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데, 죽을 날이 다가 온 걸까?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 날 정도로, 식구보다 더 챙긴 내가 요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으며,
그 오래된 인연을 하나하나 끊고 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변화다.

없는 자보다 가진 자가, 못 배운 사람보단 배운 자가,
못난 사람보단 잘난 사람들의 가식과 비인간적인 실체에 서서히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동자동 사람 외는 아무도 만나기 싫어 고장 난 핸드폰마저 일부러 고치지 않고 버틴다.

문제는 동자동에 정착하며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정 많은 동자동 사람들과 비교되어서 일까? 아니면 일종의 패배의식의 발로일까?
항상 마음의 문을 열라 나발 불었지만, 정작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이다.






열흘 전, 동자동 공원과 용성이네 집에서 술 마시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는데,
주머니에 넣어 둔 열쇠가 사라져 버렸다. 동내 나들이라 호주머니가 얕은 옷을 입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쪽방의 자물쇠 고리는 방 안에서 고리가 나와 밖에서는 못을 뽑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쪽방에 별 중요한 물건도 없을 텐데, 다들 문 걸어 잠그는 건 철저하다.

망치도 없지만, 잠든 야밤에 퉁탕거릴 수 없어 고민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염치불구하고 건물 관리자 정선덕씨를 깨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며 쇠 자르는 공구로 단숨에 자물통 고리를 잘라 주었다.
감사~ 감사~를 연발하며 들어 왔으면 잘 것이지, 술 취해 컴퓨터를 열어놓고 페북 질 하느라 날밤을 깠다.
눈을 떠보니 점심때가 지났더라. ‘식도락’도 끝난 시간이라 컵라면으로 속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외출을 하려니 자물통이 필요했다.
후암시장 철물점으로 급히 갔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 앞에서 김만귀, 문규도씨가 밑반찬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 밑반찬이라도 챙겨가야 하지만, 미처 신청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던 얻어먹으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만, 쪽방상담소에는 왠지 걸음이 가지질 않는다.

열어 놓은 방이 걱정되어 자물 통 하나 사서 바삐 걸어오니, 멀리서 이재화씨가 반갑다며 손을 흔들지만,
손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 했다. 방문을 걸어 잠거야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것도 잠재적인 피해의식이리라.





쪽방은 겨울보다 여름 지내기가 더 힘들다.
방이 좁아 통풍이 잘 안되니, 방문을 열어놓으면 훨씬 나을 텐데, 다들 문을 닫고 산다.
아무런 비밀도 없지만, 독거들의 공통된 심리다.

그런 폐쇄되고 고립된 습관에 의한 것인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불신인지 모르겠으나,
방문 닫는 것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 그것이 더 걱정이다.
깊어가는 불신의 고리를 끊고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평생을 사람 사람하며 인본주의를 노래불렀는데,

더 이상 그런 말 할 자격도 사진 찍을 자격도 없다.
불신의 병이라면 빨리 치료 받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광부로 살았던 아버지의 흔적을 20여 년 간 기록해 온 사진가 박병문씨의 ‘선탄부’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에는 지하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가아니라, 늘 주인공에 가려왔던 ‘선탄부’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인명사고로 부정 탄다며, 여성을 금기시했던 탄광이었지만, 

남편 잃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탄을 고르는 ‘선탄부’였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들은 무겁게 가라 앉아 있었다.
입을 가린 분진 마스크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졌고,

그들만의 검은 공간은 마치 지옥도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침울하게 했다.

꿀맛의 휴식시간을 즐기며 잠자거나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서부터

벨트 따라 굴러가는 탄을 고르는 손길이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는 등,

삶의 진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진들이 오래된 흑백영화 돌아가듯 전시장에 펼쳐져 있었다.






그 중 분진마스크를 쓴 채 정면으로 바라 본 선탄부의 강한 눈빛이 시선을 묶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사는 게 이런 것이야. 집에 가면 자식들이 기다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메라로 그녀의 얼굴을 잘라내었다.


