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를 앞 세우고 행진하는 이한열 장례행렬



최근 들어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영등포 서인형씨 사무실에서 열린 공모전 회의에 함께 했다,

그 날 최석태씨는 신인 발굴을 위한  좋은 안건을 많이 내 놓았다.

구태에서 벗어난 그런 사진 공모전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볼만했다.





회의가 끝나 가까운 식당으로 옮겼는데,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듯 했다.

너무 어지러워 서인형씨에게 택시비까지 부담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지난 2일은 최석태씨가 여수의 최병수씨를 데리고 정영신씨 집으로 온다기에, 나도 함께 했다.





코 구멍한 방에 사내 세 명이 들어가니 집이 꽉 차더라.

최병수씨가 차를 끌고 와 술 한 잔 못했지만, 주된 화제는 '87민주항쟁' 시절의 투쟁사였다.



최병수작 '한열이를 살려내라'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와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이야기 였다.

그 당시 최민화의 ‘이한열 부활도’ 판넬을 최병수가 만들었다고 했다.

그림판이 너무 커 육교를 통과하지 못할 것 같아, 중간에 정첩을 달아 접을 수 있도록 만들었단다.

그 이튿날 장례 행렬이 연세대 교정에서 출발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현동 육교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림판을 접어 무난히 통과시켰더니, 지켜보던 시민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사진 찍느라 나도 현장에 있었던 것 같았다.

‘87민주항쟁’ 화일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더니, 엄청 반가워했다.

“아! 그 때 찍었구나. 그 사진들 모아 전시 한번 해요. 이한열 기념관에서라도..”

최병수씨가 부추겼지만, 전시라는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뭉게 버렸다.


87년도에 전시를 하려니 '사협' 이사장이란 자가 못하게 해 ‘직장을 그만두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사진한다는 사람이 지레 겁먹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광목천으로 대학로 ‘여백갤러리'를 돌려 길거리 벽으로 끌어내어 전시를 했는데,

정작 현장에서 싸웠던 투사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87년12월 대학로에서 전시한 '87 민주항쟁' 포스터



92년도에는 김영삼 후보 여의도 유세장 주변에 합판을 세워 전시했으나 정치꾼에게 이용만 당했고,

‘87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은 해도 전시를 추진한다는 말은 있었으나, 감감소식이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때놈이 먹는다'는 말이 딱 맞은데, 이젠 전시 할 형편도 안 되지만 해 준다 해도 안 한다.

반 평생 찍은 사진 필름과 디지털이미지는 죽기 전에 몽땅 불 태우거나 삭제할 것이다.

사진 소장자에게나 가치를 높여 줄 생각이다.





최병수씨를 알게 된 것은 2017년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에서다.

그의 저돌적인 작업이나 투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오죽하면 민중미술의 거두인 신학철선생께서 “병수 니가 최고다”며 엄지를 치켜 세웠을까?

그 당시 광장에 철공소 차려 작품 제작하느라 많은 빚을 졌고, 지난 번 ‘민예총 기금 마련전’도 고생만 했다.

똥파리들은 팔아 먹기도 잘하고, 한 자리 꿰 차기도 했으나, 모든 걸 다 바친 최병수는 왜 찬밥 신세인가?

전시를 기획한 최석태가 그를 돕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이유다. 




 

곰이 책을 보는 ‘휴먼’이란 대형 작품을 만들어 ‘전시장’ 앞문과 뒷문에 설치했는데,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 작품이야말로 도서관 입구의 조형물로는 안성마춤이었다.

혹시 교육 행정가나 관련 있는 분이 계시면 도와주기 바란다.


2년 전 촛불집회 때 그를 인터뷰하여 “광화문광장에 철공소 차린 최병수”란 제목의 기사를 쓴 적도 있다.

그 때 인터뷰한 내용 일부를 올리니, 최병수를 모르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살아 온 자체가 예술이다.





“최병수는 이한열열사의 대형걸개 그림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안 해 본 일이 없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다. 노동판의 잡부에서 선반공, 용접공, 보일러공, 목수 등 다양한 직업으로 기능을 닦아왔는데, 그 장인적인 기질을 무기로 그림, 판화, 조각,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장시켜, 사회 실천적 창작활동에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학력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전부다. 80년대 중반 우연히 신촌 벽화사건에 연루되어, 미술 판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대생들이 그리는 진달래꽃 벽화작업(상생도)에 쓸 작업받침대 짜러 갔다가 북한의 국화인 진달래 꽃 작업을 돕게 되었는데, 이적성 표현물 작성의 죄목으로 경찰에 잡혀 갔다고 한다. 그는 목수로 참여했지만, 경찰이 그의 직업을 화가로 붙여주어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그의 예술적 재능은 타고 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칼을 갖고 다니며 무엇이던 만드는데 재미를 붙였고, 반항아적인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 뿐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물론 집안에서 내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옳다고 믿으면 자기 몸까지 던지는 정직하고 강한 사람으로, 직설적이고 다혈질에다 단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목공소나 철공소의 기능공으로 일 할 때도 자신의 창의성이 주인의 장사 속에 밀리면 그 자리에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최병수 씨는 작가였지만, 환경운동가로 더 유명하다. 해창 갯벌이나 북한산, 고봉산, 새만금, 사패산,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팽목항에서 부터 노동현장까지 생명평화의 외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지구온난화, 빈곤, 전쟁 등 생명과 평화가 파괴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나약한 생명들이 짓밟히는 현실 폭로성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자라, 작품 들고 현장에 가서 싸워야 했다. 전쟁터의 대포대신 예술적 조형물로 생명파괴자들의 머리을 공격하는 투사로 살아 온 셈이다. 반문명과 싸워 온 환경운동의 뿌리에는 삶의 근거가 되는 노동이 어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이 먼저 라는 근본을 외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긴 세월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을 해오며 동지들의 인간적 배신에 실의를 느낀 적도 많았다고 한다. 모순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더 힘들게 했을 것으로 본다.






돈 안 되는 짓만 해왔으니 사는 꼴은 보나마나다. 13년 전에는 위암 3기 판정을 받아 위를 3분의2나 잘라 내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은 악바리였다.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교사를 아내로 맞으면서 입에 풀칠하는 데는 지장 없게 되었지만, 대형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비를 충당하기는 어림없었다. 그런데, 세월호와 연관되어 박근혜 국정농단이 터지면서 또 한 번 사단이 나고 말았다.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겹치면서, 지난 12월 중순경 광화문광장으로 공구들을 싸들고 올라와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여수 배개도 촌사람이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하여 텐트 집이라도 마련했으니, 출세했다면 출세한 셈이다. 허구한 날 여수에서 실어 온 철재들을 잘라 붙여 광장 곳곳에 조형물을 세워 광장은 자연스럽게 야외 조각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의 상징처럼 돼 버린 도루코 면도날도 그가 만든 작품이다.





탄핵, 퇴진, 민주, 꽃 등, 낱말의 조형미를 철판으로 잘라 광화문 공중에 우뚝 세웠는데, 다양한 글자체와 갖가지 형상물의 조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에 숨통을 턴 것이다. 물론, 캠핑촌예술행동위원회, 비주류예술가, ‘광화문미술행동’에서 활동하는 많은 작가들의 예술행동이 광화문광장을 예술광장으로 변신시켰지만, 설치미술을 이용해 역동감 있는 현장분위기로 이끈 최병수의 도드라진 예술행동이 일조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촛불광장을 예술광장으로 이끌어간 그의 노력은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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