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동자동의 쪽방은 잠긴 방이 더 많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지, 물가로 갔는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광주식당 건물 4층은 절반 넘게 자물쇠가 잠겨있다.
하기야 잠자리가 자유로운 자들이 푹푹 찌는 쪽방에서 버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 층에 남은 네 사람은 왜 떠나지 못했을까?
관리인 정선덕씨야 건물 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맞은편의 김응수, 최성길씨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찾아 올 사람은 없으나, 나가기조차 귀찮은 모양이다.
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지 눈물이 난다.

그리 말하는 난 왜 나가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다.
사실, 컴퓨터가 없으면 사진정리는 물론,
세상과의 소통이 되지 않아 쪽방을 뜨지 못한다.
핑게 없는 무덤이 없으나, 컴 중독 증세에 가깝다.


8월5일이 울 엄마 제삿날이라 7월말에 정선가기로 했으나
일이 생겨 또 이틀간 연기 했다.

오늘은 찍은 사진 정리도 미룬 채, 보따리를 쌌다.
사진이고 컴퓨터고, 모든 걸 접어버렸다.
벌써 마음은 정선 만지산에 가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들이 '줬다 뺏는 기초연금'을 해결하라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도끼 상소를 올렸다.
21개 노인·복지단체로 구성된 '빈곤노인 기초연금 보장을 위한 연대'는

13일 오전 서울 청운효자동 주민자치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도끼 상소 퍼포먼스를 펼치며 시정을 촉구했다.

2014년 7월 기초연금 제도 시행 후 네 번째이자,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처음이었다. 

 
도끼 상소(持斧上疏)는 조선시대 대궐 앞에서 도끼를 둘러메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도끼로 목을 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날 오전10시 경, 도끼상소에 함께하기 위해 ‘동자동 사랑방’으로 나갔다.

김호태 대표와 김원호, 김영진, 강명국, 유한수, 김창현, 김정호, 조인형, 류종희, 김정길 씨등 열 한명이 나갔는데,

‘노년유니온’,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에서 나온 50여명의 빈민들도 현장에 모여들었다,





일찍부터 오건호, 고현종, 김윤영씨 등 빈민운동가들이 나와 더운 날씨에도 부지런히 자재를 옮기고 있었다.

얼굴에 고인 땀방울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난, 40만 수급노인에 해당되는 빈민 당사자라

나오기 싫어도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저들까지 왜 저렇게 고생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제발 문재인대통령께서 이 간절한 빈민들의 상소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40만 기초생활수급 노인을 대표한 김호태(84·용산구)씨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기초연금 30만원 약속은 노인들에게 희망을 줬지만,

그대로 내놓아야 하는 40만 수급 노인에게는 절망과 배신의 상처만 남겼다"며

"대통령이 기초연금의 잘못된 현실을 살펴 수급 노인들도 정당하게 기초연금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바로 잡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난한 노인을 외면하는 정부가 어찌 민주정부, 복지정부일 수 있냐는 탄식들도 흘러 나왔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70%에게만 지급하지만, 가장 가난한 기초생활수급(소득 60만원 이하) 노인은

기초연금 혜택에서 제외시켜 왔기에, 오랫동안 어렵게 사는 노인들의 빈축을 사 온 일이다.

기초생활수급 노인의 경우 매달 25일 기초연금을 받지만, 다음달 20일 기초생활 생계급여에서 같은 금액이 삭감 당했다.

기초연금이 소득에 걸리는 탓이다.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보충성 원리’에 따라 기초연금만큼 생계급여를 공제한다지만,

정작 노인 계층 간 형평성이 깨지는 문제에 대해선 모른 척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 현행 20만원인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연계한 기초연금을 소득 산정에서 제외한다는 명시적 약속은 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늙은이들’을 대표하는 상소인으로 동자동의 김호태씨를 비롯하여 김원호, 김정호,

조인형, 강명국씨가 나섰는데, 도끼로 바구니를 치니, 그 안에서 상소문이 나왔다.

