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동자동의 쪽방은 잠긴 방이 더 많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지, 물가로 갔는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광주식당 건물 4층은 절반 넘게 자물쇠가 잠겨있다.
하기야 잠자리가 자유로운 자들이 푹푹 찌는 쪽방에서 버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 층에 남은 네 사람은 왜 떠나지 못했을까?
관리인 정선덕씨야 건물 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맞은편의 김응수, 최성길씨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찾아 올 사람은 없으나, 나가기조차 귀찮은 모양이다.
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지 눈물이 난다.

그리 말하는 난 왜 나가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다.
사실, 컴퓨터가 없으면 사진정리는 물론,
세상과의 소통이 되지 않아 쪽방을 뜨지 못한다.
핑게 없는 무덤이 없으나, 컴 중독 증세에 가깝다.


8월5일이 울 엄마 제삿날이라 7월말에 정선가기로 했으나
일이 생겨 또 이틀간 연기 했다.

오늘은 찍은 사진 정리도 미룬 채, 보따리를 쌌다.
사진이고 컴퓨터고, 모든 걸 접어버렸다.
벌써 마음은 정선 만지산에 가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열리는 김남진의 이태원의 밤, 호모나이트쿠스’전시가 오는 816일까지 열린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락과 욕정은 밤에 꿈틀댔다.

통금이 있던 시절에도 외국인을 위한 호텔 나이트클럽까지 가서 주머니를 털지 않았던가.

술과 음악 섹스, 그것이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유일한 해방구처럼 설쳤다.

‘나이트’와 요즘의 ‘클럽’은 술과 음악과 춤, 이성이 어울린다는 점은 같지만, 그 섞이는 방식은 다르다.

나이트는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곳과 춤 추는 스테이지가 따로 있지만, 클럽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테이블이 있긴 하지만 잠깐 앉아 쉬는 자리이지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순 없다.

남녀가 만나는 방식도 다르다. 나이트의 핵심은 남녀 손님을 짝 지어주는 웨이터였다.

그런데 요즘 클럽은 웨이터도 부킹도 없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공간적 차이와 더불어, 더 개방적이고 주체적이며 평등한 방향으로 변했다.





그런데, 사진가 김남진씨가 ‘이태원의 밤’ 2탄으로 ‘호모나이트쿠스’전시를 열었다.
처음 전시를 연 80년대는 ‘현실과 발언’이란 사회 저항성 문화운동이 일던 때라, 김남진의 현실비판적인 사진도 한 몫 했다.

그 당시 사진판에선 흔치않은 작업이기도 했지만, 일단 반향을 일으킨 전시였다.

그 이후엔 사진관련 기획자로 교육자로 갤러리 관장 등으로 활동해 다큐 사진가로서의 기억은 잊어버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30여년이 지난 오늘의 이태원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제 환갑을 맞은 사진가가 향락가를 기웃거리며 20대 젊은이와 어울려 사진 찍기가 그리 쉬웠겠는가?






난, 이태원의 퀴퀴한 술집 분위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음악에 미쳐 결혼 첫날부터 신혼여행으로 이태원에 간적이 있었다.

레코드 사러 간 김에 클럽에 들어갔으나, 외국인들 체취에 좀 질려버렸다,

그 뒤 한 두 차례 갔으나 연이 맞지 않았는지 갈 때마다 사고를 쳤다.

본래 춤추며 노는 것 보다 음악 들으며 조용히 술 마시는 걸 더 좋아해 클럽 체질은 아니다.


김남진씨 역시 이태원이 좋아서 찍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80년대 발표한 사진들은 찍을 때의 두려움도 엿보였지만, 이성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사진이었다.

시대적 변화에 따랐겠지만, 세월이 지난 오늘의 작업은 전혀 달랐다. 두려움이 사라졌고,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인 사진이었다.

흑백으로 보여 준 ‘이태원의 밤’과는 달리 강렬한 색이 주는 원색적인 분위기가 사뭇 감촉적이다.

디지털사진이 주는 강한 색으로 욕망과 열정을 극대화했다. 도발적인 이태원의 밤이 뿜어내는 열기는 절정에 달했고,

욕망에서 비롯되는 허망함까지 드러나고 있었다. 정적인 사진에서 동적인 사진으로 바뀐 것이다.

이태원에서 만난 젊은이와 외국인, 그리고 성 소수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도 전해주었다.






