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정선에서 십년 넘게 처박억아 둔 먼지투성이 액자를 끄집어낼 때 본색을 드러낸

폐질환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천형의 병이 되고 말았다.





그 때는 심한 호흡장애로 입원까지 했으나, 기관지 확장제인 ‘테오란-비’를 먹고
‘아노로 엘립타’를 매일 흡입하는 식으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통풍으로 자이로릭까지 매일 먹어야하니 약통을 끼고 사는 편이다.
약 타러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들리는 게, 생활화 된지 일 년 가까이 되었는데,
담당의사가 묻는 말은 항상 똑 같다.






의사 : 담배 끊었습니까?
나 : 아뇨
의사 : 하루에 몇 개피나 피웁니까?
나 : 반 갑요.
의사 : 안 끊으면 죽습니다.
나 : 안 죽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의사 : 술은 얼마나 마십니까?”
나 : 소주 한 병 정도 마시지만, 혼자 있을 때는 안 마십니다.
의사 : 술과 담배를 반으로 줄이세요
나 :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냥 꼴리는대로 살다 죽는 것이 편하겠네요.






대책 없다는 듯이 “약이라도 잘 챙겨 드세요”라며 진료를 끝낸다.
한 달에 한 번씩 주고받는 대화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데,
처음 몇 번은 고문처럼 느껴졌으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다.






지난 5일은 ‘진주청국장’ 누님의 팔순이라 양재동에 갔다.
모처럼 남매가 만났으니, 어찌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다들 맥주를 마셨으나, 혼자 소주를 마셨다.
기분 좋아 옛이야기들 곱 씹으며 즐거운 시간 보내다 돌아왔다.





서울역에서 내려 지하도로 나가니, 노숙하는 천씨가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긴다.
“아제! 어디 갔다 오요? 술 한 잔합시다”
소주를 사주었으면 그냥 올 것이지, 같이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종이컵에 따라 두 잔 정도 마셨는데, 몸에 신호가 왔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어지러워,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천씨가 “와 그라요? 이제 다 됐구나”며 지하도 밖까지 부축해 주었다.
길 모퉁이에 앉아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누었다. 






뿌옇게 뒤 덥힌 미세먼지까지 가쁜 숨에 한 몫 하는 것 같았다.
빨리 가는 게 상책이라 집 앞까지 왔으나, 4층까지 오를 자신이 없었다.
저만치 김원호씨와 동네사람들이 보였으나,
나보다 나이 많은 늙은이들에게 부축해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한 칸 오르고 쉬기를 수십 번 했는데, 드디어 4층 입구의 박씨 신발이 보였다.






“천국 오르기가 너무 힘들다”며 복도를 들어서니,
마치 저승사자 같은 놈이 한 쪽 구석에 버티고 있었다.
자세히 쳐다보니, 술에 젖어 사는 옆방의 알중 최완석이었다.






관속에 들어왔으니 이젠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뻗어 버렸다.
숨 못 쉬고 자다 죽는 것도 괜찮을 텐데, 죽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라면 국물 생각에 물을 끓이다 생각 했다.
술과 담배를 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낮은 방으로 이사 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장터에서 점쟁이 할매들이 정영신씨에게 여러 번 들려주었다는 끔찍한 말이 기억났다.
“빌빌거리며 엄청 오래 살 겠네”



사진, 글 / 조문호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지만, 자식 하나 장가보내는 일이 힘들긴 힘들었나보다.
몇 날을 실성한 듯 방황하다, 경상도로 강원도로 떠돌다 오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원인은 개인적인 일을 페이스북에 나발불어 떠벌인데 대한 부담감과,
블로그에 올린 글을 내리라는 압박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것 같았다.






신세진 분들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지만, 도와주신 분의 목록은 무덤까지 안고 갈 것이다.
사진이든 글이든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차례 차례 보답할 작정이다.





