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서 지내는 날은 유독 밤이 한가롭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없으니, 볼거라고는 책 밖에 없다.
뭘 볼까 살피다, 성남훈씨의 ‘소록도’사진집이 눈에 박힌 것이다.




 


그 사진을 처음 본 것은, 20여년 전 ‘삼성카메라’에서 일할 때였다.
‘삼성포토갤러리’에서 열린 성남훈씨 ‘소록도’ 전시를 보며 감흥을 받은 것이다.
그 좋았던 기억이 사진집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들었다.






성남훈씨의 ‘소록도’ 사진은 볼수록 정감이 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사진이다
한센병 환자들의 가슴 아픈 삶의 모습이 세월의 두께에 숙성되어
그 당시 받은 감흥보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소외되고 고통 받은 이들의 아픔이, 큰 사랑으로 빤짝였다.





성남훈씨가 보여준, 당시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거나,

혹은 숨기려 했거나, 아무도 모른 척 했거나, 아니면 관심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폐해에 의한 가난과 기아, 병자 등 약자나 소외계층의 삶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우습게도 예술이란 것이,  아픔의 고통이 클수록 사람들은 더 감동하고 예술성을 높게 산다.






일세기가 지난, 기나 긴 역사의 소록도 애환은 보는 이의 가슴에 사무친다.
소록도를 기록한 사진들이 더러 있지만, 성남훈씨 사진을 아무도 따를 수가 없다.
그는 잘 못 인식되었던 다큐멘터리사진의 실체를 온 몸으로 보여 준 사진가다.





한센병환자들이 머무는 '소록도'는  전라도 고흥군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다.

1910년 선교사들이 세운 ‘시립 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어

1916년 주민들의 민원에 의해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 개원되었다.

'소록도'는 아픔의 섬이었고, 치유의 섬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 체재하다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소록도라고 한다.
어느 누가? 그 곳에 들어 가 사진 찍을 생각을 할 수 있으랴!
깊은 상처를 보여주기 꺼려하는 그들을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가의 진정성을 느끼고, 교감을 이루기까지의 노력은 보나마나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제일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지만,
사진보다 인간적으로 그들의 삶에 다가갔다는 점을 높이 산다.
그 앞에 작업한 루마니아 집시 생활상에 이어 인간애를 다룬 두번째 작업이다.






삼 년동안 두 달 넘게, 그곳에 생활하며 이루어 낸 역작들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그의 사진은 사회비판이나 캠페인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서정성이 짙게 깔려 있다.
큰 목소리보다, 잔잔한 여운이 깊고 오래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남훈씨의 촬영기록에 적힌 마지막 글은 자기 밖에 모르는 오늘의 현실을 반성케 한다.


“소록도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도 속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의 평안을 비는 시간이 더 많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조심스럽게 등 도닥여주는 행동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소록도'가 한센병 걸린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그곳에도 우리네와 똑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 없이 보여준다.



글 / 조문호











사진가 양재문씨로 부터 저녁식사라도 한 번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16일 오후 여섯시 무렵, 약속장소인 충무로로 갔더니, 정영신씨도 나와 있었다.

양재문씨는 30년 지기인 오래된 사우지만, 그동안 만날 기회가 통 없었다.

정선 살 때는 사진판과 거리를 두어 그랬지만, 그 뒤는 장터 따라 다니느라 연락이 끊긴 것이다.

한참 뒤에 인터넷에 드나들며 서로의 근황을 알게 되었고, 몇 년 전 ‘사진예술’ 행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얼굴 좀 보고 삽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80년도 중반 ‘월간사진’에서 일할 무렵 처음 만나 ‘한국사협’, ‘삼성포토스페이스’에 이르기 까지 함께한 세월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작년 2월 경, 모처럼 그의 개인전에 가 볼 기회가 생겼다.

‘비천몽’이란 제목의 전시였는데, 육감이 동하는 몽환적인 춤사위가 마치 한 폭의 수묵채색화처럼 아름다웠다.

곧 바로 초창기 그가 발표했던 ‘풀빛여행’이 오버랩 되며,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각인시킨 것이다.