지난 26일 오후6시 ‘스페이스22’에서 열린 전시 오프닝에 갔는데, 마치 클럽에 간 것 같았다.

“놀 준비되셨습니까?”라는 특별한 파티였는데, 전시장에 조명과 음악은 물론 칵테일까지 준비해 놓았다.

함께 즐기며 작업해 왔던 이태원 클럽 분위기를 전시장에 끌어들인 것이다.

DJ가 틀어주는 음악과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칵테일, 그리고 입구에서 찍어주는 팔목 스탬프까지 이태원클럽 그대로였다.

사진가들이 언제 전시장에서 함께 어울리며 춤추고 놀아본 적 있는가?


작가 김남진씨를 비롯하여 한설희, 구자호, 김석종, 김문호, 강제욱, 김광수, 고정남, 곽명우, 김보섭, 이규철, 박찬호, 

정영신, 서준영, 김영호, 한금선, 김봉규, 남 준, 최연하 이은숙, 마동욱, 이일우등 많은 사진가들이 신판 클럽을 가득 메웠다.

'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양승우씨가 일본에서 오기도 했고, 사회는 이정환씨가 보았다.

그러나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던지 음악이 있어도 춤추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음악은 약했으나 칵테일 맛은 좋았다.

홀짝 홀짝 받아 마시다 ‘북촌’으로 옮겨 와 소주를 마셨더니, 술이 받지않았는지, 어지러웠다.

결국 술집에서 뻗어버려, 쪽팔리게 김남진씨가 불러준 택시에 실려 와야 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어린이 아트 캠프 ‘TO BE FREE'가 오는 7월31일과 8월1일 양일간에 걸쳐 '서서울호수공원' 다목적홀에서 열린다.

지난 28일 오전 11시경 스텝들의 첫 미팅이 있었는데, 난 '서서울호수공원'도 처음 가보지만, 이 행사의 내용도 잘 모른 채 갔다.
일전에 안애경씨로부터 이 빠진 모습으로 어린이들을 웃기며 사진 찍을 생각 없냐는 재미있는 발상에 별 생각 없이 승낙했다.

안애경씨는 핀란드를 오가며 국내외 주요 프로젝트에서 아트 디렉트로 동분서주하는데, 발상들이 너무 참신하여 본받을 일이 많다.
묶여 있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새롭고 참신한 시도는 창작하는 예술가들의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 날 처음으로 본 ‘어린이 아트 캠프’ 기획안은 서울시청 공원녹지정책과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어린이들에게 창의적인 예술교육을 접목시키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함께 어울려 경험하며 주변 환경에 연관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데, 어린이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어린이들의 체험이 공공디자인 개념의 기본 아이디어로 활용되는 프로젝트였다.
창의적인 워크샵을 통해 도출된 아이디어는 올 가을 주민들과 함께 실물크기로 공원에 설치하기로 되어있었다.
주민들이 만들어 가는 공공예술의 한 사례로, 주민이 공원의 주인의식을 갖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날 참석한 스텝은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안애경씨를 비롯하여 영어교사인 김정은씨, 그리고 핀란드 작가 두 명과
서울시청 공원녹지정책과 담당자 두 명 등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서로 인사하는 정도의 탐색전에 가까운 미팅이었다.
마지막 결과에 대한 큰 그림이야 안애경씨 머리에 있겠지만 미리 발표할 수 없었다.
참가하는 어린이들의 생각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틀을 짤 일이 아니었다.
담당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부분도 있겠지만, 작가의 뜻이 받아 들여졌다.

서울시청 에서 온 담당자는 모든 일을 수용하며 도우려했지만, 그러나 공원 관리자는 달랐다.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이 공원은 2009년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는데,
제2의 선유도 공원이라 불릴 만큼 환경친화적인 공원으로 여의도 공원과 맞먹는 규모다.
녹슨 수도관이나 기존의 골조를 재활용한 배치도 좋지만,

지척에 있는 김포비행장으로 오가는 비행기 소리에 분수가 작동하는 시스템도 흥미롭다.
‘씨토포스’ 최신현씨가 설계한 시각의 파격을 안겨주는 친환경공원이었다.




