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만난 김지은씨



김지은씨는 서울역 사는 노숙자다.
한 푼 없는 거지지만,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

작년 이맘때는 동자동에 움막 짖고 살았으나,
지난 봄 강제 철거되었다.

여행가방 하나로 살림을 줄였으나, 그마저 짐이다.
어차피 버릴 거지만, 폼 나게 떠나고 싶다.

오늘도 서울역 주변을 서성이며 기다린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지만, 떠날 준비 되었다.



사진,글/조문호



동자동 길가에 있던 김지은씨 움막은 지난봄에 철거되었다.




좌로부터 월간사진 발행인 황성옥,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선생



85년 무렵,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월간사진’사무실에서 진행된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께 듣는다“란 좌담회 장면이다.

당시 월간사진 발행인이었던 황성옥씨와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 선생께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동선생의 지도로 사진에 입문하여 ’내셔널 지오그래픽‘편집장을 지낸 김회중(에드워드 김)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는데,

다들 현역으로 활동할 때의 모습이라 다소 낯설다.



사진,글 / 조문호







살인마 전두환을 절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법을 바꾸어서라도 단죄하지 않고는 역사를 바로 세울 수도 없고,
법도 정의도 아무 것도 이야기 할 수 없다.
어떻게 국민들만 법을 지키고 정의롭게 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된다.


그의 권력욕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었는가?
그런 악질 살인마를 경호하기 위해 낭비하는 국민의 혈세가
매년 8억이 넘게 소요된다니 통탄할 일이다.

12.12사태 책임과 5.18광주시민 학살,
그리고 수 천억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횡령한 죄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했으나 2년 만에 사면하고 말았다.
엮이고 엮이는 더러운 정치권력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라지만,
이것만은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지금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서전까지 내가며 역사를 왜곡시키려 들고,
재물 욕까지 극에 달해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며 뻔뻔하게 버틴다.
은닉 재산으로 의심되는 경기도 용인 땅을 456억원에 매각하고,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호국 영웅들에게 주어지는 ‘태극무공훈장’을
반납하라는 요구도 8년째 거부하고 있다.

지금도 숨겨 놓은 막대한 자금으로 많은 사람들을 주무르고 있으며
수구꼴통 정치인들에게 그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말까지 있다.

그는 분명 사람의 탈을 쓴 악마다.
그를 처단하지 않고는 적폐청산을 할 수 없다.
그부터 응징해야 이명박까지 뿌리 뽑을 수 있다.
문정부의 결단을 촉구한다.

글 / 조문호




5,18 광주시민학살현장을 다시 한 번 돌아보자.

    




































“야야~ 이거 가져가서 반찬 해 무라.”
“괜찮심더. 그냥 놔놓고 파이소”

지난여름 의성 봉양장에서 만난 정겨운 모습이다.

장바닥에 좌판을 벌인 할머니가 잘 아는 아낙을 만나
팔던 농산물을 챙겨주려 실랑이 하고 있었다.
그냥 못이기는 척 받아 가면 좋으련만, 아낙의 마음은 달랐다.
힘들게 농사지었으면 한 푼이라도 더 팔았으면 하는 배려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도 만만찮았다.
뿌리치는 손을 부여잡고 기어이 손에 쥐어주고 만 것이다.
아낙은 무거운 짐 진 듯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전해 준 할머니의 얼굴은 환해 보였다.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쩌랴!
자기밖에 모르는 도시인들이 한 번 곱씹어 볼 일이다.
시골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인정병이
방방곡곡에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진한 쾌감은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장작 팔러 장에 가는 행렬이 오래된 추억을 일깨운다.
그리 많지도 않은 장작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에서 가난의 세월이 그대로 읽혀진다.
네 사람이 이고 진 장작을 다 모아도,
하루 저녁 군불 땔 양밖에 되지 않을 텐데, 도대체 몇 푼이나 받을 수 있었겠는가?

옛날엔 곡식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땔감이었다.
가스나 석유가 대체한 요즘의 연료에 비해 원시적이긴 하지만,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이 장작불이나 화롯불이다.

온돌방에 군불을 때거나 밥을 짓는 등 가정에서 사용한
유일한 에너지가 장작이나 솔가리뿐이었다.
요즘에야 산에 나무가 흔하지만,
예전에는 헐벗은 산이라 나무도 흔치 않았다.







농한기인 겨울에는 대개의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녔는데,
가난한 집은 어린이까지 나무하러 다녔다.
나도 친구 따라 한 번 간적이 있었는데,
빌린 지게가 내 키만 해 질질 끌고 다닌 기억이 난다.

