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어 늙어가는 거야 서럽지만,
경자년이 왔는데 그냥 넘어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기해년 간다고 마시고 경자년 온다고 마시니, 이러다 술로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갈 땐 가더라도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지 않더냐.

 

 

 

 

 

정초부터 연 이어 술 복이 터졌다.
정월 초하루에는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얻어 먹는데,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찾아왔다.
소주와 장어를 등짐에 넣어 왔는데, 어찌 술을 마다 하겠는가?

 

 

 

 

빵을 좋아 하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빵도 잔뜩 사 왔더라.

동자동 살면서 배급주는 빵 맛에 길들었는데, 이젠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양놈도 아닌 주제에 밥보다 빵을 더 많이 먹는 편인데, 술 안주로도 괜찮다. 
빵 안주는 술도 취하고 배도 부르니, 도랑치고 게 잡는 격이 아닌가?
소주가 모자라 꼬불쳐 둔 상황버섯 술을 꺼내 마셨다.

 

 



그 다음 날은 여섯시에 모임이 있다는 정영신씨의 전갈을 받았다.
예술인협동조합을 준비하는 서인형씨가 마련한, 시무식을 겸한 술자리란다.
서인형씨를 만나 구산동 ‘싸리골’에 갔더니, '서울민예총' 사무국장 황경하씨가 와 있었다.
뒤늦게 미술평론가 최석태씨가 나타났는데, 일을 추진할 사무실도 곧 차린다고 했다.

 

 


삼겹살에다 갈비까지, 정초부터 육고기로 배를 채웠는데,
금주령이 해제된 서인형씨가 많이 마시는 바람에 덩달아 취해버렸다.
이차 가자는 걸 줄행랑쳤는데, 녹번동까지 따라 온 것이다.
술 귀신이 따로 없었다.

 

 



방이 좁아, 겨울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다락방에 술상을 차린 것이다.
추워 떨며 마시니 좀 덜 취하는 것 같았다.
아들 햇님이 까지 찿아 와, 동자동에서 가져 온 초코파이 한 상자를 손녀 하랑이 주라고 선물했다.

 

 



이 술 저 술 닥치는 대로 마시다보니, 죽을 때나 마실 작정인 ‘불사주’까지 나와버렸다.
그 날은 술이 취해 맛도 모르고 마셨는데, 남은 술로 아침 해장을 하니, 정말 좋은 술이더라.

올 해는 술독에 빠져 아무래도 제 명에 죽기는 틀린 것 같다. 

 

 

 

다들 고마웠어요.  새해에는 만사형통하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황경하 / 글 : 조문호

 

 

 

 

 

 

 








지난 22일은 은평구 동내배움터 “뽀데모스”에서 사진 공부하는 날이었다
아들 햇님이가 진행하는 공부방인데, 나더러 사진 강의 좀 해달란다.
평생 강의라고는 서너 번 밖에 하지 않았는데,
갈 때마다 죄지은 놈 청문회 끌려가듯 어쩔 수 없어 나갔을 뿐이다.




첫 강의 할 때는 얼마나 혼 줄 났는지, 그 다음부터 술의 힘을 빌었다.
술에 취하니 수강생 눈이 보이지 않아 입이 열리기는 하는데,
쌍시옷 자가 수시로 나와 나이 값을 못했다.




그런 강의 공포증이 있지만, 아들 부탁인데 어찌 거절하랴.
죄 많은 애비 마음을 알랑가 모르겠다.




걱정되어 정영신씨 까지 대동해 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아들 페북을 보고 알게 된 몇몇이 오겠다고 했으나 오지 말라고 말렸다.
가보니 며느리와 손녀 하랑이까지 나와 있었는데,
사진가 노재학씨를 비롯한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아 아주 가축적인 분위기였다.




큰 걱정은 덜었으나, 이 빠져 삭은 소리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진 찍지, 예술 하지 말라는 말도 했고,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주변을 찍으라는 말도 했다.

아들에게는 전몽각선생의 ‘윤미네’처럼 하랑이를 지속적으로 찍으라는 주문도 했다.




그런데, 강의 자료로 열장이 넘게 쳐 갔으나 눈에 보이지를 않으니 말이 연결되지 않았다.

독수리 타법으로 치느라 얼마나 고생한 자료인데...
한 시간으로 강의를 끝내고, 남은 한 시간은 정영신씨 장터 사람으로 떠 넘겨 버렸다.