 


스탭들과 '서서울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아 보았는데, 21세기 몬드리안의 정원같은 멋진 공원이었다.
옛 신월정수장의 침전조를 재활용하여 기존의 콘크리트 벽과 기둥들이 그 골격을 이루는데,
수직과 수평의 선을 활용한 동선에 따라 면과 선을 가로지르고 서로 만나고 헤어지면서 3차원의 공간을 연출했다.
흥미로운 배치의 조화로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공간의 리듬을 맛보게 하였다.





문제는 작가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 놓아도 그 것을 관리하는 공무원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주의의 익숙함에 길들어 있다.
의도와 다르게 관리되는 것을 안타까워 한 설계자 최신현씨의 부탁도 있었지만, 미술감독 안애경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서울호수공원'의 여러 프로젝트에 솔선 참여하여 발전시키려 했으나, 번번히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야외에 설치할 피아노도 관리의 어려움을 내세우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원에 설치된 원통 수도관의 양쪽 구멍조차 막아버린 것이다.
호기심 많은 개구장이들의 생각을 막아버린, 즐기는 놀이공간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날도 공원을 관리하는 인부들이 테크 틈사이에 비집고 나온 잡초를 말끔히 제거하고 있었다.

있어야 좋은 것과 없는 것이 좋은 것을 구분조차 못하니,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날도 공원관리자와 어린이 아트 캠프 미술감독과의 마찰이 빚어졌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왔는지 모르지만, 작업 자재로 들여다 놓은 물품을 실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격려는 못할망정, 어찌 싫다는 표현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할 수 있는가? 결국 서러움에 북 바친 안애경씨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외국에서 데려 온 작가들에게 여비도 챙겨주지 못하는 봉사에 가까운 일을 어렵게 진행하고 있는데,
뭘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욕이라도 먹지 않을텐데, 무슨 기득권 지키는 완장 행세 같아 나까지 열 받아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사례들이 '서서울호수공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국 지자체의 문화관련 공무원 사이에 만연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일단 문화관련 부서 공무원은 모두 문화전문가로 바뀌어져야하고, 생각이 막힌 안일주의 공무원들의 거세가 절실한 실정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뭘 모르는 인간들이 갑질 하는가.



사진, 글 / 조문호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서, 사진집 출판기념전


2017년 07월 28일 (금) 16:59:01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한계레’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 간 후,

40여 차례 넘게 팽목항과 동거차도를 방문 기거하며 기록했다. 기자로서의 냉철한 시각보다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심정으로 찍었다.

객관성을 우선하는 신문사진과 주관을 우선하는 사진가로서의 갈등도 보였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사진가.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마치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 더 아팠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대상 속으로 들어가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그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눈빛사진가선 50. 팽목항에서 표지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동거차도 앞바다를 찾은 단원고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혜 씨_2016년 4월 22일 오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으로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했다.



▲동거차도_2017년 3월 22일 오후



세월호가 침몰하는 평목항에 달려가 처음 맞은 동거차도의 밤은 적막감과 긴박감이 뒤섞여 있었다. 사진집 표지에 실린 사진처럼,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딱뜨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인양되는 세월호_동거차도 사고해역_2017년 3월 24일 오후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며,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 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중요한 것은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오후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써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써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오후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 낸 사진가 김봉규씨의 집념과 열정에 대해 몇 가지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90년대 초반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어내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로 작업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평소 관심 가진 ‘시사저널’주간지를 택했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기의 포부를 밝혀 특채가 되었다.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전혀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이었다.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오후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오후


세월호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인재가 삼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인양작업을 시작한 후 하루 만에 올라 온 세월호가 인양하는데 왜 3년씩이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박근혜가 탄핵되고 세월호가 인양된 것은 정말 우연일까?

특검도 밝히지 못한 박근혜 7시간의 행방이며, 세월호 수사를 방해했다는 우병우 구속신청기각도 석연치 않다.

정권은 바뀌었으나, 범죄 집단 같았던 기득권의 뿌리가 여전히 깊다는 이야기다.



▲팽목항에 설치된 분향소. 2015년 12월 20일 오후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전시문의:‘류가헌’(02)720-2010

*사진제공=눈빛출판사



팽목항_2014년 7월 9일



사진가 김봉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출판기념전이 오는 30일까지 청운동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가 시작된 지난 7월25일 오후6시경 '류가헌'을 가기위해 경복궁역에서 걸어 갔더니 너무 더웠다.

