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 유행가 자락이다.
술꾼들은 예수님 말씀을 너무 잘 듣는다.
원수라는 술을 그토록 사랑하니까...






술 때문에 먼저 간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닌데다,
더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질 못한다.
사랑이 아무리 진하다지만, 목숨 바치는 사람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술자리를 피해 인사동도 한 낮에 가지만, 며칠 가질 못한다.
저녁 먹자는 김명성씨의 뻔한 전화를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봐야 할 전시도 있어, 서둘러 인사동으로 달려갔다.






인사동 벽치기 골목 깊숙이 박혀있는 유담 커피집에는
김명성, 김용국씨와 함께, 제주에 사는 이용철씨도 와 있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술시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요즘 김명성씨 패거리는 술도 인사동에서 마시지 않고, 연신내에서 마신다.
그 곳은 불러 낼 술꾼도 많은데다, 음식이 맛있고 싸기 때문이다.
연서시장 안에 있는 ‘똑순내’집이 단골인데, 주모의 넉살도 죽인다.
여럿이 간장게장에 병어 찜을 안주로 실 컨 마셔도, 오만원이면 떡을 친다.





삼청동 '이노갤러리'에 들려, 전시장 지키던 강찬모화백 까지 데리고 갔다.
데모대 막는 경찰에 막혀, 택시 안에서 돈만 버리다, 결국 지하철을 타야 했다.
먼저 간 김병국씨가 술상 차려놓고 기다렸는데, 술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해인, 이만주. 서길헌씨가 왔고, 늦게는 최벽호씨 영화 찍는데 갔던 오세필씨도 등장했다.






그 날의 화제는, 오래전 인사동 ‘실비집’이나 '시인통신'에서 퍼 마시던 이야기였다.
추접 떨기로는 사진기자 김종구를 당할 자가 없었는데, 

막걸리 주전자에다 여름철 꼬랑내 나는 양말을 휘휘저어 짤아 마시지를 않나,
어떤 놈은 한 술 더 떠, 똥딱지 묻은 빤스까지 벗어, 술에 짤아 쳐 마셨다.
벌주로나, 기 싸움으로 마시는 호기도 천태만상이었다.






그 지긋 지긋하던 일들도, 이제 아련한 전설이 되었는데,
강찬모씨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 주었다.
지금에야 술을 멀리하여 부처같이 살지만, 그도 예전엔 꼴통이었다.





어느 놈이 커다란 막걸리 주전자에다, 남자변기에 붙은 누런 찌꺼기를 끌어 넣었다고 한다.
한 참을 마시다 주전자에 덜거덕 덜거덕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변기 찌꺼기를 걸러주는 마게였다고 한다.






아무리 더러워도 모르고 마시면 약이겠으나, 알고 나면 속이 뒤집힐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위생을 따지는 요즘 잣대라면, 다들 병 걸려 죽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 목숨이 생각보다 질긴 것이다.






서울역에 사는 노숙자들을 보면 알 수있다.
그들은 물을 겁내는 족속이라, 목욕은 커녕 손도 씻는 일이 없다.
항상 더러운 손으로 상한 음식을 먹어도 배탈도 나지 않는다.
몸은 길들이기 따라 내성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술자리의 객기는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옛날 꼬맹이 시절에 아버지 친구들이 어울려 벌이는 기행을 엿 본적도 있다.
소리꾼 정상수씨가 운영하는 기방에, 울 엄마 정탐꾼으로 아버지를 찾아 갔는데,
기녀 고무신에다 술을 따라 마시고 계셨다.
다들 알만한 점잖은 분들이라, 기가 막혔다.






그 후 어른이 되어, 그 때의 기행이 풍류로 느껴지며 나도 서서히 물든 것 같다.
술이 취하면 객기를 부리는 것이 다 그 때 영향이 아닐까?
아니면 부전자전이던지...






그 다음에는 죽은 술꾼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쪽방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사람은 다 술꾼이다.

진짜 술이 원수다.



인사동에서 갤러리하던 김용철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 날 처음 들었고,
배불둑이 박진관씨도 몇일 전 혼자 객사했다.

