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촌사거리 고기집에서...좌로부터 서인형, 전세미, 황경아, 박권주, 최석태씨



지난 24일 저녁무렵, 정영신씨로 부터 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역촌 사거리에 있는 고기집인데, 그 곳은 1인당 12,900원만 내면 무한정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집이다.

고기 많이 먹는 사람이라면 본전 뽑고도 남는다.

정영신씨가 부탁한 서류를 가져가니, ‘예술인 협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는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비롯하여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하씨와 박권주, 세민씨 등 젊은 분도 세명이나 있었다. 

예술인 협동조합 창설에 따른 회의를 마친 후 마련한 자리 같았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처럼, 술과 고기를 양껏 얻어 먹었다.

정영신씨 집으로 옮겨 와 차 한 잔 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집이 너무 넓어 주인과 장정 세 사람 들어가니 꽉 찼다.

의자까지 부족해 옆에 쪼그려 앉아야 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영신씨 집에서...좌로부터 최석태, 서인형씨


이미 사진시장에 대해서는 정영신씨가 많은 조언을 했겠지만,

술김에 사진판 돌아가는 이야기나 지껄였다. 얻어먹은 술 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사실 ‘예총’에서 만든 ‘한국예술인협동조합’이나 연극인들이 하는 ‘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

‘온누리 국악 예술인 협동조합’ 등 기존 예술인 협동조합도 있으나 이름만 협동조합이지 제 기능을 못한다.

특히 미술이나 사진 등 시각예술 부문에 몸 담은 분들이 만든 협동조합은 아직까지 없는 실정이라

작품 시장의 활성화나 저작권 문제 등 도맡을 일이 한 둘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기구다. 

제일 관건은 많은 예술인들이 함께 동참하는 결집력인데, 작가들에게 도움만 된다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여러 협동조합을 성공시킨 경험을 갖고 있는 서인형씨가 주도하는 일이라 신뢰가 간다.

이미 성공한 다른 나라 경우를 벤치마킹 할 것이란다.


얼마전 회의를 마치고 정영신씨 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좌로부터 서인형, 정영신, 최석태씨


기존의 미술시장은 재력있는 삼성이나 가나 등 몇몇 갤러리에서 시장을 주도해 작품 값을 튀기지만, 사진판은 아직 미미하다.

'한미', '스페이스22'등 재력가들이 운영하는 사진갤러리에서 이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정도다.

내가 볼 때는 이름 있는 몇 몇 작가보다 가난한 작가들의 그림이나 사진에 올인 해야된다.

이미 제벌갤러리의 영향력을 받고 있는 작가들은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미술판은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자문하고 있지만, 사진판은 사진평론가 이광수교수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눈빛출판사' 대표 이규상씨의 협력도 얻어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예술인협동조합의 성공적 정착을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얼마 전 회의를 마치고 정영신씨 방에서 찍은 사진이다,좌로부터 서인형, 최석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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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미술세계’에서 열리는 강레아씨 ‘산에 들다’ 초대전 보러 인사동 갔다.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전시 리뷰 쓰는 일을 자제하겠다고 다짐한지가 5개월 가까이 되었다.

그 중 진천에서 열린 류연복 판화전을 본 것이 유일했다.

그동안 박불똥씨 전시를 비롯하여 꼭 가보아야 할 전시거나 보고 싶은 전시가 숱하게 많았지만,

어디는 가고 어디는 가지 않을 수 없어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보니 마음은 불편해도 몸은 편했다.




그런데, 지난 달 개인전을 준비하던 사진가 강레아씨로 부터 전시서문을 부탁받은 것이다.

원고료 받는 일이라 쓰고 싶어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안 하겠다고 다짐한 일이기도 하지만, 원고료 받아 팔자 고칠 일도 아니 잖은가?

그렇지만, 원고 청탁을 거절한 죄로 전시회가 열리면 꼭 가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지난22일 오후무렵 인사동에 나갔는데, 솔직히 말해 강레아씨 산 사진은 처음 보았다.

20여 년간 산을 탐미해 온 강레아씨의 산에 대한 애착과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좋은 전시였다.

