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경천면 불명산에는 천년고찰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란 절은 강원도 고성과 충청도 음성에도 있고, 금강산에도 있다지만,
완주 ‘화암사’ 앞에서는 명함도 내 밀지 못한다.





오래 전에 전국의 명찰을 찾아 다닐 때 가본 후,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은 그리움인데,
정영신씨가 완주 ‘화암사’를 간다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안도현 시인이 ‘잘 늙은 절’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농 익은 절이다.
20년 만에 가보니, 화장도 하지 않은 채 고찰의 지조를 잘 지키고 있었다.






깊은 골짜기라 근접성이 좋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 무서운 돈의 유혹에서 벗어 난 게, 참 용하고 기특했다.
위엄을 갖춘 ‘극락전’과 ‘우화루’의 자태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 뿐인 하앙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앙이란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데,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받치는 역할을 한다.
하앙식 목재가 받치는 다포식 맞배지붕의 고풍스러움에 입이 쩍 벌어졌다.





법당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는데, 천정을 장식한 닫집은 또 얼마나 멋진지,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잊은 채 올려다보았다.






법당 한 쪽 모서리에는 유물인 동종이 똬리틀고 있었다.
광해군 때 호영이 만들었다는 이 동종은 사찰이나 나라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소리를 내어 그 위급함을 알려 주었다고 해서 자명종이라고도 부른다.






화엄사의 또 하나 설화도 있다.
연화공주가 원인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어느 날 임금님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 꽃잎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꽃잎을 수소문해 보니, 불명산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는 것이다.
그 꽃잎을 먹고 공주가 신통하게 나아,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694년 일교국사가 창건한 ‘화암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던 절이기도 하다.






극락전과 마주한 ‘우화루’ 또한 만만치 않다.
’꽃비'라는 이름도 아름답지만, 세월의 풍화에 절은 누각이 너무 멋지다.
누각의 내부에는 당초문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매달린 목어 또한 고색창연하다.






산사를 오르는 길도 20분은 족히 걸리지만,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지 않았다.

구비구비 계곡따라 올라가다 보면, 낙엽에 가린 흙 땅이 윙크하며 반긴다.





인연이 닿아야만 올 수 있는 절인지라,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올 수 있을까?






아쉬워서, 돌아보고 되돌아보며 산사를 내려왔다, 





차를 몰아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남계정’을 찾아갔다.

이 정자는 조선 중엽의 유학자 김진이 지었는데, '남계'는 김진의 아호란다.
그는 25세 때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고향으로 내려와 훈장을 지내며 여생을 보냈다.






대청마루에서 방으로 연결된 '남계정'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등이

남계의 학문과 덕망을 찬양하여 지은 여러 편의 글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굳게 닫힌 정자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연못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말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고...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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