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6일부터 보름 가까이 더러 누워 낑낑거렸다.
창 너머로 유혹하는 봄바람도,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도 못들은 체, 매일같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처음엔 정선에서 몰고 온 감기몸살로만 알았으나, 숨을 쉴 수 없는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검사 해 보더니, 폐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언어장애는 있었으나, 담배 탓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병원에 가보라는 지인들의 충고를 묵살하였더니, 기어이 올 것이 찾아오고 만 것 같았다,

호흡기에 이상이 있어도 갑자기 이런 경우가 올 때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월부터 전시하기로 되어있는 ‘산골사람들’ 사진을 전해주고 오기 위해

천장 위에서 끄집어낸 액자 때문인 것 같았다.

14년 동안 부엌아궁이에서 나오는 끄름에 쌓여 있었는데, 마스크도 하지 않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하는 장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평소의 미련한 고집을 차마 자백할 수 없었다.

”숨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일만 반복하는 무료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일체 병실을 알리지 않은 채, 문병조차 사양했다.

티브이는 물론 핸드폰마저 꺼 버렸으니,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정영신씨가 노트북을 병실에 갖다 주었으나,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그냥 고통 없이 죽는 주사 한 방에 조용히 눈감고 싶었다.






별다르게 진행하는 치료도 없이 약만 받아먹는 처지라,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안고 퇴원해 버렸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지만, 술 생각과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니, 술도 한 번 마셔보고, 담배도 한 대 피워보자.

모든 것이 사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니, 콤펙트카메라만 호주머니에 넣고 인사동 나들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날은 박진화씨의 드로잉전이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날이지만, 숨이 차 4층까지 올라 갈 기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으로 들어갔는데, 조해인시인과 사진가 이수길씨가 먼저 보였다.

옆 자리에는 윤성광씨와 박혜영씨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눈에 꽂히는 그림 한 점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미 저승으로 떠난 적음선사의 ‘파적’이란 시에 신준식씨가 그린 그림이었다.

두 사람 다 끼가 있는 꾼이었지만,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한 사람은 암자에서 술이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한 사람은 술이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이 무슨 암시인가?

‘가을밤의 춤’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는데, 그 이글거리는 담배불의 유혹에 온 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뒤늦게 다인 최종선씨와 공윤희씨도 나타났고,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도예가 김정범, 터너 이동환씨 등 여러 명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가히 인사동 아지터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 자리잡은 조해인, 이수길씨와 조용하게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는데, 온 몸에 이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말 없이 술집을 나서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소관이라며...





몇 걸음 걷다 한 참을 쉬어 가야하는 인사동의 밤거리가 낯설어 보였다.

그 늦은 밤에도 땅을 파 뒤집고 있었고, 마치 조계사의 야경이 저승 풍경처럼 음산했다. 




적음의  '파적' 부분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다니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사진,글 / 조문호











한 해를 보내는 지난 31일은 왠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몇 날을 송년회 핑계대고 퍼 마셨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종각 타종행사 같은 곳에 갈 수는 없잖아.

마침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연락이 왔다.
낙원상가 밑의 ‘다리 밑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관우선생 단골집이지만, 좁아도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다.
마치 어린 시절 짚동 사이에 들어가 놀던 틈바구니 생각도 나지만,
집 이름이 너무 야하지 않은가?

인사동에 나가보니 낙원상가 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몇 사람이나 넘어졌다.
연탄재라도 좀 뿌려야 했으나 요즘은 연탄재도 흔치 않다.
그런데, ‘다리밑 집’에 문이 잠겨 있었다.
연락했더니, ‘낙원아구찜’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관우선생을 비롯하여 송재엽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미녀가 두분이나 있었다.
관우선생이 도예가와 큐레이터라고 소개했는데, 큐레이터라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사슴 눈처럼 큰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애잔함이 가득한데,
약간 도툼한 입술은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것 같은 강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눈치 챈 송재엽씨가 얼른 자리를 바꾸었다.
이런 저런 씨잘데 없는 이야기 나누며, 소주로 한 해의 여독을 씻었다.

이차로 다른 곳에 간다지만, 난 서울역으로 가야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즈음이라 노숙하는 친구들과 한 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최고의 부자나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이나 술마시고 노는 건 별 다를 바 없다.
쪽방 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사는데 별 걱정은 없지만,
노숙자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욕심 부릴 게 없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대로 나누어 먹는 그들이 진정 비운 자라는 생각도 한다.

