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광복절 노래가 무색한 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 온 사진에는 광화문광장 시위에 일장기까지 등장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손아귀에서 벗어 난지 75년이 지났건만,

친일 청산은 커녕, 오히려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란 전시 제목이 실감났다.

 

다시 한 번 미치광이 전광훈 개독집단과 꼴통 보수 세력이 친일 잔재라는 걸 입증했다.

그 뿐이던가?  맞장구치며 부추기는 보수언론이 더 문제다.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를 씹는 보수언론 논리에 귀가 막혔다.

 

독재자 이승만의 일제 계승과 무고한 민중 학살을 몰라서 하는 말이던가?

그렇게 일제 치하가 그리우면 국적을 바꾸던지, 차라리 일본으로 이민가라.

언론이란 가면을 쓰고 국민을 이간질 시키는 무리부터 척결해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위급한 때가 아닌가?

도저히 쪽방 구석에 처박혀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인사동으로 갔다.

시위를 끝내고 지하철로 몰려드는 늙은이들의 행렬이 측은해 보였다.

무엇이 저들을 거리로 내 몰았을까? 역병에 목숨까지 걸어가며...

 

요즘 떠도는 유행어처럼 독립운동은 못해도 꼬장은 부리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원칙도 가치관도 없이, 젊은이들로 부터 지탄 받고 살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인사동의 모습은 변함없었다.

비에 젖어 가라앉은 거리엔 발길만 분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거리 사진부터 찍었겠지만, 바로 술집을 찾아갔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유목민’ 앞에 연출가 기국서씨와 김명성씨 모습이 보였다.

김명성씨가 추진한 독립 자료전을 보고 오는 길이라 했다.

개막식이 있던 날은 작업 때문에 밀양에 있었단다.

 

모처럼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기국서씨가 고충을 털어 놓았다.

아무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풀리지 않는 일에 답답해했다

결과에 돈이 걸려 있다는 대목에서는 미칠 것 같단다.

 

비록 기국서씨 혼자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주변과 얽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며, 돈에서 자유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작가의 재능이 뛰어나도 권력이나 돈에 치우치면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나 친일시인 서정주와 다를 게 무엇인가?

차라리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나을 것이다.

 

한 쪽 자리에는 ‘뮤아트’ 김상현씨가 후배 가수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유진오씨는 분주히 ‘유목민’ 일손을 돕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출연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인 이승철씨, 박재웅씨 일행에 이어 단청장 이인섭씨가 나타났다.

좀 있으니, 시인 정희성씨와 소설가 현기영, 산악인 박기성씨가 왔다.

 

이 우울한 날 어찌 술 한 잔 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때와 달리, 기국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시국처럼, 술자리마저 흩어져 사분오열이었다.

‘유진커피숍’에서 팥빙수에 더운 속을 식히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코로나가 설쳐도 꼭 찾아갈 곳이 있다.

바로 구로구민회관 ‘갤러리 구루지’에서 열리는 ‘독립이 맞습니까?’전이다.

그 전시를 보며, 독립을 위하여 몸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되새기자.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소설보다 더 기막힌 일이 많아, 이젠 소설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찰총장이 자신을 임명한 정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지 않나,

대권에 뜻을 둔 유망 정치인들은 모조리 ‘미투’란 올가미에 걸려 잡혀 가거나,

목숨까지 잃는 별의 별 일이 다 벌어지고 있다.

음모와 저주가 난무하는 드라마 같은 현실에 누가 소설을 읽겠는가?

 

느닷없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보를 접하며 한동안 멘붕 상태에 빠져 일손을 놓았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마지막 희망으로 지지해 온 

정의당의 망자에 대한 부도덕한 처신도 마음을 뒤집었다.

조문하기 싫으면 안 가면 될 것이지, 왜 나팔을 불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잘난 채 하고 싶었을까?

 

시장으로 재임하기 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할 때부터 존경해 온

박시장과의 첫 만남은 ‘아름다운 가게’ 상임이사 시절이었다.

당시 ‘민예총’ 사무총장이었던 김용태씨 소개로 사진 5점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창녕군 장마면이 고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향후배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친근감을 느꼈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한 호감에 금이 간 것은 2018년 여름 그가 동자동 쪽방 촌을 방문하면서다.

