggestions and symbolic designs. ● 03. The birth of a portrait of a building His camera began to roam the streets of Seoul at night. Eulji-ro - Toegye-ro - Chungmuro - Sogong-dong. In the back alley off the main way, the old buildings that seemed to be timid and drooping were gathering and whispering the past of the Seoul. But the atmosphere was gloomy. ● All the solid things in the world disappeared in the air, and the building was bound to disappear, but the old buildings in Seoul, which produceed destructive creation, weree not guaranteed a comfortable old age. Most of the buildings were destroyed in an instant without a word left. Another building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disappearance. Not a trace was left. It was a vain attempt to talk about tradition. He felt the like of his consciousness. ● As before, he tried to work on the 'eye-to-eye photo'. Pressing the shutter while communicating with a non-human building was no small task. As like picking up the phone number of the enchanting opposite sex, as finding the name and address of the building, investigating the price per 3.3 square meters, and exploring the shops and businesses that were inhabited, the buildings revealed their minds little by little. Although the buildings were slowly aging and shabby in the city of Seoul that had been Hanyang, Hansung, and Gyeongsung, they had been young once and also had a golden age once. It was like a sad song voice by Nan-young Lee "Under a blue dozing light/that night that gone away freshly remind/in a small tearoom/the night that met him/sing in a sorrowful voice/miss that night/sing a song, sing a song…… ● As the sound of the camera shutter became soft, the energy of the buildings began to appear in the pictures. It was the work full used of "Ehyeongsasin(以形寫神[describing spirit by shape])" and "Jeonsinsajo(傳神寫照[delivering the noble spirit by drawing appearance])" as he did when Hwasangwan Myeong-Ki Lee painted the portrait of Se-hwang Kang. Not only the exterior appearance of the building but also the personality and the years passed naturally revealed. It was the birth of a building portrait. It was the result of the experiment that he had accumulated in the meantime. His experiments now seem to approximate critical points. The exterior of the building as well as its character and history were naturally revealed. ● However, the buildings in the portraits were neither lofty nor solemn nor antique. It was just plain simple. But they all created a bluish feeling. It was like a falcon hunter in a novel written by Chung-jun Lee. ● 04. Photographer Dongwook KIM who has to live in Seoul for a long time. Seoul is a special place for Dongwook KIM, who has been living in Seoul for a long time. So, buildings that has the old Seoul scenery are affectionate for him. Most of his camera angles are horizontal in this work. Also, it is not dark in the midnight buildings. It has a lighted window or the street lights next to the building shine like stars. The mechanical reproduction power of photography is not indifferent. ● If you look his works carefully, you can see that he is consistently doing the work of finding value in the photographed object rather than shooting a worthwhile object. He has a non-authoritative good camera. This work is not started with a macro and abstract problem consciousness. However, when he call the buildings into portrait models, they throw up questions such as the knife. The buildings that are destined to disappear in the near future ask "what is the identity of the capital city of the Korean for over 600 years? Does Seoul, which run to destructive creation by discarding the discourse of ongojisin(溫故知新[knowing the new by looking back upon the old]), has indeed a tradition?" These are questions that he has to answer to live in Seoul for a long time. But he only presses the shutter button silently. ● The buildings in the portrait know that their questions are silly questions. Now they will soon become a tradition in Seoul. Photographs have that ability. ■ Dusik Chang

* ReferenceHak-Lyang Kim, "Legend or street corner: Short note on Dongwook KIM's works after Gyeomjae", Noam Gallary, 2009Chul-Ha Ryu, "Endless Nature: The infinity of space and the perspective of reality," Namu Gallery, 2012-2013Myong-Shim Yook, "People, life, photograph" Farmers: Waiting for another 100 years, Nunbit Publishing Co., 1995Kyung-Ryul Lee, "The feast of the simulacrum with the miniature world: Picture Postcards", 2006, on Photography, Nunbit Publishing Co., 2010Kwan-hoon Lee, "A documentary in a hypothetical landscape: Old Photo Album", 2008, on Photography, Nunbit Publishing Co., 2010