거칠고 우람한 산이 강레아씨의 손길을 거치면서 부드럽고 소담하게 내려앉았다.

몰려다니는 운해나 한지에 의한 프린트 용지의 특성도 작용했지만, 강레아 만의 여성적 감성에서 우러난 것 같았다.



사진을 위해 산에 간 것이 아니라 산이 좋아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북한산이 한 눈에 올려다 보이는 동네에 이주해 산다는 그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카메라에 찍히는 이미지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진에 대한 지식보다 찍고자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한데,

대부분의 아마츄어 사진인들이 카메라 놀이에 급급한 실정이라 강레아씨 사진이 더 돋보였다.




전시는 오는 12월 2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인사동 사거리에 있는 ‘갤러리 미술세계’(02-2278-8388)는 옛 덕원미술관 자리다.

사진, 글 / 조문호



















한정식선생께서 인사동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서초동 자택으로 들어 가신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다.

해마다 신년이면 가까운 분들 인사동에 불러 모아 오찬을 베풀었으나, 올 해는 그 모임도 갖지 못했다.

초여름에 한번 찾아뵌 후로 정영신씨를 통해 간간히 안부나 전해 들었는데, 병세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일 뿐인데, 소심한 성격이 병세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5-6년 전에는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는데, 모두 생각의 병이고 마음의 병이다.

우울증에는 대마가 최고의 명약이라고 권했으나,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해 바뀌기 전에 한 번 찾아 뵈어야 할 것 같아, 지난 19일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자택에 들린 적이 있으나, 갈 때마다 내비에 의존해 잘 몰랐는데,

그 곳이 몇 달 동안 검찰개혁하자며 주말마다 쫒아 다녔던 검창청 옆이었다.

육개월 만에 뵌 선생의 모습은 더 수척하셨고, 사모님은 오히려 좋아진 것 같았다.
외출은 물론 책도 전혀 못 보시고, 사모님 귀가 어두워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잘 때마마 수면제에 의존해야하는 처지가 지겹다고 했다.

식탁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 때가 가장 좋았던 꽃 시절이라고도 했다.

죽는 것도 어렵다며, 생에 대한 미련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여전하셨다.

“검찰청이 선생님 댁 지척에 있는 걸 미쳐 몰랐네요”라고 말했더니, 나더러 ‘집회에 왔냐?“고 물었다.

”당연히 와야지요“라는 나의 대답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자며 화제를 돌리셨다.

그런데, 또 하나 놀란 것은 선생님댁 거실과 연결된 정원이 연립 주택 공용이 아니고 전용 이었다.

연립주택에 그렇게 넓은 정원이 조성된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한 쪽의 큰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선생님께선 “얼마 전만해도 손자들이 저 곳에서 놀았는데,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다”며 세월의 빠름을 안타까워했다.




한정식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어우러져 선생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했지만,

이젠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인다.




선생께서는 재력이나 명성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것이라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말씀하셨다. 

죽고 나서의 명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성 때문에 마지막까지 안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황혼기의 삶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여건은 되었건만,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니 어쩌겠는가?

아들과 며느리가 의사건만, 마음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모양이다.




파출부의 음식솜씨가 입맛에 맞지 않아 점심 한 끼는 늘 외식을 한다고 하셨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며 생선구이 전문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잔 걸음이지만 걷는 데도 지장 없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 정도면 외출이라도 가끔 하시면 저녁에 잠들기가 훨씬 쉬울 것 같건만, 소심한 성격이라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아프다.
내년 봄에는 인사동으로 가까운 지인들 불러 모아 생신 잔치라도 한 번 마련했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한 이를 정직하게 담아 낸 육명심의 '백민'




사진가 육명심(陸明心)선생의 사진집 『백민』이 열화당에서 재출간됐다.

2011년 발행된『백민』사진집에서 사진이 일부 추가 되거나 교체되어, 새로운 판형의 디자인으로 나온 것이다.

윤세영씨의 글 "이 땅의 사람들, 백민으로의 귀환"을 영문으로도 수록했다.


사진가 육명심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마무리할 즈음인 1970년대말 ‘백민(白民)’ 연작을 시작했다.