패트 소주 두병과 육포하나를 사들고 서울역으로 같다.
개찰구를 나오니 지하도 한 쪽 구석에 낯 익은 자들이 보였다.
이종민, 김종학, 김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낄낄거리고 놀았다.
총무를 맡고 있다는 김종학은 ‘종학이를 아느냐?’며 계속 천원만 달랬다.
서울역에서 종학, 종철, 종민, ‘쓰리 종’을 모르면 간첩이라며 유세했다.

마침 세밑이라 그런지 온정을 나누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외국인 가족이 각기 봉투를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빵 하나 우유 하나, 양말 한 컬레, 핫펙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난 고맙다며 사진까지 찍었으나, 다들 시큰둥했다.
술이 취해 했던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가끔은 금지된 노랫가락이 튀어 나오기도 했는데,
지나가는 역무원들이 제지시키며 나가라고 종용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동자동 최씨는 ‘다시서기’직원들이 휠체어로 실어갔다.

이종민이가 카메라를 달래서 주었더니, 이런 저런 모습을 찍어댔다.
마침 경찰의 강제 해산에 직면해 어지러운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선물이 담긴 봉지는 챙기지도 않은 채 그냥 두고 갔다.
그런데, 정리를 하고 나니, 종민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가져간 카메라는 5년 전에 삼십만원에 구입한 NIKON Coolpix P310으로 지금은 단종 된 카메라다.
술자리에서 마구 사용한 고물이라 돈은 되지 않지만, 오늘 찍은 사진파일이 걱정되었다.
그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미인도 미인이지만, 같이 마신 친구들의 초상사진도 많았다.

다른 역으로 옮긴다면 모르겠으나, 서울역에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한편으로 배신감도 일었으나, 아무래도 물욕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겐 소중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쓰레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는 듯...
그들 무리에 합류하고 싶으나, 추위가 두려워 탐색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빼앗긴 무장해제 상태가 되니 지갑에 돈 떨어지듯.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관총 급인 라이카를 챙기러 동자동 방으로 올라갔다.
이 카메라는 고향후배인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인데, 

좋기는 하지만 술자리나 현장에서 막 쓰기는 불편하다.
찍히는 사람들도 피해의식부터 느끼니, 큰 행사나 많은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카메라를 챙겨 서울역지하도로 내려갔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어느 노숙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 깔고 누워 있었다.


하는 수 없어, 해 바뀌는 시점에 함께 축배 들기로 약속한 녹번동 정영신씨를 찾아갔다.
오늘 일기장에 올릴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내 얼굴 한 장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 밀었다.
신년 인사를 겸한, 강한 의지가 담긴 그런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5일 오후3시경, ''평창동계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선발된 6개국의 미녀들이 인사동에 나타났다.

평창올림픽을 알리는 역할에 앞서,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끼려 ‘통인가게’를 찾은 것 같았다.

인사동 ‘통인가게’야 말로 대를 이은 오래된 가게인데다, 도자기, 고가구 등 다양한 전통 민예품들이 널렸으니,

한 군데서 골고루 볼 수 있는 마땅한 가게라 생각되었다.

더구나 지하 ‘통인화랑’에서는 도자전이, 5층 ‘통인옥션’에서는 ‘조선의 백자’전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평창올림픽 홍보대사로 뽑힌 외국 미녀들이 하나같이 키가 너무 컸다.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으니, 아무래도 천장 낮은 쪽방은 머리 닿을 것 같았다.
솔직히, 사람보다 마네킹 같았다. 옛날에는 복스럽게 생긴 여인이 미인이었을 텐데...

먼저, 그들을 맞이한 ‘통인가게’ 김완규대표가 미녀들에 둘러싸여 기념사진부터 찍었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니, 옛날 프레이보이 잡지에서나 본 듯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프레이보이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둘러 선 미녀 사진 말이다.






1층 현대공예품 매장에서부터 2층 전통공예품, 3층 되살림가구, 4층 고미술품 매장까지

차례대로 돌아보았는데, 외국 미녀들이 우리나라 고가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5층에서 열리는 ‘달항아리’전을 본 후, 옥상에 마련된 연회장에 들렸다.

미녀들은 이계선관장이 정성 것 준비한 차와 떡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었고,
남자들은 와인을 마셨는데,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술이 얼큰하게 올랐다.






지하에서 전시하는 임현준씨 도예전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김완규 대표 따라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동갑내기인 김완규씨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다며, 요즘은 열심히 산에 다닌다고 했다.


난, 정선의 만지산외는 가지 않는데다, 운동도 전혀 하지 않으니 어쩌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맡길 수밖에...