 





그 뒤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었던, 나의 ‘사람이다’ 전시에도 한 번 왔었다.

찾아 준 것만도 고마운데, ‘청량리 588’사진 한 점을 사 주는 아량까지 베풀어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진가들 사는 게 보나 마나인데, 남의 사진을 사준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 씀에 비해, 무관심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가 강남에서 충무로로 작업실을 옮긴지가 육년 째라지만, 그의 작업실이 충무로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만나 그의 작업실과 가까운 ‘구이구이’식당에서 전어구이로 술 한 잔 나누며 모처럼 회포를 풀었다.






식당에서 일어나, 남산이 더 가까워 보이는 그의 작업실에도 가 보았다.

오피스텔처럼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아파트처럼 널찍한 공간이라 작업실로 안성마춤이었다.

혼자 살지만, 홀애비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아늑한 공간으로 꾸며놓았더라.

한 쪽에는 서재가 있었고, 한 쪽은 앱션 프린트기와 불 꺼진 조명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공관 앰프에서 흘러 나오는 은은한 음악에다, 그가 즐기는 ‘칼바도스’란 양주도 죽였다.

처음 마셔보았지만, 묵직하게 느껴지는 맛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더구나 와인을 끓여 회석시켜 마시기도 했는데, 칼바도스‘에 대한 애호가로 보였다.







그런데, ‘Calvados in Paris’란 제목의 사진집을 한 권 내놓았다.
얼마나 ‘칼바도스‘란 술을 좋아했으면 사진집에 술 이름이 들어갔나 싶었지만, 사진집은 술에 대한 기억으로 보았던 파리였다.

처음 발표한 ’풀빛 여행‘과 요즘 작업은 보았지만, 중간 작업은 전혀 보지 못했는데, 다른 작품까지 궁금하게 만든 사진집이었다.

아마 파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마셨던 ’칼바도스‘가 그를 파리로 이끌었던 것 같았다.

그 환상의 시간여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여행에 전이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했다.






’칼바도스‘를 마시며 생각했던 파리에 대한 기억들은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함과 낯설음이 교차하는 묘한 느낌을 주었다,

술을 마시며 바라 본 파리라 때로는 화각이 비틀어지거나 왜곡되기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기억했던 잠상이 분명했다.

사진이 좋았지만, 논리가 짧은 탓에 사진집에 서문을 쓴 이경률씨의 마지막 글을 옮겨본다.






“불 켜진 에펠탑 끝 가장자리에 연이어 나타나는 지난 여름날의 파리 여행 그리고 그 여행 한 가운데 연속으로 겹쳐 나타나는 누군가의 얼굴...

결국 작가의 칼바도스는 장면을 보는 응시자의 또 다른 칼바도스로 전이되어 프루스트 소설의 마들렌 과자, 문 열리는 소리, 덜컹거리는 마차와 같이  기억의 자극-신호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호로부터 드러나는 기억의 단편들은 그때 심연에 부유하는 위대한 카이로스의 세상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이 친구 사진만 잘 찍는 줄 알았는데, 소리도 잘 했다.
즉석에서 '사철가'와 '흥타령'을 불렀는데, 소리의 기교보다 음색이 타고 났더라.

속에서 터져 나오는 전형적인 남도소리꾼의 걸걸한 애간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산 저 산 꽃이 피니 / 분명코 봄이로구나 / 봄은 찾아왔건마는 / 세상사 쓸쓸허드라 /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

오 날 백발 한심허구나 / 내 청춘도 날 버리고 /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부질없는 세상을 탓하며 늙어가는 우리네 신세타령이라 더 마음이 동했다.






소리가 끝나고, 나의 동자동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갑자기 드론으로 동자동을 부감 촬영해보라는 말을 꺼냈다. 역시 사진선생을 오래 하더니, 교육적인 면모도 있었다.