그러니, 장날만 되면 나무전에 장작이나 솔가리 둥치가 많이 나왔다.
아버지께서 나무장사와 흥정해 마루 밑이나 헛간에 사 모았는데,
나무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무게로 달아 파는 것이 아니라 어림짐작으로 매기니 그럴 수밖에..

장작이 타 들어가는 부엌아궁이에 쪼그려 않아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던 추억도 새록새록 하지만,
밥 짓느라 아궁이를 지킨 엄마 옆에 달라붙어 용돈 달라고 칭얼대던 기억도,
화가 난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달려 나오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그런 촌스러움이 그리워서인지, 요즘도 정선만 가면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아궁이에 군불 때는 것은 물론, 도끼로 장작 패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끼 한방에 쩍쩍 벌어지는 쾌감이나,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길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기는 재미를 알랑가 모르겠다.
따뜻한 아랫목에 드러누워 등 찌지는 맛은 또 어떻고...

몇 년 전에는 넘어지는 나무에 치여 발가락이 망가지는 사고도 있었지만,
나무를 쌓아두면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오랜 추억 때문일 것이다.
올 해는 여러 분들의 집안에 장작불 같은 행복의 에너지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위의 사진은 작고하신 광고사진가 김한용선생의 초기사진 ‘장터 길’이고,
아래 사진은 조문호의 '두메산골 사람들'이다. 글을 조문호가 썼다.










바닥에 고인 물을 건너뛰는 두 사진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고인이 된 이형록선생의 ‘흙탕물’과 앙리카르띠에 브레송의 ‘파리 생 라자르 역 뒤에서’란 작품인데,

브레송 작품은 너무 잘 알려진 명작이라 사진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요.


'결정적 순간'이란 작가의 유명세가 한 몫 했는지,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 난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형록 선생의 흙탕물이 훨씬 정감이 갑니다.


각각의 사진이 주는 메시지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으나,

여러분은 어느 사진에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지요.






홈리스들이 왜 역을 안방처럼 생각하고, 서울역을 큰집처럼 생각할까?
역이니까 어디로던 쉽게 떠 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구걸하기 좋기 때문일 것이다.
기나 긴 역전의 세월이 쌓아 놓은 빈자들의 울타리다.
맞은편에 둥지 튼 양동과 동자동은 한 가닥 희망 촌 역할을 한다.






지난 22일은 충무로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들려 낮부터 술을 마셨다.
돌아오다 보니, 서울 역 주변이 마치 전쟁터 같았다. 
총 맞은 듯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는데, 다들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홈리스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멀쩡한 놈이 일은 안하고 빈둥거린다'거나
'술만 마시고, 행패나 부리는 놈'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들여다보면 다 사정이 있다. 더러는 게으름뱅이거나 알콜 중독자도 있으나, 일부일 뿐이다.
오히려 요즘은 그들이 대포폰, 대포통장, 대포차, 바지사장 등 범죄에 악용되기도 한다.






무슨 천형이나 받은 듯 특별한 계층으로 보지만, 노숙자 되기는 아주 쉽다.
정해진 주거가 없는데다 돈 떨어지고,
일용직을 구하고 싶어도 경쟁에서 계속 밀려나면 그냥 노숙자가 되는 거다.





4~50대에 실직한 뒤 고시원 쪽방 다 거치고 찜질방 전전하다
그마저 갈 돈이 없으면 그때부터 노숙한다.
청년층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안 되어 좌절하거나,
또는 계약직 전전하다 막히면 30대 중반부터 노숙자 신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사연이 절절하다.
대개 노숙인이 되는 과정은 질병이나 사고로 노동력을 잃은 사람이 많지만,
사업이 망하거나 실직, 빚보증을 잘 못서거나 가정불화로 나온 사람도 있고,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직업을 택한 경우도 많다.
주로 주먹쟁이나 운동선수, 군인, 예술가등이 그런 직종인데,
그 중 많은 게 운동선수와 주먹쟁이다.






지하도 계단을 지나다 노숙하는 김용규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술 한 잔 하고 가라는 듯 종이컵을 들어보였다.

상원이와 소령이를 거느리고 술판을 벌여놓았는데,
그는 구미가 고향인 씨름선수 출신이다.





김용규씨는 젊은 친구들을 잘 보살펴주어 동생들이 지극히 모신다.
술이 부족하여 오천 원을 꺼냈더니, 상원이가 냅다 달려가 소주 두병을 사왔다.
다들 폭주 하지 않고 서서히 즐기며 마셨는데, 나만 쭉쭉 들이켰다.





씨름꾼 시절의 삿바 이야기에서 부터 몇일 전에 일어났던 싸움이야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시비를 걸어 노숙인과 싸움이 붙었는데,
경찰이 노숙인만 나쁜 놈으로 취급했다며 열변을 토했다.
같이 주먹다짐을 해도 일반인보다 노숙자가 불리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에게 인권이란 없다.







