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 아트' 봄 페스티벌이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페스티벌을 벌이지만, 가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지만, 늙은이가 끼일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다.

회원제라 회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매번 술만 축내고 왔으니...






지난 번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뮤아트’의 김상현씨를 만났다.
갑작스런 병마로 죽을 고비까지 넘겼지만, 건강을 되찾아 반갑기 그지없었다.
14일부터 ‘뮤아트’ 봄 페스티벌을 연다는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뮤아트’가 궁금해 조준영시인과 가기로 했으나 약속한 날을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14일 오후 10시로 알고 정영신씨와 들렸는데, 조준영씨는 그 다음 날 약속했단다.





'뮤아트'에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고, 다들 술보다 음악에 취해 있었다.
이름 모를 재즈 가수의 볼륨 있는 성량이 '뮤아트'를 압도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실내장식은 ‘뮤아트’의 역사며 김상현의 기억 창고였다.

'뮤아트'는 바뀐 게 없었지만 뮤지션은 대부분 바뀌었더라.
아는 분이라고는 김상현씨를 돕는 친구 이한성씨와 가수 장군과 하양수씨 뿐이었다.




 


하기야! 몇 년이 지났는데, 유랑 음악인들이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있겠나.

Jay, Dee&Sean, 그레이스 등 새로운 뮤지션들의 연주를 들어야 했다.






‘뮤아트’는 1992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4년 동안 운영하다 소송에 휘말려 지금의 신사동으로 옮겼다.
그 당시 수중에 남은 돈은 140만원밖에 없었지만, 후배들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군들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긴 세월동안 어떻게 '뮤아트'를 지키며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다지만, 음악으로 위로 받았으니 음악이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김상현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다.
애잔한 우수에 젖은 듯 토해내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슬프다.
목소리에서 낙엽 냄새가 풍기는 것은 그가 가을을 좋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 전시회마다 후배와 함께 공연 해주는 것도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다.

음악을 통해 예술의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다.






몇 달 전 중병에 걸려 고통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 밀폐된 공간이 그에게 병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연주하는 그의 몸에서 에너지가 철철 흘러 넘쳤다. 



 



피아노는 물방울이 튀었고, 드럼은 소나기가 몰아쳤다.
애잔하게 가라앉은 기타 소리는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다며 속삭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좋아해 아코디온을 배웠다는 그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아코디온을 연주할 때면, 아버지가 지켜보는 모습을 느낀다고도 했다.
아버지도 아들도 그의 자식도 음악에 하나가 된다.






‘뮤아트’는 음악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축제는 새벽까지 이어지지만, 지하철이 끊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폭풍같은 열정을 뒤로하며...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일봉 조성국(1919-1993)선생은 ‘한국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영산줄다리기(당기기)의 기능보유자였다.



'창녕을 사랑하는 사람들'카페에서 스크랩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태어 난 선생께서는 일제 때 맥이 끊겨 잊혀져가던

영산줄다리기를 되살려 마을 놀이로 자리 잡게한 장본인이다.





영산줄다리기는 애살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잡이로 신명을 일으키며 답합으로 이끄는 대동문화다.

선생께서는 198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지방대에서 줄 바람을 일으켰는데,

그 신명난 대동놀이로 삼일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민주화에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10여 년 동안 영산중학교에 근무하는 등 향토교육에도 기여하셨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며, 양파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는 등 농촌경제를 일으키려는 향토애도 대단하셨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되도록 이끌며 '양파재배법'(1972)을 비롯한 여러 권의 문화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다.





난, 조성국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영산중학교 은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이라 어린 시절 기억들이 너무 새록새록 하다.

학기가 바뀌어 교실에 들어와 처음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 기억난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자신을 소개하며, “곰보도 정이 들면 구멍구멍마다 든다”며 웃기셨다.





국어와 농업을 가르쳤는데,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유달리 기다려졌다.