꼭 필요한 사진이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도면적인 지리의 정보성보다 내가 보고 싶은 장면이라 더 찍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속내를 눈치 챘는지 50만원을 내놓으며, “좋은 것은 살 수 없지만, 왠만한 드론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내 형편에 한 번 사용하기 위해 드론을 산다는 것이 무리지만, 장터 다니는 정영신씨가 더 절실한 장비라,

뻔뻔스럽게도 고맙다며 받아 들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해,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에 정영신씨가 시비를 걸어왔다.
“어떻게 남이 주는 돈을 그렇게 편하게 받냐? 동자동 살더니 거지근성 생긴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다”며 큰 소리 쳤지만, 나 역시 쪽팔리기는 마찬가지다.
속으로는 “네 년 장터사진 때문에 받았다”고 되받고 싶었지만, 참았다.

"돌고 도는 돈이니, 언젠가는 갚을 날도 있겠지... "


사진, 정영신,조문호 / 글, 조문호




























MOVES
이진숙展 / LEEJINSOOK / 李珍淑 / photography
2017_1018 ▶ 2017_1023



이진숙_Moves 19_사진_70×140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진숙 페이스북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7_101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6(인사동 194번지) 라메르빌딩 2층

Tel. +82.(0)2.730.5454

www.gallerylamer.com



이진숙이 춤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추적하는 방식은 움직임 자체에 대한 몰입, 즉 춤을 추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인물 위주의 접근 방식을 배제함으로써 무용수의 얼굴이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대의 연극적 요소들을 최소화하였다. 오로지 운동감 위주의 사진들만을 선택하고 무대 전체에 대한 조망을 강조한 사진들은 무대 위의 주인공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춤을 추는 듯한 동적인 명상 체험을 유도한다. 이진숙은 자신의 사진 속에서 스스로 안무가이며 연출자이며 무용수인 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춤을 이어가고 있다. ■ 신수진


이진숙_Moves 41_사진_110×73.2cm_2014

이진숙_Moves 34_사진_110×73.2cm_2011

이진숙_Moves 9_사진_70×35cm_2015


평생 할 줄 알았던 춤을 쉬게 된 후 어떤 방법으로든 나의 춤을 추고 싶었다. 나의 선택은 사진을 통해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춤과 장단, 무용수의 호흡, 동작을 아는 것 만으로 사진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을 느껴서 늦었지만 상명대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사진을 공부하게 되었다. 움직임을 렌즈를 통해서 잡는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어려웠지만, 카메라를 들고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 렌즈를 통해 춤을 추고 있는 행복한 내가 있다. 단 한번 밖에 없는 아름다운 움직임을 나만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다. 렌즈를 통해서 신명 나게 나만의 춤을 추고 싶은 것이다. ■ 이진숙


이진숙_Moves 1_사진_70×140cm_2015

이진숙_Moves 15_사진_35×70cm_2015


이진숙_Moves 21_사진_70×140cm_2016

이진숙_Moves 4_사진_70×140cm_2016

이진숙_Moves 17_사진_35×70cm_2011



Vol.20171018b | 이진숙展 / LEEJINSOOK / 李珍淑 / photography

[서울문화투데이] 2017년 10월 07일 (토) 00:06:29 정영신 기자 press@sctoday.co.kr 


지난 어버이날 이어 두 번째 빨랫줄 전시 추석날에도 열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명절날이면 모처럼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온 집안이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나지만 명절이지만 더 외롭고 쓸쓸히 보내는 이웃들이 있다.

다행히 이번 추석은 서울시가 쪽방주민에게 고향방문을 지원해 일부는 고향을 찾아갔지만, 쪽방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공원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 동자동을 기록하고 있는 조문호 사진가 Ⓒ 정영신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씨가 오갈 데 없는 쪽방 사람들을 위한 두 번째 위안의 자리인 '동자동 사람들' 사진 나눔전을 지난 4일 동자동 새빛공원에서 열었다.

지난 5월 어버이날에 처음 시도한 빨랫줄전시는 주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는데, 이날도 그들에게 즐거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 빨래줄 전시를 구경하는 주민의 모습 Ⓒ 정영신



동자동 사람들은 빨래줄에 걸린 사진을 보면서 “어! 여기 용성이 사진 있네, 라면 먹고 있잖아”, “준기 썬그라스 죽이는데!” 등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치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듯 이야기꽃이 피우기 시작했다.