그 당시 쪽방 촌에 장관을 위시하여 여러 정치인들이 찾아 와

빈민들을 들러리로 정치 쇼를 벌이는 일이 잦아 심기가 불편했다.

더위에 지친 빈민들에게 수박화채를 나누어주고,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이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대부분 기자들 사진촬영을 위해서 벌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을 정치판 들러리로 내 세우지마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 나무란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이번에 나팔 분 정의당 철부지가 한 말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일은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보좌진들이 짜놓은 일정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사과드린다. 부디 용서하시고, 저승에서나마 못 다한 일 이루시길 바란다.

 

어저께는 동자동에 짐 옮길 일이 있어 차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신호에 걸려 출발하려니 갑자기 변속이 되질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 시동을 끈 후 다시 걸었는데, 이젠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빵빵 그리는 뒤차의 성화에 정신이 없었는데,

호출한 견인차마저 일이 많다며 늦게 출동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삼일 전에도 밤 늦게 정선에서 돌아오다 타이어가 터져 서울까지 견인해 오지 않았던가?

그 때 폐차해야 했는데, 당장 차 쓸 일이 많아 중고타이어 두 짝을 구입한 것이다.

이번엔 엔진을 들어 올리는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며 수리비만 40만원이 넘는단다.

노후경유차라 고장 나기 전에 폐차했더라면 백 오십만원이나 되는

서울시에서 주는 조기폐차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었다.

 

결국 애마를 폐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루 전에 구입한 타이어가 아까웠다.

좋은 타이어를 산 가격 그대로 준다던 주인 말이 생각나 다시 찾아간 것이다.

타이어 휠까지 끼워 줄 테니 산값의 반만 돌려 달랬으나 한사코 손사래 친다.

오히려 자기가 아는 곳에서 폐차시켜 줄 테니 차를 견인해 오란다.

아마 폐차장에서 주는 소개비가 탐나는 모양인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십여 년간 거래한 단골이지만, 돈 앞에서는 본색을 더러 냈다.

 

3년 전, 500만원에 사들여 끝 까지 운명을 같이 할 거라며 다짐했지만, 또 먼저 보내게 되었다.

장안평 중고차 장사꾼 말에 속아 탈 많은 고물차를 너무 비싸게 사, 수리비가 더 들어갔다.

이번 주말에는 울 엄마 제사도 있지만, 무덤 이장할 일로 정선 갈 일이 난감했다.

 

그동안 이십년 넘게 정선을 오갔지만, 한 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은 없다.

정선에서 하루에 네 차례 다니는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귤암리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는 산길이라 차 없이는 힘든 곳이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구할까를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로 부터 연락이 왔다.

김명성씨와 김상현씨가 와 있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꼼짝하기 싫어 머뭇거렸는데, 정영신씨를 통해 독촉이 빗발쳤다.

 

도살장 끌려가듯 나갔더니, 그날 강찬모씨 딸 결혼식에 갔다 왔단다.

왜 나 한데는 연락하지 않았을까? 거지라 봐 주는지 모르겠으나,

아들 햇님이 결혼 때도 축의금을 보낸 터라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뒤늦게나마 결혼식을 축하하며,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뮤아트’ 김상현씨가 반겼다.

이 친구도 병원에 입원해 수술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병문안을 가지 못했다.

요즘은 핸드폰을 멀리하며 사람 만나기를 기피하니, 사람 도리를 제대로 못한다.

사람 만나는 일은 커녕, 술 마시는 일 자체를 만들지 않지만, 이 날은 한 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술자리의 화제는 온통 비명에 떠난 박원순시장 이야기 뿐이었다.

김명성씨는 독립운동 자료전시 문제로 박시장이 만나자는 날짜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 왔다는데, 갑작스런 비보에 난감해 했다.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딸로부터 원망을 듣고 나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마음 여린 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다.

 

술 마시는 중에 최명철씨와 이인섭, 안완규 씨등 여러 명이 지나갔다.

너무 과음한 탓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눈물인냥, 비까지 하염없이 내렸다.