가끔 여러 학생에게 각자의 대사로 연결하는 연극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수업의 지루함을 해소시키며 머리에 주입시키는 선생의 교육방식은 틀에 박힌 다른 분들과 사뭇 달랐다.

한 번은 내게 여자 배역을 맡겼는데, 너무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 친구들로 부터 웃음을 산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선생님께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당분간 못 나오신다고 했지만, 동내 소문은 “빨갱이로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교원노조에 연루돼 구속되었다고 하셨다.

석방되어 해직된 후로는 농사꾼으로 변신해 양파재배와 줄다리기를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 이후 고향을 떠나 와 잊고 있었는데, 1970년대는 인간문화재의 권익과

올바른 전통 계승을 위해 '한국인간문화재연합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이후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민예총’ 창립총회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고은시인과 미술평론가 김윤수선생, 조성국선생. 세분이 '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신경림시인은 사무총장,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은 김용태씨가 맡게 되었다.





너무 반가워 이런 저런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려 찾아보니 한 장도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선생의 사진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필름이라 정선에 쳐 박아 둔 모양인데,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이 찍는 일보다 더 급한 것 같았다.





문화운동, 지역운동, 사회운동으로 기여한 공적이 큰 분이지만, 세상에 덜 알려진 것은 틀림없다.

부산대 명예교수 채희완씨는 장일순선생과 조성국선생께서 닮은 데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시며 당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품까지 꼭 같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꼭지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참여한 영산줄다리기를 소개하는 면이다.

그러나 오늘의 줄다리기가 있도록 만든 조성국 선생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는데다,

공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부터 늘어 놓게 된 것이다.




지난 26일부터 시작된 3,1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진즉 듣고,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찾아 간 것이다.

더구나 조성국선생님께 줄다리기를 물려받는 신수식씨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던가.

참여한 보존회 회원 대개가 고향 선후배인데다 사촌까지 있었다.





신수식,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 등 향에서 열 두 명이 올라왔는데, 두세 명 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몇 십 년을 떨어져 늙어 왔으니, 모를 만도 했다.





덕분에, 같은 서울 살지만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고향 동창까지 만난 것이다.

김상현씨와 송장식씨를 만났고,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3월1일이 되면

더 많은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해마다 3,1절에 맞추어 열리는 영산 3,1문화제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물어보았더니,

서울 광화문줄다리기가 끝나는 즉시 내려 가야한다고 했다.

정말 불알에 요령소리 나게 됐다.





가닥 줄은 영산에서 가져왔지만, 엮고 밟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옛날 생각도 났다.

줄다리기를 전수받은 신수식씨의 능란한 지휘와 통솔력은 조성국선생을 너무 닮아 있었다.

기능에 이어 선생님의 정신까지 이어 받은 게 너무 장하고 고마웠다.





첫 날은 숙소에 띠라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오랜만의 회포도 풀었다.

술 자리에는 서울 ‘에이스다원’ 대표이사인 오정혁씨와 직원 한 분이 합류하였고,

이차로 옮긴 ‘봄 여름 가을 겨울’에는 본 축전의 예술감독인 채희완씨도 오셔서 함께 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듯이 기분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1절 백주년을 맞는 오늘 다들 청계광장으로 나가자.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의 하이라이트인 줄다리기가 오후3시 부터 열린다.

광화문광장으로 줄을 옮겨 4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니, 다들 신명난 한 판을 벌여 보자.


"이어~차, 이어~차, 이어~차"



사진, 글 / 조문호






























































































뮤지션 김상현씨가 중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아는 분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 이야기로 걱정 해왔는데,
뜻밖에 인사동에서 그를 만나, 노래까지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5일 인사동 ‘유목민’의 실내 공사를 한다기에 찾아 간 것이다.
외장에 사용할 오래된 인사동 풍경사진을 의논하기 위해서다.






강남의 송재엽씨 기공식에 갔다가 ‘통인가게’ 관우선생 차에 편승해 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분을 만난 것이다.






한 때 인사동에서 ‘북스’란 책 갤러리를 운영한 김호근씨 였다.
제주도 산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마치 인사동 유령이 나타난 것 같았다.