또한 동자동 ‘나눔의 집’에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추석한가위 합동제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들려 술을 올리며 조상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고향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조상을 찾아뵙지 못한 불효 때문인지 침울해 보였다.

    

▲ 추석한가위 합동제례에 함께한 주민이 절을 하고 있다 Ⓒ정영신



쪽방은 도시 빈민 주거형태로 1997년 IMF 이후 저임금 단순일용직 도시빈민이 발생하면서 노숙의 위기에 처한 빈곤 계층의 마지막 숙소다. 쪽방하나에 대락 15만원에서 23만원에 이르지만 돈만 있으면 곧바로 입주가 가능한데, 서울에만 다섯 군데의 쪽방촌이 있다.

    

▲ 도시락을 받아와 딸과 밥을 먹는 엄마의 모습 Ⓒ정영신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점심시간에 맞춰 주민들에게 도시락과 붉은 사과 한 알씩 나눠 주기도 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 뒤에는 도시락과 사과를 안고 흐뭇해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쪽방에서 일년남짓 살았다는 김모씨(65)는 처음에는 먹는 것 때문에 줄서는게 부끄러워 굶는 쪽을 택했다가 옆방의 동생이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후로는 일상처럼 편해졌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세번까지는 부끄럽던게 나중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했다.



    

▲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시락을 받기위해 줄을 서고 있다 Ⓒ정영신



한쪽에서 한 여인이 도시락을 펼쳐 딸아이 입에 밥을 넣어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빨래줄 사진전에서 이변이 생겼다. 작은 남자 한 분이 나타나 전시된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몇 장을 골라 '도끼로 목을 친다'는 등 끔찍한 욕설을 입에 담아가며 박박 찢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현장을 지켜보던 김원호 어르신이 화를 내며 사진을 찢는 사람더러 나무라기도 했으나 조문호 사진가는 제지시키기는 커녕 빙그레 웃고 있었다.



    

▲ 본인의 사진을 들고 좋아하는 김용만씨 Ⓒ 정영신


사진가 조문호는 쪽방사람이다. 일년 전부터 동자동쪽방촌으로 이주에 살면서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다. 일년이라는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는데도 불구하고 초상권을 빌미로 시비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한참 소동을 부리던 사람이 떠나자, 또 다른 사진 주인공들이 나타나 싱글벙글 자기 사진을 골라갔다. 동자동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조문호 사진가에게 앞으로 작업에 대해 물어보았다.



    

▲ 본인의 사진을 들고 있는 이기영씨 Ⓒ 정영신


그는 “일년으로 동자동기록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솔직히 사진쟁이로서 욕심도 생겼다. 빈민들이 사는 쪽방촌이 서울에만 5군데라고 하는데 동자동을 거점으로 다섯 군데 다 기록하고 싶다. 한 지역을 2년만 잡아도 1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쪽방촌을 기록하고 싶다. 또한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빨래줄 전시도 매년 어버이날과 추석날로 정해, 앞으로도 전시를 계속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 쪽방에 들어앉아 책만 본다는 조장섭씨 Ⓒ 정영신



쪽방촌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친구삼아 살아간다. 제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쪽방에서 일년만 지내면 반쯤은 미친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이 쪽방촌이라며 외로움을 이기지못해 자살도 시도하고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차별없이 존중받아야한다.



추석 전 날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빨래줄에 걸 사진 값이 없어 허둥대다 전시를 하루 남긴, 밤 늦게서야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주인도 없는 남의 작업실에 들어가 자정까지 사진 뽑아, 자르고 정리하느라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일어나보니 오전 아홉시였다.

부랴부랴 공원으로 달려가 빨래 줄에 사진을 걸었는데, 마침 강 호씨가 공원에 나와 있어 많이 도와주었다.

오전10시경 준비를 끝낼 수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추어 전시 할 수 있었다.