아마 힘든 순간순간마다 아른거리는 자식들 생각에 모든 것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역사는 어머니의 역사다.

표 나지 않는 집안일을 다 안으시며, 묵묵히 버텨 온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이 가능했을까.

그 숭고한 진리를 선탄부의 눈길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난, 장막에 가려진 삶이나 소외된 삶의 기록이 다큐멘터리사진의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생각한다.

박병문의 사진은 아버지의 흔적에서 비롯되어 다큐멘터리 사진 최고의 덕목을 건져 올린 셈이다.






지난 20일 정오 무렵 들렸는데, 전시장에는 사진가 박병문씨와 아내 손정애씨가 손님을 맞았고,

사무실에는 김난진 관장이 일하고 있었다. 마침 점심때라 밥 먹으러가자는데 좀 난감했다.

집에서 빵을 먹고 나왔기 때문이다. 김관장이 ‘송죽 죽집‘을 소개해 이야기나 들을까하고 따라 나섰다.






박병문씨 말로는 어제 원로 사진가 윤주영선생께서 오셨는데,

사진을 둘러보다, 선탄부들이 사진 보는 사진을 가리키며, 그 사진은 선생께서 찍은 사진이라 말씀하셨단다.

아마 박병문씨가 아버지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을 무렵, 윤주영 선생께서도 다녀가셨던 모양이었다.

죽 집에 가서는 전복죽을 시켜주었다. 그것도 짜장면 세 그릇 값에 해당하는 죽을...
너무 황송해 “이 보약거튼 죽 묵고 거시기 근들거리마 우짜지 예” 그랬더니,

손여사의 눈빛은 “그건 니 사정이야”하는 것 같았다.


이 전시는 28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리고,

'눈빛출판사'에서 박병문 네 번째 사진집 선탄부가 나왔다.



글 / 조문호






















동자동 사랑방’은 주민이 주인인 아주 민주적인 협력체다. 여기는 갑 질하는 이도 없고, 완장부대도 없다.

서로 돕는 자치단체로 주민들과 소통하며 정 나누는 행복한 보금자리다.
이 야박한 세상에 정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한 끼 천원으로 식사 할 수 있는 ‘식도락’과 책을 나누어보는 도서실을 운영하며,

어려운 분들의 선반을 만들어 주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때로는 잘 못 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연대투쟁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연고자 없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사랑방 식구들이 상주가 되어 장례까지 치러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을 길들이는 무차별한 지원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자립을 돕는데 있다.

그리고 ‘동자동 사랑방‘에서는 매년 어버이날과 추석을 맞아 주민들을 위한 행사를 마련한다.

지난 5월8일의 어버이날에도 어르신들에게 꽃을 달아드리며,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잔치를 열었다.

오전10시부터 새꿈어린이공원’에서 열린 이 날 잔치에는 주민 3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잔치 비용도 관이나 단체에서 후원 받은 것이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하였다.

필요한 예산이 250만원이었는데, 229명의 주민들이 낸 모금액이 2,513,230원에 달해, 신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 협력한 애착의 결과였지만, 사랑방 식구들이 하나같이 손발을 걷어 부쳤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쪽방주민은 물론 더 배고픈 노숙인까지 대접하는 고마운 자리가 되었다.

이 날 잔치에 곁들여 그동안 찍은 사진을 돌려드리기 위한 ‘동자동 사람들’ 빨래줄 사진 나눔 전도 가졌다.

다 뽑지는 못했으나, 그 중에서 135장을 골라 빨래 줄에 걸어 서로 돌려 본 후 잔치가 끝난 후 가져가게 했다,

누락된 사진과 다시 찍는 사진들은 올 추석잔치에서 돌려드리기로 하였으나, 장수사진 촬영에 주력할 생각이다.

이번 어버이 날 잔치에는 사랑방 식구들이 아침8시부터 몰려 나와 각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침식사를 드시지 못한 분도 많았지만, 점심마저도 주민들 챙기느라 못 먹은 채 다들 정성을 다했다.