하랑이 보려는 속셈도 작용했다.




하랑이는 엄마 품에서 풀려나고 싶어 몸부림 치고 있었다.
책상 의자에 세워주니 연필로 뭔가 적는 듯 끄적거렸다. 무슨 사진을 안다고...
그동안 공부할 때 마다 공부방에 나온 모양인데,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는 말도 있으나, 이 녀석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영신씨 강의가 끝나 헤어질 시간이 되니, 노재학씨가 맥주 한 잔 하잖다.
소주가 아니고 맥주란 말에 사양했더니, 가서 마시라며 술값을 건네주네.
염치없이 받아서는 활인마트에 들려 와인 한 병, 안심 한 팩을 사왔다.
징그러운 걱정거리 해결한 기념으로 정영신씨와 한 잔 했다.




술자리가 끝나 자리에 누웠으나, 하랑이 모습이 아른거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옛 말이 실감났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조햇님 담벼락에서 퍼 온 사진인데, 표정 하나 죽인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손녀 하랑이를 보게 되었다.
며느리가 넘어져 하랑이 머리를 찧었다는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간 것이다.
아들 햇님이가 추석 전부터 밥한 끼 먹자는 연락을 해왔으나,
추석 대목장 찍는 정영신씨와 일정이 맞지 않아 추석 뒤로 미뤘는데,
마치 미룬 것을 탓하는 것 같았다.



 
며느리는 다리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어 걱정을 덜었으나, 머리가 부딪힌 하랑이가 걱정되었다. 
울다 잠든 하랑이 머리에 외상은 없었으나, 마음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다 일어난 하랑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거침없는 표정에
걱정 같은 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그래, 넘어지고 깨지면서 자라는 거야. 


 

처음엔 두 늙은이를 낮선 듯 멀뚱거렸으나, 금방 익숙했다.
요상하게 생긴 영감탱이 형색보다 안경이나 카메라 같은 사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메라 앵글을 내 눈높이에 맞추면 처다보고, 하랑이 눈높이에 맞추니 바삐 기어왔다.




이제 아랫니가 두 개 나기 시작했는데, 이빨 빠진 나보다 복숭아를 잘 먹었다.
하랑이의 일거 수 일 투족이 얼마나 이쁜지,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핏줄은 무서운 것 이었다.




사랑은 마약 인가봐.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 두 번 보면 세 번 보고 싶으니...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3일 아침,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울먹이는 햇님의 전화를 받았다.

병세가 위중한 상태에서 한 달 넘게 버티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기어이 떠나신 것이다.



 


서울서북시립병원’ 병실에는 햇님 엄마의 낮은 통곡이 처절하게 깔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하데이! 그 흔한 꽃구경 한 번 못시켜주고, 맛있는 거 한 번 못해주면서, 지랄 같은 성질머리로 맨날 욕만 끌어 퍼부엇제.

새벽 네시만 되면 햇님이 잘 되라고 기도했는데이제 그 기도는 누가 하라고 가버렸노? 흐흐흐~"





불효자가 더 슬피운다는 말처럼, 그 울음은 한 여인의 한 맺힌 통곡이었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어, 지켜보는 햇님도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밖에는 남지현이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손녀 하랑이를 안고, 햇님이와 교대로 병실을 드나들었다.



 


외할머니 연세가 올해로 아흔 셋이고, 큰 고통없이 돌아가셨으니 호상임은 틀림없었다.

더구나 고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는 내가, 이토록 슬픈 것은 왜일까?

아마 버림받아 힘겹게 살아 온 두 모녀의 기구한 운명 때문일 것이다.






슬픔도 잠깐일 뿐, 눈앞에 닥친 장례절차와 비용이 더 걱정되었다.

'정의당' 은평지역 일에다 지역봉사에 매달려 벌이가 신통찮아,

틈틈이 공사판 노가다 일이라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장례 비용이 싸다는 서울서북시립병원장례식장 조차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문 닫은 지 오래되었단다.

연고자 없는 쪽방 빈민처럼, 화장터로 직행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닌듯 했다.



 


대개의 경조사 경비조달은 서로 돌아가며 도와주는 축의금이나 조의금에 의존하지 않던가. 

알리는 것이 구걸하는 것 같아, 형편이 어렵지 않던 친 어머니 초상은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지만,

막상 형펀이 어려운 햇님 외할머니 장례는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가 없었다. 


