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인사동에서 술 마실 기회가 많았지만,

요즘은 은평 지역에서 마실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 곳에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김명성, 서인형씨등

가까운 분들이 많이 살아 종종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예술인 ‘스마트협동조합’이 녹번동에 있는 것도 한 몫 하는 셈이다.

 

지난 25일 오후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녹번동 있으면 ‘마포나루’로 오라는데, 나의 움직임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녹번동으로 이동 중에 전화를 받아 술집부터 먼저 들렸는데,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조해인, 김수길, 백승호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포나루’는 서부경찰서 뒤편에 있는 조그만 횟집인데,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의 넉넉한 인심까지 한 몫해 김명성씨 단골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가격이 싸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에는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원님 덕이 아니라 김명성씨 덕에 매번 나팔 부는 집이다.

지척에 이청운씨 화실도 있으나, 함께 못함이  마음에 걸린다.

 

갈 때마다 회에다 멍게, 전복, 생선구이 등 갖가지 해산물이 코스요리처럼 나왔다,

해산물을 골고루 맛볼 수 있어, 오죽하면 거지 영양 보충하는 날로 여길까?

이 날은 모인 사람이 다섯 명이라 두 군데 나누어 술 상을 차려 놓았다.

 

김수길씨는 다음 주에 ‘마루아트’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고,

김명성씨는 김상현씨의 두번째 ‘뮤아트’가 이틑 날 개업한다는 소식도 주었다.

그 날의 화제는 김명성씨 소장품전인 ‘백범 김구 쓰다’전과 관련된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였다.

사회적위치가 높은 사람들의 부친 친일이력인데, 문제는 독립운동가로 조작한단다.

고증자료를 근거로 철저하게 진위를 밝혀야 한다.

 

그 날은 소주 한 병 남짓 마셨는데, 숨이 차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김명성씨와 먼저 일어났는데, 조해인씨는 시동이 걸렸는지 일어 날 생각을 않았다.

난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더 이상 마시지 않지만, 조해인씨는 달랐다.

몸도 챙겨야 할 나이지만,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로 끝장을 본다.

 

그런데,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기다렸다.

얼마 전 만해도 매일 같이 소식 주워 날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렸으나,

이젠 다른 일도 있지만, 몸이 받쳐주지 않아 일을 줄이기로 했다.

가급적 전시장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팅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안 한다.

 

그전 같았으면 주변 분들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이젠 꼭 필요한 사진만 찍고, 찍어도 올리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평에서 만난 분들 사진을 함께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양산에 가 있는 공윤희씨가 전화를 했다.

역촌동 ‘양갈비에 꼬치다’에서 기다린다며 빨리 오라는 것이다.

고깃집 이름은 흥미롭지만, 그 곳은 잘 가지 않는 술집이다.

가보니, 공윤희씨 뿐 아니라 조해인씨와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날은 폭설을 예고한 날이라 온종일 서울역 주변에서 맴돌았다.

백설이 휘날리는 서울역 전경사진이 한 장 필요했는데,

날씨가 포근해 그런지 간간이 내린 눈도 금세 녹아버렸다.

술 마시러 오라는 공윤희씨 전화에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달려갔는데,

술을 마시다 보니 진짜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황급히 서울역으로 달려갔으나, 도착할 무렵 눈이 그쳐버렸다.

운이 없는 건지 찍지 말라는 건지, 마치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부득이 눈 내리는 서울역이 아니라 눈 내린 전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남은 사진은 녹번동 정영신씨 집을 방문한 최석태씨와 서인형씨 사진이었다.

 때늦은 사진이지만, 그 날은 대취해 그런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또 언젠가는 연신내 청구병원 앞을 지나가는데 뒤에서 누가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화가 박불똥씨 였는데, 장경호씨 집에 들렸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사진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진은 어딘가 남아 떠돌테니까...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주말 정오 무렵,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동안 거리두기 핑계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뮤지션 김상현씨와 하양수씨 일행이 찾아 온 것이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설거지 하는 중이라 난처했다.

손님 대접할 음식이 없어 가래떡과 대마불사주로 한 해의 건강을 축원했다.

 

그 날 김상현씨로 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었다.

청담동에 ‘뮤 아트2’를 열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이란다.

후배가 후원하는 업소라 임대료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김상현씨가 병마를 털고 일어난 지가 오래지 않았는데, 연이어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김상현씨 일행이 일어난 후, 인사동 ‘유목민’에 전화를 걸었다.