음식이 소진되어 주민들이 떠나갈 무렵에는 쓰레기 치우고 주변 정리하느라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다들 집기들을 옮겨가고 나니, 그 때 사 시장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취재하러 왔던 정영신씨 따라가 비빔밥 한 그릇 얻어 먹었는데, ‘식도락’ 골목에 사랑방식구들이 몰려 있었다.

“식사하지 않고 어디 갔다 왔냐?”며 중국집 ‘태향’으로 안내했다.

김호태회장을 비롯한 여러 주민들이 식사를 끝내고 소주 한 잔 나누며 뒷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자동사랑방’ 사무실 앞에서는 강동근, 김정길, 김정호, 강병국, 임수만씨 등 여러 명이 설거지하느라 분주했다.

이날 뒷마무리하며 끝까지 남은 분으로는 우건일조합장을 비롯하여 박정아, 선동수, 허미라, 김창헌, 차재설, 박희봉,

박용서, 조두선, 전인중, 한정민, 최순규씨 등 많은 분들이 수고해 주셨다.


'동자동 사랑방' 화이팅!



사진,글 / 조문호


































지난 4월 25일은 동자동 쪽방주민을 위한 2017년 상반기 결핵검진이 있은 날이다.

‘서울역쪽방상담소’ 사무실 앞에서 실시한 결핵검진은 시간을 정하지 않고 하루 종일 검진해, 편한 시간에 받을 수 있었다.

‘대한결핵협회’에서 나온 검사원 외에도 ‘서울역쪽방상담소’ 정수현 소장과 전 직원들이 나와 검진을 도왔다.

나도 검진을 받아야 했다. 여지 것 결핵검진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검진을 모르는 게 약이라며 기피해 왔으나,

이젠 검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식생활 등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 남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액스레이 촬영과 객담 검사를 준비하니, 일을 돕던 김만귀, 문규도씨가 라면10개와 우유 한 팩을 선물로 주었다.

결핵검진 봉사현장을 주민들에게 알리려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뒤에서 사진 찍지 말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나오던 심경섭씨였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하는 회의나 행사는 항상 취재에 제동을 걸어 왔던 사람이다.

상황 파악도 않은채, 무턱대고 초상권침해를 내 세운다.

찍어도 친분 있는 분들 위주로 촬영하고, 당사자가 싫어하면 그 자리에서 삭제해 자기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공공의 행사는 취재하여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무슨 권한으로 주민들의 알 권리인 취재를 방해하는지, 소장이 눈치를 주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전형적인 완장부대의 월권행위였다.


쪽방상담소의 특별한 직책도 없을텐데, 먹고 살기위해 하는 짓일까?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통에 파생된 완장부대는 전형적인 적폐청산 대상이다.

권력에 빌붙어 국민들을 괴롭혀 온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자기가 행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구차하게 시비하기 싫어 물러났다.

다음에 만나 조용히 설득해 볼 작정이지만,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대표선출이 있는 오는 4일의 주민자치회의에는 녹음기도 휴대할 작정이다.

주민들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해 얼굴 노출되기를 싫어하는 분은 피해서 촬영할 것이다.

더 이상 참석하지 못하는 다수 주민들의 알 권리를 방해하지마라.

사진, 글 / 조문호















모처럼 시간 내어 정선 만지산으로 떠났다.
농사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돌아올 작정이었으니, 마치 휴가 떠나는 기분이었다.
귤암리로 접어더니, 잔잔한 동강의 물결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으나,
텃밭의 붉은 복사꽃이 그만 들뜨게 만들었다.





장모님이 좋아하는 살구나무를 몇 년 전 심었는데, 살구가 아니고 복숭아였다.
묘목장사가 속였는지, 얼치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복숭도 먹지 못하는 탱자 같은 게 열렸다.