30여년 전 햇님이 엄마와 이혼한 사이라 가족관계가 끊긴 것이다.

획일화된 장례절차도 개선할 점이 많지만, 가족제도의 모순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햇님 엄마의 무데뽀 성격에 친정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려 알릴 곳도 없단다.

오죽하면 햇님 엄마를 잘아는 오랜 친구들이 고외수씨를 고악질 여사라고 불렀겠는가?



 


국화 한 송이 없는 간소한 장례지만, '은평장례식장' 장례비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문상객 한 사람 없는 빈소를 지키고 있으려니, 애가 터졌다.


돈이라고는 사정을 잘 아는 사진동지 정영신씨가 오십 만원 보태 주었고

햇님 엄마 외가 오빠가 준 오십 만원이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정의당' 당원들이 마지막 날 늦게 몰려 왔는데, 그 조의금이 이백만 원이나 되었단다. ,

큰 부담을 줄여 준 동지들이 고맙기 그지 없었다.


장례비 오백만원 중 부족한 돈은 햇님이 카드로 막았으나, 늘어난 빚이 걱정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2일장 같은 간소한 장례절차도 생겨야 할 것 같았다.



 



이틀 날 아침 6'백제화장터'로 옮겼으나, 납골당 비용도 걱정이었다.

정선에 수목장 하자는 내 뜻이 받아져 돈은 들지 않았으나, 먼길이라 어려움도 따랐다.

하필이면 정선 만지산에 도착할 즈음에는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십 팔년 전에도 폭우가 쏟아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승용차가 계곡에 추락해 가족이 다치기도 하고, 질퍽대는 땅에서 치룬 장사는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어머니 제사가 바로 오늘인데, 같은 날 치루는 수목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의를 입고 땅을 팠으나, 자세가 좋지 않았던지 허리를 삐꺽한 것이다.

은행나무 밑에 나무상자를 파묻고는 비닐로 덮어 비를 피하게 해두었다.

내일 가족들이 몰려오지만햇님 더 머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수목장은 30일 이내에 군청에 신고해야 한다는데, 장소가 임야라야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

매장한 곳이 농지라 산소로 이장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는데, 삐꺽한 허리의 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팠다.

앉거나 누우면 괜찮으나, 서있거나 걸어 다니면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 제사를 간소하게 지낸 후 자정이 지나 겨우 잠 들었는데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는데, 누가 이 깊은 밤에 전화를 거는 것일까?

전화번호를 바꾸어 아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말이다.

다시 전화가 울렸으나 받지 않았는데, 그 뒤로 잠이 오질 않았다.





간신히 한 두 시간 눈 붙이고 일하러 나가니, 그 때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도대체 시도 때도 없이 거는 전화가 누구인지 궁금해, 안 받을 전화를 받았더니 햇님 엄마였다.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전화 건 사연이 기가 막혔다.

화장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시신 묻을 때 빠트린 것이 있다며 추가로 유품을 묻을 수 없냐?"는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혀 "백제화장터에서 화장하는 걸 직접 보지 않았냐?"고 냅다 소리 질렀더니,

그때 사 생각났는지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치매 증세가 심해진 스스로를 한탄하는 울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리가 아파 앉아서 땅을 파고, 뿔뿔 기어다니며 벌초하였더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낫까지 들지 않아 잡초를 베는 것이 아니라 거의 뜯는 수준이었다.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여 정오 무렵 끝났으니, 한 두 시간에 끝낼 일을 무려 여섯 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마치 시간을 맞춘 듯 인천의 형님가족이 산소에 도착했는데, 흙과 땀이 범벅된 내 몰골을 보고 기급을 한 것이다.



 


엄마! 오늘 오빠 좆 됐소” 

농담을 지껄여 다들 웃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형님이 준비해 온 음식을 차려놓고, 햇님 외할머니와 잘 지내라는 부탁을 드리기도 했다.

점심 먹으러 읍내 나가자는 형님 말을 사양한 채 만지산에 남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상추와 고추 따느라 또 다시 두 시간 남짓 씨름한 것이다.





몸을 씻고 떠날 준비를 하니, 그때 사 집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선에 머문 이틀 내내 카메라 한 번 꺼낼 겨를이 없었는데,

마당 밑에는 도라지꽃이 만발하고 언덕에는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렸다.