엎드려 있다 잠들기를 반복했는데, 김상현씨가 부른 노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떠날 때는 말없이”란 슬픈 노래 소리가 빗물에 흘러내렸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모처럼 반가운 벗들을 만났다.
출감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벼슬하고 온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전화 받기가 머쓱해 핸드폰을 없애버렸으나
정영신씨를 통한 쓰리 쿠숀으로 쳐들어 왔다.




사실, 구치소에서 작심한 것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핸드폰을 없애는 일과 페북을 끊는 것도 있는데,
전화 없애는 일은 간단했으나, 페북 탈퇴는 작심 삼 일을 못 넘겼다.




결국 출소 이틀 만에 글을 올리고 말았는데,
페북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차례만 접속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첫날은 정영신씨와 함께 일하는 ‘예술인협동조합’ 서인형씨가 찾아와
녹번동 ‘풍년집’에서 돼지 한 마리 잡아 몸보신 시키더니,
지난 주말에는 김명성씨 전화를 연결시켜주었다.




진관동 집 부근에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데,
시인 조해인씨도 와 있었고, 뒤 따라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뮤아트’에서 음악 하는 낭자들도 셋이나 등장했다.




북한산 아래 ‘북한산 메기탕’에서 메기탕을 끓였는데,
수제비를 뜨도록 밀가루 반죽까지 넘겨주었다.
쪼물락 쪼물락 만지는 촉감이 꽤 좋을 것 같았다.
“아~ 옛날이여!”




술자리가 끝난 후, 김명성씨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청운씨가 그린 석양 포구에서 듣는 음악이 그리워서다.



그 날은 보슬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 한 몫 한 것은
북한산을 휘감은 구름이 장관을 연출해서다.



어찌 이 분위기에 술이 없을소냐?
중국집에서 유산슬 시켜 또 한잔 걸쳤는데,
김상현씨가 선곡한 음악까지 죽였다.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비롯한 축음기 시절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코맹맹이 음색의 간 들어진 노래 소리가 봄비마저 울렸다.



그날은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여배우 전옥 노래까지 나왔다.
배우 최민수씨 외할머니였던 전옥의 창법은
가슴 속 가라앉은 슬픔을 끌어내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전옥이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항구의 일야' 레코드자켓

봄비와 노래가 작당하여 늙은 놈 가슴을 후벼 팠다.
재미있게 살기로 한 시작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김명성씨가 새로 나온 명함을 한 장씩 돌렸다.
주식회사 ‘아트해피니스’ 연구실장이라 적힌 명함인데,
‘행복’이란 글씨가 도드라졌다.
김구선생 필체라는데, 글체처럼 뭉툭한 행복이 찾아들었으면 좋겠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야 한옥마을에서 걸쭉한 잔치 한 판 벌일텐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 김상현씨의 음악홀 ‘뮤아트’에서 “인사동 사람들을 위한 공연"이 열렸다.

얼마 전 기국서씨 훈장수훈 기념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축하공연을 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취중이라 제대로 기억 못했는지 몇 명 나오지 않았다.




평일 공연 외에도 봄, 가을로 페스티벌을 갖지만, 그동안 잘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끔 다녔으나, 귀에 이상이 생기면서다
조명이 어두운 공연장이라 스트로보를 터트리는 무례도 마음에 걸렸고, 한 번도 내지 못한 술 값도 부담스러웠다.
이번은 꼭 가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저녁 여덟시 무렵 집을 나섰다.




옛날에는 고막이 덜덜 떨릴 정도의 볼륨으로 음악에 파 뭍혀 살았지만,
사진에 미쳐 음악에 등 돌 린지 숱한 세월이 흘렀다.
이번엔 스스로 즐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모처럼 음악에 빠져 볼 작정을 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뮤아트‘ 입구에서 망설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김상현씨가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뮤아트'의 분위기는 언제보아도 적막한 멕시코 뒷골목이나 담배연기 자욱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다.



자리에는 조준영 시인과 양평에 작업실을 둔 화가 최용대씨가 와 있었다.
이태원 시절 만난 최용대씨는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24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숲‘을 주제로 한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도 주었다.
인사동에서 가끔 만났던 최 형, 안준영, 곽미영, 박소진, 류수씨 등 여러 명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날 처음 본 유혜린 째즈 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감미로웠다.
물방울을 튕기는 듯한 영롱한 피아노 음율에 빠져들기도 했다.