예술가들과 밀착해 작업하며 그들 역시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고,

자연스레 이 땅의 사람들 중 가장 소박하고 진솔한 민초들을 제대로 기록해야겠다 다짐한 것이다.

이는 훗날 ‘백민’과 함께 삼부작으로 불리는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으로 이어진다.


모두 낮은 곳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지탱하는 기층민들의 얼굴이 담겨 있지만,

‘백민’은 삼베나 모시옷 차림의 촌로, 박수와 무당ㆍ사찰에 기거하는 스님ㆍ아기를 업은 아낙네ㆍ

무뚝뚝하게 앉은 노부부 등  우리 옛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1980년대의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백민’ 시리즈는 수백 년간 이어온 전통적인 농경사회 마지막 모습의 증거가 되는 소중한 기록이다.

사진가 육명심선생의 사진 속 인물 특징은 정면성이다.

카메라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할머니와의 눈 맞춤은

그 후 사진가가 카메라 앞에 선 인물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작업으로 전개된다.

여기에서 정면성은 단순한 눈 맞춤(eye contact)에 그치지 않는 내면과의 소통을 의미하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람객 또는 독자와의 눈 맞춤으로 확장된다.

다른 하나는, 인물을 존재케 하는 현실공간에 중점을 두고 시간과 함께 주위 환경과 동화된 인물을 보여준다.

자신의 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할머니와 고목의 조화는 마치 일체를 이룬 듯 자연스럽다.

또한 ‘백민’ 연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영적이고 신비로운, 무속적이고 토착종교적인 분위기가 이 사진에도 감지된다.

그리고, 이번 책에 새로 추가된 사진들에는 정면성에서 벗어난 사진들이 꽤 많다.

정면성이 깨진 사진을 의도적으로 함께 섞어 놓아, 시선이 어긋난 인물들과도 다층적 교감을 시도한다.

'백민'을 재출간하는 육명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다.

지난날 원시인들이 바위에 암각화를 남기는 심정으로 우리 시대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육명심 사진집 I 백민 I 열화당 I 2019년 10월 20일 I 180쪽 I 정가 9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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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나의 떴다 방 사진전이 지난 19일 오후2시 종로3가

‘도심권50플러스센터’1층 '활짝라운지'에서 활짝 열렸다.




난생처음 듣는 떴다방 사진전이라는 말에 궁금증이 발동했다.
'떴다방'이란 말은 부동산 분양권 전매가 기승을 부리던 1998년 무렵 생겨난 것이 아닌가?
아파트 분양현장에 철새처럼 모여드는 '이동식 중개업소'를 '떴다방'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말 자체가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기는 하지만, 어감이 흥미로웠다. 


 

사진을 판매하기 위해 갑작스러게 전시를 하는 하나의 이벤트로 짐작했으나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오후2시에 들려 사진만 보고 여의도 촛불집회로 갈 작정이었는데,
사진전이 아니라 성유나씨의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프로젝트였다.




행사장에는 성유나씨를 비롯하여 사진가 이정환, 권 홍, 이경희, 이재정,

심보겸, 정명식, 이미리씨와 화가 김구씨도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분이 더 많았다.




그런데, 사진전이 아니라 빔 프로젝트로 성유나씨의 사진을 프레젠테이션하는 자리였다.
그 이전에 젊은 작가가 만든 단편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지도교수인 이정환씨가 작가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성유나씨가 자신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귀가 어두워 절반도 알아듣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젊은이들 이벤트에 끼일 군번은 아닌 것 같았다.
늙은이 하나 때문에 다들 불편해 할 것도 틀림없지만,
예상한 시간보다 많이 걸려 다음 일정에 신경도 쓰였다.




작 년 봄 정선 ‘동강할미꽃’축제에 왔을 때, 사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사력이 2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자기만의 분명한 색깔을 잡아가고 있었다.
하기야! 사진한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 가에 달려있지 않은가?



성유나씨는 주제도 잘 잡았지만, 그에 따른 열성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인간 군상에 푹 빠져 있었다. 앉으나 서나 사진 생각이었다.