 


꽃도 딸기도 다 싫고, 한시라도 빨리 정선을 떠나고 싶었다.

빨리 가서 눕고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 운전하는 자세가 그 중 편하기 때문이다.


연극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이제 그만 잠들고 싶다.

 

사진, / 조문호












 




 

아부지! 외할머니가 위독해요아들의 전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분은 35년 동안 등 돌린 채 살아 온 옛날의 장모다. 비록 햇님 엄마와 이혼하였지만, 아들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그 연이 끊길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안부는 아들로부터 들어 왔지만, 차마 찾아뵙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으로 끝내야 할 비운의 삶을 딸이 똑 같이 이어받았으니, 얼마나 나를 원망하였겠는가?

 

아들 외할머니가 입원했다는 서북시립병원으로 찾아가니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워했다. 싸늘하게 여윈 손에서 병세를 느낄 수 있었으나, 오히려 늙어 초라한 내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밥은 먹었냐?”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환이지만 기도에 문제가 생겨 음식을 삼키지 못했다. 물 같은 죽도 삼키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손자가 입에 넣어주는 죽은 고통스럽게 받아먹었다. 병상 옆에는 햇님이 어머니까지 앉아 있었다. 허리에 문제가 생겨 걸음도 제대로 못 걷지만, 치매증상이 생겨 병원에 왔다는 것이다. 다들 목숨은 살아 있으나 자식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옛날 장모였던 김득금(94)씨는 처녀시절 김해 대저국민학교 여교사였다. 당시 교장선생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장선생의 아들 ()고영보씨와 결혼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아내와 헤어져 서울에서 생활한 고영보씨는 명문여대를 졸업한 신식 여성과 눈이 맞아버렸다. 외동딸 고외수(72)씨를 두었지만 고향의 아내에게 이혼을 강요하게 되는데, 기구한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딸 고외수씨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외톨이가 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공군대령이었던 고영보씨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에 가담하여 군사혁명 재판관이란 악역을 맡았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씨를 반혁명행위라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 다음에는 공보부차관이란 직책을 맡아 일 년간 군사정권의 나팔수로 일 했으나 토사구팽의 전형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쿠데타 집단에 가담하여 죄를 짓지 않게 도와 준 일이었다.

 

딸 고외수씨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성장할수록 성격이 날카로워 진 것 같았다. 가끔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을 사정없이 퍼부어 고혈압인 아버지가 뒤로 넘어 진적도 있었단다. 그러다 고외수씨의 두 번째 비극이 나와 연결된 것이다.


 

, 그 당시 아버지 몰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부산으로 도망쳐와 에덴공원에서 음악실을 운영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사는 히피족의 삶을 추구했는데, 어느 날 어떻게 알았는지 아버지가 그 곳을 찾아오신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후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주셨다. 죽기 전에 아들 장가라도 보내고 싶다, ‘에덴공원원장 ()백준호 장로를 찾아가 장가보낼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그 때 중매한 여인이 바로 고외수씨였는데,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병에 걸린 것 같은 자책도 작용했지만, 평소의 흐리멍텅한 처세가 문제였다.

 

결혼식을 올린 후 음악실 밑에 신방을 차렸으나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시집 온 신부는 그런 생활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음이 되지 않아 온 방이 들썩거리는 시끄러운 하드락의 굉음도 괴로웠겠지만, 정해진 시간도 없이 손님들과 어울리는데다 여자 친구까지 끼어 음악을 들으며 대마초까지 피워댔으니,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불만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술상을 뒤집어 그 친구가 다시 못 오게 만들었다.

 

친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햇님이 엄마와 헤어지고 싶었으나, 성질이 모질지 못해 헤어지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 곳을 떠나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학사주점을 차렸는데 대박이었다. 그 무렵 아들 햇님이가 태어나, 비로소 가정에 안정을 찾아 간 것이다. 그런데 부산 남포동으로 가게를 옮겨 오며 성업은 이어졌으나, 사진을 시작하게 되며 또 다시 불행이 시작되었다. 주인이 사진에 미쳐 돌아다녀 가게에 신경을 쓸 수 없으니 손님이 서서히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포동에서 서면으로 옮겨가며 영업을 하다 결국 다 털어먹고 서울로 올라 온 것이다.