선물로 샴페인을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 맛은 샴페인에 대한 기존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여지 것 삼페인 하면 40여년 전에 마셔 본 ‘오스카삼페인’이 떠올라 기피해 왔다.
그 당시는 생일이나 무슨 축하할 일만 생기면 “뻥‘ 터지는 소리 때문에 오스카 삼페인이 따라 붙었는데,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그 맛에 고개를 절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샴페인은 가라 안는 기분을 살짝 받쳐주는 좋은 술이었다.




김상현씨의 ‘뮤 아트’는 93년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회원제로 14년 동안 어렵게 끌어왔으나, 건물주 횡포에 신사동으로 옮겨오게 된다.
불특정 다수를 원치 않는다는 그의 고집은 사업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 긴 세월동안 임대료에 허덕이며 버텨온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부도로 무너질 때도 음악이 일으켜 세웠고,
병마에 쓰러졌지만, 음악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사나이가 김상현이다.




그 날은 나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며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렀다.
전시 오프닝 공연이나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들었지만, ‘뮤 아트’ 본 무대에서 듣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얼마나 처절하게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김상현씨가 아픈 후로 감정의 폭이 더 깊어진 것 같다.
그의 노래 소리에서 낙엽 떨어지는 가을 냄새가 난다.




“비 오는데 두고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13일 연극 연출가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아니라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전갈에 괜히 쫄았네.

주인공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와 언론인 윤상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비가 내리다 멈춘 인사동 길은 은행잎이 떨어져 보도블록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 걸음에 밟혀  은행 터지는 소리조차 정겨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담커피숍에 김명성씨가 기다리고 있었.


 

 전활철씨의 안내로 유목민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춘천의 유진규씨가 나타났다.

뒤 이어 김상현씨와 조해인씨가 왔고, 나중에는 김수길, 이인섭, 최일순씨도 만났다.

기국서씨 훈장 덕에 반가운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귀한 훈장 술이라 술은 술술 넘어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

매년 30명이나 훈장과 상을 주면서 기국서씨를 왜 이제 주었을까? 

기국서씨 수훈도 공적에 비해 늦지만, 유진규씨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리고 문화훈장은 상금도 없는데다,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했다.

무공훈장처럼, 사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특혜도 없지 않은가.

금붙이가 아니라 전당포에도 잡혀주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밥 먹지 않고 명예만 먹고 사나?

대개의 예술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도움 되지 않는 훈장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에서 주는 훈장이 이 모양이니, 신문사에서 주는 문화대상도 상금 한 푼 안 주는 곳도 있다.

상으로 작가를 우롱하고 장난 치는 곳이 많으니, 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관객모독이 아니라 훈장모독이란 연극도 무대에 올려야겠다.


 

몇 일전에는 '이중섭미술상' 받는 정복수씨 시상식에 갈 일도 있었지만

주관하는 조선일보가 꼴 보기 싫었다. 어찌 치욕적인 사옥에 발 디딜 수 있겠는가?

그 곳에는 상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권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

일억을 상금으로 내놓은 '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이 더 좋은 상으로 친다.


 

훈장에 초치는 소리 집어치우고, 술자리 이야기나 해야겠다.

그 날의 화제는 70년대 시절 이야기가 많았는데, 명동 심지다방을 비롯한 다양한 추억담이 나왔다.

그 당시는 부산에 살아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말짱 도루묵이네. 


 

조해인씨는 영화 도둑들에 출연한 기국서씨의 연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장면들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기국서씨는 연출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명성씨는 몇 일전 무세중씨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는데,우리 상복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 했단다.

그렇기야 하지만, 한복이라면 모르나 흰 양복이 어울리겠는가? 전통장례를 두고 다들 서양식 장례를 택하니 어쩌겠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유진규씨는 어머니 임종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곁에 누워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말씀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잠 들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는데, 이보다 행복한 임종이 어디 있겠는가?