지난 주말 전활철씨로 부터 전화가 왔으나, 일이 있어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즉 연락하지 못한 것은 집이 비좁아 한꺼번에 앉을 수도 없지만,

다섯 사람 이상 모이지 말라는 거리두기 지침에도 맞지 않은가?

 

전활철씨와 한 잔 하는데, 때 마침 조해인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듯이, 자리 만든 김에 조해인씨를 초대했다.

손님이 사 온 떡과 케잌을 안주로 기분 좋게 마셨다.

 

그 날은 일찍 세상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씨와

땡초스님 최영해씨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떠난 친구 그리워하기 전에 살아 있는 친구라도 자주 만나야 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이제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연식이라, 올 해는 친구 자주 만나는 해로 정했다.

"우리가 살면 언제까지 사나?"유행가 구절도 갱각난다.

 

코로나가 한 풀 꺾일 오는 5월 무렵, 인사동에서 심봉사 잔치 한 번 열기로 했다.

새해들어 시무주로 마신 대마불사주가 건강과 함께 깨우침을 준 것 같다. 

 

기대하시라! ‘인사동 기 살리기 잔치’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추석을 맞아 이청운화백 문병가자는 연락이 왔다.

병문안 간지가 2년이 넘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 걱정되었다.

이미 간다는 약속이 된 터라 내가 안 된다고 우길 일은 아니었다.

 

죽고 사는 것은 운에 맡기고,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에서 따라 나섰다.

약속한 서부경찰서 앞으로 가니, 전활철, 김명성, 조해인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이어 김상현씨가 나타나 다섯 명이 모여 병문안을 한것이다.

 

이화백이 자리에 누운 지가 벌써 6년이 지났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부인 이상랑여사가 반겼는데, 얼마나 고생 했으면 늙어보였다.

밤낮을 지극히 보살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듯, 자리 털고 일어날 때도 되었다.

 

! 그런데 이청운화백을 보니 화색이 좋아졌고, 눈빛에서 재기의 자심감이 보였다.

오래 전 만났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애통한 눈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 빨리 일어나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그림에 혼을 불어 넣어라.

 

오래 있을 수 없어 다들 연신내로 자리를 옮겨 술 한 잔 했다.

미리 약속했는지, 선수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먼저 온 네 사람 외에도 김각환, 최석규, 이상훈, 서길헌, 강찬모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복권 일등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연신내 복권매장에서

김명성씨가 복권10장을 사와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나야 복권 살 돈도 없지만, 어떻게 번호를 맞추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도 한 장 얻었는데, 주머니에서 돌아다니다 결국 확인도 못한 채 버렸다.

평소 요행을 바라지도 않지만,

만약 일억짜리에 당첨되었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물음에 멍해졌다.

돈이 생겼다는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팠다.

 

방향이 같은 조해인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코로나는 물러가고, 이청운화백도 일어나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모처럼 반가운 벗들을 만났다.
출감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벼슬하고 온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전화 받기가 머쓱해 핸드폰을 없애버렸으나
정영신씨를 통한 쓰리 쿠숀으로 쳐들어 왔다.




사실, 구치소에서 작심한 것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핸드폰을 없애는 일과 페북을 끊는 것도 있는데,
전화 없애는 일은 간단했으나, 페북 탈퇴는 작심 삼 일을 못 넘겼다.




결국 출소 이틀 만에 글을 올리고 말았는데,
페북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차례만 접속하기로 다짐에 다짐을 한다.



 
첫날은 정영신씨와 함께 일하는 ‘예술인협동조합’ 서인형씨가 찾아와
녹번동 ‘풍년집’에서 돼지 한 마리 잡아 몸보신 시키더니,
지난 주말에는 김명성씨 전화를 연결시켜주었다.




진관동 집 부근에서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데,
시인 조해인씨도 와 있었고, 뒤 따라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뮤아트’에서 음악 하는 낭자들도 셋이나 등장했다.




북한산 아래 ‘북한산 메기탕’에서 메기탕을 끓였는데,
수제비를 뜨도록 밀가루 반죽까지 넘겨주었다.
쪼물락 쪼물락 만지는 촉감이 꽤 좋을 것 같았다.
“아~ 옛날이여!”




술자리가 끝난 후, 김명성씨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청운씨가 그린 석양 포구에서 듣는 음악이 그리워서다.