가는 도중 전람회를 다녀오던  엄상빈씨를 만났고, 전시장에는 사진가 김봉규씨를 비롯하여 이규상, 이상엽,

한금선, 곽명우, 이규철, 강제훈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반가운 분들 만나 이야기 나누며 곡차도 한 잔했다. 



▲김봉규 사진가.ⓒ조문호



첫 눈에 보인 사진은 작가가 평목항을 처음 찾은 동거차도의 밤이었다.

사진집 표지에 소개되었듯이, 조명탄에 비친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수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어둠의 농도로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며 어렴풋이 먼 섬의 능선들이 드러났지만, 긴박한 비극의 현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이나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명탄만 흘러내렸다.

그 사진 한 장이 운명의 첫날밤에 맞닥트린 김봉규의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과 사진가들이 팽목항을 촬영했겠지만, 김봉규씨는 친자식을 떠나보낸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아파하며 찍었다.

사진가로서의 소명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마음이 더 아팠던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대상 속에서 이루어내는 공감인데, 김봉규의 평목항 전시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공감이었다. 스스로 아파야 아픔이 사진에 드러나고, 보는 이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김봉규시의 '팽목항에서'사진집 표지 (가격 : 12,000원)



김봉규의 사진을 덕목과 공감으로 평한 사진가 김문호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다큐사진의 무게, 혹은 삶의 무게, 사진가가 찍는 대상인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고,

그 "우리"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환치할 수 있을 때, 가장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의 무게를 이루는 것, 그것은 대상과 사진가와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감"(compassion)의 무게일 것이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다큐멘터리 사진에 진정성의 무게를 만들어주는 덕목, "공감".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되기는 그른 사람"이라 하고,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진정성이 없는 사진"이라고 말한다.

김봉규의 팽목항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동정을 넘어서

바로 우리가 적어도 지금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체감해야 할 "공감"일 것이다.

사진이 이렇게도 이렇게 막막할 수 있다니...”




  ▲팽목항_2014년 11월 18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진기자 김봉규씨가 유가족의 울부짖는 모습이나 시신이 인양되는 비참한 모습이 담긴 직설적인 표현을 비켜간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가족처럼 차마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다. 그 것만 보아도 사진가가 얼마나 아파하며 그들과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객관적 앵글’로 찍힌 신문용 사진이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에 충실한 ‘주관적 앵글’의 사진이다.

오히려 직설적인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이 더 강하고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도 증명한다.


넋을 잃은 듯 절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먹구름이 뒤덮은 칠흑 같은 바다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마치 지옥의 묵시록처럼 무겁게 닥아 왔다. 가끔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부표나 십자가, 노란 리본들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대개가 침울한 슬픈 풍경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듯이 음산하기까지 하여 불쌍한 원혼들이 바닷가를 멤도는 착시현상마저 생겼다.

그리고 사진 곳곳에 작가의 분노가 똬리 틀고 있었다.



▲팽목항_2014년 6월 2일



“여기에 실린 김봉규의 사진들은 대체로 비극의 슬픔과 분노를 적막 속에 감추고 있다.

감춘다기보다는 감춤으로서 표출되고 억누름으로서 드러난다. 이 억누름은 힘을 가해서 얻어지는 물리적 억누름이 아니라,

드러나지 못해서 아우성치면서 심층에 잠겨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허용하는 여백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한다.

이 억누름과 드러남은 고통스런 분열의 과정인데 그 과정을 통해서 인칭의 국면은 힘겹게 전환되면서 인칭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빚어지고, 대상은 보이기 시작한다“고 소설가 김훈은 해설했다.



▲팽목항_2014년 4월 27일



이 작업을 이루어 낸 김봉규씨의 사진가로서 집념과 열정에 대해 부언하려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전 ‘사진집단 사실’에 함께 하면서다. 그는 사진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았고,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는 다큐 사진가로서 살아남으려면 최선의 직업이 사진기자였다.

밥벌이를 겸해 작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사진기자인데, 그가 평소 관심 가져 온 ‘시사저널’ 사무실을 찾아 간 것이다.

사진기자 모집이 있은 것도 아닌데, ‘시사저널’ 주필 방에 들어가 통사정한 것이다. 끈질기게 포부를 밝혀 관철시켰다.

그는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뒤 ‘한겨레’신문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진 찍는 일 외에는 한 눈 팔지 않았다.

