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에는 원로시인 강 민 선생과 소설가 김승환 선생께서 전시장을 찾아 주셨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페친이라 알고 오신 것 같았다.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추운 날씨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진보다 나를 만나러 오셨기에,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강민 선생님께서는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 하셨다.
찾아 간 곳은 길 건너편 골목에 숨은 ‘호미곳“이란 식당이었다.
‘문학의 집’ 가까이 있어 문인들이 자주 드나 더는 밥집이었는데,
십 오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선생님도 십 여 년 동안 단골이셨다는데, 싱싱한 해산물이 주 메뉴였다.
시원한 대구탕에다 소주까지 곁들였더니, 엊저녁에 다친 속이 다 풀렸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고나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책 판돈 삼 만원만 집어넣어 왔는데, 술값이 좀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언제 읽었는지, 강민 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삼 만원이라도 꺼냈으나, 막무가내셨다.
매번 신세만 져, 모처럼 밥 한 끼 대접하려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후, 인사동에서 사드릴 작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돌아가시는 두 선생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작년, '장에 가자'전에서 마지막으로 찍었던, 고 김동수선생



지난 6월1일, 예정에 없던 인사동 오찬모임에 나갔다.
오래 전부터 시인 강민선생과의 약속을 못 지켜, 늘 마음에 걸려 왔던 터다.
마침 오후6시에 박진호씨의 사진전 오프닝도 있어, 겸사겸사 전화를 드렸더니,

오후1시쯤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만나잔다.

전 날 밤 애(愛)편내 우울증 풀어 주려 대작하다, 너무 과하게 마셨다.
술김에 광기넘친 사랑 놀음까지 했으나 잠이 안 왔다.
페북에 들어가 씰데 없는 댓글 질로 날 밤을 깠으니, 몸 조시는 보나마나다.

정오 무렵, 마즙 한 잔 마시고 ‘포도나무집’으로 나갔더니,
강민선생 뿐 아니라, 소설가 김승환, 화가 강녹사, 시인 장봉숙선생도 함께 계셨다.
아마 장봉숙선생께서 오찬자리를 마련하신 모양인데, 완전 불청객이었다.
모처럼 친구 분끼리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데, 꾸어다 놓은 보리쌀 자루처럼 지키고 있었으니,
솔직히 밥맛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속은 쓰리지만, 된장국에 밥 말아먹고, ‘예당’에서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강민 선생께서 죽어가는 친구들이 많다는 한탄이 나왔다.
처음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신봉승선생 말씀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김동수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 것도 제법 지났단다.
정말 믿기기 않는 소식이었다. 어찌 그 걸 몰랐는지...

김동수선생은 오래전 ‘민속박물관장’까지 지낸 로맨티스트다.
내가 인사동에 사무실 두고 있을 땐, 선생께선 낙원동에 사무실을 두고 계셨다.
인사동에서 만나기만 하면, 같이 술 한 잔하자는 말씀을 하셨으나, 미룬 적이 더 많았다.
친구들과는 매일같이 퍼 마시며, 자주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김동수선생을 마지막 본 것은 작년 ‘아라아트’에서 가진 '장에 가자'전 에서다.
오프닝 때도 오시고, 그 다음 날도 오셨는데, 그게 마지막사진이 될 줄이야...
집에 돌아가시며, 예전에 전시한 ‘인사동 사람들’ 사진 값을 못 주어 미안하니,
술 한 잔 거나하게 사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이제 저승 가서 마시게 되었구나.
가는 길 순서가 없으니, 강 민 선생보다 내가 먼저 갈 지 어떻게 알겠나?
평소 생각대로 재미있게 살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강민선생께서 몸이 불편하셨지만, ‘푸른별 이야기’에 들려 막걸리 한 잔 더했다.
아무 얘기 없이 술만 홀짝거리며, 김동수선생을 추억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근간에 선생님 묘소 찾아뵙고, 꼭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2007년 2월 인사동 '공화랑'에서 전시한 '인사동 사람들'의 김동수선생


오랜만에 만난 인사동 사람들, 좌로부터 강녹사, 김승환, 장봉숙, 강 민선생



















좌로부터 김승환, 박정희, 강민, 추은희, 심우성, 장소임, 채현국, 신경림, 김희연, 장경호씨, 앞엔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민선생의 생신기념 오찬회가

지난 3일 인사동 가회에서 있었다.