 

70여 편의 창작으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씨 문화훈장 수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번 수훈이 창작활동의 결실인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기국서씨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며 늦도록 축배를 들었다.

기분좋게 만취한 것은 좋으나, 버스타고 졸다 종점까지 가버렸네.

 

사진, / 조문호
















김수길사진















김수길사진

















조해인사진




















 

 




지난 22일 오후2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2019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 시상식에서

연극연출가 기국서씨가 영예의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 날 시상식에 초대받았으나 사진 강의와 겹쳐 참석하지 못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김명성씨가 보도자료를 보내 주어 기쁜 소식을 전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9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문화훈장’ 수훈자 18명,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표창) 수상자 5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체부장관 표창) 수상자 7명 등 총30명을 선정했다.




아래는 훈장 수훈자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상 과 젊은 예술가상 수상자 명단이다.




은관 문화훈장의 문학부문에는 현기영씨와 (고)황현산씨, 미술 분야에는 (고)곽인식씨,

공예디자인 분야는 한도용씨, 음악 분야에는 나덕성, (고) 노동은씨 등 6명이 수훈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시상식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보관 문화훈장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 수립에 기여한 

(고)김혜원 전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 부위원장과 만화가 이상무씨,

(고)하동호 전 공주대학교 교수, (고)강국진 전 한성대교수, 이보형 고음반연구회장 등 5명이 수훈했다.




옥관 문화훈장은 연극작품 70여편을 창작하며 다양한 연극적 시도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 ‘극단76’ 예술감독을 비롯하여 이용남 한성대학교 명예교수, 배병길 도시건축연구소 대표,

김해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4명이 수훈했다.


좌로부터 '인사동 사람들' 회원인 김상현, 김명성, 기국서씨


화관문화훈장은 지역문화 환경 개선과 지역주민의 문화향수 증진에 기여한 이준호 서산문화원 원장을

비롯하여 한국적도자를 세계에 알린 김시영씨, 극단자유 배우 오영수씨 등 3명이 받았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은 문화일반 부문에서는 이재춘 안동차전놀이 보존회 회장,

문학부문에서는 김혜순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미술부문에서는 김영식 조선요 대표,

음악부문에서는 강은일 단국대학교 교수, 무용부문에서는 김지영 경희대교수가 대통령 표창과 함께 상금 천 만원을 받았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은 미술 부문에 정은영, 공예디자인 부문에 이석우 에스더블유앤에이 대표,

건축 부문에서는 안기현 한양대학교 부교수, 음악부문에서는 피아니스트 양성원씨,

전통예술 부문에서는 국가무형문화제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윤주씨, 연극부문에서는 정범철 극발전소301대표.

무용부문에서는 안무가 권령은씨 등 7명이 문체부 장관 표창과 상금 오백만원을 받았다.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상현씨로부터 말복 날 삼계탕 한 그릇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해방촌고기방앗간의 이태주씨가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해방촌은 같은 용산구라 가깝기는 하지만, 신세진 적이 많아 송구스러웠다.


 

그리고 정의당 동물복지위원회에 소속된 아들이 복날에 채식해요라는 캠페인을 벌이는 터라,

그 날 하루만큼은 육식을 금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사람간의 정이 더 중요한 세상이라, 조햇님이가 벌이는 캠페인에 따르지 못했다.


 

약속한 일요일 정오 무렵, 해방촌에 갔으나 버스노선을 몰라 좀 헤맸다.

해방촌고기방앗간에 들어가니, 이태주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상차림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씨름 선수처럼 덩치 좋은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눈에 익은 친구도 여럿 있었다.

가까운 친구거나 후배들인 모양인데, 끈끈한 정이 느껴졌다.


 

그동안 해방촌고기방앗간을 운영하는 이태주씨를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참 정이 많은 친구였다. 요즘 이런 사람 보기 힘들다.

다들 살기 바빠 그런지 남을 배려하기보다 제 식구 챙기기 바쁘다.

더구나 손님 많은 말복에 장사할 생각은 않고

가까운 사람 불러 모아 정 나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촌놈이 오랜만에 목에 때 벗길 작정으로 엊저녁까지 굶은 터라

김상현씨도 오기 전에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간만에 살려고 먹는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었다.