상소문에는 수급노인들에게 절망과 배신의 상처를 남긴 현실을 살펴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뒤 이어 문제인 대통령의 가면을 쓴이가 나와 상소문을 받아들고, 노인을 대표한 김호태씨와 프리허그를 하였으나,

그게 퍼포먼스가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난한 약자의 아픔을 아는 대통령인지라 시정 요구를 물리치지 않고 검토하여 수용할 것으로 믿는다.

이 외에도 사각지대에서 수급혜택을 못 받는 더 어려운 빈민들도 많고,

가진 자들이 위장하여 혜택 받는 등 별의별 일들이 많으니, 잘 헤아려 좋은 정책을 수립하기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간 밤 꿈에 수안스님이 나타나셨다.

'통도사'에 계시는 전각가이자 화가, 시인 등 다재다능하신 분인데, 나에겐 “眞空‘이란 법명을 주신 분이다. 
너무 반가워 큰 절을 넙적 올렸더니,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소식 끊긴지가 십 오년도 더 되었는데, 갑자기 왜 나타나셨을까?
스님께 연락 드리지 못한 건, 잘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내 주둥아리 때문이다.


오래 전, 통도사에서 올라와 인사동에서 전시를 열 때였다.
스님을 모시는 통 큰 방림보살이 호텔 방을 두 개나 잡아두고,
근사한 전시오프닝을 마련했는데. 주연에서 그만 방정을 떨고 말았다.
“스님! 서울역에 한 번 가보이소. 배고픈 놈들이 천진데, 스님이 이라마 됩니꺼?”
화가 난 스님께서 크게 나무라시어, 그 뒤부터 가지 못했는데, 
한 참후 방림보살과 동강에 레프팅하러 오셨다며 정선 집에 들리셨다.
‘夢菴’이란 현판 글씨를 써 주시며 거금 백만 원이나 놓고 가셨는데,
연이 닿지 않았는지, 그 뒤로도 스님이 계신 축서암에 들리지 못했다. 

가끔 스님의 근황이 궁금하거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연락처마저 바뀌어 버렸다.

수소문해 보니 축서암에서 문수암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러던 중에 꿈에 나타나시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한편으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도 되었으나, 나더러 조심하라는 경종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나도 늙었지만, 스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살아생전 만나 뵙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작정하여 한 번 찾아뵈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난, 주둥이 뿐 아니라 손가락으로도 상대를 씹어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
상대에 대한 악의는 없으나, 잘 못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버릇 때문이다.
태생은 그렇지 않았으나, 평생을 기득권자에 당하기만 해 온 처지라
나도 모르게 입바른 악바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까운 친구는 물론 예술계, 특히 사진판에서 더 그렇다.
그러니 ‘다된 밥에 코 빠트린다’는 말처럼 지원이나 도움이 확실했던 일도
뒤늦게 따돌리기 일 수였는데, 기득권자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이다.
다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모 나는 일에 나서지 않고 살아 그런지,
정치판이나 사진판이나 곳곳이 썩어 문드러졌으니, 어찌 간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정영신씨가 시골장에서 점쟁이를 만나면, 가끔 내 사주를 물어보는데, 

만나는 점쟁이마다 입 때문에 팔자가 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인지 말년에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된 것같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지만, 상처 준 이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쪽방 촌에 들어 왔다.

빈민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비난 받을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갑 질 하는 자를 나무라며 잘 못을 바로 잡으려했으나, 잘 못 전해진 내용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이야기를 믿고 발발거렸으니, 내 꼴이 어떻겠는가?

그것도 친하게 지낸 믿었던 사람인데 말이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일로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도 가졌다. 글로 옮길 때는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비가 들쳐 창문도 열지 못하고, 방안 열기 때문에 컴퓨터도 켜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이틀 동안 한증막에서 곤욕을 치루었으나, 비가 그친 어제 오후에서야 모처럼 공원에 나갔더니,
이준기, 방원길, 변성식씨가 모여 앉아 소주 한 잔 하고 있었다.

술병이 비어 소주 한 병을 더 사오려니 준기씨가 강력하게 말렸다.
이 친구는 어느정도 술이 취하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성식씨와 원길씨 생각은 달랐다.
소주 한 병 사와 세 사람이 나누어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정신 바짝 차려, 주민들이 힘을 모아 권익 찾는데 집중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 들어와 크게 깨우친바 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이 곳 사람들은 다들 어렵게는 살지만,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 또아리 튼 부정적인 관념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생각처럼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지만, 난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동자동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혼자 노닥거리다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지만,

인사동에 나가거나 일을 하다보면, 또 부정적인 관념이 꿈틀거린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괜히 심통이 도지는 것이다. 더 수행을 해야 할 것 같다.