그저께는, 술 취해 가던 김수길씨가 쓰러져 119에 실려 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해인씨가 ‘인사동 유목민’이란 소설을 쓰며, 그동안 죽은 술꾼을 헤아려보니, 4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술 마시던 김명성씨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먼저 일어나야겠다는 것이다.

놀란 오세필씨가 데려다 주었는데, 지금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수 십 년을 같이 마셨지만, 그런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지켰던, 그마저 간다면 이제 끝나는 것인가?

다들 술 때문에 죽을 판이지만, 그래도 악을 쓰며 마신다.


“그래 죽자.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전시도 보고,
반가운 분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오래 된 인사동 사람은 너무 잘 알아 지겹기도 하겠지만, 인사동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사도 더러 있어, 나가지 않을 수도 없다.






지난 17일은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진열씨의 목판화전으로, 그런대로 많은 분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이태호, 최석태, 김 구, 손기환, 나종희, 이흥덕,
이인철씨를 만날 수 있었고, 뒤풀이집 ‘자미향’에서는 정복수, 김종업씨도 만났다.
그런데,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장경호씨가 나타나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더 슬픈 것은 사과는 커녕,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 듣고도, 술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간다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골목에서 이인섭씨와 노광래씨를 만났다.
다들 술이 고픈지, ‘평화만들기’에 한 잔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조해인 시인과 남해의 진공선사와 함께 있었으나,
반가운 설 주 한잔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페북을 열어보니, 귀가 찬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몇 일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만났던 박윤호씨가 이상한 표정의 내 사진을 올려놓고,
줄줄이 장난질의 댓글을 올려놓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도 너무 공격적으로 찍는다.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사진을 고른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명색이 변호사란 최혁배씨가 문호 꼴 보기 싫다는 등 작난 글을 올려 놓았는데,
내가 지 친구거나 후배라도 그 따위 말을 페북에 올릴 수 없다.






그보다, 미운 정이니 어쩌니 댓글 단 박윤호씨의 처사가 더 괘씸했다.
그것도 나에게 링크까지 해둔 걸 보니, 나 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어 졌지만, 지랄 떨다 내리겠지 생각하고 양양으로 촬영을 떠났다.
한 밤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의 처사를 나무라며, 지켜보겠다는 댓글만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 확인하니,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문제의 댓글만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도 사진 찍어 올리면서 사진 내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럴려면 나부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놓는 박윤호씨 사진은 모두 내려야 했다.





작심하고 컴퓨터에 눌러 붙어 박윤호씨 이름과 사진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으니, 그가 찍힌 사진이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때문에 함께 찍힌 다른 분들 사진까지 내려야 할 경우가 많았다,
온 종일 찾아 지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다 지우고 나서, 다시 페북에 들어가 당신의 사진과 글은 모두 삭제했으니, 내 사진을 내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한 참 후에야 사진을 내리고는 줄줄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이 따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단지 죄라면 30여년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웃기려 애썼던 것 뿐이다.
술자리에서 개똥철학이나 풀며 거룩한 표정 지어봤자, 피차 피곤하다.






씨잘 데 없는 소리지만, 술 자리에서 한 번 웃으려고 한 말을 두고,
그 자리에선 좋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웃고 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흑사리 쭉지로 알고, 몰캉하게 본 것 같다.

이젠 사람 좋다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다.






씨바!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막다른 길의 싸움꾼이다.
선배고 후배고 세상에 민폐 끼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도, 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한 번 지켜보라. 나쁜 놈들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은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2018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의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이
이화마을 일대와 ‘아지트문화갤러리’에서 내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지난 9일 방문했으나, 늦장 부리다 뒤늦은 소식이 되었다.






사진가 김수길씨가 2010년부터 이 전시를 기획하여 참가하고 있으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동안 도시재생 문제로 지역민들의 갈등이 시끄러웠으나, 이화동 낙산마을 자체를 처음 가 본 것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물어물어 낙산공원으로 향했는데,
마로니에 공원에는 젊은이들의 거리공연이 흥을 돋우고 있었다.
도보로 약 10~15분 거리라, 산책하기 좋은 코스였다.