그 때야 동자동사람들이 새빛 공원으로 하나 둘 모여들어 빨래줄에 걸린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여기 용성이 사진 있네, 라면 먹고 있잖아”, “준기 썬그라스 죽이는데!”라는 등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또한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추석한가위 합동제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술을 올리며 조상님께 큰 절을 올렸다.

다들 고향을 찾지 못하는 불효막심에 용서를 비는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오전 11시경에는 주민들에게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도시락과 붉은 사과 한 알씩을 나누어 주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그렇지만, 받아들고는 공원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식사하는 모습에서 연민의 정이 일었다.





그런데 빨래줄 사진전에 이변이 생겼다.


‘동자동 사랑방’의 강동근 사업이사가 돌아다니며 5,18묘역 참배사진을 골라 찢고 있었다.

그것도 도끼로 내 목을 친다는 등, 끔찍한 욕설까지 퍼 붇는데, 귀가 막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원호씨가 강씨더러 죽일 놈이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분께서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강씨가 찍힌 사진은 지난번 광주 5.18묘지에서 찍은 공식적인 사진들이다.

강씨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동자동 사랑방' 임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자가 막말을 해대며, 허락도 받지않고 남의 사진을 손괴한 것은 초상권 침해가 아나라 범죄행위다.

이건 분명 개인적 앙심에 의해서거나, 아니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헤프닝일 것이다.

.

그 사진은 개인 기념사진이 아니라, 주민들의 시대적 역사성도 지닌다.

구린데가 있어 자기의 모습을 숨겨야 한다면 임원직을 맡아서는 안되고,

그런 공적인 자리에는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찍을 때 포즈는 왜 취했는가?




당장 공개적인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며,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임원이란 자체가 조합원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다.

그 자리에는 동자동 식구들만 있었던 자리가 아니라, 신문 기자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찢은 일곱장의 518묘역 참배사진은 단체사진이라 먼저 본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 찢던 말 던 상관할 바 아니지만, 전시사진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찢는 건,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사람까지 못 가져가게 방해하는 꼴이니,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나.


저런 자가 어떻게 '동자동사랑방'의 사업이사가 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공동체 자체의 존립이 의심스럽다.






그자가 떠나고 나니 김용만, 이기영, 송범섭씨 등 또 다른 사진주인공들이 나타나 싱글벙글 자기 사진을 골라갔다.

뒤늦게 나타난 정용성씨는 자기 사진이 없어졌다며 울상이었고. 정재헌씨도 사진이 없어졌다며 찾고 있었다.

용성이네 가족과 정재헌씨 사진은 그들만 찍힌 사진들이라 누가 전해주려 챙겨 두었을 것이라며 달랬다.


마침 취재를 나왔던 정영신씨가 이제 일 년 동안 동자동을 기록했으니, 끝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사진을 훤히 아는 자가 이 무슨 소린가? 이제까지 주민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시작일 뿐인데...






솔직히 사진쟁이로서의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빈민들이 사는 쪽방 촌이 동자동 뿐만 아니니, 서울의 중점 관리지역 다섯 곳이라도 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곳에 2년씩만 잡아도 10년이나 걸리는데,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겠나?

그 동안 정들었던 사람이 눈에 밟히기도 하고...






추석 하루전인 3일은 ‘동자동사랑방’에서 마련한 합동제례에 음식을 나누며 노래자랑까지 하였으나,

사진 때문에 허둥지둥 돌아다니느라, 가 보지도 못했다.





찍힌 사람들과의 약속이 추석이기도 하지만 사진 뽑을 돈이 없어 미루다, 임박한 3일에서야 간신히 준비를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정선아라리촌의 ‘문학콘서트’에서 만난 김여옥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려고 꼬불쳐 두었다며 10만원을 주었고,

서초동에서 밥 집하는 누님이 과일이라도 차례상에 올리라며 보내 준 돈으로 사진 만들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러한 급박한 시기에 정영신씨 프린트기에 이상이 생겨버렸다. 분명 잉크가 남았는데, 없다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연휴라 수리기사를 부를 수도 없지만, 새 잉크를 구입할 가게도 없었다.