이 집에 올 때마다 배가 터지도록 먹는데, 그 날은 삼계탕에다 콩국물도 내 놓았다.

다들 반가운 사람들과 어울려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바쁜 사람들은 먼저 일어나고,

김상현, 김삼환씨 등 몇 분만 남았는데, 뒤 이어 맥주와 케익이 나왔다.

난 허리가 아파 한 달 가까이 밀밭에도 못 가보았지만,

통풍에는 맥주가 원수지간이라 아이스커피만 쫄쫄 빨았다.



그런데 이태주씨가 이름도 모르는 귀한 술을 한 병 가져온 것이다.

맛만 본다며 한 잔 받았는데, 일단 향이 기가 막혔다.

다들 단숨에 들이켰으나, 몇 차례 나누어 마시며 역시를 연발했다.

술의 향도 향이지만, 취기가 퍼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하기야! 촌놈이 즐겨 마시는 소주에 어찌 비길 수 있겠나.

무엇이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니 다들 돈 벌려고 난리 치는 것 아닌가.


    

단 한 잔의 술과 한 모금의 연기에 이렇게 마음이 넉넉해지다니..

김상현씨가 들려주는 정감 있는 음악에 푹 빠져, 도저히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싶었다.


 

주책스럽게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늘 가까이 있는 행복도 모르고 산 후회였는지도 모른다.


 

한 잔의 술이 자극했겠지만, 마음을 휘어 잡은 것은 사람 사는 정이었다.

한마디로 이태주씨의 인간미에 감동 먹은 것이다.


 

,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배려는커녕, 늘 벌집 쑤셔 놓듯 일만 벌이고 다니지 않았던가. 

여지 것 잘못 살아 온 업으로 그러지만, 자책이야 왜 없겠는가.


 

혼자 감정에 빠져 청승을 떨고 앉았는데 뒤늦게 선비 내 가족이 왔다.

음악을 배우는 선비양이 김상현씨에게 한 수 배울 작정인 것 같았다.

더구나 음악 경연이 한 달 후에 있다며 노래 한 곡을 불렀는데, 제법이었.


 

몸집만큼 성량도 풍부하고 가창력도 뛰어났다.

정확한 발성 등 시정할 점을 김상현씨가 지적해 주었는데, 일단 음악적 끼가 보였다.

머지않아 만나보기 어렵겠다는 농담까지 했다.


 

늙은이는 눈치껏 빠져 줘야 하는데, 너무 오래 퍼져 있었다.

더구나 다섯 시에 이준기씨를 만나기로 하지 않았는가.

시간이 늦어 서두르니, 이태주씨가 동자동 친구들 술 한 잔 받아 주라며 용돈까지 쥐어주었다.

너무 황송했지만, 고마운 뜻이라 받아들였다.



늦을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이준기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일은 무슨 일요? 복날 행님하고 술 한 잔 할라고 불렀지요

의리의 사나이로 통하는 준기씨는 절대 술을 얻어먹지 않는다.

종종 남에게 술값까지 쥐어주는 인정 많은 사나이다.



 그날도 잘 아는 사람이 갑자기 죽어, 술이 한 잔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가 모처럼 술 한 잔 살려고 했으나 한사코 손사래 쳤다.

행님! 와 이라요. 급수로 치마 내가 행님보다 한 급 위가 아인기요.”

다리가 불구라 장애등급 수급자란 말인데, 정말 못 말리는 친구다.

그 날도 술자리를 기웃거리는 친구에게 오천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다음에 중국집에서 내가 한 턱 쏠 테니 가까운 사람들 연락하라고 했더니,

웃긴다는 듯 씩 웃었다. “행님 술이 목구멍에 넘어 가겠소?”

개 무시하는 것 같아 신사임당 지폐를 보여 주었더니, 내 돈은 위조지폐라며 감방가기 싫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술 한 잔 사려면 이준기는 절대 부르면 안 된다.

이 야박한 세상에 사람이 너무 좋아도 탈이라니까...

이젠 받기보다 갚아야 할 때라,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동자동은 사람 냄새를 풀풀 풍겨 너무 좋다.