대개가 취미사진가를 위한 강좌나 촬영지도 같은 부업을 갖지만,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진뿐이었다.


 


이 ‘팽목항’ 작업 역시 사진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의 열정과 끈기가 이루어낸 성과다.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세월호의 현장을 통한의 시어처럼 기록해 남긴 것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장면 장면들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데올로기조차 뛰어넘는 게 사람의 생명이요 인간의 존엄성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밝혀내어,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이 김봉규의 팽목항 전시와 사진집 출판을 계기로 빠른 시일 안에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세월호 앞에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사진은 전시 열림식에 다녀 간 분들의 모습이다]



























‘한국현대미술작가’시리즈 사진부문 두 번째 사진가인 한정식선생의 ‘고요’전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6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4월14일 개막되어 8월6일 막을 내리는 전시인데, 4개월에 가까운 긴 전시라 미루다보면 놓치기 십상이다.

나 역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참석하여 전시도 보고 취재를 했지만, 미루다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무더운 쪽방에서 멍 때리다, 우연히 눈에 띈 한정식선생의 사진집을 보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이쿠! 전시 끝난 것 아이가?”싶었는데, 아직 10여일 남아 부랴부랴 서두르게 되었다.






한정식선생하면 사진가는 물론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이라면 다 아는 사진가라,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행여 모르는 간첩이라도 있을까하여 몇 자 적는다.

한 선생은 70년대 ‘나무’에서부터 2000년대 이후의 ‘고요’ 연작에 이르기까지 오 십 여년을 사진의 추상성을 물고 늘어지신 분이다.

물론 초창기의 ‘북촌’이나 ‘흔적’등의 사실적인 기록 작업도 있으나 그건 선생이 가고자했던 명상의 세계를 향한 워밍업에 불과했다.

초창기에는 임응식선생이 주도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쏠려 다니기도 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선생은 사진가 이전에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이고 이론가였기에, 한국사진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시켜야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으리라 판단된다. 그래서 뜬 구름 잡는 것 같아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던 순수사진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에 열거한 이유보다 작가의 인간적 심성이나 종교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이름자에도 고요할 정“靜”자가 들어 있지만, 가히 스님 못지않게 불가와의 인연도 깊다.

시적 감수성과 불가의 초월적인 명상세계가 합일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이룩한 것이다.

이게 한국적 사진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일세기 전에 한국을 방문한 베버신부가 우리나라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겠는가.






오래전부터 미국의 형식주의 작가들인 ‘폴 스트렌드’, ‘아론 스시킨드’, ‘에드워드 웨스턴, ‘마이너 화이트’로 이어지는

추상사진의 계보가  이어져왔지만, 한정식 선생의 ‘고요’연작은 철학적인 작가의 사색이 집약된 형식주의라

가장 한국적이며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한정식선생의 작품세계는 무엇보다도 한국적 색깔을 찾아내어 한정식선생 고유의 시각언어로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사물이 부유하는 느낌을 일으키거나, 때로는 무에서 시작되어 무로 돌아간다는 무위의 사상을 일 깨우게도 했다.

생성이 소멸을 부르고, 소멸은 또 다시 생성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과정 속에 살아가는 자연의 엄정한 법칙을 말이다.

욕망으로 뒤 덮인 세상을 치유하려면 ‘고요’ 즉 적정 적멸로 치닫는 명상뿐일 게다.






작가가 ‘풍경’ 사진집에 적은 서문 한 자락에서 선생의 속내를 읽어 보자.

‘나는 대상을 한 번도 대상 자체의 실체로 파악해 본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나무는 대나무가 아니었고,

발은 발이 아니었고, 풍경은 풍경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물의 형상성이 아닌 묵언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또 ‘사진 산책’에서는 경주의 무덤을 두고 “스치던 바람결은 여기 묻힌 선인들의 숨결이 아닐까.

경주는 허무이자 초현실이다”고 적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은 1980년대부터 작업해 온 ‘나무’, ‘발’, ‘풍경론’을 비롯하여

‘고요’에 이르기까지의 대표작 100여점이 전시된다.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철학에 기인한 ‘한국적 형식주의 사진의 기틀을 다진 작품들이다.