하루의 일과처럼 동자동을 한 바퀴 도는데,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매번 보는 골목이고 쪽방들이지만, 볼 때마다 정겹게 다가온다.

가파른 시멘트계단이나 엉클어진 전선마저 친숙하고, 빨래 줄에 늘린 옷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대개 피폐한 환경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지만, 그 곳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알면 사물마저 정겹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달동네가 행복한 동네인 것이다.

내일은 기다려 온 전쟁터에 출전하는 날이다.
동자동 쪽방사람들은 오후2시에 남영역에서 집결하여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행진하기로 되어있다.

오늘 밤 좋은 꿈꾸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꿈을...

사진, 글 / 조문호




































지난27일은 동자동 쪽방 촌에 구제물품을 나누어주는 날이다.
지난 주민회의에서 1인용 전기장판이나 이불 등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물품들을 신청했는데,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는 등록된 주민 600여명을 대상으로 가구당 차렵이불 한 채씩을 나누어 준 것이다.

아침 겸 늦은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이나 일찍 현장에 나갔는데도 이불 한 채씩을 둘러메고 싱글벙글 돌아오고 있었다.

상담소 앞 도로변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주민들이 백미터 남짓 줄지어 서 있었다. 심지어 이불 받으려 일 나가지 않은 노무자도 있었다.

올 겨울을 견뎌내려면, 두툼한 이불이 필요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좁은 쪽방에 이불 한 채가 더 들어가면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진다.

헌 이불과 새 이불을 바꾸면 되겠으나,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 긴히 쓰던 물품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싶지 않다.

사실상 쪽방 사는 사람보다 이불이 필요한 사람은 노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불을 주지도 않지만, 줘도 보관할 곳이 없다.


내가 잘 아는 노숙자 이성동씨에게 내 이불을 주려 했더니 난색을 표했다. “형, 그 큰 이불을 들고 어떻게 밥 얻어먹어요.”

맞는 말이다. 노숙자들에게는 개인사물함이 필요하다. 공원 주변에 이불을 넣을 수 있는 케비넷이라도 마련해 둔다면 요긴하게 사용할 텐데,

다들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탁상 행정의 문제점은 빈민들 생활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한다는데 있다.


둘 곳이 없어 비좁게 자거나, 멀쩡한 이불을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은 낭비다. 정치나 행정이 너무 이벤트성 행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 빈민들이 필요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일정의 상품권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부터 고려해 주기 바란다.
































이 날은 온 마을이 이불보따리로 들썩였지만, 이불보다 술에 시름 푸는 친구들도 있었다.
정재헌, 김장수, 이준기, 이남기, 강재원, 조찬익, 이상종씨가 공원 옆자리에 모여, 열 받는 정치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들 박근혜를 향한 욕설을 술안주로 삼고 있었으나, 순진한 이준기씨는 불상한 대통령 욕하지 말라며 나무라기도 했다.

평소에는 보수성향의 이준기씨 말을 모른 척 듣고 넘겼으나, 이 날은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나야 페북에서 보아 대충 알지만, 그 친구들은 티비를 껴안고 살아서 인지 나보다 더 많이 알았다.


괜히 열 받아 술과 안주까지 사버렸다. 개털 주제에 중국집에 탕수육 작은 것 하나를 시켰는데, 갑자기 길바닥 술판이 그득해 보였다.

만 칠 천원에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맨 날 깡 술로 버티던 사람들이 모처럼 왕건이 술안주를 만났으나,

다들 많이 먹지 못해 여러 사람이 먹어도 남았다. 어느 누가 싸가려 하니, 조찬익씨가 한마디 던졌다.

