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에서 일하는데, 정영신씨가 차 끌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총알같이 달려갔더니, 민예총사무실에서 인수 인계하던 서인형, 최석태씨도 함께 내려왔다.

일 마무리하며 뒤풀이로 술집을 가는 모양인데, 가다 가다 녹번동까지 갔다.

차 버려두고, 술 한 잔 하자는 배려였는데, 덕분에 양 갈비 집에서 한 잔했다.



    

 

매번 지나치던 집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인데, 정성스레 구워 준 양고기와 중국술 연태주가 찰떡궁합이었다.

과분한 술상에 기분 좋게 취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공모전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기획의 베테랑인 서인형씨와 추진력 있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민예총사진단체 구성을 위해 고민하는

정영신씨가 모인 자리라 대략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진 활동을 해 오는 동안 제일 진절머리를 낸 것이 사진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이란 상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의 공모전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왔.

그 상을 놓고 벌이는 주최 측이나 심사위원들이 벌이는 구역질나는 형태를 생각하니,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취기도 올랐지만, 사라지는 게 덕일 듯싶어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하니, 공모전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과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신인 등용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의 경험담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무렵인 70년대에도 사진공모전이 대세였다.

주로 '사협'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인데,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점수를 축척해야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 한 장으로 작가의 능력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협회에 가입해야 작가로 인정받는 줄 알았으니, 공모전에 매달린 것이다.

공모전이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에는 해악이 될 뿐이다.

연출이던 조작이던 튀는 이미지만 만들어 내면 백발백중이다.



국전에서 분리되어 개최된 첫 '한사전(1981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씨의 '환회'


 

그 땐 전국 지부에서 공모전이 있었으니, 점수 채우기는 쉬웠다.

그러나, 준회원은 최초 입선에서 2년이 경과되어야 했고, 정회원은 4년이 경과되어야 가능했다.

세월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입회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공모전이란 것이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상 따먹는 재미인 셈인데, 자신의 작업은 뒷전이고, 심사위원들 비위 맞추는 사진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 심각한 폐해를 깨달은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던 중 81년도 무렵,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제2회 '한사전'(1983년) 대상 수상작인 고) 양은환씨의 '나들이'

몽타쥬에 의해 만든 작품으로 연출냄새가 나는데다 화면 배분도 엉성하다.


 

신문에 동아미술제공모 수상작이 게재되었는데, 대상에 차용부씨의 기지촌의 이후가 발표되어 있었다.

이 또한 공모전이긴 하지만, 방법이 달랐다.

일단 새로운 형상성이란 기치를 내걸었고, 이년 전에 공모할 주제를 미리 공고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구미를 당기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연작사진으로 출품하는데다

85년도 공모작의 주제가 직업인으로 발표되어 있었다.

당시는 사창가인 전농동 작업을 준비하며 주위를 맴돌아 다닐 때인데, 그 작업에 추진력이 붙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아 다섯 장의 사진으로 조를 맞춘 홍등가라는 사진을 출품했는데,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으로 뽑힌 것이다.



1985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작인 조문호의 '홍등가'와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김희룡씨의 '풍어제'



빈 집에 소 들어온다는 속담처럼, 상금에다 작품 매입대금까지 들어왔으니 횡재한 것이다.

청량리 588에 입주할 돈이 생겼으니, 도랑치고 게 잡은 셈이었다.

상금이란 바로 이처럼 사진가의 작업경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동아미술제'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에 의해 취지가 흔들맇 수밖에 없으니,

세월 따라 변질되다 결국 없어지고 말더라.



제9회 한사전(1990년) 대상 수상작인 최주억씨의 '북소리'

 


그 뒤 이름도 거룩한 한국사진작가협회에 편집장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호구지책으로 똥 판에 들어갔지만, 이 기회에 사협이란 회보지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협이란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다 보니,

그 곳에서 진행되는 공모전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장삿속이었다.



한 때 박근혜가 이사장이었던 '정수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제11회 '대한민국 정수사진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종두씨의 '저산 팔읍 길쌈놀이'다

이 사진이 대통령상이라는데, 누가 뽑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 뒤 87년도 무렵 민주항쟁개인전을 하려니, 이사장이란 자가 전시를 말려,

기회다 싶어 사직서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참 후에는 국전 급에 해당되는 한사전공모전의 실태가 세상에 까발려 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전에 여관방에 모여 입을 맞추는 추태가 들통 난 것이다.

결국 농간을 부렸던 사무국장이 구속되며 사진인들 얼굴에 똥칠 시켰다.