아무튼, ‘성유나의 떴다방’ 사진전을 축하하며 더 큰 성과를 기대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 전 봉화장에서 만난 서씨 아지매 이야기다.
통통한 알밤 한 되 박 펼쳐 놓고 쪼그려 앉은 모습이 안 서러워,
“아지매는 사는 게 어떻냐?”고 물어 보았다.

“사는기 다 그렇지 별거 있는기요?”
"별거 아닌 게 힘들게 한다"며 투덜거렸더니, 측은한 눈길로 쳐다본다.

그 무렵, 옆자리에 있던 아낙이 맛보라며 서씨에게 김밥을 건네준다.
“별 생각 없는데...” 하시면서도 한 점 집어 맛있게 드셨다.

돌아서는 귓전으로 들려오는 아지매 말에 인정이 묻어있었다.
“밥이나 묵고 댕기는지 모르겠다”
바로, 낯선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숱한 사람과 부딪히고 살아도 연관이 없으면 아무 관심도 없는 비정한 세상에
낯 선 사람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다.

정이 메말라 기계처럼 사는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타인에 대한 정은 멸종되지 않았다.
시골장터에서나 만날 수 있는 훈훈한 정경이다.

별것 아닌 것이 별것이 된 세상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큰 이미지는 정영신씨가 찍은 서초동 검찰청 촛불집회사진이고.

작은 이미지는 조문호가 찍은 광화문 태극기 집회 사진입니다.

정영신 사진


조 국, 정말 잘 생겼내요. 내가 여자였다면 같이 살고 싶습니다.
웃으려고 하는 소리지만, 조국보다 검찰개혁이 더 급합니다.

조국 문제는 다 밝혀질 것 입니다.



이 문제는 조국 문제에 앞서 유교적 가부장제가 무너진 시대적 현실입니다.
남자들의 주도권이 여자들로 넘어가며, 여자들의 애살에 원칙을 중시하는 집안 체면보다,

내 가족을 잘되게 하려는, 편법도 마다하지 않던 욕심 탓입니다.



솔직히 말해, 자식 앞에 자유로운 사람있으면 한 번 나와 보세요.

열 사람에 한 사람도 나오기도 어렵습니다.

난, 자식을 팽게치고 살았지만, 이제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조국에게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한 번 기회를 주어 봅시다.
제 몸을 촛불처럼 태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제물이 되도록,,,.



내일 여의도에서 가까운 곳에 사시는 분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촛불을 밝히고.
서초동에서 가까운 분들은 중앙지검 앞에서 촛불을 밝힙시다. 느긋하게 즐깁시다.

싸움이건, 놀이 건, 성질 급한 놈이 집니다.




이 건 싸움이 아니고, 문화로 만들어가는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엊그제 광화문 집회에서 처럼, 사이비 목사가 십일조 거두는 돈벌이하고,

여기자 성추행하는 등의 폭력이 난무하는 자리가 있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사람!


정영신 사진

난, '광화문미술행동'이 총 집결하는 서초동에 가서 열심히 찍고 놀께요,

다들, 자기 자리에서 가치를 만들어 냅시다.



여기 올린 작은 사진들은 지난 개천절 날, 

차 끌고 인사동 볼 일보러 가다 청운동 앞에서 길이 막혀, 차 버리고 찍은 사진입니다.

볼 만 합디다. 미국 놈 앞잡이 이승만이가 외쳤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도 나오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하는 쌍팔년도 군가도 나왔습니다.



함께 구경 간 정영신씨는 정보원이라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잡혀 한 시간을 잡혀 있었습니다.

무엇이 정보원으로 보였을까요? 카메라가? 생긴 것이? 다 아닙니다.

단지, 기자 근성에 꼬치 꼬치 캐 물은게 화근입니다. 그들은 약점이 너무 많으니까요.


정영신 사진


폭력 없는 평화로운 정의를 위해, 모두 나가 한 판 놉시다.

빨리 검찰 개혁하고, 다음에는 섞어 빠진 언론들 몰아내야 합니다.