그 날은 보슬비 내리는 창밖 풍경까지 한 몫 한 것은
북한산을 휘감은 구름이 장관을 연출해서다.



어찌 이 분위기에 술이 없을소냐?
중국집에서 유산슬 시켜 또 한잔 걸쳤는데,
김상현씨가 선곡한 음악까지 죽였다.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비롯한 축음기 시절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코맹맹이 음색의 간 들어진 노래 소리가 봄비마저 울렸다.



그날은 눈물의 여왕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여배우 전옥 노래까지 나왔다.
배우 최민수씨 외할머니였던 전옥의 창법은
가슴 속 가라앉은 슬픔을 끌어내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전옥이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항구의 일야' 레코드자켓

봄비와 노래가 작당하여 늙은 놈 가슴을 후벼 팠다.
재미있게 살기로 한 시작치고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김명성씨가 새로 나온 명함을 한 장씩 돌렸다.
주식회사 ‘아트해피니스’ 연구실장이라 적힌 명함인데,
‘행복’이란 글씨가 도드라졌다.
김구선생 필체라는데, 글체처럼 뭉툭한 행복이 찾아들었으면 좋겠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야 한옥마을에서 걸쭉한 잔치 한 판 벌일텐데...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월요일은 동자동 복귀하는 날이었다.
주말에 정영신씨 집에서 쉬고 아지트로 돌아가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 였다.
“행님 어딧습니꺼? 녹번동이마 시상식 중계 보면서 술 한 잔 하입시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출발한 것 같았다.

 

 



이 집은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는데, 정오 무렵에 밥 먹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마침, 정영신씨가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 놓았다.
자식 자취방에 보내는 심정으로, 가는 놈 몸보신 시킬 속셈이었다.
마침, 전 날이 보름이라 오곡밥과 나물도 남아 있었다.
술은 이름도 거룩한 ‘불사주’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다.

 

 



전활철씨는 오전에는 시장보러 다녀 항상 등짐을 짊어지고 다닌다.
보따리를 뒤지더니, 송이버섯을 꺼냈다.
철 지난 송이라 향은 없으나, 명색이 송이버섯이 아니더냐.
그 정도의 술안주면 요리집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누가 문을 두드려 열어보니, 요즘 제주에서 벌어먹는 공윤희씨였다.
반갑게 어울려 함께 술을 마셨는데, 화제는 온통 ‘기생충’ 이야기 뿐이었다.
난, 상 받는 자체를 좋아했지만, ‘기생충’이란 영화 내용도 몰랐다.
대략의 줄거리를 들어보니 흥미롭기도 하지만, 사회적 문제를 건드려 더 관심이 컸다.

 

 


그나자나, 이 집은 영화 보는 모니터는 있으나, 티브이를 볼 수 없도록 해 놓았다.
노트북으로 YTN 뉴스 틀어 놓고 마셨는데, 빈속에 들어가는 낮술이라 기분 좋았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기생충’ 상 받는 게 안 좋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전활철씨는 남다르다.
봉준호 감독 일행이 ‘유목민’ 단골이라 그 속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각본상에 이어 국제영화상, 감독상, 작품상까지 네 개 부문을 차지했다는 소식에 모두 들떴다.
다들 기분 좋아 축배에 축배를 거듭한 것이다.

 

 



전활철씨는 가게 문을 열어야 하니, 아쉽지만 먼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을 뇌까리며...
뒤이어 조해인시인이 왔고, 한 참 후에는 사진가 김수길씨도 등장했다.
코구멍한 집구석에 인근에 사는 인사동 사람들은 다 등장한 것이다.

 

 



술 기운에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여기 저기 전화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윤희씨가 미국 사는 최정자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며 바꾸어 주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갑기는 했으나, 미국 같으면 그 때가 새벽3시 무렵이었다.
잠자는 노친네를 깨운 그 죄를 어쩌려고, 정말 대책 없는 술꾼들이다.

 

 



기분 좋게 취했으나, 조해인씨는 술을 너무 급하게 마신 것 같았다.
신이 나서 십팔 번 노래까지 불렀는데, 문제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부득이 집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자리가 파하자 나 역시 녹초가 되어버렸다.

 

 

 

밥 먹으며 간단히 끝내려 했던 술자리가 결국 하루 종일 땡땡이 친 셈이다.
자고 일어나니 몸속의 기생충이 들고 일어났는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불사주'는 관절에 특효인 약술로 조금씩 마시면 아주 편하게 취하는 좋은 술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술도 지나치면 독일 뿐이었다.