그리고 블로그에 올린 내용은 오보가 있을 때만 수정하지, 전체 내용을 내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명예훼손으로 소송까지 걸려도 내리지 않는 것은 시정을 위한,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제기된 사안은 새로이 맞은 사돈과 친동생 같이 지내는 김명성씨 요구지만,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치관의 차이나 지레 겁먹은 것이지 하등에 문제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명성씨는 블로그 아이디를 알고있는 정영신씨에게 쓰리쿠숀을 쳐 더 열 받게 했다.
그 이후 비밀번호를 바꾸어 아무도 모르게 했지만, 그 날 기록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동자동으로 복귀하여 일상으로 돌아왔다.

허튼 일에 끌려 다니지도 않을 것이며, 성가신 생각일랑 말끔히 지워버렸다.

비록 쪽방이지만 내집이 편하다는 걸 실감한다.

배고프면 끼니 때울 걱정은 있으나,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






지난 토요일은 빵 타러 공원에 내려갔더니, 긴 행렬이 양쪽에 줄지어 있었다.
한 쪽에는 추석선물을 나누어 주었는데, 알아보니 삼성에서 돈 내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대한적십자사'가 마련한 선물을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난, 추석선물보다 주린 배를 채울 빵이 더 필요했다.
빵을 탄 후에도 선물 주는 줄이 끝나지 않아 어렵사리 선물박스도 받았는데, 뭔가 무거웠다.
황금덩이는 아닐 테지만, 잔뜩 기대감에 4층까지 낑낑대며 들고 올라간 것이다.
열어보니 한 살림이 나왔다.





밀가루, 설탕, 부침가루, 국수, 당면, 간장, 고추장, 된장, 식용유, 참기름, 소금 등
주방에서 필요한 물건은 다 들어 있었다.






공간이 좁아 밥을 해 먹지 못하는 나로서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좁은 방에 그 많은 물건을 둘 곳도 마땅찮을 것이다.
물론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필요 없는 것은 비좁은 방에 그냥 쌓아둘 수밖에 없다.





얻어먹는 거지 주제에 주는 대로 받지, 웬 말이 그리 많으냐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가난한 쪽방주민들을 위한다면 좀 더 합리적으로 도왔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한 사람에게 줄 액수만큼 상품권으로 나누어 주어, 필요한 것만 구입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물품구입에 따른 리베이트를 챙길 수 없는데다, 나누어 줄 때 광고 효과가 없어 그러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가 여러차례 나왔으나, 계속 줄 세우며 밀어붙이는 것은 좆 까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건가?





더 이상 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만들지 마라.

다른 지역에 없는 '쪽방상담소'는 당장 해체하고, 모든 일은 동사무소에서 전담하게 하라.

이런 일로 청와대에 민원 넣기를 바라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어제는 더워서 난리를 쳤는데,
오늘은 술로 더위를 마취시켜 버렸다.
알딸딸하니 훨씬 살만하더라.






그래도 잠이 안와, 담배 한 대 물고 옥상에 올라갔다.


아이고! 깜짝이야.

건물 관리하는 정성덕씨 아지매가 먼저 자리 깔았네.






왕왕거리는 개소리에 깨어나 날 반겨주는데,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는 ‘오빠는 잘 있단다.’ 노래가 나오네.







행여 미투에 휘말릴까,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나온 김에 동네 순찰 한바퀴 돌았다.





바람 통하는 비탈 건물 명당자리에는 다들 자빠져 자고,
영달이는 더워도 그림 좋은 자리에 자리 잡았네.






새꿈 꾸려 새꿈공원에 갔더니, 아이구! 이게 왼 떡이냐?
술도 넉넉한데다, 잠 못 자는 놈들 다 모였네.






문신으로 폼 잡는 영철이를 비롯하여
추교부, 유정희 등 동자동 골통들이 판 벌여 놓았네.





삼양동 빨래터 아제가 따라주는 술을 졸라 빨아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노래는 금지다.