이화동은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 카페, 공방, 호프집, 식당 등 다양하게 들어서 있었다.
여기 저기 조형물과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다, 성곽길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도 있고,
도처에 옛날 교복을 걸쳐 입은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산 모양이 낙타를 닮아서 ‘낙타산’으로도 불리는 낙산공원은 옛 모습대로 복원한 성곽 따라 역사 탐방로가 이어져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일품이었다.






벽화마을에 관광객이 몰려드는데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몰래 벽화를 지우거나
붉은 페인트로 휘갈긴, 마을 관광화를 반대하는 글귀도 보였고, 계단에 그려진 벽화를 지운 흔적들도 역역했다.
마을 재개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부 갈등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2006년 서울시가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진행한 ‘낙산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화동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 따라 그려진 벽화와 계단 위 그림은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의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져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으나,
동네 사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인 ‘가을 봄 여름 그리고 겨울“전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렸는데,
이화동 삶의 이야기가 빨래 줄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사진가 김수길씨를 비롯한 출품작가들의 사진이 저 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김수길 작



낙산마을페어 뿐만 아니라 “낙산실빛음악회”도 열렸고, 대학로에서는 서울아트마켓 국제공연예술제도 열리고 있었다.
사람사는 이야기인 낙산 아랫동네 이야기는 내일까지니, 일요일 데이트 코스나 산책 코스로 이화동을 정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진을 감상하고 있으니, 반가운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김수길씨가 나타났고, 조해인시인도 왔더라.





김수길씨가 차린 술상에 목을 적시기 시작했는데,
‘아지트문화갤러리’ 관장인 양한모씨와 “ART & SHARE" 대표 김영기씨도 만났다.






양한모씨가 직접 갈아 준 커피에다 중화요리까지 골고루 영양 보충한 하루였다.
늦게는 인천 사는 권양수씨가 나타나 심심찮게 만들었다.
사진가 김수길씨 덕에 낙산 구경 한 번 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김수길작




양한모작



김수길작























사진가 김수길씨가 응암동에 “순간포착”이 아닌 “순간포차”를 차렸더라.
지난 3일, 송추 전강호씨 집에 가을소풍 갔다 오며 이차로 들린 술집이었다.
김수길, 공윤희, 민영기씨 등 몇 명이 둘러앉아, 송추에서 모자란 기름을 ‘순간포차’에서 보충하였다.
뒤늦게 조해인, 박진관씨도 나타났는데, 나만 ‘순간포차’를 몰랐던 것 같았다.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전형적인 선술집이나 통술집 스타일인데, 가뿐하게 한 잔 하기 딱 좋았다.


그런데, 돌아가신 민병산 선생 조카 민영기씨로 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바로 인사동 사람이라면 한두 장 쯤 다 갖고 있는 민병산 선생의 글씨였다.
아들 조햇님 결혼식을 미처 몰랐다며, 전해주라는 결혼선물이었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는 민병산선생은 세상을 훤히 읽고 있지만, 평소 별 말씀이 없으셨다.
붓 글씨 또한 얼마나 좋은지, 추사선생께서 계셨다면 아마 스승으로 모셨을 것이다.
자유롭고 거침없이 몰아가는 바람 같은 획들이, 쓰 놓고 나면 얼마나 조형적인지,
한 눈에 반할 글씨였다. 항상 괴나리봇짐에 잔뜩 넣고 다니며 나누어 주셨다.


선생께서는 달라고 말만 하면 거침없이 주었지만, 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주지 않았다.
싫어서도 아까워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하는 것 같아 차마 주지 못하신 것 같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토록 많은 글을 쓰서 나누어주셨지만, 나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달라고 손을 내밀지 않아 못 받았는데, 어떻게 귀한 작품을 그냥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민영기씨가 내놓은 민병산 선생의 붓글씨 내용을 보니,
김삿갓처럼 떠돌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봄 새벽’이란 시였다.
살아생전 그 글을 인사동 ‘귀천’에서 쓰시는 것을 보고 탐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글씨를 삼십년 만에 만났으니, 그 인연도 예사롭지 않다.
마치, 달라지 않은 너는 가질 자격이 없으니, 자식에게나 주겠다는 것 같다.
그 시를 곱씹고 곱씹으며 민병산 선생님을 그린다.