 

사진을 시작하며 손님과 부딪힐 일이 없어 햇님이 엄마와 싸울 일은 줄었지만, 그 때부터 또 다른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렵사리 월간사진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박봉으로 방세도 내기 어려웠다. 한 번은 햇님이 엄마가 사무실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린 적도 있었는데, 그 성격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성격에 앞뒤 가리지 않지만, 악의나 뒤가 없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런데, 햇님이 엄마에게 아들을 데리고 외가로 내려가 있으라고 종용한 것이 대를 이어 이혼의 상처를 안긴 불씨가 되었다. 하필이면 이삿짐 싸는 날에 비 까지 내렸는데, 헤어지기 싫어 처마 밑에서 울고 있던 아들 햇님의 모습은 여지 것 지워지지 않은 천형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부산으로 식구들이 내려갔으나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수시로 걸려오는 저주에 가까운 전화를 감내해야 했는데, 아들이 대학에 들어 갈 무렵, 용케도 삼성카메라에 계약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진 때문에 한 직장에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4년까지 버틴 게 자식에게 도움 준 전부였다.


 

본래 여자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혼자 사니 더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사진하는 여인에게 정을 주었지만, 심지어 사진 찍으러 들어간 오팔팔 여인에게도 정을 주었다. 그런 무질서한 생활로 결국 이혼을 요구했는데, 그 때부터 아내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또 하나 불행의 시작은 아들까지 사진을 공부해 어려움을 자초한 것이다. 사진 전공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패션사진에서 웨딩사진에 이르기까지 여러 업체에 전전하였으나, 쥐꼬리만큼의 보수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더러운 현실을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이 정의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세상을 바꾸기란 계란으로 바위 깨기일 것이다.

 

그 별난 어머니의 성질을 참고 견디며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힘겹게 산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짊어 질 짐을 자식에게 떠 넘겼으니, 난들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평생을 눈물로 보낸 두 여인의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요즘 같으면 자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지만, 예전의 어머니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한을 참고 견디며 살아 온 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운명인데, 그 여인들의 삶은 누가 보상할 수 있겠나?


이제 마지막으로 옛날 장모와 햇님이 엄마에게 보답 할 수 있는 길은 자식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잘 못 규정지어진 사회의 모순이나 사진계의 잘못에도 당당히 맞서려 한다. 후세들이 고통 받지 않는 좋은 세상을 위해 이 한 몸을 불사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글은 비운의 두 여인에게 보내는 속죄의 글이지만, 어쩌면 비슷한 운명에 처한 수많은 여인들에 대한 위로이고, 사진하는 남편을 두어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아내들에게 드리는 위안의 글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비운의 여인들에게 사죄드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 아들 햇님이로 부터 점심식사를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침 식사를 거른 채 녹번동에 갔더니, 있어야 할 정영신씨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 보니, 파주장으로 촬영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뿔사!
운전할 사람 없으면 꼼짝 못한다는 안일한 생각에 미리 연락 못한 불찰이었다.
좀 있으니 손녀 하랑을 대동한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을 어쩌랴?
이 빠진 것처럼 허전 하지만, 우리끼리 식사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서오능으로 간다는데, 그 것도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낙지집이란다.






그런데, 낯선 외출이라 그런지, 하랑이의 표정이 편치 않아 보였다.
아무리 얼르도 웃지 않아, 갑자기 옛날 햇님이 얼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햇님이 앞에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펼치며 “까꿍~”하면
까꿍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내 모습에 까르르 웃었다.






백일 무렵에는 대상 연속성이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손에 얼굴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마치 마술쇼를 보고 “우와~”하며 반응하는 것처럼,
까꿍 소리와 함께 나타났으니 신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애기들을 억지로 웃기는 것이 육아 정서발달에 도움이 될까?
어른 들 좋아라고 아기를 억지로 웃기는 것이 좋은지 모르겠다.
아무튼, 웃음이 만복의 근원이라니 해 될 것은 없을 듯하다.






햇님이도 어릴 때 잘 울지 않는 순둥이였는데, 하랑이도 잘 울지 않았다.
애가 자주 우는 것도 피곤하지만, 잘 울지 않는 것도 걱정이다.
많이 울어야 노래도 잘 부른다니까.






손녀 하랑이 때문에, 육아심리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하랑아! 건강하게 자라다오. 예쁜 인형 사줄게...