그러나 꽃의 미색 하나는 천하의 양귀비가 따르지 못할 정도로 귀가 막혔다.
얼마나 강렬한 정염을 토하는지,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만약 그 꽃이 여인네였다면, 사내들 상사병 여럿 났을 것이다.
비록 열매는 맛보지 못하지만, 봄마다 나를 들뜨게 하는 꽃 중에 꽃이다.






올해는 너무 늦어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린 듯 시들지 않았다.
또 하나 기다리다 시들어가는 꽃은 조팝꽃이었다.
심을 때는 어떤 꽃인지도 모르고 이름이 좋아 심었는데, 이 꽃도 한 미색하는 꽃이다.
해 마다 윗만지골 최종대씨가 씨를 받아 갔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마음 태운 꽃이기도 하다. 


지난달 몽우리 졌던 목련은 할머니 살결 같은 꽃잎만 흩뿌려 놓았고,
벚꽃도 진달래도 다 쓸쓸하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꽃 타령에 날 셀 일이 아니다.
옥수수 심을 밭떼기 파 뒤집을 일 생각하니 아득했다.
옛날엔 소가 쟁기 끌어 뒤집었고, 요즘엔 대개가 포크레인으로 뒤집는데,
늙은이가 곡갱이로 파 뒤집어야 했으니, 그 꼴이야 보나 마다다.
한 고랑도 못 파고 헉헉거리며 퍼져 않아야 했다.


농사지어 돈 벌기는 커녕, 옥수수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지만,
땅을 놀려서는 안 된다는 농부의 마음으로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중노동이었지만,
모처럼 쪽방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기에 휴가로 치부한 것이다.






날씨조차 가물어 애를 태워야 했다.
한 달 전에 뿌려놓은 씨앗은 이제 겨우 움을 튀우고, 부추와 잔파는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물 퍼 나르느라 똥줄 타게 오르내려야 했는데, 지하수라도 있으니 가능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슬피 우는 소쩍새 소리에 넋 놓고 쉬기도 했으나,
언제부터인가 소쩍새도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뿌리는 농약 냄새가 싫어 떠났는지, 내가 싫어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은 그 울음이 그리워진다.

땅 파고 물주며 파종하는 일만이 아니라,
고사리도 꺾어야 하고 산에 돌아다니며 두릅도 따야 했다.
쌉쓰름한 두릅 안주로 소주 한 잔하는 맛도 일품이지만,
두릅 좋아하는 정영신씨가 신신당부한터라 각별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 쓸쓸히 지내시는 이명동선생께 문안인사도 드려야 하고,
동자동 사랑방 식구들도 맛보이려면 많이 따야 했다,


높은 가지 꼭대기에 핀 순이라 따기도 만만치 않지만,
자칫하면 가시에 사정없이 찔리기도 한다.
결국은 량이 모자라 최종대씨가 따 놓은 두릅까지 얻어 와야 했다.






그러나 만지산에 어둠이 몰려오면 한결 여유로워진다.
낮에는 땀을 흘렸으나, 밤이 되면 추워 군불을 지펴야 한다.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드는 맛도 괜찮다.
고상한 명상에 빠져드는 것보다, 천박한 공상이 더 재밋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처녀귀신이 느닷없이 나타나 수작 부리는 따위의...

일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었지만,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목구멍에 도통 넘어가질 않았다.
올 때 사온 일회용 곰탕을 끓였는데, 김치가 없으니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다.

 
동자동처럼 빵으로 해결할 생각도 했으나, 힘쓰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밑반찬도 없이 카레나 짜장 등 인스턴트 식품을 골고루 사왔는데,
끼니 때마다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산소 갈 때 가져가는,
한 잔 밖에 나오지 않는 샘플용 소주 두병을 꺼내와 곰탕을 안주로 먹어야 했다.






서울생활이 디지털 삶이라면, 만지산은 아날로그 삶이다.
인터넷도 연결 되지 않지만, 핸드폰까지 꺼 버렸으니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다.