만 명이 넘는 거대 단체로 성장한 원인도 바로 사진공모전이 효자노릇을 했으나, 사람은 많으나 사진이 없다

그 것을 본보기로 좋은 공모전을 만드는데, 참고할 일은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뒤 아들 조햇님이가 부산경성대 사진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식 등록금을 마련 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콜이 온 것이다.

삼성카메라클럽이란 전국적인 단체를 만드는데, 사무국장직과 삼성포토패밀리라는 계간지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얼씨구나!’하며 계약직으로 들어가 자식이 졸업할 4년 동안 일한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강수씨의 "서울' (20매 중 4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공모전을 만들어 신인을 발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모임이라 그들의 입맛에 맞는 단사진 공모 부문도 있었지만,

연작사진부문을 추가한1한국사진대전을  95년도에 공모한 것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홍순태선생과 육명심, 한정식선생께서 운영과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결과 연작부문의 ‘95한국사진가상우수작으로 송미경, 이강수, 장석주씨 세 사람이 뽑힌 것이다.

다 젊은 신예작가로 개성이 뚜렷했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 (20매 중 4매)


 

이강수씨는 서울을 주제로 도시의 그늘진 풍경을 보여주었고,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은 나환자촌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성작가였는데, 공단 여공들의 매춘을 다룬 소재로 충격적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작에 선정되었으나, 삼성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 담당 전무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입상을 취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수상자들


 

예사 일이 아니었다.

사무국장직을 그만두고 문제 삼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한정식선생께 전화드려 부탁한 것이다.

결국 상은 주지만, 전시는 안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원하는 사람만 입상작을 볼 수 있도록, 전시장에 입상작 사진과 면장갑을 준비한 것이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최우수작 조임환씨의 '이농지대'(20매중 3매)


 

그 다음해인 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사진 부문의 수상자는

최우수상에 조임환씨의 이농시대가 뽑혔고,

우수상에는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와 신 옥씨의 초충도가 결정된 것이다.

첫 해에는 완전한 신인들의 출현이었지만,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의 출현이 달라진 점이나

성공적인 공모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20매중 3매)


 

그러나 다른 입상작은 작품집에 남아 있으나 문제의 작품인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은 자료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송미경씨의 그 이후 활동조차 알 수 없어 더 안타까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작가를 수소문해, 그 때 사진들을 재조명하고 사진사에 남기는 것도 숙제로 생각한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신옥씨의 '초충도'(20매중 3매)


 

그러나 한국사진대전도 그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항공사장이 바뀌며 강남 삼성동에 있던 삼성포토스페이스를 없앤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진가회' 첫 회장이신 고,홍순태선생과 김한용선생의 현판식 장면



반 협박에 가까운 비장의 카드를 꺼내 얻어낸 것이 충무로 세기양행2층에 마련한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 임대보증금과 운영비 일부 보조였다.



돌아가신 후 '최민식사진상'으로 구설수에 오른  최민식선생의 생전 모습

 


그 이후에는 공모전에 관련될 일이 없었는데, 뒤늦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동강사진상이 작업 성취도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는 상이라면,

최민식 사진상은 주최 측의 시상 목적대로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한 다큐사진가를 뽑는다고 했으나,

그 또한 성취도 위주의 동강사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일으킨 최광호씨의 '천제'



형식만 포토폴리오를 제출하는 공모 형식이었지, 끼리 끼리 노 잔치였다.

첫해는 이갑철씨가 받아 그냥 넘어갔으나, 두 번째는 최광호씨가 받아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부산의 이광수교수 문제 재기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그 공모전도 두 번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모전은 절대 운영위원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 사진상들이 잘못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인들에게 많은 빈축을 사왔기에, 공모 형식의 사진상이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이젠 중견작가들을 위한 포상식의 작가주의 사진상은 그만두자. 첫번 째로 '동강사진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뒷자리로 물러 난 사진가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신진들을 발굴하는데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최광호씨를 지지했다”고 말하는 이상일 운영위원장


 

많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다.

기존의 공모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 전시회를 평가해 상을 주자는 것이다.

일단 수순을 밟은 작가가 민예총에 등록하여 개인전을 열면

여러 명의 미술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이 비밀리에 전시를 돌아 본 후,

일 년 동안의 개인전을 모아 총평가하여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수상자에 대한 수상작 전시는 물론 전시를 둘러 본 평론가들 모두가 작품을 평론하는 등

제대로 된 작품집까지 만들어 문제작가로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제1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그 세부적인 운영은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인 최석태씨를 비롯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마련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날 술자리에서 드리지 못한 의견을 이 글로 대신함을 양해 바란다.

아무튼,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제2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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