살아남기 위한 풍찬노숙의 철칙이다.






하나 둘 쓰러져 자기 시작해 비틀비틀 쪽방으로 기어올랐더니,
옆방의 완석이는 치질이 도졌는지 똥꼬를 내놓고 자더라.





나도 찬물 몇 박 뒤집어쓰고 기어들었으면 그냥 자빠져 자지,

또 일기 쓰느라 씰데 없는 짓거리나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벌써 여름 날씨다.
따끈따끈하게 달구어진 옥상 열기로 쪽방은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올 여름 지낼 생각하니 아찔하다.
정선으로 피난 갈 작정이나, 노숙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여름은 노숙, 겨울은 쪽방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 달 어버이 날에는 동자동과 서울역 주변에 노숙자들이 너무 많았다.
안쓰러운 행색이지만, 지나치는 사람들의 그들에 대한 시선은 차갑다.
“멀쩡한 것들이 일안하고 논다”는 투다.






다 사정이 있다. 일방적으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
물론, 젊은이도 있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 지병이 있는 환자들로 술 없이는 못 견디는 알콜 중독자다.
모든 희망이나 삶의 의욕마저 잃은 사람들이다.






노숙자들은 아이엠에프 금융위기에 급속히 불어났다.
한 마디로 살벌한 돈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들이다.
사업이나 가정만 파탄나지 않았다면, 거리로 내몰릴 가능성이 거의 없던 평범한 시민들이다.
간혹은 사회적 규범에 갇히기 싫은 히피 기질의 노숙자도 몇몇 있으나 극소수일 뿐이다.






길에서 자는 노숙의 노자를 길 노(路)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노숙자라는 말은 바람 속에서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잔다는
사자성어인 풍찬노숙(風餐露宿)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니 길 노(路)자가 아닌 이슬 노(露)자를 쓰는 노숙자(露宿者)다.
이슬 맞고 자는 거지가 생겨난 지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의 복지를 최우선시 한다는 요즘 같은 세상에
기초생활수급 혜택마저 받을 수 없는 그들을 너무 냉대하지 마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부터 거두어다오.






‘다시서기’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신경 쓰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그들도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까다로운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

이제 벼랑에 몰린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다 같이 고민해야 한다.






노숙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괴물이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다”는 말은 결코 헛소리였던가?


사진, 글 / 조문호


















쪽방사람들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는지, 다들 걱정되는 모양이다.
사진하는 정영신씨가 지난 12일 동자동을 방문했다.





내 사는 것도 보고 싶겠지만, 용성이 모자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수면바지 두 개와 먹거리를 사가지고 왔는데,
온 김에 송범섭씨와 장애인화가 윤용주씨도 만나보라고 했다.

 





그 들 살아 온 이야기 들어 보면 책 몇 권 읽는 것보다,
더 값진 공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방 아래층에 사는 송범섭씨 방부터 찾았는데,
그 방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방이 작아 세 사람 앉으니, 꽉 찼다.






한쪽에는 약봉지가 줄줄이 놓여있고,
한쪽에는 나비 접기 위해 모아 둔 종이 봉지도 있었다.
이 친구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갖고 산다.





쪽방상담소 봉사요원으로 일하며, 틈만 있으면 희망의 나비를 만든다.
한 때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젠 달라졌다.
얼마 안 되는 기초생활수급비를 아껴 적금까지 들며 꿈을 키운다.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며 희망과 좌절을 반복했지만,
모든 욕심 버렸으니, 더 이상 좌절할 것도 없다.






두 번째는 장애인화가 윤용주씨 방을 찾았다.
들여다보니, 좁은 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일전 성당에서 치룬 그림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의욕이 충천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다리의 통증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젠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보라는 부탁도 했다.
그 정도 의욕이고 투지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술의 힘이다.