When the night comes to the city, the landscape is different from the daytime. When the busy procession of cars and those who have been busy making a living disappear, and the occasional drunken man's faltering steps are became buried in the darkness, the old buildings which were standing depressedly among the new buildings in the middle of the day come and tell me stories with dignity how the city has developed and changed. This winter when it was unusually cold, I walked about the streets aimlessly, trying to pick up stories scattered by the wind. ●The redundant comment under the title of the work is just as distracting a fragment of my thoughts as I walk without direction. ● I translate title of my works in English as "Midnight Balade in Seoul". 'Balade' in French means 'walk' or 'stroll' (The word 'walk[sanbo, 散歩さんぽ]' was originally a pharmacy term in the Japanese Nara era. This medicine is called Oseoksan[五石散, the five mineral medicines powder], which prescribes five mineral minerals such as stalactite, sulfur, white quartz, red quartz, and red bole. This medicine is used to improve the fragility. However, this medicine is effective immediately, so it will warm the body up, but if it doesn't warm the body up, it will harm the poison of the drug. Therefore, patient walked to make himself warm quickly, which is called a 'medicine powder walk[sanbo, 散歩さんぽ]'. This is the origin of 'sanbo(walk)', which has become a common term. Therefore, 'walk' should be written as 'sanchaek[散策]' in Korean.). ■ Dongwook KIM



Vol.20180721a | 김동욱展 / KIMDONGWOOK / 金東旭 / photography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지난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대회로 정부를 규탄했다.






참가자들은 “비정규직 없는 세상, 투쟁으로 쟁취하자”,“최저임금 개악, 투쟁으로 분쇄하자”,

“말로만 노동 존중, 문재인 정권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특히 정부와 여당이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하는데 동의하고,

최근 국회에서 이 법률안이 통과된 것을 집중 규탄했다.






이 집회에 앞서 서울 도심 곳곳에서 사전 집회가 열렸다.

금속노조, 서비스산업연맹, 공무원노조, 공공운수노조 등 민주노총 산하 산별 노조는

각각 시청광장, 청와대 앞, 대한통운 본사, 강남역 삼성 본관 등에서 집회를 열고

오후 3시 무렵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앞으로 집결했다.






'민주노총'은 "울산, 부산, 대전, 대구 등 전국 각 사업장에서 전체 조합원 80만명의 10분의 1인

약 8만여 명이 집회에 참여했다"며 "조합원 이동에 900여대의 버스가 동원됐다"고 했다.






이들은 정부가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6개월 계도 기간을 갖고,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불가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명한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늘려 최저임금을 삭감하고

제도 개악의 칼자루까지 사용자에게 쥐어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많은 집회 참여 노동자 속에 반가운 분도 섞여 있었다.

부산에서 올라 온 비주류사진관의 사진가 정남준씨였다.






본 집회는 이날 오후 5시쯤 마무리하고, 청와대 앞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방면,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방면, 안국역 방면 등으로 행진했으나, 경찰과의 마찰은 없었다.





문재인정부는 눈치 보는 양다리 정치를 즉각 중단하고, 조속히 노동자 삶을 개선하라.



사진,글 / 조문호


























[빈민운동 사진가 최인기씨, 6월 25일 종자동에서]



지난 25일, 빈민운동가이자, 사진가인 최인기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청계천 사진집이 나왔다며, 책을 한 권 가져 온 것이다.
어렵게 만든 사진집이라 사고 싶었으나, 기어이 주겠다는 것이다.

그를 알게 된지는 동자동에 들어 온 이후였으니, 한 이년 가까이 되었다.
노점상 집회나 근로자 집회에 가면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날 때마다 차를 대접하거나 밥을 샀다.
보나마나 돈 안 되는 사진 찍으며 빈민 운동하느라 어려울 것은 뻔한데, 
신세지는 것이 결코 편치는 않았다.
아마 어려운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하는 그의 천성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에 펴낸 청계천 사진집은 사진이기 전에 최인기의 삶 자체였다.
그는 사진을 예술의 사진보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알리며
저항하는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핍박받는 노점상을 대변하며, 그들의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든 것에는 사람이 우선하고 있었다.

원로사진가들이 찍은 오래된 청계천 판자촌 사진들이 지나치며 찍은 사진이라면,
노무라 목사의 청계천기록을 이은 그의 사진은 주민의 한사람으로 온 몸으로 찍었다.
그 책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청계천이 바뀌는 과정 과정에서,
빈민들을 핍박한 내용이 일지처럼 적혀 있었다.
잘못된 도시정책에 저항해온 이들의 사진 역사책이었다.

