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 꿈에 수안스님이 나타나셨다.

'통도사'에 계시는 전각가이자 화가, 시인 등 다재다능하신 분인데, 나에겐 “眞空‘이란 법명을 주신 분이다. 
너무 반가워 큰 절을 넙적 올렸더니,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소식 끊긴지가 십 오년도 더 되었는데, 갑자기 왜 나타나셨을까?
스님께 연락 드리지 못한 건,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내 주둥아리 때문이다.


오래 전, 통도사에서 올라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 때였다.
스님을 모시는 통 큰 방림보살이 호텔 방을 두 개나 잡아두고,
근사한 전시오프닝을 마련했는데. 주연에서 그만 방정을 떨고 말았다.
“스님! 서울역에 한 번 가보이소. 배고픈 놈들이 천진데, 스님이 이라마 됩니꺼?”
화가 난 스님께서 크게 나무라시어, 그 뒤부터 가지 못했는데, 
한 참후 방림보살과 동강에 레프팅하러 오셨다며 정선 집에 들리셨다.
‘夢菴’이란 현판 글씨를 써 주시며 거금 백만 원이나 놓고 가셨는데,
연이 닿지 않았는지, 그 뒤로도 스님이 계신 축서암에 들리지 못했다. 

가끔 스님의 근황이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연락처마저 바뀌어 버렸다.

수소문해 보니 축서암에서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러던 중에 꿈에 나타나시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한편으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도 되었으나, 나더러 조심하라는 경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도 늙었지만, 스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살아생전 만나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작정하여 한 번 찾아뵈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난, 주둥이 뿐 아니라 손가락으로도 상대를 씹어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
상대에 대한 악의는 없으나, 잘 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다.
태생은 그렇지 않았으나, 평생을 기득권자에 당하기만 해 온 처지라
나도 모르게 입바른 악바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까운 친구는 물론 예술계, 특히 사진판에서 더 그렇다.
그러니 ‘다된 밥에 코 빠트린다’는 말처럼 지원이나 도움이 확실했던 일도
뒤늦게 따돌리기 일 수였는데, 기득권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다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모 나는 일에 나서지 않고 살아 그런지,
정치판이나 사진판이나 곳곳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어찌 간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정영신씨가 시골장에서 점쟁이를 만나면, 가끔 내 사주를 물어보는데, 

만나는 점쟁이마다 입 때문에 팔자가 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말년에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된 것같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지만, 상처 준 이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쪽방 촌에 들어 왔다.

빈민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비난 받을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갑 질 하는 자를 나무라며 잘 못을 바로 잡으려했으나, 잘 못 전해진 내용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이야기를 믿고 발발거렸으니, 내 꼴이 어떻겠는가?

그것도 친하게 지낸 믿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일로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글로 옮길 때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비가 들쳐 창문도 열지 못하고, 방안 열기 때문에 컴퓨터도 켜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이틀 동안 한증막에서 곤욕을 치루었으나, 비가 그친 어제 오후에서야 모처럼 공원에 나갔더니,
이준기, 방원길, 변성식씨가 모여 앉아 소주 한 잔 하고 있었다.

술병이 비어 소주 한 병을 더 사오려니 준기씨가 강력하게 말렸다.
이 친구는 어느정도 술이 취하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성식씨와 원길씨 생각은 달랐다.
소주 한 병 사와 세 사람이 나누어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정신 바짝 차려, 주민들이 힘을 모아 권익 찾는데 집중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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