미녀가 미녀로 보이지 않고, 마네킹으로 보일 정도니, 아마 인생 끝난 것 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완규 '통인가게' 대표방에 있는 서양화가 안창홍씨의 스케치가 재미있다.










'통인화랑'에서 전시되는 임현준씨의 도자작품

























지난 27일 오후6시, 아트 디렉터 안애경씨를 만나기로 했다.
몇 일전부터 약속된 만남이었으나, 꾸물대다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약속장소인 정동의 영국대사관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더니, 바로 옆자리에 서 있었다.
사과할 겨를도 없이, 반갑게 맞는 그를 따라 맞은편의 정동국밥집에 들어갔다.
그 국밥집은 신부님이 운영하는 식당인데, 그 수익금으로 동자동 빈민들께 매주 국밥 대접을 한다고 했다.

다섯 그릇 팔아 배고픈 한 사람의 배를 채운다니, 가능하면 여기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나도 몰랐던 정보라 고맙기도 했지만, 그녀의 마음 씀이 너무 예뻤다.

안애경씨는 지난 5월 초순 '통인' 김완규씨가 마련한 오찬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차림새는 20대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50대는 되어 보이는 완숙한 작가였다.
외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국내 예술행정의 문제점도 훤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파격적이면서도 참신하여 배울 바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사는 동자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버이날을 기해 그들에게 돌려주는 빨래줄 전시를 한다고 했더니, 꼭 들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날은 내 핸드폰에 이상이 생겨, 양동 방향에서 헤매었다고 했다.

대신 양동의 쪽방들을 돌아보며 빈민들의 생활환경을 편리하게 꾸밀 방안을 연구했다고 한다.

쪽방이 몰린 복도 한 켠에 조그만 탁자라도 하나 놓으면 방에만 박혀 사는 주민들이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그 날 돼지국밥을 먹으며 재미있는 제안을 해왔다.
7월 말 신월동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조그만 축제를 마련하는데, 사진을 찍어 줄 생각이 없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동자동에서 딴 곳으로 마음 뺏길까 염려되었으나,

어린이들과 어울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빨 빠진 마귀 같은 꼬락서니로 낄낄거리면 얼마나 재미있어 하겠는가?

그 좋아하는 모습의 이미지가 벌써 그려진다.

어린이들과 마음대로 놀려면 빨리 허리부터 완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파주출판단지에서 개최할 북 페스티벌에 자신의 기획안을 프리젠테이션하여 결정되었다고 했다.

, 자연, 미래,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운 만남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장터처럼 난장을 펼치고 싶다며 장터사진을 찍어 온 정영신씨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예술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다양한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영국대사관 옆의 성당 정원으로 안내했는데, 그 성당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여지 것 조선일보 미술관을 더나들며 여러 차례 그 골목을 다녔지만,

벽돌과 돌을 사용해 지은 로마네스크 식의 멋진 성당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검색해 보니, 1926년에 준공한 성공회의 서울교구 건물로 되어있었다.

얼마나 여유 없이 살았으면 옆으로 시선한 번 주지 못했을까?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성당 건축물을 두고, 외국만 가면 성당건물을 찾아다닌다.


모르면 바보나 마찬가지다. "이 바보야 정신 차려라.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9월30일 오후6시부터 인사동 ‘툇마루’에서 ‘인사모’의 9월 정기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몇 차례나 빠진 터라, 하던 일을 미뤄두고 나갔다.

그 자리에는 회장이신 민건식 원로변호사를 비롯하여, 대법관 지내신 박일환 변호사, 선우영 변호사,

‘통인가게’ 김완규회장, 검찰지청장에서 이대교수로 말을 갈아탄 조균석교수, 해병대 장성출신인 윤경원씨,

하나은행 박상균 지점장, 사업가 박원식, 강윤구, 송재엽사장, 테너 이동환, 화가 류재춘씨 등 열 세 명이 자리했는데,

이 날도 저조한 참석률이었다.

막걸리 잔을 나누며,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중에 민회장 께서 느닷없는 인쇄물 한 장씩을 나누어 주었다.

마치, 무슨 성명서라도 발표할 듯한 의아한 분위기였는데, 읽어보니 ‘자화상’이란 늙어감에 대한 소회가 적혀 있었다.

민회장께서는 "박정희처럼 총 맞기 전에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인사동을 위한 모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다, 이미 관광지화 되어버린 인사동에 대한 미안함도 깔린 것 같았다.

다른 분으로 바꾸어 참석률이라도 높일 생각인 것 같았으나, '통인'의 김완규씨가 손사래 쳤다.