가진 자들은 욕심에 눈이 멀었지만, 없는 자들은 욕심을 버려 사람이 잘 보인다.

저승 대기소 같은 동자동이 그래서 좋은 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8일 ‘아리랑’에서 “인사동 백년을 걷다”란 인사동 풍류객을 위한 큰 잔치가 열렸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과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명성씨가 초대한 자리로,

마치 심청전의 심봉사 잔치가 연상되는 그런 자리였다.



그동안 터줏대감이셨던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풍류가 이계익선생, 극작가 신봉승선생,

음향의 달인 김벌레 선생은 세상을 떠난 데다 강 민, 신경림, 무세중 선생은 몸이 불편해, 나오실 원로 분이 몇 분 되지 않았다.

엉겅퀴 꽃을 쓴 민영 시인, ‘한국의 아이로 잘 알려진 황명걸 시인, 조선의 삼대구라로 불리는 협객 방동규 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소설가 김승환 선생, 철학자 신성준 선생 등 몇 분 남지 않은 원로께서 먼저 나오셨고,

제주와 부산, 사천, 남해, 단양, 전주, 광주 등 전국 방방곡곡의 풍류객들이 한 분 두 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오부터 오후 아홉시까지 온 종일 잔치를 열어 천상병시인과 인사동을 사랑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는데,

무려 15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예전에는 틈틈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으나, 그 비용을 혼자 감당해 온 김명성씨의 아라아트사업이 나락에 떨어져,

오랫동안 소식한 번 전하지 못한 것이다.


 

인사동 백년을 걷다라는 잔치를 마련한 취지는 친일 후손의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게 부끄러워 집을 나와 한 평생 거리를 떠돌며 독서회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 나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았던 노촌 이구영 선생,

문필가이신 박이엽 선생의 노조에 대한 지조, 그리고 저잣거리 웃음거리로 잘 못 왜곡된 천상병시인의

올 곧은 정신을 제대로 알고, 그 분들의 무대였던 인사동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다들 모처럼의 잔치 소식에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나누는 정담에 인사동은 봄바람 같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그동안 소식도 듣지 못한 황명걸 시인의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라는 신간 시선집과

김신용 시인의 비는 사람의 몸속에도 내려라는 제목을 단 신간 시집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자리에 어찌 풍류가 없을 소냐? 전주에서 올라온 음류 시인 송상욱씨의 열 두냥 인생을 시작으로

김상현씨의 아코디언과 장 군의 협연으로 부른  장소영씨의 진도아리랑으로 분위기는 한층 무르익어 갔다.

김상현씨가 애절하게 부른 '떠날 때는 말없이 봄이 오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슬픔에 빠져들었다.

봄이 오면으로 반복되는 절절한 후렴에서 내가 좋아하는 봄날은 간다와 겹쳐지며 설움이 북받힌 듯 했다.


 

부산에서 올라온 김진규 시인은 하모니카 연주에다 천상병선생의 시 강물을 낭송하기도 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시인의 눈에 비친 강물은 기쁨의 강물이 아니라 서럽게 흘러가는 강물이었다.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이지, 기계처럼 돈만 쫓고 살아가는 오늘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난데없는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모임에 참석한 원로 분에게 여비라도 챙겨드리기 위해 80세 이상은 16만원을 드린다고 공지했는데,

한겨레에서 확인도 없이 기사화 해, 돈 얻으러 찾아 온 분이 여럿 생긴 것이다.

사정을 잘 말씀드리고 식사 대접해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참 돈이란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의 원로 분들은 오찬 후 곧 바로 귀가하셨으나, 뒤 늦게 위선으로 똘똘 뭉친 늙은이 한 분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사진 찍는 나에게 사진 찍지 말라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폭력을 저질렀다.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기에 휘어 잡는 위압에 멈추었으나, 사과하라고 겁박이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치매증세가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참았다.



무슨 억한 심정에 잔치 집 깽판 치려 작심한 모양인데, 언론이 자기도취에 빠지게 만든 불쌍한 노인이다.