일본 놈 앞잡이나 다름없는, 좃선일보같은 쓰레기들 말입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지난 15일 사진가 정범태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페북에서 접했습니다.
그것도 장례를 다 치루고 나서야 연락이 왔답니다.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 조용히 치루라는 유언을 유족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정범태선생이 누구십니까?
한국 사진계의 마지막 남은 전설 아닙니까?
투철한 기자정신에 잠시도 카메라에서 손을 놓지 않았던 분입니다.
선생님이 기록한 4,19 발포 사진을 비롯한 많은 기록들이 한국사진사의 중요한 자리를 메웠습니다.




스스로를 내 세우기 싫어하는 선생님의 강직한 성품은 잘 알지만,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 현실에 선생님을 추억하며 명복을 빌 수 있는 마지막 자리는 만들어 주셔야지요.




하기야! 몇 년 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도, ‘한미사진미술관’의 회고전도 다 거절하셨지요.
사진인이라면 못해 안달하는 전시들도 사양하셨는데, 어찌 선생님의 고집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도 사진권력에 기웃거리지 않으며 평생을 욕심 없이 사셨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셨네요.




사람이 태어 나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만, 꽃 한 송이,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게 더 가슴 아픕니다.




내년 일주기에는 사진인들이 힘을 모아 제대로 된 유작전과 함께 추모제라도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 잊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십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문호 합장




선생님을 추억하기 위해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있는 사진과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스크랩 / 조선일보 2019,9,18 / 정상혁기자]


[발자취] 4·19, 5·16… 격동의 현장에 그의 카메라가 있었다


보도사진가 정범태씨 별세… 1956년 조선일보 입사, 기자 활동
고대생 피습, 귀성객 압사 사고… 현대史 숱한 특종 사진들 남겨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보도사진가 고(故) 정범태.


1960년 4월 18일 서울 종로 천일백화점 앞에서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가두 시위 중이던 고려대 학생들은 훗날 정치 깡패로 밝혀진 괴한들에게 무참히 두들겨 맞았다. 현장에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가 있었다. 위압적인 깡패들 탓에 다른 내외신 기자들은 쉽사리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찍지 않으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 맞아 죽더라도 찍어야 한다.' 셔터를 누르고 냅다 회사로 달렸다. 다음 날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이 사진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결정적 한 방으로 평가받는다.

보도사진가 정범태(91)씨가 지난 15일 별세했다. 유족 측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3일장을 마친 후 지인 몇 명에게만 소식을 알렸다. 시신은 가톨릭대 의과대학에 기증했고, 추후 4·19 민주묘지에 안치할 예정이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외삼촌이 살고 있던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상선에서 일하며 유학했고, 광복 직후 귀국했다. 당시 외삼촌이 일제 카메라 한 대를 선물로 건넸다. 이것이 인생을 바꿨다. 사진기를 목에 둘러매고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촬영했다. 전쟁통에 피란 가면서 보따리에 제일 먼저 챙긴 것 역시 카메라였다.

6·25전쟁 당시 육군 공병대 사진기록 문관으로 일했고, 1956년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한 그는 이후 40여년간 한국일보·세계일보 등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렌즈에 담아냈다. 1960년 서울역 설 귀성객 압사 사고 등 특종 기자로 유명했으나 1962년 강화도 전등사에서 깡패들이 행패를 부려 관광객이 쫓겨나는 내용의 사진을 보도했다가 국가 위신 손상 등의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복역하는 등의 고초도 겪었다.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①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피습 현장 특종 사진. ②1960년 1월 26일 서울역 압사 사고 특종 사진. ③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


죽은 닭과 산 닭을 나란히 찍어 1959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한 '생사(生死)'가 국내 작가로는 처음 입상하는 등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한 장면으로 긴 여운을 곱씹게 하는 대표적인 사진으로 1961년 5·16 직후 경기고등군법재판소 공판에서 촬영한 '결정적 순간'이 자주 거론된다. 고개 숙인 죄수복 차림의 젊은 여자, 그 앞에 선 두세 살짜리 꼬마가 여자의 손을 잡고 있다. 판사는 여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이 강렬한 흑백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사진살롱 '10걸작' 중 하나로 선정됐다.

1993·1995년 두 차례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한국 전통 춤꾼의 사진과 행적을 정리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2006년엔 '사진인생 50년'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생전에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진을 찍어야 역사와 사회가 바뀐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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