‘인사모’ 회장직은 종신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회장님께서 쓰신 ‘자화상’이란 글은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 글에는 늙어감에 따른 안타까움이 묻어났으나, 산 다는 게 뭔지 되묻고 있었다.

‘덧없는 인생이라지만 그런대로 오래 살았구나.
그럭저럭 지나 온 나날을 돌이키면서 남은 세월은 얼마나 될지.
네 얼굴을 보라 뭐 그리 불만이 많은 가?
인간이란 본래 그런 것이야.
쓸데없는 미련과 욕망은 버렸어야지.
젊은 시절, 너나 나나 밝은 미래를 꿈꾸며 힘차게 날개 짓 했지.
빛나는 이상, 행복, 환회 등 모든 것이 영원하리라 믿었지.
(중략)
불안과 고통, 절망에서 해방되는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도 있다며,
노구를 추슬러 나마지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자는 말씀이셨다.

자리가 파한 후, 김완규, 조균석, 이동환, 송재엽씨 등 다섯명만 남아 낙원동 ‘다리밑집’으로 갔으나,

더 이상 술 마실 형편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혼 줄 났던, '툇마루' 막걸리의 뒤늦은 취기로, 삼십육계 줄행랑 친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낙원상가 계단 밑에 둥지 턴 ‘다리 밑’ 집은 추억을 일깨우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이곳은 본래 담배포를 개조한 곳이라 간판도 없다.
탁자도 세 개 뿐이라, 열 댓 명 남짓 들어가면 꽉 찬다.
‘통인가게’대표 김완규씨는 외국 손님을 이곳에 안내할 정도로 단골이다.

안주로는 감자부침, 닭똥집, 뻔대기찌게 등이지만, 생맥주에 막걸리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김완규씨가 개발한 이 ‘막맥주’를 마셔보진 못했지만, 마셔 본 사람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통풍에는 맥주가 쥐약이라 삼가긴 하지만, 마시고 싶은 마음은 꿀떡같다.

그런데, 입구에 자리가 있어도 굳이 담배가 진열된 계단 밑을 찾아간다.
키 큰 사람은 계단 턱에 걸릴 것 같은 낮은 곳이지만, 오랜 기억들을 끌어내는 아기자기함이 있어 좋다.

밀폐된 좁은 공간의 은밀함에 더해 상대방과의 대화집중력에 그지 그만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어린 시절 추억이란 게 골방의 구석진 자리나 뒤 칸의 숨은 공간들을 아지트 삼아 놀던 기억이다.

심지어 시골에서는 볏단 틈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일단 어른들의 시선에서 벗어 날 수도 있었지만,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 좋았던 것이다.

지난26일 오후7시 무렵, 김완규, 송재엽, 연극박사 이동일, 윤경옥 내외와 어울려 다리 밑으로 기어들었다.

술집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 날의 화제는 어린 시절 이야기 일색이었다.

김완규씨는 어릴 적 병아리를 무척 좋아 했다고 한다. 용돈만 생기면 병아리를 사 모아 일흔 여섯 마리까지 모았단다.

병든 병아리는 마이신까지 사 먹이며 애지중지 길렀는데,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모두 가마솥에서 삶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단다. 조금만 더 키워 야생으로 키울 야심찬 기대가 순식간에 물거품 된 것이다.

이동일씨는 집에서 키우던 개 네 마리가 한꺼번에 쥐약을 먹어 안타까워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고,

윤경옥씨는 팔려가던 개가 자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린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말 못하는 가축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이런 저런 옛 생각에 빠져 들었다.

모두들 불편을 감수하며 이 좁은 집을 찾는 것은, 지난 시절의 추억도 추억이지만, 사람 사는 정이 그리워서일게다.

요즘은 이 집도 손님이 많아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인사동에 추억과 낭만을 파는 술집은 없는가?

사진,글/ 조문호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통인 오페라 콘서트'가

지난 3월26일 오후 5시부터 ‘통인가게’ 5층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열렸다.


객석을 가득 메운 무대는 바리톤 박태환씨의 ‘시골양반들, 내 말 들어봐요’로 막을 올렸다.
이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오페라,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소프라노 이은희씨가,

‘별은 빛나건만’은 테너 이동환씨가 열창했다. 그 외에도 ‘칼멘’중의 ‘투우사의 노래’ ‘라보엠’중의 ‘사랑스런 아가씨여’,

‘무정한 마음’, ’이탈리아 거리의 노래‘,’성스런 사원에서‘ 등 주옥같은 아홉 곡과 앵콜까지 더해,

객석을 오페라 감동에 흠뻑 적시게 했다.