일단 볼 일부터 본 후,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먼저 임하룡씨가 전시를 한다는 ‘토포하우스’로 갔다.






무슨 전시인지도 모른 채 이야기만 듣고 갔는데,
개인전이 아니고, ‘제5회 오늘전’이란 단체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29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임하룡씨 외에도 정승재, 심영숙, 이경근,
박춘우, 이유림, 김은숙, 백순진, 한정혜, 권혁철, 샤샤정, 장용주, 이혜영,
유준희, 이준섭, 최재영, 오현금씨 등 열 일곱명의 화가가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임하룡씨 외에도 정승재씨를 만난 것이다.
전시 보러 오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참여 작가라 했다.






그 부지런함에 존경감이 일었다.
학교 강의하랴 소설 쓰라, 이젠 그림까지 그리니, 식구들 얼굴 볼 틈은 있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제 작업에 물이 올랐나보다.






전시를 돌아본 후 ‘유목민’으로 갔다.
‘유목민’ 안방을 터, 통유리로 밖이 보이게 하는 모양인데. 화가 양서욱씨가 열심히 돕고 있었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반가운 사람이 줄줄이 나타났다.
‘유담’커피숍 앞에 김명성씨가 서 있었고, 안에는 정기범씨가 계셨다.






좀 있으니, 김호근씨가 찾아 와 ‘유목민’에 자리잡고 막걸리를 시켰다.
이어 김완기, 최종선, 김영국, 김상윤씨가 줄줄이 등장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김상현씨가 나타나, 죽은 사람 살아온 듯 반가웠다.
김명성씨가 연락했다는데, 좀 수척해 보이기는 하나 생각 외로 좋아 보였다.






그동안의 투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오랜만에 그의 노래까지 들을 수 있었다.
‘회상’과 ‘떠날 때는 말없이’ 두 곡을 불렀는데, 너무 절절했다.
감정에 몰입되어 터져 나오는 노래 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김상현씨의 노래 소리가 오랜만에 인사동을 울렸다.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

사진, 글 / 조문호





'제5회 오늘전' 전시작


임하룡작

임하룡작

이준섭작

장용주작

샤샤정작

정승재작

정승재작


























 




지난 11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조준영시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인사동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하나의 의식 같은 모임이다.






모이기로 한 ‘유목민’으로 가다 ‘갤러리 이즈’ 앞에서 아르바이트하는 Lucy양을 만났다.
언제나 쉴 틈 없이 초상화를 그리는 그녀지만, 마침 혼자 있었다.
모처럼 이런 저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홍익대 3학년인데, 학비 마련하러 인사동에서 일 한다는 것이다.
한 장 그리는데 팔천 원씩 받지만, 그리는 량이 많아 수입은 짭짤하단다.
돌콩 같은 조그만 녀석이 참 기특했다.






그래서 나를 그려보라며 Lucy양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Lucy양은 나의 사진모델이 되었다.
얼굴 특징을 잡아내기 위해 연신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참 예뻤다.
낯선 소녀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쳐다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소녀의 미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유목민’으로 가던 장경호씨와 안원규씨에게 덜미 잡힌 것이다.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은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내 꼬라지가 하도 지랄같이 생겨서인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완성된 초상화를 받아보니 너무 미화시켜 놓았더라.
대개 예쁘거나 근사한 자신의 모습을 원하겠지만, 대 실망이었다.




 


이가 빠지면 빠진 데로 주름살이 있으면 있는 데로 리얼하게 그려야 하는데,
닮은 것이라고는 안경테와 콧수염뿐이었다.
주변에 그려 넣은 색이나 카메라도 산만하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돈은 벌지 모르겠으나, 본인 작업에는 도움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조준영씨를 비롯하여 김상현, 이한성, 전강호, 장경호, 안원규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공윤희씨가 나타났다. 번개 팅도 아닌데 참석률이 저조했다.