“욕심내지마! 여기서는 술안주지만, 가져가면 쓰레기야” 쪽방사람들은 버리고 비워야 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이불 얻어 기분 좋게 술을 마셨으나, 오후7시까지 인사동 ‘이모집’으로 넘어가야 했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이사회를 5년 만에 연다는데, 명색이 사단법인의 이사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술김에 가서 확 뒤집어 버릴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은 낮술에 취한다.
일찍부터 마시기 시작해 초저녁만 되면 모두 쪽방으로 들어가는데,
대신 직장인들이 밤거리를 메운다.







나 역시 낮에만 마셨으면 좋겠으나, 밤까지 끌려 다닐 때가 많다.
밤술까지 마시는 날은 온 종일 더러누워 곤욕을 치루지만, 조절이 잘 안 된다.

이 날도 오후7시경, 초상집에 들릴 약속으로 피하기가 어려웠다. 







지난 20일은 공원 귀퉁이에 자리 잡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재헌씨와 마시다 안쪽으로 옮겼더니,

교부씨를 비롯해 김진호, 신영진, 이상용씨가 술자리를 깔았더라.







뒤늦게, 처음 보는 김상권씨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노숙자들의 인사법은 특이했다.

명함 건네듯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안면을 텄다. 생년월일 따라 형이 되고 아우가 되었다.

쉽게 만나고 기약 없이 헤어지는 방랑자의 삶이지만, 인정은 살아 있었다.

그 자리엔 쪽방 얻을 처지가 못 되는 친구가 둘이나 있어, 막걸리 두 병 사주고 일어섰다.






기초생활수급자도 있었으나, 다들 일할 생각을 안 한다.

            조그만 수입만 생겨도 수급자에서 잘려나니 안 한다. 아니 못하게 한다.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정부가 막는 것이다.








그 날은 또 다른 술자리를 찾았다.

처음 만난 김새길, 한세창씨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씹었다.

동자동 본거지에서는 좀 떨어졌으나, 그들이 사는 모습도 똑 같았다.











돌아오니, 이기영, 강완우, 전 설씨가 어울려 있었는데, 갑자기 구급차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옆 건물에 사는 중늙은이가 병원에 실려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천국 갈지도 모른다. 그의 목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거든...































쪽방촌이 저승 가는 길목이던가?

그걸 보니, 갑자기 전인경씨 모친의 부음이 생각났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까지 가야하는데, 술이 취해 걱정되었다.
술김에 택시를 잡아탔으나, 퇴근시간이라 차가 밀려 가슴 조렸다.
다행히 가진 돈을 초과하지 않아, 중간에 내리는 일은 없었다.

이처럼, 사는 게 곡예 하듯, 늘 아슬아슬하다.

사진, 글 / 조문호







추교부(52)



동네를 한 바퀴 휘~ 도는 것이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어제는 공원에서 큰 길로 내려가니, 길가 한 쪽에 추교부, 김영훈, 김태식이가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라.
한 잔 얻어먹으려 끼어 앉았으나, 술이 떨어졌다.
얼른 가서 막걸리 두 병을 사왔더니, 모두 입이 벌어졌다.

“형님이 엿 같은 내 기분을 알아주네!”라며 추교부가 더 좋아했다.
이 친구는 일찍이 광운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그런대로 잘 살았다.
그러나 직장에서 잘려나며 인생막장에 들어 선 것이다.
요즘은 쪽방 얻을 형편도 되지 않아, 친구 쪽방에 끼어 자거나 아무데서나 잔다.

지난밤에는 교회에서 잤는데, 일어나보니 신발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일어 난 놈이 바꿔 신고 간 모양인데, 헌 운동화 한 컬레만 달랑 남았더란다.
“모처럼 괜찮은 신발 하나 장만했는데, 복도 지지리도 없다”며 투덜댔다.
날씨도 쌀쌀해 지는데다,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신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큼직한 운동화를 질질 끌고 다닐 일이 보통 일은 아니듯 싶다.

하기야! 남의 신발 바꾸어 신고 간 놈의 사정도 보나마나다.

다들 없이 사는 죄 뿐인데, 교회서 신발을 잃어버렸다기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릴 적 동네 꼬마들이 찬송가 곡에다 가사를 바꿔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예수 사랑 할라고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훔쳐가더라.
내 신 내놔~ 내 신내놔~”

사진, 글 / 조문호
























나이가 들어가면 짐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짐은 정선 움막에 있고, 작은 짐은 정영신에게 두고, 몸뚱이와 필요한 물건만 챙겨왔으니 너무 홀가분해 좋다.