사진, 글 / 조문호










하랑아! 고맙다.
너를 만나는 순간 꿈은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사 같이 잠든 너의 모습을 보니, 온 마음에 평화가 가득했고.
빤작이는 눈동자에서 새로운 희망이 솟구쳤으며,
환하게 웃는 해맑은 표정에서는 세상 시름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구나.






이 할아비는 평생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본 벙어리란다.
사랑이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입에 뱉어서는 안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칠십이 넘도록 고치지 못한 바보다.






너를 만나는 순간, 안아 보고 싶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기어이 아무 말도 못한 채, 카메라 화인더 속에 숨어 너를 훔쳐보기만 했구나.
긴 세월 살아온 네 할미는 물론, 네 아비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지만,
너를 낳느라 고생한 네 어미에게도 등 다독이는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구나.






살다보니 이심전심이 되었지만, 왜 그리 애정 표현에 인색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리고 네 아비를 키우며 착하게만 자라 달라고 빌었던 것이 때로는 후회스럽기도 했다.
착한 사람이 못 사는 세상이지만, 너에게도 영악하게 살아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구나.






네 아비와 어미도 좋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나섰지만,
나 역시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작정이다.
그리고 하랑(嘏烺)이란 이름이 ‘크고 장대한 빛이 환하다’란 뜻을 가졌지만,
하나로 어우러지는 세상에 너의 이름이 불러졌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하랑아! 부디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다오.

-바보 할아비가 보냄-






지난 주말 사진후배 성유나씨가 손녀 하랑이 보러가자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하랑이가 태어 난지 오래지만, 참고 참아 백일이 될 때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이를 데리고 치루는 백일잔치를 탐탁찮게 생각해 왔는데,
다행히도 백일잔치는 생략한다기에 먼저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백일이 되는 날은 비좁은 집에 늙은이 까지 끼어들어 번잡스럽게 만들기도 싫지만,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다.




 


정오 무렵 들려 함께 식사하기로 했으나, 아침부터 마음이 들떴다.
손녀에게 줄 선물이 걱정 되어 잠을 설쳤는데, 정영신씨가 준비해 두었다기에 한시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후로 신혼 방은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걱정 되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도 못했다.

애비가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하니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 



 



염체불구하고 찾아갔으나, 짐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어수선했다.
손녀 하랑이는 천사처럼 새근대며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더구나..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아! 이래서 손주바보가 되는갑더라.
친구들이 손주재롱에 빠져 외출도 삼가며 히히덕거릴 때는 손가락질하였지만,
이제사 이해가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하랑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들 햇님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구나.
잠에서 깨었을 때만 한 번 울었지, 시종일관 생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 순하고 착했다.
카메라를 치켜든 요상하게 생긴 늙은이가 이상한지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뜬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남은 생은 몰래 숨어 다니며 하랑이만 찍어대는 파파라치가 되고 싶어졌다.






이제 담배 값을 줄여서라도 하랑이 선물 사줄 돈을 꼬불쳐 두기로 작심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하랑이의 행복만을 빌어야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성유나사진



























대마씨 껍질 모아 한 모금 피웠다.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마음이 어수선 해서다.
사진 동지가 물 밑으로 가라앉아 연락 두절이었다.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되었는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햇님이로 부터 손녀 태어났다는 연락도 왔고,
사진가 이정환씨의 장인 돌아가셨다는 부고도 떴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손녀야 볼 일이 많겠지만, 세상 떠난 망자부터 찾아 나섰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편안한 저승길이 되길 빌었다.
문상객이 넘치는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이정환씨와 술 한 잔했다.
처가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준 장인이었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 오자마자 돌아가셨으니, 힘들어 보였다.






충무로 사진축제 부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무로 사진축제에 관여한 적이 있으니, 사정을 잘 아는 듯 했다.
우선 명동에서 충무로 넘어오는 건널목 만드는 게 시급하단다.





사진축제에 사진인들이 협조하지 않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사진으로 먹고사는 카메라점이나 각종 업주들의 무관심을 더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진인을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내고 일어나니, 알딸딸한 게 기분 좋았다.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잠실나루 역 가는 길은 호젓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야경을 찍어려니, 세 다리가 없었다.
카메라가 흔들려 불빛이 미끄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이면 어떻고, 빛 그림이면 어떠랴?






유난히 밝은 보름달에 끌린 건, 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손녀 같았다.


이 험난한 말세에 태어난 걸, 과연 좋아만 할 일인지...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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