“봄날 혼곤히 잠들어 새벽을 느끼는데
여기저기서 새 울음 들려온다.
지난 밤 비바람 사나웠기에
꽃잎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아누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은 고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엉뚱한 일로 무산되고 말았다.

용산경찰서사이버수사대에 출두하여 조사받는 날과 겹쳐진 것이다.


 

3년 전 수난 당하는 동강할미꽃, 최초 발견한 사진가는 이석필씨다.”란 글을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는데,

뒤늦게 야생화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명예혜손으로 고소장을 접수시킨 것이다.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지가 숱한 시일이 지나도록 감감소식이었는데,

뒤늦게 주소지인 용산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가 찍어 발표한 동강할미꽃 사진이 야생화의 생태를 헤치는 잘못된 방법이라는 점과

알려 진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바로잡기 위해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내용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실과 달리 동강할미꽃 최초촬영자로 나서며 정선군의 명예군민증까지 받지 않았던가?

동강할미꽃 사진은 그가 촬영하기 10년 전 태백의 야생화사진가 이석필씨가 먼저 찍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1999년 동강환경사진집에 실린 이석필씨의 동강할미꽃 사진만 하더라도 김정명씨가 만든 야생화 달력보다 앞서고 있다.

    

 


문제는 누가 먼저 찍었냐보다 동강할미꽃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거나 꽃에 붙어있는 마른 풀을 뜯어내는 등

생태환경을 파괴하여 내 놓은 그의 사진에 있는 것이다.

야생화사진을 심사할 위치에 있는 중견사진가의 꽃 사진이 그러할진데,

어찌 사진 배우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그의 사진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 글을 올린 것도 따라하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만행을 근절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야생화사진이란 생태를 파괴하는 것 보다, 자연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사진이라는 것이지,

김정명씨 개인에 대한 감정이 있거나 명예를 혜손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변명으로 일관된 고소장을 읽어보며,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챙겨간 증거자료를 제출하며, 수사관의 질문에 답변하다 보니 조사시간이 세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며 동자동으로 돌아왔으나, 곧 바로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모처럼 인사동에서 술 한잔하자는 사발통문을 받은 것이다. 

반가운 인사동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야 마다할 수 없지만,

노회찬의원의 영결식이 있는 27일까지는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동안 술자리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술을 사양해 왔고,

그제 밤에는 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도 음복 한 잔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약속장소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조해인, 장경호, 공윤희, 전활철, 박혜영, 김상현씨가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는 유진오, 정영신, 이인섭, 이 현, 황예숙, 박상하씨도 나타났다.



모임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인사동 사람들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내용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때로는 당사자의 반감으로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들을 했으나,

잘 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데 어찌 친분을 따질 수 있겠는가



오는 8월25일 아들 햇님이 장가 갈 걱정에서 부터, 속도위반으로 손자를 얻어 일타 쌍피를 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하필이면 사돈 될 두 내외가 16년 전 영월 천포문학회에서 거시기 퍼포먼서로 난리 친, 그 집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더니,

조준영교수는 한 수 더 떠 내가 찍은 그 때 사진을 핸드폰에서 보여 주었다.



조준영교수는 쪽 팔린다며, 부인의 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화가 이청운을 검색해보니, 죄다 조준영씨와 술 마시는 사진만 나오더라는다.

"이젠 같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너무 탓하지 마시라요."



사실 사진판이나 문화예술계는 물론 즐겨 찍는 인사동이나 동자동 사람들 대개가

가깝거나 잘 아는 분들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 이야기를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부터라도 정신차려야 하는 것은, 나이 들어가며 더 이상 쪽팔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중엔 왕따가 되어 외로워지더라도 내가 할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노회찬의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피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문대통령이 문상은 가지 않으면서 장례기간 중에 광화문 호프집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맥주 쇼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정치 자체가 쇼를 필요로 하는 것이겠지만, 정치적 동지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기야 박원순 시장까지 옥탑방에서 쇼를 벌이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쇼에 넘어가는 순진함에 있다는 것이다.