더욱 김빠지게 하는 것은 분위기를 정화시키는 여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래야 기껏 연극하는 이명희씨와 사진하는 정영신씨 정도겠지만,
그래도 구색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구석자리에 사진하는 분들이 여럿 와 있었다.
한기현씨가 두 차례나 인사하며 언질 주었건만, 이야기하느라 가보지 못했다.
아마 그날 희수갤러리에서 열린 박경태씨의 ‘마주한 기억’ 전시를 본 후
‘유목민’에서 한 잔 하는 것 같았다.






담배 피우러 나갔다 들어오니, 다들 나가려고 술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한옥란교수를 닮아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한참 젊은 미녀였는데,

뒤늦게 페친 신청한 이름을 보니 노미경씨였고, 안명현씨도 있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부랴부랴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송구스러웠다.
다음 만날 기회 있으면 꼭 술 한 잔 올리리다.






술이 얼큰해지니 갑자기 졸리기 시작했다. 나만 조는 것이 아니라 장경호씨도 졸았다.
지난 밤 너무 더워 잠을 못이루어, 둘 다 졸음이 몰려 온 것이다.
먼저 가 쉬라는 조준영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행랑쳤다.
같은 버스를 탄 장경호씨와 번갈아 졸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내릴 곳을 놓치지는 않았다.






구월 모임에는 많이 불러 모아 좀 재미있게 놀아 봅시다.

그리고 모임의 이름이나 인사동에서 해야 할 일을 의논하는 등 모임의 틀도 짭시다.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전 ‘뮤아트’ 김상현씨로부터 이태주를 비롯한 몇 명과 식사 한 번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걱정해 주는 후배들이 고맙기는 하나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매번 얻어먹기가 편치않았다.
글쓰는 문인들과 함께 한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몰랐다.






지난 23일 오전 김상현씨가 찾아와 손님들이 기다리는 공원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는 '고기방앗간'을 운영하는 이태주씨와 처음 보는 최진희와 박호경씨도 있었다.
그런데, 최진희씨는 나 줄려고 김밥을 잔뜩 말아 왔더라.
공원 옆에 노숙하는 친구들에게 다 주고 싶었으나, 가져온 분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다섯 개만 주었다.
남은 량도 혼자 먹기 벅찬 량이었으나, 일단 쪽방에 올려놓아야 했다.





냉장고에 김밥 넣어두려 쪽방으로 가는데, 김용만씨가 자전거를 타고 오며 불렀다.
아마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시락을 나눠주는 모양인데, 딱 하나 남았다며 날 주었다.
이 친구는 참 착한 친구인데, 전해 주는 표정이 받는 사람 표정보다 더 밝았다.
여지 것 사진이나 옷 같은 물건을 나에게 받기만 했기에,
모처럼 도시락이라도 하나 전해주니,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동자동 사람들이 맨 날 얻어만 먹었지, 언제 베풀어 본 적이 있겠는가?
나 역시 동자동에 와서야 남에게 베푸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체득하였다.
다들 쪽방에 올라갔으나, 방이 적어 다 들어갈 수도 없었다.
받은 김밥과 도시락을 챙겨두고, 기념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이태주씨가 예약해 둔 식당은 명동의 ‘오리백숙집’이라 했다.
동자동에서 걸어가는데,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던 또 한분을 만났다.
김정은씨라 했는데, 다들 글 쓰는 모임에 함께 하는 분이었다.
온라인에서는 자주 만나지만, 가끔 이런 모임도 있다는 것이다






아들 햇님이가 마흔 두 살인데, 세 아가씨도 비슷한 또래였다.
그런데, 세 아가씨 모두 처녀라니, 욕심 생기더라.
여지 것 장가도 못간 아들이 있으니 며느리 삼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겠는가?
애비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처녀나 아들이나 사람이 없어 결혼 못 했겠는가?
오늘 만난 처녀들도 다들 사정이 있겠지만,
햇님이도 단칸방에서 노모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사니, 어찌 결혼할 엄두를 내겠는가?