객석을 쩌렁 쩌렁 울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소리들은 관객들을 비애와 환희에 빠져들게 하였는데,

특히 머리보다 가슴으로 노래하는 소프라노 이은희씨의 격정적 감정표현은 보는이로 하여금 슬픔에 빠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애원하는 대목에서는 객석에 앉은 ‘통인가게’ 대표 김완규씨 손을 잡고 불렀는데,

갑자기 무대에 끌려나온 김완규씨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마치 미녀에게 프로포즈 당한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것이다.

맞은편에 아내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 더 난처했을 게다. 아무튼 귀만 즐거운 게 아니라 눈까지 즐겁게 한 무대였다.

테너 이동환씨의 재치 있는 오페라 설명이 감상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리고 오페라 중 ‘통인옥션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이민혁씨의 작가소개도 있었는데,

전시 중인 “탱고 땅고 땡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마침 전시작들의 그림 소재가 율동적인 탱고 춤을 형상화한 것이라, 오페라공연장 배경으로 금상첨화였다.

사진,글 / 조문호


































































인사동 통인가게김완규회장이 마련한 정월대보름맞이 과메기파티가 통인가게 상광루에서 열렸다.

지난 22일 오후5시경 열린 이 모임은 과메기와 늦겨울 추위를 함께 맛보는 자리였다,

통인에서 해마다 모임을 가져왔으나, 올해는 공교롭게도 정월대보름날 잡힌 것이다.

 

매콤한 추위에서 먹는 과메기의 진 맛은 마누라를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지경이라는데,

포항에서 가져온 이 곳 과메기는 꼬들꼬들하게 기름지게 잘 말라 여느 식당의 과메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이 연회만은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참석해, 해마다 그 진 맛을 보는거다.

그러나 아무리 과메기 맛도 맛이지만, 어디 반가운 사람들의 정담에 비하랴!

대개 새해 들어 첫 만남이라 과메기 쌈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술술 말아 먹은 것이다.

 

아직 연회장 매화나무의 꽃은 피지 않았지만, 예쁜 여인들의 미소가 넉넉했으니 그마저 부족함이 없었다.

연회석을 자주 만드는 관우 김완규씨는 왜 부부가 함께하는 자리보다 혼자 노는 따로 국밥을 좋아하는지?”

모두들 궁금해 하지만, 본디 옛날 한량들이, 어디 마누라 데리고 노는 것 보았는가?

그리고 이번 토요일에는 크래식기타와 만돌린으로 풍악까지 한 판 울린다니 기대된다.

 

이 날 모임에는 통인 김완규회장을 비롯하여 성악가 이동환, 화가 김양동, 에밀리 영, 최석운, 황주리, 건축가 김동주,

도예가 김정범씨, 라선영 작가, 한만영, 조균석, 손수호 교수, 편완식, 이광형 기자, 사업가 민호기, 황태인, 신재철,

황윤식, 윤경원, 손제희, 김성욱, 변현숙, 이방주, 감정규, 박상금, 정성기, 정미선, 손동범, 정진수, 강윤구, 강봉섭,

송재엽, 미혜, 김보선, 오만철, 손혁수, 서장원, 이마리, 강혜숙씨 등 각계 명사 40여명이 참석하여 상광루를 북적였다.

 

그러나 반가운 사람들 만나 사진 찍기 바빠, 과메기 먹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술이야 한숨에 쭉 들이키면 되지만, 과메기는 김, 미역, , 상추, 마늘, 고추 등 이것 저 것 챙겨 넣을 것이 많아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과메기가 많이 남아 몇몇 사람은 도시락을 싸기도 했지만,

난 마누라에게 상납하려 비닐장갑에다 과메기 세 마리와 파, 미역만 좀 챙겨 넣었다.

비닐장갑에 바람을 불어 넣었더니 마치 멋진 조각품 같았다.


"어디 예술이 따로있냐? 재미있게 사는게 예술이지..."


 







































술 취해 손제희씨와 황홀한 포즈까지 취하며 작별인사까지 했으면, 빨리 집에 가야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가지 못하듯  유목민에 또 들린 것이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

이수호선생과 이행자시인, 이도흠교수가 계셨고,

퇴청하는 김진하씨를 만나 급히 카메라부터 잡았으나, 그만 초점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수호선생 팀에 어울려 또 한 잔 걸친 건 좋았은데, 결국 마누라 줄 과메기를 꺼내고 말았다.

본래 음식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니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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