돌아오며 두릅 얻으러 찿아 간 최종대씨 내외를 만난 것 외에는
몇 일 동안 사람 한사람 보지 못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사진 찍을 일도 없지만,
습관적으로 일기장에 보탤 동강풍경과 사물사진만 몇 장 찍었다.


마치 무인도에 귀양 온 듯, 인적 없는 산중이지만,
어쩌면 저승이나 천국이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모든 근심 걱정을 접어버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지난 가을에 동자동으로 왔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사진이었다.
진솔한 사진을 담고 싶은 성취욕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 틀고 있어,
그 욕심까지 과감하게 버리기로 작정했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려 마지막 황혼을 즐기다, 조용히 돌아가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8월 6일까지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려


“내 사진은 고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말처럼 사진가 한정식 선생의 ‘고요’는 그가 추구하는 사진 작업의 지향점이자 존재의 모든 것이다.

사물의 가려진 부분을 읽어내며, 사물 안의 본질을 찾아 시(詩)를 쓰는 과정이 그가 추구하는 사진작업이다.




▲ 기자간담회를 마치고 전시실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사진가 한정식 선생



그는 사물이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기다리다, 소통이 빚어내는 언어를 통해 부처를 만난다.

그는 “내 모든 마음을 비우면 사물의 본질이 명료하게 보인다.


시를 통해 사진이라는 생경한 분야를 개척하다보니 나 자신도 모르게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이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사물이 가진 미학을 추구해오며, 사물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그러다보니 완전한 무(無)의 경지에 달해, 그 안에서 부처를 만나게 된 것이다.



▲ 나무,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어느 때가 사진을 찍는 ‘결정적인 순간’이냐는 물음에는 “사물과 작가 내면이 마주치며 존재의 리듬이 들리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사진이 시간과 빛의 예술임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그에게는 선(禪)이란 또 한 가지가 더 존재한다.

빛과 사물에 더해 선이 만들어내는 생경한 ‘시각적 의미’를 들려주는 작가의 글을 한번 읽어보라.



▲ 나무,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언어만이 아니라 어떠한 매체로도 표현 불가능한 시각적 체험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빛의 세계,

카메라와 사물이 빚어내는 시각적 ‘비가시체험(non-dejavue)’이라 할 일종의 육감적 체험을 뜻한다.

소위 ‘현대사진’으로의 길을 여기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내목표의 하나로, ‘시각적 의미’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 발, 1980년대(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 -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장순강 큐레이터는 “한정식은 사진을 통한 추상이라는, 한국사진에서는 짧은 실험에 그친 영역을

40여년에 걸쳐 추구해왔고, 이는 한국사진의 다양성을 위한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주변을 제외한 사물 본래의 모습만 담아내,

마치 물이 융합하는 것처럼 무취무색으로 존재를 드러내며 보는 이에게 묵시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적막은 생성과 소멸을 벗어나, 어떤 언어로도 이룰 수 없는 무(無)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 발, 1980년대(2018),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이것은 은유도 직유도 아니다. 사물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실을 벗어난 궁극의 경지였다.

사르트르가 말한 ‘인생은 B와 D사이에 있다’는 명제처럼, 그 사이에는 사진의 알몸만이 오롯이 드러나 예술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서울대 사범대국어과를 졸업한 문학도였다.

청년시절엔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힐 만큼 시인의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봤기에, 사진도 마음이 사물에 닿는 순간 시(詩)를 쓰듯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다.



▲ 강원도 홍천, 2012(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그의 초창기 사진으로 ‘북촌’ 같은 특정 지역을 기록한 작업도 있었지만, 점점 나무와 사람의 발 등 서정적인 피사체를 대상으로 형상화 해왔다. 그 주변의 풍경과 교감하면서 사물의 본래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형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의 예로 나무의 결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기도 하고, 발의 부분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인체를 느끼게도 한다.

그처럼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모습은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에 자유롭게 접근하기에 가능했다.