세 번째는 오층 옥탑 방에 사는 황춘화씨 방을 찾았다.
쪽방에서 두 명이 살 수 없어, 높고 가파른 옥탑 방을 얻어 사는 데,
방안에 있어도 입김이 절로 나왔다.






전기장판으로 간신히 온기를 유지하지만, 말이 방이지 창고나 마찬가지다.
두 모자는 큰 냄비에다 술국을 끓여놓고 있었다.






황춘화씨는 40여년 전 남편의 폭력에 견디지 못하여 어린 용성이를 안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 뒤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다른 사람에게 맞아 죽었단다.





자활봉사로 떠돌며 공중화장실 청소에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마저 힘이 미치지 못하니,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젠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으나, 늘 아들과 술로 소일하고 있다.
함께 마시다 차례대로 쓰러져 자지만, 행복해 보였다.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이 혼자 사는 쪽방에서,
사랑하는 두 모자가 즐겁게 사니, 그 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 모두 술기운에 젖어 살지만,
서로 챙겨주며, 술도 조금씩 절제시켰다.
오히려 나더러 술 좀 적게 마시라며 용성이가 충고했다.






세 사람 살아 온 이야기만 옮겨도 책이 몇 권은 될 것이다.
정영신씨는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 싶어 왔지만, 오히려 위안을 받은 것 같다.
어느 누가 그들을 보고, 세상에 불만이 있겠느냐?



사진, 글 / 조문호























2017년 12월 04일 (월) 19:34:54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두 발 없는 지체 장애인 윤용주(54세)씨의 한국화전이 지난 3일 후암동 천주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절망의 늪에서 다시 일어 선 흔치 않은 전시라 주변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 윤용주, '산하' 73x 53cm (국제장애인미술대전 특선작)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 온지가 13년 된 한국화가 윤용주씨의 인생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전시장마다 좋은 전시가 한 둘이 아니지만,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결실이라 더 아름다웠다.



    

▲ '포도' 45x53cm



아름다운 진경산수를 먹물로 풀었는데, 대부분 화려한 꽃이 어우러진 채색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가 그려낸 붉은 꽃이 핏빛인양 처연하게 보이는 것은 그림 한 점 한 점에 다시 일어서려는 결기가 서렸기 때문일 것이다.



    

▲ '만추' 59x56cm



그는 IMF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전주에서 건설회사 하청업체를 운영하다 부도가 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술로 한탄의 세월을 보내다 가족에게 버림당했고, 서울의 고시촌과 쪽방 촌을 전전하며 죽지 못해 연명해 온 것이다.



    

▲ '단풍' 45X35cm



기나 긴 체념의 세월은 건강을 돌 볼 여유조차 없었다.

천식과 고혈압, 신장질환, 뇌전증, 폐기종, 당뇨 등 그의 종합병원 수준인데,

몇 년 전 합병증에 의해 혈관이 막혀 다리가 썩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해 볼 때만 해도 오른쪽 다리만 절단하였으나, 이젠 두 다리를 모두 잃은 1급 지체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 전시작품 앞의 작가 윤용주씨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생겨났다.

30대에 화가로 활동한 이력을 알게 된 사진가 김원씨가 그림을 그려보라며 사준 화구가 용기를 내게 했다.

20여년 중단되었던 한국화였지만, 그의 집념은 단숨에 세월을 되돌렸다.

한 사람 눕기도 불편한 그 비좁은 쪽방에서 틈만 있으면 붓을 잡았으니,

옛 솜씨가 다시 살아나며 한의 무게까지 실려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



지난 8월, 제2회 국제장애인미술대전에 출품한 작품이 당당하게 특선으로 뽑히므로 자신감을 얻게 되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전시를 이틀 남긴 지난 1일 동자동 ‘새꿈공원’앞을 지나다 작가 윤용주씨를 만났다.

전시가 눈앞에 닥쳐 할 일도 많을 텐데, 자신의 발 역할을 해주는 전동휠체어가 고장 났다고 했다.