 

장경호씨는 인사동 모임을 묵사모로 하자고도 했다.

민초연대로 하면 참여할 사람이 많겠지만, ‘묵사모가 더 좋다는 것이다.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默思의 뜻은 좋으나 단번에 묵사발이란 말부터 떠올라 좀 그랬다.

하기야 모임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지 그까짓 이름이야 무슨 소용이랴!

단지, 술 마시고 노는 모임에서 인사동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모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도 모르게 술을 마시고 말았다.

고인도 그 시간엔 편히 영면에 들었겠지만, 숱한 시름을 술잔에 풀어놓고 말았다.


 

부디 이 땅에 진보정치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나마 잘 지켜주소서!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달 26일부터 보름 가까이 더러 누워 낑낑거렸다.
창 너머로 유혹하는 봄바람도,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도 못들은 체, 매일같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처음엔 정선에서 몰고 온 감기몸살로만 알았으나, 숨을 쉴 수 없는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검사 해 보더니, 폐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언어장애는 있었으나, 담배 탓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병원에 가보라는 지인들의 충고를 묵살하였더니, 기어이 올 것이 찾아오고 만 것 같았다,

호흡기에 이상이 있어도 갑자기 이런 경우가 올 때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월부터 전시하기로 되어있는 ‘산골사람들’ 사진을 전해주고 오기 위해

천장 위에서 끄집어낸 액자 때문인 것 같았다.

14년 동안 부엌아궁이에서 나오는 끄름에 쌓여 있었는데, 마스크도 하지 않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하는 장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평소의 미련한 고집을 차마 자백할 수 없었다.

”숨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일만 반복하는 무료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일체 병실을 알리지 않은 채, 문병조차 사양했다.

티브이는 물론 핸드폰마저 꺼 버렸으니,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정영신씨가 노트북을 병실에 갖다 주었으나,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그냥 고통 없이 죽는 주사 한 방에 조용히 눈감고 싶었다.






별다르게 진행하는 치료도 없이 약만 받아먹는 처지라,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안고 퇴원해 버렸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지만, 술 생각과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니, 술도 한 번 마셔보고, 담배도 한 대 피워보자.

모든 것이 사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니, 콤펙트카메라만 호주머니에 넣고 인사동 나들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날은 박진화씨의 드로잉전이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날이지만, 숨이 차 4층까지 올라 갈 기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으로 들어갔는데, 조해인시인과 사진가 이수길씨가 먼저 보였다.

옆 자리에는 윤성광씨와 박혜영씨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눈에 꽂히는 그림 한 점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미 저승으로 떠난 적음선사의 ‘파적’이란 시에 신준식씨가 그린 그림이었다.

두 사람 다 끼가 있는 꾼이었지만,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한 사람은 암자에서 술이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한 사람은 술이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이 무슨 암시인가?

‘가을밤의 춤’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는데, 그 이글거리는 담배불의 유혹에 온 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뒤늦게 다인 최종선씨와 공윤희씨도 나타났고,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도예가 김정범, 터너 이동환씨 등 여러 명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가히 인사동 아지터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 자리잡은 조해인, 이수길씨와 조용하게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는데, 온 몸에 이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말 없이 술집을 나서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소관이라며...





몇 걸음 걷다 한 참을 쉬어 가야하는 인사동의 밤거리가 낯설어 보였다.

그 늦은 밤에도 땅을 파 뒤집고 있었고, 마치 조계사의 야경이 저승 풍경처럼 음산했다. 




적음의  '파적' 부분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다니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토요일, 급히 만날 분들이 있었다.
술이 취해, ‘인사동사진축제’ 구상안을 이규상씨 페북 메시지로 보낸다는 게,
실수하여 전체공개가 된 것이다.

그 내용에는 이규상씨는 물론 엄상빈씨 이름까지 거명되어 있어,
당사자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많은 분들의 관심 속에 댓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잘못된 경위를 문자로 전한 후, 일단 만나 뵙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5시 무렵, 아내와 인사동 ‘허리우드’로 나갔다.
엄상빈씨와 이규상씨 두 분께, 전 후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일단 운영위원 부터 구성하여 구체적인 기획안이 나올 때, 공개하기로 했다.
사진인들의 힘을 모아, 우리사진의 정체성을 찾는 축제에 공감했다.