 

 

 

몸이 안 좋아 술을 피해 다니니, 술이 나를 찾아다니는 격이었다.

 

 



하루종일 땡쳤으니, 국 쏟고 뭐 데인 격이지만 누굴 원망하랴!
술이 원수냐? 상이 원수냐? 친구가 원수더냐?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13일 연극 연출가 기국서씨의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술집이나 식당이 아니라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전갈에 괜히 쫄았네.

주인공을 비롯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와 언론인 윤상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비가 내리다 멈춘 인사동 길은 은행잎이 떨어져 보도블록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 걸음에 밟혀  은행 터지는 소리조차 정겨웠다.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벽치기 골목으로 들어가니, ‘유담커피숍에 김명성씨가 기다리고 있었.


 

 전활철씨의 안내로 유목민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춘천의 유진규씨가 나타났다.

뒤 이어 김상현씨와 조해인씨가 왔고, 나중에는 김수길, 이인섭, 최일순씨도 만났다.

기국서씨 훈장 덕에 반가운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귀한 훈장 술이라 술은 술술 넘어갔으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

매년 30명이나 훈장과 상을 주면서 기국서씨를 왜 이제 주었을까? 

기국서씨 수훈도 공적에 비해 늦지만, 유진규씨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렇게 많은가?



그리고 문화훈장은 상금도 없는데다, 아무런 혜택이 없다고 했다.

무공훈장처럼, 사후에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특혜도 없지 않은가.

금붙이가 아니라 전당포에도 잡혀주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밥 먹지 않고 명예만 먹고 사나?

대개의 예술가들이 가난하게 사는, 도움 되지 않는 훈장이 무슨 소용인가.

정부에서 주는 훈장이 이 모양이니, 신문사에서 주는 문화대상도 상금 한 푼 안 주는 곳도 있다.

상으로 작가를 우롱하고 장난 치는 곳이 많으니, 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관객모독이 아니라 훈장모독이란 연극도 무대에 올려야겠다.


 

몇 일전에는 '이중섭미술상' 받는 정복수씨 시상식에 갈 일도 있었지만

주관하는 조선일보가 꼴 보기 싫었다. 어찌 치욕적인 사옥에 발 디딜 수 있겠는가?

그 곳에는 상금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은 권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

일억을 상금으로 내놓은 '금보성아트센터'의 한국작가상이 더 좋은 상으로 친다.


 

훈장에 초치는 소리 집어치우고, 술자리 이야기나 해야겠다.

그 날의 화제는 70년대 시절 이야기가 많았는데, 명동 심지다방을 비롯한 다양한 추억담이 나왔다.

그 당시는 부산에 살아 귀를 곤두세우고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말짱 도루묵이네. 


 

조해인씨는 영화 도둑들에 출연한 기국서씨의 연기가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장면들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기국서씨는 연출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명성씨는 몇 일전 무세중씨를 만난 이야기를 꺼냈는데,우리 상복은 검은색이 아니라 흰색이라 했단다.

그렇기야 하지만, 한복이라면 모르나 흰 양복이 어울리겠는가? 전통장례를 두고 다들 서양식 장례를 택하니 어쩌겠는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유진규씨는 어머니 임종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곁에 누워 두 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갑자기 말씀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잠 들듯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는데, 이보다 행복한 임종이 어디 있겠는가?


 

70여 편의 창작으로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국서씨 문화훈장 수훈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번 수훈이 창작활동의 결실인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계기라고 입을 모았다.


    

기국서씨 옥관문화훈장 수훈을 축하하며 늦도록 축배를 들었다.

기분좋게 만취한 것은 좋으나, 버스타고 졸다 종점까지 가버렸네.

 

사진, / 조문호
















김수길사진















김수길사진

















조해인사진




















 

 





 니가 회 맛을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

사진가 김수길씨, 시인 조해인씨와 함께 복에 없는 횟집에 간 이야기다.

네 사람이 회 한 접시를 남겼는데, 상대를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있는데, 김수길씨가 나오라고 했다.
은평구 주민끼리 만나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난, 주말만 녹번동에 오지만, 그마저 정선 가거나 없을 때가 많다.

마침 하루 전날 조해인씨와 연락이 되어 만나기로 작정했던 터다.

그것도 집 가까이 있는 최원호병원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나가 기다리니 조해인씨는 역촌역 방향에서, 반대 방향에서 김수길씨가 나타났다.