선생께서 본 사물과 풍경들은 사진의 특성인 구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느낌만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난, 이렇게 느꼈다. “아! 이게 선(禪)의 경지로구나”

아무런 말이 없는 사물에게서 받는 깨달음은 마치 스님의 죽비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시간도 빛도 소리도 멈춘 채 오로지 고요의 세계로 안내하는 한정식선생의 사진에서 진리를 깨우치고,

이 지긋지긋한 무더위를 말끔히 날리기 바란다.






그리고 같은 날 개막된 건축가 윤승중씨의 ’문장을 그리다‘전은 제5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데,
두 전시 모두 8월6일 막을 내린다. 관람료 2,000원으로 마음의 피서를 즐겨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4월14일 정오무렵 가진 기자회견장 모습이다-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2017_0609 ▶ 2017_0903 / 월요일 휴관



앙드레 케르테츠_몬드리안의 안경과 파이프 Mondrian's Glasses and Pip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6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주관 / 성곡미술관

협력 / 프랑스문화부_주드폼 국립미술관_디크로마 포토그라피


도슨트 / 02:00pm, 04:00pm / '문화가 있는 날'은 07:00pm 추가 진행


관람료

성인(만 19~64세) 10,000원 / 청소년(만 13~18세) 8,000원

어린이(만 4~12세),국가유공자,장애인,만 65세 이상 6,000원

단체 20인 이상 20% 할인 / 만 4세 미만 어린이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_10:00am~08:00pm*

전시종료 30분전 매표 및 입장 마감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42(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0)2.737.7650

www.sungkokmuseum.org



성곡미술관은 여름특별전으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앙드레 케르테츠(André Kertész, 1894-1985)의 사진전을 개최한다. 케르테츠는 70여 년의 오랜 활동 기간 동안 부다페스트, 파리, 뉴욕을 옮겨다니며 작품 세계를 펼쳤다. 그는 사조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사진을 통해 일기를 쓰듯이 자신의 솔직한 감성을 자유롭게 담아냈다. ● 독학으로 사진을 익힌 케르테츠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자신의 작업원칙에 충실했으며, 나아가 사진매체의 잠재적 표현 가능성들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새로운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신속, 정확한 카메라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치밀한 화면 구성과 흑백의 농담으로 더 깊고, 세밀하게 담아내었다. 케르테츠는 어떤 사조나 그룹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같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때로는 그들을 앞서나가는 혁신적인 작업을 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우리가 해온 것들은 모두 그가 처음으로 했던 것"이라는 말로 칭송했던 케르테츠는 브라사이Brassaï,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등 사진의 거장들을 리드하며, 향년 91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작업을 이어갔다. ● 이번 전시는 그가 일생에 걸쳐 작업한 189점의 작품들을 헝가리(1912-1925), 파리(1925-1936), 뉴욕 시기(1936-1985)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4년 필생의 작품들을 보존하겠다는 열망으로 10만 점의 원판 필름과 1만5천 점의 컬러 슬라이드 소장본을 프랑스 문화부에 기증했다. 본 전시는 그 원판으로 프린트한 모던 프린트로 구성되었다. ● "나는 빛으로 글을 쓴다." / "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는 해석할 따름이다." / "좋은 사진은 우리 눈에만 뭔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두 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시각은 항상 이미지와 영혼 사이를 오간다." / "나는 오직 파리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파리에 갔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생활할 수 있는 약간의 돈이 있었고, 그리고 내겐 창조적 힘과 꿈이 있었다." (앙드레 케르테츠)


시기별 작품세계 - Ⅰ. 헝가리 시기(1912-1925) ● 1894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앙드레 케르테츠는 1912년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한 후 마치 일기를 쓰듯 전원의 목가적 생활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촬영했다. 특히 남동생 예뇌Jenö를 비롯한 가족들, 친구들은 작가의 모델로서 훌륭한 피사체가 되어 주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징집된 그는 전장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는데, 드마라틱한 전투 장면보다는 군인들의 소소한 삶의 모습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 이 시기부터 케르테츠 사진에는 휴머니즘적 감수성과 아방가르드적 실험성의 전조가 동시에 드러난다. 사진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자유로운 사고와 감성에서부터 발원하는 영감을 기반으로, 자신이 애정을 두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 풍경들을 시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고자 다양한 방식을 모색했다.


