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 아트' 봄 페스티벌이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페스티벌을 벌이지만, 가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지만, 늙은이가 끼일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다.

회원제라 회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매번 술만 축내고 왔으니...






지난 번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뮤아트’의 김상현씨를 만났다.
갑작스런 병마로 죽을 고비까지 넘겼지만, 건강을 되찾아 반갑기 그지없었다.
14일부터 ‘뮤아트’ 봄 페스티벌을 연다는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뮤아트’가 궁금해 조준영시인과 가기로 했으나 약속한 날을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14일 오후 10시로 알고 정영신씨와 들렸는데, 조준영씨는 그 다음 날 약속했단다.





'뮤아트'에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고, 다들 술보다 음악에 취해 있었다.
이름 모를 재즈 가수의 볼륨 있는 성량이 '뮤아트'를 압도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실내장식은 ‘뮤아트’의 역사며 김상현의 기억 창고였다.

'뮤아트'는 바뀐 게 없었지만 뮤지션은 대부분 바뀌었더라.
아는 분이라고는 김상현씨를 돕는 친구 이한성씨와 가수 장군과 하양수씨 뿐이었다.




 


하기야! 몇 년이 지났는데, 유랑 음악인들이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있겠나.

Jay, Dee&Sean, 그레이스 등 새로운 뮤지션들의 연주를 들어야 했다.






‘뮤아트’는 1992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4년 동안 운영하다 소송에 휘말려 지금의 신사동으로 옮겼다.
그 당시 수중에 남은 돈은 140만원밖에 없었지만, 후배들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군들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긴 세월동안 어떻게 '뮤아트'를 지키며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다지만, 음악으로 위로 받았으니 음악이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김상현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다.
애잔한 우수에 젖은 듯 토해내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슬프다.
목소리에서 낙엽 냄새가 풍기는 것은 그가 가을을 좋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 전시회마다 후배와 함께 공연 해주는 것도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다.

음악을 통해 예술의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다.






몇 달 전 중병에 걸려 고통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 밀폐된 공간이 그에게 병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연주하는 그의 몸에서 에너지가 철철 흘러 넘쳤다. 



 



피아노는 물방울이 튀었고, 드럼은 소나기가 몰아쳤다.
애잔하게 가라앉은 기타 소리는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다며 속삭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좋아해 아코디온을 배웠다는 그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아코디온을 연주할 때면, 아버지가 지켜보는 모습을 느낀다고도 했다.
아버지도 아들도 그의 자식도 음악에 하나가 된다.






‘뮤아트’는 음악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축제는 새벽까지 이어지지만, 지하철이 끊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폭풍같은 열정을 뒤로하며...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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