▲ 경기도 안성, 1985(2017), 젤라틴 실버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작가는 영암월출산 도갑사에서 찍은 사진을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사진을 찍게 된 것은 우연한 인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살이 그 방으로 안내했지만, 어쩌면 부처가 그 빈방으로 인도했을 것이라 했다.


당시 기와불사를 하던 도갑사에서 기와 한 개당 천원의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머니에 만원권 지폐뿐이라 거슬러 주겠거니 하며 건네줬는데,

보살이 활짝 웃으며 “웬 시주를 이렇게 많이 주세요?” 라며 웃어넘겨, 차마 거슬러 달라는 소리를 못해 물러났다고 한다.

절 경내를 돌아 본 후 일주문을 나서다 기와 불사를 했던 보살을 다시 만난 것이다.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공양이라도 하시라며 안내한 곳이 그 방이었다고 한다.



▲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 1986(2017), 디지털 프린트


빈방에는 밥상으로 쓰는 탁자 하나가 그를 기다리듯 반겼고, 천장에서 내려오는 전등불 하나가 밝혀 주는 소박하고 정갈한 방이었는데,

그 방으로 들어 간 순간이 바로 부처와 만나는 찰나였다.

그 방에 부처가 앉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 경기 가평, 2001(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전국립현대미술관)



사진도 하나의 말이라는 작가는 월출산 도갑사 빈방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사물과 만나, 사물의 계시를 기다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이 바로 ‘결정적 순간’이라는 작가는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라고도 했다.


전시장에는 사물의 형태가 지니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한 초창기 사진이었던 ‘나무’와 ‘발’ 그리고 ‘풍경’이

차례대로 전시되어 평생 화두로 잡고 있는 ‘고요’에 의미를 더해 주었다.



▲ 충청북도 단양, 1998(2017), 디지털 프린트 (사진제공-과천국립현대미술관)


추측컨대, 작가의 전생은 시인도 사진가도 아닌 스님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러한 작가의 불심이 ‘고요’의 중요한 요체로 작용되었으리라.

말 걸어오는 생명체인 무(無)를 통해 그만의 부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한정식선생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 아카이브에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한정식의‘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적과

서울을 찍은‘북촌’등 그동안 발행된 선생의 사진집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두 번째 사진 전시로 추진된 한국 추상 사진의 선구자 한정식선생의

전시는 오는 8월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198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보여주는 작품 99점이 전시되어 작가의 사진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www.mmc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02-2188-6000)


[서울문화투데이 / 정영신기자]





(사진집 / 또 하나의 경계 / 눈빛출판사 / 40,000원)



엄상빈씨는 30 여 년 동안 분단을 상징하는 동해안의 철조망을 지켜보며, 분단의 한을 삭여 온 사진가다.

그 민족을 아픔을 조망한 “또 하나의 경계”전이 오는 14일부터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전시된다.

철조망을 잡은 주름진 노인 사진이나, 철조망에 걸린 죽은 새로 분단의 한을 표현한 다소 인위적인 사진들이 더러 발표되기도 했으나,

그런 사진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진가가 애 끓이며 삭여 온 세월의 무게에 감히 얼굴 내밀 수 없다.

그가 붙들고 있는 분단의 상처에 대한 끈은 ‘아바이 마을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엄상빈씨의 대표적 작업으로 꼽힌다.

철조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자 집 담장 위에 쳐놓은 폭압적인 풍경들이다.
그 밑에다 유리조각들을 박아 두었는데, 정말 흉물스러웠다.

도둑 못 들게 하는 짓을 탓할 수는 없으나 조세현 같은 도둑이 그런 철조망 있다고 못 들어가겠는가?

엄상빈씨가 보여주는 동해안에 쳐 놓는 철조망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대 뒤떨어 진 잔재물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자체가 슬픈 것이다.

처음엔 동물의 침입을 막느라 철조망을 치고, 동물을 가두어 키우느라 쓴 철조망이 이젠 사람을 막는 분단의 상징물로 남게 된 것이다.