앙드레 케르테츠_수영하는 사람 Swimmer Under Water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1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Ⅱ. 파리 시기(1925-1936) ● 1925년, 현대미술의 본거지인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에 자리를 잡은 케르테츠는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등 모더니즘 예술운동의 선구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 특히, 만 레이Man Ray, 몬드리안Mondrian, 브랑쿠시Brancusi, 샤갈Chagall, 그리고 콜레트Colette와 짜라Tzara와 같은 예술가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 케르테츠는 파리의 수많은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사진 작품을 출판하였고, 주요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필름과 포토Film und Foto』(1929) 국제전에 만 레이와 함께 파리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한다. 1933년 여성의 누드를 뒤틀리게 표현한 「왜곡」 시리즈를 내놓아 보다 전위적인 시각적 실험을 전개했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케르테츠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 예술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모더니즘의 실험적 조형 언어인 '거울 유희', '반사', '그림자와 복제', '전면 구성', 혹은 '야경과 명암의 대비' 등을 자신의 표현기법으로 소화하여 작업에 반영함으로써, 자유로운 정신과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사진적 아방가르드의 주역이 된다.



앙드레 케르테츠_포크 The Fork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8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깨진 원판 Broken Plat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왜곡 Distortions」(1933) 시리즈 ● 1930년 『뷔VU』 잡지가 카를로 림Carlo Rim 신임 편집장의 초상화를 앙드레 케르테츠에게 주문하자, 그는 편집장을 놀이동산의 '뒤틀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촬영하여 괴물처럼 변형된 놀라운 이미지를 제작한다. 이어서 케르테츠는 1933년 도색 잡지 『미소Le Sourire』의 주문을 받아 한층 더 왜곡된 여성 누드 사진을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실험을 한발 더 전진시킨다. 이렇게 탄생한 「왜곡」 시리즈를 케르테츠는 '파리 시기'에 본격적으로 작업하였다. 하지만 이 실험적 작업은 이미 '헝가리 시기'부터 일종의 '광학적 변형' 또는 '그림자의 투영'에 관심을 두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기하학적 구도가 돋보이며 빛을 효과적으로 다룬 「수영하는 사람」(1917)과 「포크」(1928)는 「왜곡」시리즈의 전조를 알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기이함과 기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여성신체의 신비로움을 깊게 탐닉한 「왜곡」 시리즈는 이미지에 대한 케르테츠의 반 사실적, 반 묘사적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축 쳐진 목과 늘어난 발, 기괴하게 뒤틀린 이미지들은 곡선으로 이뤄진 루벤스Rubens의 풍만한 여성의 몸이나 앵그르Ingres의 지나치게 긴 척추를 가진 여인의 메아리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벨머Bellmer의 절단되고 불구가 된 인형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는 초현실주의가 추적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실험과도 맞닿아 있는데, 당시 케르테츠를 비롯해 만 레이, 브라사이, 카르티에 브레송과 같은 작가들 역시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이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현실을 변형, 왜곡시키는 실험적 이미지들을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왜곡」 시리즈는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참 뒤에 재조명되었는데, 뉴욕 시기의 후반부인 1976년에 이르러서야 12컷의 왜곡 이미지로 구성된 책이 출판되었다