다행히 사진하는 후배 하재은씨에게 부탁하여 주인도 없는 작업실에 처 들어가,

자정이 가깝도록 프린트 해, 어렵사리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재은씨에게 재료비라도 보내드리려고 연락했더니, 황송하게도 받지 않겠다는 거다.

전시협찬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이 돈은 내년 어버이날 사진제작비로 쓰기위해 묻어두었다.





사실, 이번 빨래줄 사진 나눔전도 ‘동자동사랑방’에서 행사를 치루는 3일에 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치루는 4일에 할 것인가? 망설였으나

일이 풀리지 않아 떠 밀려 4일에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더 잘된 것 같았다.


전 날은 박원순 시장을 비롯하여 기자들까지 달라붙었으니,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성격이 짙어 부담스러울 뿐더러, 추석명절이 아닌, 하루 당겨 합동제례를 치루는 것도 마땅찮았다.

추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진짜 오 갈 때 없는 빈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씩, 어버이날과 추석마다 사진을 돌려 줄 생각이다.

때로는 사진 값 조달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이들의 흐뭇한 표정에서 보람도 느낀다.


특히, 그 날은 사진 찍는다고 멱살까지 잡았던 분이 찍어 달라 했고,

평소에 카메라를 피해 다니던 분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내가 하는 일이 단발성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그 진정성을 읽은 것이다.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일들이 하나같이 아슬아슬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아마, 만지산 산신령님이 도와주는 것 같다.


“산신이시여!  이 늙은 몸 하나 제물로 바치려 하오니,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남원 '다담 콘서트'에 가다 시껍하고 돌아와서, 정영신씨와 살아 온 기념으로 또 한 잔 마셨다.

그러나 적당히 마시고 자야 하는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된다. 

술은 넘쳐야 하고 님은 품에 안겨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술 병은 비워야 하지 않겠느냐?

내일 새벽 네시에 일어나 정선 가야 하는데, 자정이 넘어 자빠졌으니, 또 바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알람이란 놈의 성질머리를 알았으니,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새벽 네시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지난 29일 오전 8시에 만지산에 들려 사진액자 두개 챙겨, 9시까지 화암면 그림바위 G갤러리에 전해 줘야 했다.

시간 맞추어 전해주고, 느긋하게 돌아 오는 귤암리 조양강변의 정취는 너무 포근했다.


만지산 살팔봉은 이미 익어버렸고, 조양강은 온천처럼 그 때까지 김이 무럭무럭 나더라.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급변하고 있다는 평범한 자연의 이치를 말해주었다.





만지산 집으로 올라가니, 입구에서 코스모스가 너울너울 날 반기는데,

오래 전, 삼겹살 구워먹던 불판 가마솥까지 코스모스가 점령해 버렸더라.


"네 이놈~ 네 놈이 빨지산이냐? 계엄군이더냐?"

갑자기 고은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나더라.

갈 때 못 본 불판, 돌아오니 화분으로 보이네.


예전엔, 친구 올 때 삼겹살 구워먹는 불 판이었는데, 

그 좋아하던 친구들을 일 하느라 멀리하였더니,

가마 솥 불판도 알아차려, 화분으로 둔갑해 버렸구나.

그래도 끝까지 지켜주어 고맙다. 힘없어 일 못하고 만지산에 돌아 올 때만 기다려다오.


그리운 친구 하나 하나 불러모아, 삼겹살 구워 소주 한 잔 마시게...

내가 그 때까지 살지도 모르지만, 친구들도 그때가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그 건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만지산 신령님만 알 것이다.

난, 십년 전 '농심마니' 박인식씨 패거리를 만지산에 불러와 

산삼 심어드리며 알랑방구 뀌어났으니, 좀 봐줄 것 같다.





이튿 날, '정신아리랑제'에 정영신씨가 온 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술 한잔 먹여 잡아 먹으려고, 정선시장에서 전어 열 댓마리 사다놓고,

강기희 사단의 '문학콘서트' 차에 달라 붙어 오는 정영신씨를 찾아 아라리촌으로 갔다.


'문학콘서트'에서 많은 반가운 사람들 만났으나, 술은 차 때문에 딱 두 잔만 얻어 마셨다.