이게 우리민족의 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엄상빈씨는 20여년 넘게 지켜 본 오래된 사우다.
떠벌리는 사진가들처럼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다.

대개 그 나이가 되면 손자 재롱에나 파묻혀 사진은 뒷전 일 텐데, 미쳐도 제대로 미친 사람이다.

알고 미치는 것과 모르고 미치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찍는 것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기 까지 그의 치밀함은 알아 주어야한다.

그것도 편하게 프린트하지 않고 암실에서 한 장 한 장 구워내는 프로 근성까지 보여 준 것이다.

오래된 이미지를 확대기에 걸어놓고 보며 당시의 회억에 빠지거나,

약물 속에서 서서히 드러내는 맛을 오래 작업한 사진가들은 대개 알 것이다.






몇 일 전 엄상빈씨가 동자동을 방문했다.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사진인지 몰랐는데, 새로 출간된 사진집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여지 것 ‘아바이마을사람들’, ‘학교이야기’, ‘들풀 같은 사람들’, ‘창신동 이야기’처럼 사람 중심이 되는 사진은 보아 왔지만,

해안을 바라 본 서정성 있는 풍경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개 풍경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끝나는 것이 많은 데, 엄상빈씨의 풍경은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말하는 사진보다 묵비권으로 일관하는 사진이 더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좋아하다 넘기는 사진과 여운에 끌려 다시 돌아보는 차이다.

작품의 내용 뿐 아니라 인쇄나 편집도 나무랄 곳 없는 훌륭한 사진집이었다.
전시된 오리지널 프린트의 맛이 좋은 거야 말할 필요 없겠으나, 집중적으로 감상하기에는 사진집이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한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점에다, 두 작품을 비교 분석하는데도 용이하다.

그의 부지런함 또한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여지 것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전시 열림식을 어김없이 챙기고 다녔다.

물론 전시를 본다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려면 조용한 시간에 봐야지

열림식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 감상에 제대로 빠져들 수 없다.

그런대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사진가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도 한동안 폐북을 통해 알게 된 전시에 쫓아다니며 기념사진도 찍어주고 축하주도 마셔왔으나,

폐북 중독증을 알고부터는 일을 줄이려 전시오프닝에 가급적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꼭 볼만한 전시는 조용한 시간에 보거나 사진집 구해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엄상빈씨의 한 맺힌 사진은 슬펐다.
바다를 바라보는 주름진 아낙의 깊은 눈길에 시름이 가득했다. 철조망 너머 아득한 바다에는 보이지 않는 한이 떠돌았다.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한이 되었는지, 구천을 떠도는 실향민의 넋인지 모르지만 아련히 번져 있었다.

마치 자신만 아는 진실을 지키려는 듯 침묵으로 이념의 갈등에 저항하고 있었다.

바람이나 파도 같은 자연의 소리는 애틋함과 슬픔을 노래했다.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라는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박봉우시인의 ‘나비와 철조망’이란 시 구절이 사진에 너울거린다.

5월2일까지 열리는 엄상빈의 “또 하나의 경계”전은 흑백의 진수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사진전으로 꼭 한번 볼만하다.

흔하지 않은 은염 흑백사진 40여점을 비롯해, 최근 기록한 컬러사진 10여점에서는 시대변화에 따른 또 다른 이질감을 맛 볼 수 있다.



글 / 조문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술작가 시리즈인 한정식선생의 ‘고요’전이 오는 4월14일부터 8월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에서 열린다.




한정식선생은 리얼리즘사진이 주를 이루던 1960년대부터 사진 자체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사진의 형식주의’를 수용하여 한국 예술사진의 미학적 범주를 확장시켜 왔다.

한국이 지닌 고유의 미와 동양철학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한정식선생의 반세기에 가까운 작품세계를 한국현대사진의 발전과 더불어 살펴보고

한국사진이 가지는 고유의 사진미학에 대해 탐구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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