앙드레 케르테츠_샹젤리제 Champs-Elysée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2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Ⅲ. 뉴욕 시기(1936-1985) ● 1936년 케르테츠는 사진 대행사 키스톤Keystone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내 엘리자벳과 함께 뉴욕으로 떠났다. 하지만 계약은 1년 남짓 지속된 후 파기되었다. 『보그Vogue』,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 등 다수의 잡지사들이 케르테츠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사진은 대중적 이미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7년 뉴욕의 PM갤러리와 1946년 시카고미술관에서의 전시회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의 그의 생활은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다. 적은 수익, 연이은 실패, 「왜곡」 시리즈에 대한 몰이해와 외국인으로서의 장벽 등이 결국 그에게 우울증을 안겨주었다. 1944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케르테츠는 1947년 『하우스 앤 가든House & Garden』지와의 작업을 위해 콘데 나스트Condé Nast 그룹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지만, 주로 인테리어 사진을 제공해주던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확보할 수는 있었으나 상업적 작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1961년 은퇴를 한다. ● 아울러 워싱턴 스퀘어가 내려다보이는 5번가 12층 아파트에 정착한 1952년 이후 다시 작업의 열정을 되찾기 시작하는데, 아파트의 테라스에 머물며 망원렌즈의 줌을 이용하여 주변의 생활을 포착하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처럼 거리와 장소를 옮겨 다니며 시대적, 사회적 장면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광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특이한 행태와 풍경을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마치 '발견된 오브제'처럼 찾아내었다. 케르테츠에게 뉴욕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의 공명상자와도 같아서, 그 생각들을 사진이라는 메아리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직관적이고 암시적인 그의 스타일은 뉴욕의 황폐한 벽돌 담, 그림자나 철근, 외부 계단의 얽힘 속에 자신의 멜랑콜리를 주입하기에 충분했다. ● 케르테츠의 예술성은 삶의 후반에 들어서며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1959년 『인피니티Infinity』지가 게재한 케르테츠에 관한 기사는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6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계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순회전이 이어졌다. 또한 이즈음 그는 뉴욕으로 건너오기 전 파리에 남겨 두었던 원판 필름 상자를 찾아왔다.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자신의 작품들을 다시 접하게 된 케르테츠는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어서 발행한 두 권의 책 『나는 파리를 사랑한다J'aime Paris』(1974)와 『뉴욕에 대하여Of New York』(1976)는 케르테츠가 파리와 뉴욕의 서로 다른 문화 환경 속에서 겪은 갈등을 보여준다. 1977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 케르테츠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안타깝게도 부인 엘리자벳이 전시 개막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케르테츠는 세상을 떠난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을 담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수 제작한다. 그에 따르면 폴라로이드는 "작품의 내재적 요소를 보다 더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케츠테츠는 1985년 9월 28일 뉴욕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앙드레 케르테츠_길 잃은 구름 Lost Cloud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7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앙드레 케르테츠_우울한 튤립 Melancholic Tulip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39

ⓒ Ministère de la Culture et de la Communication-

Médiathèque de l'architecture et du patrimoine,

Dist. RMN-Grand Palais / Donation André Kertész



라이프Life』지 편집장은 1937년 케르테츠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의 작품을 게재하기를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이미지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케르테츠의 사진들은 우리를 반성하게 만들고 문자 그대로의 뜻과는 다른, 어떤 의미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중)성곡미술관


전시연계 특별강연회 (장소 / 성곡미술관)

1. 앙드레 케르테츠와 모더니즘 예술운동 | 6월 24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2. 앙드레 케르테츠의 헝가리와 파리 시기의 사진 | 7월 8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3. 미국 현대사진에 대한 앙드레 케르테츠 | 7월 15일 (토) 2-4PM   - 박상우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

4. 앙드레 케르테츠의 뉴욕시기의 사진 | 7월 29일 (토) 2-4PM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5. 포토저널리즘과 앙드레 케르테츠 | 8월 12일 (토) 2-4PM   - 이기명 (『사진예술』 발행인)

6. 스냅사진과 그 대가들 | 8월 19일 (토) 2-4PM   - 최연하 (사진평론가, 독립큐레이터)


* 당일 전시 입장권 소지자 강연회 무료 참석

* 이메일 info@sungkokmuseum.org 로 사전 신청가능

케르테츠 패스 30,000원 



Vol.20170610e | 앙드레 케르테츠展 / André Kertész / photography





세상에~
이렇게 더위에 시달리기는 처음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룩 주룩 흐른다.
선풍기도 뜨거운 바람만 분다.
컴퓨터 식히는 날개 소리조차 덥다.

겨울 쪽방은 버텼으나, 여름은 못 견디겠다.
방마다 문 열고 벌거벗은 꼴도 가관이다.
다들 곰처럼 잘 버티는데, 난 못 참겠다.






계단을 내려오니 옆방의 전씨가 한마디 한다.
“아직 수양이 덜 된 것 같네요.”
지옥이 이러면 지옥에서도 도망칠 것이라고 답했다.

길거리에 큰 대자로 누워 자는 노숙인이 부럽다.
겨울은 쪽방, 여름은 노숙이라지만, 그게 안 된다.
길거리에 자리 깔 자신은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도사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서울역에서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마땅히 갈 곳은 없었지만, 더위부터 식힐 요령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너무 추웠다. 죽 끓듯 하는 이 변덕을 우짤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와 공원에 퍼져버렸다.






동네 술꾼들과 어울렸으나,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올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
정선 만지산으로 튈까? 아니면 경주 가는 정영신씨 따라 붙을까?

에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생각하자.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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