그런데, 명동이 이태주씨 고향 같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 나누고, 구멍가게 주인까지 그를 반겼다.
그 짧은 시간에 아는 사람을 몇 사람이나 만났는지 기억도 분명치 않다.
더구나 친형이란 분을 만났는데, 이태주씨 에게 용돈까지 주었다.
이태주씨는 동자동에서도 살았지만, 명동에서도 오래 산 듯 했다.






나그네들만 북적이는 명동에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요즘은 같은 동네 살아도 정 나누지 않으니, 누군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세상 아니던가?
모든 건 상대적이다. 이태주씨가 정을 주니 가능한 것이겠지.






예약해 두었다는 식당에 갔더니, 예약시간보다 빨라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예약손님만 받을 정도로 손님이 많은 모양인데,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되었다.
손님이 많은 집은 미어터지고, 없는 집은 파리만 날려야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니, 없는 사람은 늘 가난하게 살아야 할 운명의 장난인 것이다.






시간이 되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이태주씨 친구인 김종국씨도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김정은씨가 시화 액자를 꺼내 남자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너무 고마운 분인데, 이름도 요즘 뜨고 있는 김정은이가 아니던가?
‘명백한 생“이라는 제목의 시였는데.“저주의 피를 토 한다”라는 대목이 머리에 박혔다.






온갖 한약재들이 들어 간 오리백숙이 나왔는데,  좀 색다른 맛이었다.
시를 생각하니 그 맛있는 음식이 차마 목구멍에 넘어 가지 않았다.
남은 음식을 싸 가지고 나왔는데, 찻집에서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다들 헤어진 후 김상현씨와 동자동으로 돌아오다, 차 안에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매번 남에게 도움만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저께 지하철을 기다려다 보았던 '촛불'이란 시가 떠올났다.
“나는 당신을 위해 눈물로 땅을 적시고, 대지에 입을 맞추려는 촛불입니다.“

난, 누구를 위해 과연 몸을 태운 적이 있었던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일요일은 영주 사는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로 했다.

80년대 중반 인사동을 주름잡던 실비대학 멤버가 아니던가.
그림, 시, 도예를 아우르는 인사동 풍류객이었다.






그 뒤 고향인 봉화로 내려가서도 틈틈이 올라왔고,
지방에서 열리는 ‘창예헌’ 모임에도 왔으니, 얼굴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적음선사와 풍류객 이종문씨가 세상을 떠나며부터
두문불출하여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페북에 올라오는 얼굴사진이나 간간히 보았을 뿐, 그의 근황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선에서 토끼와 대마초의 전쟁을 치룰 무렵, 인사동에 나타난 것이다.
전시 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정선에서는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마저 지니지 않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지난 토요일에서야 그와 통화 할 수 있었는데,
내일 오후에 영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 해방촌에 있는 ‘고기 방앗간’에서 만난 김상현씨와

전활철씨에게 알려, 시인 조준영씨와 김명성씨까지 연락 된 것이다.






인사동에 나가보니,‘나날이 마켓’이란 프리마켓에 참여하고 있었다.


인사동에 사흘이 멀다 하고 들락거리지만,
이 큰 전시장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귀가 막혔다.
남쪽보다 북쪽에서 놀다보니,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인사1길 컬쳐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나날이 마켓’은 감성이 꿈틀거리는 프리마켓이었다.
천연염색, 붓, 명차, 한복, 막사발, 옻그릇, 가방과 모자에 이르기까지
수공예, 요리, 전통공예, 리빙, 패션, 소품 등 생산자가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 장터였다. 
서랍 속의 예술이 대중의 손에 쥐어지는 의미 있는 기획전이었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신동여씨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라.
수염에 가렸을까? 선한 미소에 가렸을가? 세상 살아 온 나이테는 다 어디 갔을까?


그는 돈을 못 벌어 그렇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천하호인이다.