마침 봉사단체에 연락이 닿아 휠체어를 실어 보내고 있었는데,

표정도 밝지만 뚜벅 뚜벅 무릎으로 걷는 걸음에 힘이 실려 있었다.



    

▲ 전시를 앞 둔 윤용주씨가 바삐 걸어가고 있다



절망과 희망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는 자리였다. 인간의 강한 의지 앞에는 몹쓸 병마도 무릎 꿇게 한 것이다.


지난 3일 후암동 천주교회에 마련된 전시에는 많은 쪽방 촌 이웃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고 있었는데,

작가 윤용주씨는 작품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고 필요한 이웃과 나누겠다고 말했다.

어려운 삶을 사는 동자동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전해주는 따뜻한 손길에는 정이 서려있었다.



▲ 축하하러 온 동자동 주민들과의 기념촬영



예술의 가치란 작품성만 논하며 구중궁궐에 갇히는 것 보다, 대중들이 같이 좋아하며 함께 나누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

윤용주씨의 재기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그의 작품에서 예술의 위대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ss@sctoday.co.kr



2017년 11월 21일 (화) 18:43:13                                                              조문호 기자/사진가 prees@sctoday.co.kr



동자동 쪽방촌 주민 등 300여 명 참가,신명과 봉사 한마당 펼쳐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위안잔치인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 한마당’이 지난 8일 오후1시부터 4시까지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열렸다.

남영동과 ‘남영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서 마련한 이날 축제는 만추의 낙엽이 흩날리는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열려 한층 가을의 정취를 더 했다. 주민 300여명이 나와 함께 어울린 흥겨운 잔치였다.




 ▲구인선씨를 비롯한 7인의 난타그룹이 첫 무대를 장식했다



맨 먼저 구인선씨를 비롯한 7인조 난타그룹의 춤추는 난타가 공원을 들썩이며 축제의 포문을 열었다. 사회자 이상훈씨의 내빈소개로 단상에 오른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위로하며, 도덕과 예의가 땅에 떨어진 오늘의 현실을 걱정했다. 한편으론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들의 망동을 꾸짖기도 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행사장에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만이 아니라 남영동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다. 이 날은 신명나는 공연만이 아니라 다양한 봉사도 이어졌다. ‘용산보건소’에서는 어르신들의 혈압, 당뇨체크 및 건강 상담을 하며 응급체험관을 운영했고, ‘쎄아떼미용전문학원’ 봉사단들은 주민들의 머리손질하기 바빴다.



    

▲씨아떼 미용전문학원 봉사단에서 주민들의 머리 손질을 하고 있다



한쪽에선 스리랑카 음식 체험도 하고, ‘남영동새마을부녀회’에서는 우동과 녹두전의 음식 나눔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는 인형, 매듭, 향초, 차 등 공예품을, ‘소망을 찾는이 교회’는 한지공예품과 무공해농작물을 판매하는 등 프리마켓을 열어 온 공원이 시끌벅적했다.


    

▲동자동 정용성씨의 행복한 표정



무대에서는 은지노래와 백댄서 춤이 어우러지는 색스폰 연주로 어르신들을 흥겹게 만들었고, 김기환씨는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트럼펫으로 구성지게 불어 쓸쓸한 가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가수 한경아씨가 주민들에게 농담을 건낸다



최현선씨를 비롯한 4인조의 오카리나연주에 이어 가수 한경아, 김영남, 김시연씨가 나와 다들 좋아하는 트로트 곡으로 분위기를 잔뜩 띄웠는데,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인기곡이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포크가수 주석렬씨의 정겨운 노래에 이어 마지막으로 등장한 노숙인밴드 ‘민들레’는 최헌의 ‘오동잎’으로 쓸쓸함을 달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노숙인밴드 '민들레'가 '오동잎'을 연주하고 있다