사진은 200장이 넘게 찍어두었으나, 일은 언제 할지 모르겠다.


정영신씨를 납치해 만지산으로 돌아 와, 가을전어 노리짝하게 구워놓고 술 잔을 들었다.

저 푸른 초원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싶은 꿈을 꾼게 아니라, 남진의 노래를 불렀다.

한 잔하니. 천하가 내 손에 있더라. 대마까지 한 분위기 잡아주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인사동에서 반가운 사람들 만나 술마실 수 있었던 셋째 수요일이었다.
이른 술시부터 화가 전강호씨로 부터 연락 왔으나, 두 세 시간 지나야 나갈 수 있었는데,
뒤늦게 인사동 ‘사랑방’으로 갔더니, 장경호, 전강호, 두 사람이 나와 있었다. 빈 병으로 보아 장경호씨는 정량을 초과한 듯 싶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김명성, 이상훈씨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 신현수, 이인섭, 강찬모, 신성준씨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러나 술을 마셔도 노는 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술자리는 조가 잘 맞아야 하니까...
장경호씨는 이미 취해 매사에 시비조였다. 전강호씨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관용을 아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가 비상금으로 꼬불쳐 둔 신사임당 한 장으로 술값을 내길래, 내가 강찬모한테 탁발한 심사임당 한 장을 주었는데,

'낭만'가는 길에서 최명철씨를 만나 , 그 구리알 같은 돈을 최명철씨 한데 줘버렸다.

이런 싸가지 좀 보게, 그것도 오빠 보는 앞에서...

최명철씨 역시 객지에서 떠 돈지가 오래되어, 주머니가 빈 걸 눈치챈것 같았다.


김용태씨 딸래미 보영이가 장사하는 '낭만'에 가보니, '민미협' 그림쟁이 투성이더라.

이재민, 조신호, 강성봉, 정세학씨 등등, 다 말하다 보면 날 새겠다.






그 날따라 갑자기 열반한 적음(寂音)이 그리웠다.
인사동하면 생각나는 사람으로  민병산, 박이엽, 천상병선생 등 유명세를 떨친 분이 한 둘 아니지만,
선생 분들은 체면 때문에 본색을 들어 낼 수 없었으니, 노는 것하고는 별개 문제다.

단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적음이만 유일하게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월간 뻐꾸기’이야기가 신화로 둔갑한 '월 빠'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대개 알것이다.
자기가 무슨 ‘월간 빠’ 주간이라며 창간과 복간을 거듭하는 ‘월빠’이야기로 좌중을 웃겨댔다.
자기 이야기에 자기가 웃는 것도 그렇지만, 온 몸을 흔들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자신은 ‘적음선사’로 불러주길 원했지만, 법명을 뜻하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땡초로 통했다.

보면 이 갈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적음이다.



적음선사



술이 취하면 '찔레꽃'을 엄청 청승맞게 불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참 좋지!


한 번은 정선 만지산 ‘서낭당 축제’ 뒤풀이에서 “긴 머리 소녀”를 불렀는데,
털도 없는 중놈이 '긴 머리 소녀'를 청승맞게 불렀으니, 동네 사람들이 나 자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만지산 사는 최종대씨는 그 이야기로 적음을 그리워한다,

탁발로 살아야할 중이 대중에게는 손 내밀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 주머니만 털지만,
그마져 없으면 인사동 ‘실비집’에 퍼져 날 밤을 까며 퍼 마셔댔다.
아는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렸으니,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싶다.


오죽했으면 장경호는 적음 이야기만 나오면 아직도 이를 간다.
미술선생을 할 때인데, 돈 떨어지면 학교 찾아와 수업중인 자기 기다리느라

교무실에서 회전의자 돌리고 있었다는데. 얼마나 징그러웠겠는가?

그래도 끝 까지 술값 보태 준 사람은 전활철, 김명성, 강찬모 등 몇몇사람 있었지만,

적음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 깊은 정신을 아니까...