전활철, 김상현씨와 먼저 어울렸는데, 너무 반가워 대낮부터 술잔을 들었다.
전시장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탑골공원’ 전주집으로 이어졌다.
김명성씨와 조준영씨 까지 나타나 인사동 골통 한 패거리가 뭉친 것이다.






김명성시인은 신화백이 옛날에 했던 말은 재방송했다.
“난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고 싶다”
이게 생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차로 들린 ‘유목민’에서는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을 만나 뵙기도 했다.
그러나 숨이 가빠오기 시작해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3차는 신사동 ‘뮤아트’로 간다지만, 난 쪽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신동여화백은 결국 그 날 가지 못하고, ‘뮤아트’에 퍼졌다고 한다.






이제 조문호 인생도 끝났다.

예전의 그 객기는 다 어디 가고,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을까?
십팔 번도 ‘봄날은 간다’가 아니라 “봄날은 갔다”로 바꿔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은 적은 없었다.
입이 호강한 건지 고생한 건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된다.

지난 토요일은 동자동 노숙자들과 어울려 한 잔했는데,
마침 ‘뮤아트’ 김상현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폭 두목이나 탈 듯한 검은색 밴츠를 타고. 술 마시는 현장까지 찾아 온 것이다.






같이 놀던 노숙하는 친구들 볼까 황망하게 차에 올라탔다.
마음이 다급해, 막걸리 두병 사주기로 한 약속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멀찍이서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정앙중보부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았다.
차에는 뮤지션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고기방앗간’ 이태주씨,
재즈피아니스트 박상민씨가 타고 있었다.






해방촌에서 ‘고기방앗간’을 운영하는 이태주씨로부터
오래전부터 식사 한 번 대접하겠다는 걸, 여지 것 미루어 왔던 터다.
해방촌이면 같은 용산구에 있으니 지척이 아니던가.
이태주씨는 오래전에 동자동에서 살아 이곳 사정도 훤히 알고 있었다.
내 사는 것이 안타까워, 원도 한도 없이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기방앗간에 도착해 보니, 아래층은 방앗간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 났는지

방앗간 참새들이 가득 자리를 메우고 있었고, 이층 한적한 곳에 준비해 두었다.


피아니스트 박상민씨의 ‘The lonly one’과 김상현씨의 ‘imagine“등
향수에 젖어들게 하는 멋진 피아노 연주로 분위기를 잔득 돋우었다.






현역 육군소령인 조대현씨가 음식을 갖다 나르기 시작했는데,
먹어 치우기 바쁘게 다른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자로 시작하여 스파게티와 스테이크가 줄줄이 나왔고,
마지막에는 바다에서 급송해 왔다는 회까지 가져 왔는데,
도저히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고급 위스키마저 눈에 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김상현씨가 동자동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술이 떨어져 빈병만 쳐다보고 있는 동자동 친구들에게
늦게나마 막걸리를 사줄 수 있었다.






김상현씨는 내 사는 것을 본다며 쪽방까지 따라 올라 왔는데,
제과점에서 빵을 잔뜩 사 온 것이다. 그 날은 토요일이라 빵 탄 날인데...
좌우지간, 먹을 복이 터진 하루였다.
소처럼 되새김질만 할 수 있다면, 며칠 동안 먹지 않아도 될듯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가 없는 사람에게 스테이크를 드려 미안하다며, 아침식사로 닭죽을 끓였다는 것이다.
이가 빠져도 갈비까지 녹여 먹을 수 있다며 허풍을 떨어댔다.






김상현씨가 타고 온 택시에 실려 다시 해방촌으로 갔는데,
그 자리에는 전활철씨와 아들 시원이와 딸 예원이도 함께 왔었다.
닭죽은 물론 백숙까지 잔뜩 먹어 치운 것이다.






이태주씨 덕에 연 이틀 동안 맛있는 음식을 포식할 수 있었다.
거지 주제에, 이렇게 과분하게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잊었던 음식 맛을 일깨워준 이태주씨 내외에게 감사드린다.
사진이라도 멋지게 한 판 찍어줘야 할 텐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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