쪽방 공간이 좁아, 크게 운신할 필요조차 없으니, 몸도 마음도 편한 것이다.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운영하는 ‘해 뜨는 집’ 105호에 살던 김영희씨 방은 짐으로 가득했다.

어디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왔는지, 쓸 만한 물건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석 달 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별 탈은 없어야 할텐데...

지난 8일, 그 쪽 방향으로 나갔더니 쪽방상담소 직원들이 그녀의 짐을 끌어내고 있었다.

밀린 방세 때문에 짐을 폐기처분할 모양인데, 좁은 방안에 짐이 얼마나 많은지, 수레로 두 차례나 실어 버리고도 남았다.





쪽방촌 사람들은 늘어나는 짐 때문에 대개 골머리를 앓는다. 심지어는 이웃 짐까지 맡아 곤혹스러워하는 경우도 더러있다.

갔다 올 때 까지 잠시만 맡아 달라했으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버리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인 것이다.

신변에 큰 문제만 없다면, 어디선가 또 짐을 모울 것이다. 아니면 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지...

그런데, 짐을 빼낸 ‘해 뜨는 집’ 1층의 방세를 물었더니, 한 달에 16만원이라 했다.

난, 4층인데도 23만원이나 주는데, 귀가 솔깃해 당장 짐을 옮기고 싶었다.

쪽방상담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싼 모양인데, 한 달 방세 손해 볼 것도 아깝지만, 있는 곳에 정이들어 생각을 접었다.






이제 먹는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지난 7일은 공원에서 빵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민간 봉사단체에서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 빵이 모자랐다.  돌아서려는데, 강완우씨가 걸어 와 내 손에 자기 빵 봉지를 슬그머니 쥐어 주었다.

“왜 니 모가치를 내 한테 주노?”했더니,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비시시 웃는다. 빵을 안 좋아하는 놈이 줄은 왜 설까...

이런 인정스러움 때문에 쪽방사람들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그 날은 먹을 복이 많은지, '새꿈나눔터'에서 특별한 무료 급식도 하고 있었다.

‘연세의료원노동조합 행복 나눔 봉사회’에서 나왔는데, 닭다리를 하나씩 준 것이다.

비록 조그만 닭다리가 죽에 꽂혀 있었으나, 닭죽이라 술술 넘어갔다.

어찌 술 마시고 속 쓰린 것 까지 헤아려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지난 8일의 식사는 ‘동자동 사랑방’에서 운영하는 ‘사랑방 식도락’에서 해결했다.

한 끼 천 원씩 받아, 별 반찬은 없으나 씨락국이 시원해 좋다. 내가 앞으로 많이 활용할 식당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무료배식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인정스러움이 있다.





제일 힘든 끼니 때우기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맛나샘’ 무료급식이었다.
일단, 한 끼 얻어먹으려면 한 시간 전에 가서 신청명부에 적고 앉아야한다.

자리가 없으면 복도 계단에 줄지어 쪼그려 앉아,

예수를 믿던 안 믿던 한 시간 넘게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해야한다.

난,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못하지만,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했다.

대관절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주 길래 저렇게 까지하며 얻어먹을까? 란 생각이 든것이다.





그래서 지난 11일, 한 번 체험해 보았다.
신청서에 올리고 복도계단에 쪼그려 앉아 내키지 않는 설교와 기도를 들은 것이다.

일단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일하는 사람들의 자세부터 고압적이고 거만했다.

밥 얻어먹으러 온 사람들도 외지에서 왔는지 낮선 사람이 더 많았다.

반찬은 된장국과 돈가스 세 조각, 당면무침 정도였으나, 먹을 만 했다.



교회에서 하는 급식 보다는 카톨릭 단체에서 하는 봉사가 훨씬 신사적이다. 

"카톨릭 평화의 집’에선 월요일과 목요일에 도시락 배달을 하는데, 200여 가구에 한정되어 있다.

 골고루 혜택 받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봉사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좀 귀찮지만, 밥은 얻어 먹는 것 보다 내 손으로 해 먹는 것이 상책인 것 같더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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