그는 열다섯 살에 경북 기림사로 출가하였으나, 그 기행은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는 산문집이 잘 팔려나가자 허구한 날 술로 살았다. 있는 대로 퍼 마셨다.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택시타고 인사동에서 봉화 ‘청량사’까지 간다.
절에 차 대놓고 주지 불러 택시비 주라니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단지 술 마시기 위해 돈이 필요할 뿐이지만, 한 마디로 돈을 좆같이 본다는 거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 ‘청량사’ 있을 때도 벼랑 깊은 암자에서 혼자 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암자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는데, 한 밤중에 부엌에서 그릇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암자에 적음과 나, 두 사람 뿐인데, 누가 그릇을 만진단 말인가?
완전 쫄아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물어보니, 가끔 나한상이 장난 질 친다며 별거 아니란다.


그런데 한참 후에 모령의 애인을 데리고 가서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산 깊은 암자에 오르느라 너무 피곤한데다, 술에 취해 잠이 들어버렸다.

자고 일어나 눈을 떠보니, 적음도 애인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꼭두새벽에 찾아 나섰는데, 옆 골방에서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호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어 들여다보니, 미쳐 팔짝 뛰겠더라.
보이는 것은 달싹거리는 이불 뿐이었지만, 그 아래서 들리는 신음은 분명 그녀의 신음이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도저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어 산으로 기어 올라 청량사를 내려보며 울부짖었다.
“적음아! 이 씨발 놈아~ 적음아! 이 씨발 놈아~” 목 놓아 외치니 산울림은 내 귀에 내려 꽂혔다.

내 얼굴에 침 밷는 격이었다.

내려 와보니, 그 여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머리 감고 있었고, 적음은 자고 있었다.

그냥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지껄일 수 밖에..

아마 꿈 속에서 본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소암 '전경




나중엔 거기서도 밀려나 봉화 수식에 있는 헌 집 하나 얻어 ‘一笑庵’이란 문패 달고 혼자 살았다.
보나 마나 가까이 있는 도예가 신동여씨를 비롯하여 이미 고인이 된 영주의 뮤지션 이종문과

많은 글 패들게 민폐께나 끼쳤을 것이다.


나중엔 마을 사람까지 싫어해 외톨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발가벗은 알몸으로 열반하고 말았다,
그의 법명처럼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이 방바닥에 썩어 안타까웠다.

그게 바로 적음이다.


열반한 적음선사의 시신이 섞은 자욱





지금 되돌아 보니, 내가 인사동에 연연하는 것도 미우나 고우나 사람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구, 강용대, 김영수는  물론이고, 죽지 못해 발버둥 치며 사는 이청운, 배평모, 신동여,

석 파, 김신용, 장경호, 최울가, 김명성, 김용문, 전강호, 박광호, 이수영, 노광래, 공윤희, 이목일, 전활철 등 등..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 아무 것도 아닌 인사동이란 자리에 목메고 살았던 것 같다.


적음이 남긴 '유적'의 시 한자락이  떠 오른다.

"청동의 푸른 뱀이 / 꿈틀거리고 있는 / 숲길을 지난다 / 무섭지도 않은 등 뒤에 / 스멀스멀 / 실안개 / 따라 붙는다."


사진,글/ 조문호



적음의 열반 소식을 듣고 몰려든 지인들


빈소를 여관방에 차려놓고, 신동여, 석파, 이수영씨가 영정사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 하고있다.


적음 일주기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모여 적음을 추모하며 한 잔 마셨다.


아래 사진은 지난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토요일엔 서둘러 공원에 나갔다.
남의 밥그릇 뺏는 일이라
몇 주째 빵 배급을 놓쳤더니,
뱃속을 비우는 경우가 잦다.




천성이 밥하는 것을 싫어하는데다,
혼자 사먹기도 그러니, 어쩌랴?
아슬아슬하게 받은 번호표가 199번,
한 장이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다 싶다.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온다.
착한 아내 버려두고, 왜 여기 왔나?
뭘 위해, 도대체 누굴 위해 사는 것이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엊 저녁엔 노을조차 심상찮았다.
마치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끝내라고...




사진,글/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