이명박은 청계천복원공사를 강행하며 가난한 노점상과 철거민을 내 몰았다.
오세훈은 시민들의 추억과 삶의 공간인 동대문운동장을 허물었다.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설 때마다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 밀고 당기는 긴박한 순간순간을 최인기의 카메라는 놓치지 않았다.

난, 최인기를 사진가로서 보다 빈민운동가로서 더 좋아한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빈민들의 열악하고 핍박받는 현실을 기록하며
주민들과 함께 싸워 온 지칠 줄 모르는 그 투지를 좋아한다.

청계천은 최인기가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청계천에 있는 출판사에 다녔고,
어머니는 신 평화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가 살았던 삼일아파트의 옥상과 복도는 그들의 놀이터였다.
도시를 돈으로만 보는 인간들은 빈민들의 삶은 물론
최인기의 유년기 추억마저 송두리째 앗아갔다.
가난한 이들의 삶이 짓밟히며 공동체가 파괴되는 악순환을 지켜본 것이다,

도시 공간의 공공성은 권력 있는 한 두 사람에 의해 구성 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함께 논의되었을 때 성립할 수 있다.
이제 낡은 청계천과 을지로의 골목도 우리 문화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도시가 되어야한다. 화려하고 새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정책입안자들도 가진 자보다 없는 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최인기는 “저는 이 사진 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편하지 않음을 통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합니다”고
작업노트에 적고 있다.


사진집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지만, 지속적인 빈민 기록을 위해 한 권 구입 합시다.



“청계천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펴낸 곳 : 리슨투더시티
270페이지, 가격 35,000원







지난 월요일은 늦잠을 잤다.
간밤에 정선에서 오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로 부터 연락을 받아,
요양원에서 모친 간호하던 정영신씨와 

약속장소인 남대문 ‘벤로갤러리’로 갔다.






평소 버스는 잘 타지 않는데, 그 날 따라 버스를 탔다.
갑자기 소공동에서  “끼이익~‘소리를 내며 버스가 급정거했다.
한 아낙이 급히 버스 앞을 지나치다 생긴 일이었다.
승객들이 놀라기는 했으나, 별탈은 없었다.
한사람이 앞으로 쏠렸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기사가 버스에서 내려 아낙에게 전화번호 달라며 닥달이다.
승객 중에 다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아낙은 기어이 못 주겠다고 버텼다.
‘달라’. ‘못 준다’며 한 참을 실랑이 해대니,
뒤에서 비키라는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기사는 멀찍이 차를 옮겨놓고 다시 달려갔다.
차에 탄 승객들은 한사람 두 사람 내리기 시작했고,
버스에는 정영신씨를 비롯한 네 사람만 남았다.
30분 가까이 지체했으니, 억울해서 그냥 내릴 수가 없었다.






잠시 차에 핸드폰 가지러 온 기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니 눈깔에 승객은 보이지도 않느냐?고 화를 냈다.
그렇게 난리를 쳐도 다시 아낙 쪽으로 달려간다.
기어이 받겠다는 기사나, 못주겠다는 아낙이나 똑 같았다.






더 이상 약속한 분들이 신경쓰여 버스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자기밖에 모를까?
교통불편 신고서까지 챙겨왔으나 찢어 버렸다.
그런 것이 사람들을 더 급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다.






화를 삭이지도 못한채 ‘벤로갤러리’에 갔더니,
‘하늘에서 본 영암’ 전시를 하는 사진가 마동욱씨와

무의도 정중근 촌장, ‘예당국악원’ 조수빈 원장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만 나누고, 식사 대접하겠다는 정중근씨 따라

인근의 '진주냉면'에서 오붓한 오찬의 시간을 가졌다.





전시장으로 돌아 온 조수빈씨는 사진전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정선아리랑’을 그렇게 구성지게 부를 수가 없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애잔했다.
마동욱씨는 만들어 놓은 사진 한 점을 답례로 선물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맛 아니던가.

버스에서 상한 마음, 눈 녹듯 녹아내렸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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