 

끈질긴 감기로 어렵사리 나갔더니, 인사동은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옷을 너무 두텁게 입고나와 걱정스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돌아보니, 그림 그리는 장경호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재환선생 전시 때문에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깜빡 잊어버린 일을 새겨 주었는데, 시간이 남아 함께 갔다.

 

가회오찬장에는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여럿 나와 계셨다.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 시인, 소설가 김승환,

김희연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요즘 유명세를 타는 채현국선생,

도서출판 답게장소임대표 등 아홉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본래 2월이 생신이었던 강 민선생께서 따뜻한 3월로 바꾸셨다는데,

답게출판사 장소임씨가 매년 생일 오찬회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풍성한 음식에 배 두드려가며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한 때 탄광을 운영하신 채현국선생의 말씀으로는,

그 당시 회사 경리직원이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소임씨라는 것이다.

회사에 강도가 들어 와 금고에 있는 돈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죽을힘을 다해 돈 보따리를 잡고 늘어져 기어이 뺏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감한 소녀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신 채현국선생과 신경림선생은 키가 엇비슷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어느 분이 큰지 여쭈었더니, 신경림선생께서 좀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민 영시인도 키가 작은 분이나, 그중 나아 항상 어깨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 그런데, 두 선생님을 나란히 세워 확인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회입구에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 민, 김승환, 신경림, 장경호씨만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재환선생의 전시 개막식에 가려면 시간이 남아 예당에서 한 잔 더 하실 모양이었다. 

감기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인사동 거리나 쏘다녔으면 좋으련만,

시간만 죽이다 학고제 가야 했다.

 

강 민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사진,/ 조문호












































 





인사동 터줏대감이신 시인 강 민, 소설가 김승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께서 모처럼 인사동에 나셨다.

‘툇마루’건물 1층에 새로 생긴 '나주곰탕'이 괜찮다며, 세 어르신께서 오찬모임을 가진 것이다.

복분자를 반주로 맛있게 드셨는데, 심우성선생은 다음 달 넋전공연을 앞둬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날은 돈을 부쳐왔다며 선생께서 밥 값을 내셨다. 사실 세 분 중에는 주머니 사정이 제일 낫다.

여관비나 식권을 대주는 후배도 있고, 원고료도 가끔 들어오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난 후, 옛 날에 즐겨 다니신 인사동 술집들은 어디였는지 여쭈어봤다.

80년대 중반은 ‘실비식당’이나 ‘하가’였지만, 그 이전 선생님들께서 다니신 곳이 궁금해서다.
관철동을 주 무대로 오가던 문인들이 70년대 후반부터 하나 둘 인사동으로 옮겨왔으나,

갈만한 술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참 뒤에는 천상병시인의 부인께서 운영한 찻집 “귀천”이나

“누님손국수”에 자주 다녔고, 그 밖에 '사천집', '이모집' 등이 기억난다고 하신다.

‘인사동 사람들’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시간죽이다, 심우성, 김승환선생은 먼저 들어가셨다.

강민 선생따라 술집을 찾아나섰으나 ‘유목민’은 아직 문이 걸려있고,‘푸른별 주막’은 청소가 한 창이었다.

그래도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막걸리와 노가리를 시켰다.
물 뿌려 빗질 한 후라 먼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랜만에 맡는 먼지 냄새에 옛 생각이 왈칵 밀려왔다.

80년대 ‘실비집’에 들려 청소를 지켜보며 술벗들을 기다리던 생각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인사동을 찾는 예술가들은 벗이 그리워 인사동에 나올게다.
예전에는 핸드폰이란 게 없어, 무작정 나와도  벗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화통을 몸에 달고 다니지만, 더 만나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상대를 배려한다지만, 어쩌면 마음의 벽이 두터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강 민 선생도 술이 고파 인사동을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서일게다.
인사동에 그 많은 술집들이 널렸지만, 굳이 문 닫힌 뒷골목을 배회하는 것도,

행여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날까하는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다.