너무 답답하여 “술~ 술~ 술이 원수다‘란 케케묵은 노래를 불렀더니, 다들 질급을 한다.
역무원에게 당장 쫓겨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쫓겨나지 않으려 공중질서를 지키지만, 내가 더 못난 놈이었다.
상원이가 노래 말에 시비를 걸며 ”형! 술이 원수가 아니라 돈이 원수지요“라고 말했다.
조그만 소리로 다시 불렀다. “맞다 맞다 맞았다! 돈이 원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울역 쪽으로 나가니, 노숙하는 김지은씨가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동자동 성민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났다고 했더니, 괜찮단다.






따라갔더니, 진짜 그때사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지은씨 덕에 도시락과 화장지 선물을 받았는데, 타이밍이 귀가 막혔다.

예배와 공연으로 보내야 하는 지루한 시간을 생략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인생을 배우지만, 가끔은 약삭빠른 요령도 배운다.


이러다 사기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2017년 12월 26일 (화) 17:19:06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누가 패자인 홈리스에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지난 22일의 동지 날은 해마다 서울역에서 홈리스 추모문화제가 열리는 날이다. ‘홈리스 행동’을 비롯하여 ‘동자동 사랑방’등 40개 반빈곤인권사회단체가 연대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에서 추진한 행사로,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들의 넋을 기리는 문화제다.

▲무연고 사망자를 애도하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분향소가 마련되어 서울역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이 헌화하기도 했다.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을 알려 추모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홈리스의 복지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거리나 쪽방에서 죽은 무 연고자를 추모하는 자리지만, 무관심한 사람이 더 많았다.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살펴야 한다고는 하나, 말뿐이다.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지하도에서 연명하는 홈리스 이야기를 꺼냈더니, 핀잔을 주었다. 게으르고 술만 마시는 그들은 어쩔 수 없다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너무 열 받아 한 마디 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마라. 네가 그 사람들 사정이나 한 번 들어 봤나? 돈이 사람을 망치는 세상의, 한 희생자일 뿐이다. 어쩌면 돈에 길이든 네가 더 잘 못 산 것인지 모른다.“

▲사망한 홈리스의 이름 위에 국화가 놓여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논리에 순응하지 못해 비참하게 죽었는데, 누가 그들의 죽음에 돌을 던질 수 있겠나? 추모제가 열린 날은 다른 날에 비해 덜 추웠지만, 홈리스의 삶은 일 년 내내 혹한의 겨울이다.

매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나 쪽방 촌 빈민들이 300여명이나 된다, 그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절실하지만,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장례라도 제대로 치루어 주어야 한다.

▲홈리스 추모제가 열리는 서울역 야경

그 날 서울역광장에서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빈민들을 추모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주거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죽어서나마 영혼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추모제에 참여할 기력도 없는 홈리스가 주변에 웅크려 있다

그 많은 무연고 사망자 중에 영정사진이라고는 세 사람 밖에 없었고, 다들 이름만 적혀 있었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그토록 기구하여, 죽어가면서도 자기 얼굴 한 장 남기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홈리스 서정철씨가 촛불로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추모제에서는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법률상담, 홈리스 사진관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소리 없는 이들의 삶을 기록한 ‘홈리스 생애기록’이란 책도 출판하여 나누어 주었다. 홈리스들은 책 자체도 짐일 뿐인지라, 책보다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끓여 준 동지팥죽을 더 찾았다.

▲홈리스 김지은씨가 '동자동사랑방'에서 준비한 동지팥죽을 받고 있다

오후7시부터 시작된 추모제 본 행사에는 다들 촛불을 들고 무연고 사망자들을 넋을 기렸는데, '동자동 사랑방' 차재설씨가 나와 안타까운 추모사를 낭독했다. 노동가수 박준씨와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씨의 노래도 있었지만, 마음에 불을 지핀 건 김가영씨의 추모노래였다. ‘새로운 선택’이란 노래도 마음 아팠지만,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라고 열창한 노래에 피가 끓었다.

▲가수 김가영씨가 '새로운 선택'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추모공연이 끝난 후 죽은 홈리스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서울역 구내를 비롯한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추모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쳤다. “홈리스 차별을 철폐하라”, “홈리스 인권을 보장하라”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1세라지만, 홈리스의 평균수명은 48세라는 걸 잊지 말자.

▲'홈리스 차별을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빈민들

홈리스의 죽음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방치한 죽음이다. 그들도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 빈소도 빌리지 못한 채, 냉동 보관되다 화장터로 직행한다. 더 이상 홈리스의 죽음을 방치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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