이 날 주민들에게 신바람을 일으켜 어께를 들썩이게 한 것은 단연 음악이지만, 한데 어우러지며 즐겁게 한 것은 가위바위보 등 다양한 게임을 벌여 주민들을 무대로 끌어들인 레크레이션이었다. 많은 경품을 준비한 효과도 있었지만, ‘신바람 나는 복지 공동체 만들기 사업’이라는 취지와 같이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정 나누고 협동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신발 차 넣는 레크레이션에 참여하고 있다



기자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정해진 공연 중간 중간에 주민들의 장기자랑을 넣어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잘 모르는 가수들의 틀에 박힌 노래를 들으며 구경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 다소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친근한 주민들의 노래와 장기자랑도 함께 어우러진다면 금상첨화겠다.



▲주민들이 '가위 바위 보'레크레이션에 참여하고 있다



모처럼 ‘서울역쪽방상담소’와 ‘동자동사랑방’ 등 민관이 협력하여 만든 멋진 동네잔치였다. 쪽방에 갇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겠는가?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는 동네 분들의 모습에서 진득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하루였다.








두 발 없는 지체 장애인 윤용주(54세)씨의 한국화전이
오는 3일 후암동 천주교회에서 개최된다.

동자동에 들어 온지가 13년 된 윤용주씨의 인생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세월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어선 결실이라 더 아름답다.
아름다운 진경산수를 먹물의 짙고 옅음으로 드러낸 수묵화도 있으나,
대부분 화려한 꽃이 어우러진 채색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가 그려낸 붉은 꽃이 핏빛인양 처연하게 보인 것은,
그림 한 점 한 점에 다시 일어서려는 결기가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IMF가 만들어 낸 희생양이다.
전주에서 건설회사 하청업체를 운영하다 부도나며 비극은 시작되었다.
술로 한탄의 세월을 보내다 가족에게 버림당했고,
서울의 고시촌과 쪽방 촌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기나 긴 체념의 세월은 건강을 돌 볼 여유조차 없었다.
천식과 고혈압, 신장질환, 뇌전증, 폐기종, 당뇨 등 그의 종합병원 수준인데,
몇 년 전 합병증에 의해 혈관이 막혀 다리가 썩기 시작했다.
지난 해만 해도 오른쪽 다리만 절단하였으나,
이젠 두 다리를 모두 잃은 1급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생겨났다.
30대에 상업화가로 활동한 이력을 알게 된 사진가 김원씨가
그림을 그려보라며 사준 화구가 용기를 내게 했다.

20여년 중단되었던 한국화였지만, 그의 집념은 단숨에 세월을 되돌렸다.
한 사람 눕기도 불편한 그 비좁은 쪽방에서 틈만 있으면 붓을 잡았으니,
옛 솜씨가 다시 살아나며 한의 무게까지 입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8월, 제2회 국제장애인미술대전에 출품한 작품이
특선으로 뽑히므로 당당하게 재기하게 되었다.






전시를 이틀 남긴 지난 1일 동자동 ‘새꿈공원’앞을 지나다 그를 만났다.
전시가 눈앞에 닥쳐 할 일도 많을 텐데,
자신의 발 역할을 해주는 전동휠체어가 고장 났다고 했다.
마침 봉사단체와 연락이 닿아 휠체어를 실어 보내고 있었는데,
표정도 밝지만 뚜벅 뚜벅 무릎으로 걷는 걸음에 힘이 실려 있었다.






절망과 희망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는 자리였다.
인간의 강한 의지 앞에는 몹쓸 병마도 무릎 꿇게 한 것이다.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쪽방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는 없을까?

내일은 후암성당에서 열리는 윤용주씨 한국화 보러가자.
다들 윤용주씨의 재기를 축하해주며, 대견한 그의 등 한번 두드려주자.
우리도 그림 한 점 방에 걸어두고, 희망 한 번 싹 틔워 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은 지난 해 9월 촬영한 사진으로

그 때는 왼쪽 다리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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