낭만은 사라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인사동,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사진,글 / 조문호





















오늘 아침, 전시 디스플레이에 쓸 재료 구입하러 청계천에 나갔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인데도, 육 만원이나 날아갔다.
자동차 정비소에 맡긴 차는 브레이크 라이닝 마모로 드럼까지 갉아먹었다는
연락에 골머리를 앓는데, 마누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 강 민선생님과 인사동 있는데, 점심 먹지 않았으면 ‘툇마루‘로 와”
마음이 딴 곳에 쏠려있어 밥 생각은 없었으나, 안 갈 수 없었다.
‘툇마루’에는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김가배시인과 소설가 김승환선생도 계셨다.
다들 식사가 끝나가는 중이라 급하게 된장비빔밥 한 그릇을 해치웠다.

식사 중에 나온 이야기는 김전대통령의 서거를 국면 전환용으로 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수언론들은 김전대통령께서 변절해 합당한 과거사를 “통합과 화합의 승부사”로
추켜세우는 등, 국정교과서문제와 물대포 맞아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에 대한
들끓는 여론을 덮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 정치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생전에는 박근혜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기에, 현 정권에는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가시가 뽑혔으니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그렇지만 하나같이 장례식장에 나와
무릎을 조아리는 모습에 정치인의 비열한 양면성을 다시 한 번 본다.

고인께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했듯이,
별 짓을 다 해도 새벽은 올 것이다. 더 이상 고인을 욕되게 하지마라.

김영삼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영면을 빈다.


사진:정영신,조문호 / 글: 조문호

















몸이 아픈 강 민시인은 단골식당에서 밀려남을 슬퍼하고,
음유시인 송상욱씨는 낙향하자는 사모님 채근에 슬퍼한다.


덩달아 심우성, 김승환선생까지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한다.

그렇게 하나 둘 떠나가고, 누군가 그 자리를 메우는 게 세상이치지만,
인사동 영혼과 그 낭만을 이을 자가 없으니 가슴 아프다.

‘툇마루’ 비빔밥으로 허기 메우고, ‘인사동 사람’ 맥주로 시름 달랬다.



인사동 / 2015, 10, 6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터줏대감들 만나러 가는 날이다.
그 분이 바로 시인 강 민선생과 민속학자 심우성선생이시다.
강민 선생께서는 시로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고, 심우성선생은 몸으로 인사동 아리랑을 추신다.

두 분 다 인사동을 너무 짝사랑해, 인사동 아리랑고개로 넘어 가시겠단다.

지난 17일 오후3시 무렵, 두 분을 만나러 인사동 ‘예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강 민 선생을 비롯하여 소설가 김승환, 유금호선생, 그리고 시인 이애정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옷상자를 챙겨든 심우성선생께서 싱글 벙글 들어오신다.
대학로에 공연이 있어 상복 한벌 지어 오셨는데, 삼일동안의 출연료 대신 옷 한 벌 지어 달랬단다.

‘유목민’으로 술 마시러 가자는 강민선생의 말씀에 심우성선생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오늘은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서둘러 일어나신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겨 복분자에다 민어회를 시켰는데,
그 술값을 유금호선생께서 다 내 주시어, 한시름 놓게 했다.

 

뒤 늦게 심우성선생께서 재 등장하시어, 복분자 한 병 추가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7일,  강민선생을 뵙기위해 인사동으로 나갔다.
일에 빠져 약속시간을 20분이나 늦어 송구스러웠다.

 

강 민, 김승환선생과 ‘포도나무집’에서 식사하며 딸기 술도 마셨다.

 

이차로 간 ‘유목민’에서는 이행자시인과 심우성선생,

장경호씨를 만났고, 늦게는 정기영, 허미자씨도 왔다.

 

해삼과 굴에다 밑반찬으로 더럽 까지 나와 술상이 그득했다.

낯 술에 약한데다 막걸리를 데워 먹었더니, 금세 올랐다.
술 취하면 돌아다니는 버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김주대시인의 문인화전과 조성제씨의 ‘우포늪’전에 들렸다.
인사동거리에서 김명성, 김주대 시인과 박진화 화백도 만났다.

늦게 간 ‘무다헌’에서는 너무 취해 모두 잊어버렸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 보니 배성일씨가 와 있었고, 장경호씨는 취해 있었다.
주인장 강고운시인을 갑질 행세한다며 나무라고 있었다.

요즘은 갑의 수난시대다.
독수리도 까마귀 무리에 쫓기는 시대란다.
집에서도 갑보다 을이 더 편하던데, 왠 갑질 논쟁일까?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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