 

내가 이 잔치를 기록하는 사진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 찍혀 않될 일이 있으면 조용히 말을 하던지, 카메라 확인 후 지우면 그만이다

평생을 사람만 찍어 온 사진가에게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니,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오래전 자선을 내 세워 사익을 취한 기획전을 문제삼은 적이 있는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은 일체 카메라에 담지 않으나, 보기 싫은 사람은 찍을 필요도 없다.

한 달 전에는 우연히 창성동 실험실갤러리에서 열린 이지녀씨의 무속전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날은 노광래씨 흉사를 알리어 문상객을 모아준 일을 격려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마음이 풀린 것으로 생각했다.


 


좀 있다 다른 지인에게 들어보니, 나를 더 두들겨 패고 싶었으나 폭력 전과가 많아 참았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옛날에 저지른 폭력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들 떨어진 분이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봉변 당하지 않고 살았던 게 용하다 싶다.

여지 것 돈으로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내 한테 걸리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입구에서 분노를 삭이다 연회장으로 들어가 보니, 배평모씨와 김언경씨가 보였다.

그들을 향해 사진을 찍는데, 난데없는 지팡이가 또 나타난 것이다.

키가 작아 파묻혀 못 보았지만, 안 쪽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잔치 집에 어떻게 좋은 일만 일을 수 있겠는가?

다른 분들은 그런 불협화음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재건 문제는 회의를 진행할 자리가 되지못해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으나,

많은 분들의 자문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했다.


 

오후 아홉시가 넘어 인사동 풍류객의 아리랑연회는 끝났지만,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분을 위한 잠자리까지 준비해 두었으니, 이 좋은 날 어찌 그냥 갈 수 있을 소냐?

그 날 잔치는 천상병시인 기념사업회 재건과 돌아가신 인사동 터줏대감의 올 곧은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김명성씨가 모았지만, ‘아리랑'광진상공', '엠에스오토텍', '이엘에스솔루션'에서 도왔다.


 

자리가 파한 후 남은 소주 한 병을 챙겨들고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평화만들기로 찾아갔다.

개업 소식은 들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도 하지만, 벗들이 그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 했기 때문이다.

마침 배평모씨를 비롯하여 김언경, 하형우, 박상희, 임경일, 고선례, 편근희씨 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함께 어울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또 폭력배가 나타난 것이다.

나 더러 나가라고 고함 질렀는데, 설사 그 술집이 자기 집이라도 먼저 온 손님을 내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꾸도 않했더니 다른 분이 데리고 나갔지만, 별 개 같은 꼴을 다 본 것이다.


 

그 곳에서 나와 인사동 벽치기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찻집 유담에는 김명성, 최석태, 손연칠, 백남이, 공윤희씨 등 여러 명이 홍어회를 배달시켜 마시고 있었다.

그 날은 신경이 날카로워 그런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좀 있으니 정영신, 조경석, 서길헌씨가 나타나 그 것으로 인사동 백년을 걷다잔치를 마무리했다.


 

그 날 잔치에 참석한 분들은 아래와 같다.

구중서, 김승환, 민 영, 방동규, 신성준, 황명걸, 채현국, 송상욱, 이인섭, 유재만, 한귀남, 정기범, 손연칠, 김신용, 배평모, 조경석, 김명성, 김상현, 장 군, 장소영, 신현수, 강찬모, 기국서, 조준영, 임계재, 김진규, 최명철, 전강호, 조해인, 백남이, 변순우, 김언경, 김민경, 이명희, 장경호, 황외성, 박상희, 김 구, 서길헌, 노광래, 정영신, 이은영, 조두림, 안영상, 김수길, 하형우, 고선례, 박구경, 이희종, 최혁배, 임경일, 전활철, 정복수, 이만주, 이지녀, 금보성, 김종근, 박 철, 김효성, 김이하, 공윤희, 고중록, 강선화, 홍석화, 편근희, 유진오, 서인형, 최석태, 김윤기, 황예숙, 김이하, 이승철, 이광군, 박윤호, 권양수, 민영기, 유근오, 김발렌티노, 임태종, 오치우. 최유진, 송일봉, 최근모, 박완규, 조명환, 나재문, 정현석, 김용국, 김상윤, 이상훈, 김병호, 김준태, 목영순, 조신호, 한슬기, 주영선, 김미란씨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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