‘나우갤러리’에서 박진호씨와의 약속으로 오래 지체할 수 없었다.
이규상씨가 달을 훔친 사나이 만나러 가자는 제안에 모두들 일어섰다.
‘나우갤러리’에는 박진호씨와 여친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 깨며 자리까지 빼앗았지만, 어쩌겠는가.

모처럼 오붓한 자리에서 달과 함께 놀았다.
누구 말처럼, 훔친 달이지만 풍류가 그윽했다.
서예가의 힘찬 붓길 같기도 하고, 추상화 같기도 했다.
이 좋은 달밤에 어찌 술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규상씨를 따라 청계천에 있는 국수집으로 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수육을 안주로 소주 한 잔했다.
얼마나 맛있던지, 사진 찍는 일도 잊어버렸다.
얼큰하게 취해, 아쉽지만 헤어졌다.

아내를 앞세워, 다시 인사동 ‘유목민’으로 쳐들어갔다.
그 곳에도 반가운 분이 많았다.
멀리서는 김기영씨가 손을 흔들었고,
이호상씨의 노래소리가 골목을 매웠다.

신성준선생을 비롯하여 조해인시인, 노광래씨도 있었다.
이날은 주인장 전활철씨도 기타 치며 노래했다.
등달아 노광래씨 까지 기타들고 설쳤는데,
좌우지간, 실수로 시작된 하루였지만, 신나는 토요일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9일 정오 무렵, 제주 사는 변순우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이웃에 있는 조해인씨 집 부근의 ‘산호다방’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불과 500미터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커피숍에 밀려난지 오래된 다방이라기에 도대체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했다.

 

지하로 들어가는 너절한 입구를 보며, 보나 마나 짐작은 되었다.

대낮인데도 술 마시는 손님이 두 테이블이나 있는 걸로 보아

다방이라기보다 술집에 더 가까웠다.

한가롭게 쉬는 남정네들도 있고, 의자에 누워 곤하게 자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동네 사랑방처럼...

 

변순우씨와 조해인씨도 일찍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빠 나 쥬스 한 잔 마실게"

옆에 있던 다방레지의 꼬드김을 들으니

오래 전 끊긴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지하실의 퀴퀴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시골 다방을 연상시켰다.

실내는 푸르둥둥한 형광 빛을 받은 대형수족관이 칸막이 노릇을 하고,

옆 좌석의 소리를 가려주는 음악은 흘러 간 옛 노래 일색이었다.

때로는 느닷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튀어나와 잠자는 격정을 건드리기도 했다.

 

마담과 레지가 교대로 오가며 술시중을 들어 번잡스럽기는 했으나, 술은 잘 넘어갔다.

변순우씨는 치과에 일이 있어 올라 와 앞니 만 몇개 달랑거리며 술을 마셔댔다.

뒤늦게 부천에서 중고차매매상사를 운영하는 신영철씨가 찾아왔는데,

원로영화배우 신영균선생의 자손답게 신영균씨를 빼 닮았었다.

그리고 조해인 시인의 명상집이 8월경 ‘해냄출판사’에서 나온다는 소식도 들었다.

 

마치 술병에 구멍 난 듯 순식간에 맥주 열 몇병과 소주 세병을 비웠다.

오랜만에 음숭한 생각마저 들어 꼬불쳐 둔 ‘팔팔’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어느 한 곳에 힘이 쏠리면 쉽게 뻗지 않는 효과는 있지만, 괜한 호기를 부린 것이다.

낯 술에 취해 모두들 헤어졌는데, 텐트 친 가랑이를 움추린 채,

동내사람 볼까 조심스럽게 돌아와야 했다.

 

그 곳 ‘산호다방’은 도라지위스키 한 잔 시켜놓고 시시덕거렸던

80년대의 다방풍속 그대로였다.

시덥잖은 한 시절의 풍속이지만, 지나고 보니 아련한 향수는 있었다.

불현듯 최백호씨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가 생각났다.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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