내가 역촌역 부근의 사정을 잘 알아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물었지만, 좀 난처했다.

여지 것 따라가기만 했지 내가 주동이 되어 음식점 안내한 적도 없지만,

상대방 음식 취향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평소 정영신씨와 외식할 때도 실랑이하지만, 결국은 내가 따라간다.

늘상 뭘 먹을까?”하고 물어오면 사모님 드시고 싶은 곳에 가시죠  이런 식이다.

사실, 짠맛이나 매운 맛 같은 강한 맛을 제외한 예민한 맛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것저것 가리고 않고 남 따라 먹는 잡식성이 되어버렸는데,

어찌보면 맛도 제대로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더구나 틀니를 끼면 더 맛을 알 수 없다.

맛은 혀로 감지해, 틀니 때문에 맛이 없다는 말은 기분에 의한 것이라지만,

실제 끼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일 뿐이다.

아무리 혀로 맛을 안다지만, 입안에 돌덩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니 맛인지 내 맛인지 분간되겠나?


 

내가 잘 가는 곳은 짜장면 한 그릇에 2,500원이고,

제일 비싼 게 5,000원하는 역촌동 기사식당이지만, 그 곳은 술을 팔지 않아 안내할 수 없었다.


결정을 못 하니, 어디서 보았는지 회집 이야기를 꺼냈다.

정영신씨가 회를 좋아해 한 두 차례 따라갔지만, 별로 탐탁치는 않았다.

아마 김수길씨가 날 생각해 각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안내했다.



조해인씨는 술 끊은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었으나, 그 때까지 춘향이처럼 지조를 잘 지켰다.

나 역시 병원 다니느라 술 마시지 못한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갈보처럼 지조를 팽개쳤다.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듯이 술 술 넘어갔다.

김수길씨 조차 평소 말이 적은 양반이라 주거니 받거니 술만 홀짝였다.

김수길씨가 친구 김일남씨를 불렀으나 마찬가지였다.


 

김수길씨는 정영신씨도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싸웠냐고 물었다.

싸운 게 아니라 요즘 노출되는 것을 꺼려 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싫어해서다.

여자들은 자기 얼굴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주변 지인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혼했으면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다.

대충 짐작하는 년인데, 걸리면 가랑이를 찢어 버릴 작정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찍지만 상대를 배려해 가능하면 예쁘게 나온 사진만 쓴다.

두 번 찍어 그 중 예쁜 사진을 고르고, 그것도 본인이 싫어하면 즉각 내린다.

더러는 찌그러지거나 요상한 표정의 포트레이트만 즐겨 찍는 사진가도 있더라.

예술사진은 찌그러져야 하는가? 제발 남의 얼굴가지고 장난치지마라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갈 일이 있다.

어제 지방에 있는 잘 아는 사람이 페북에 댓글을 달았는데, 별 것 아닌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난, 그 양반이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내 글을 쭉 읽어 잘 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 거야 있을 수 있겠으나, 처음으로 댓글 달며 충고하는 식이었다.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는 등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며, 뒤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오랜만에 할 소리도 아니지만, 포스팅한 내용도 댓글과 상관없는 동자동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말을 엉뚱한데 풀어 놓은 것 같았는데, 오래 전의 악연으로 생각하기도 싫어 페친을 끊어버렸다.



 

사실, 긴 세월동안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살아왔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 실없는 소리까지 해가면서...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돌아서서는 욕하며 바보 취급 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고...

 

다들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지, 댓가도 없이 사진을 부탁하고 사진도 그냥 사용했다.

대개 아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갔는데, 오죽하면 40여 년 동안 열심히 사진 찍어 거지처럼 살겠는가?


 

그래서 마누라와 이혼하고 쪽방에 들어가며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잘 못한 것은 그냥두지 않고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좆되고 싶으니 

더 이상 씹소리 하지마라.


 


페친 끊은 놈 이야기하다 열 받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술자리가 재미없으니 조해인씨는 살아생전 마광수씨의 숨겨진 이야기를 술안주로 내놓기도 했고,

얼마 전에 인사동에서 전시한 소설가 이외수씨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 사정이 있어 개막식에 가지 못했는데, 조해인씨가 이혼한 부인도 왔더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나도 정영신씨와 이혼했지만, 정영신씨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던가?

나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결혼이란 틀 자체를 깨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난 본래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않지만, 다들 회를 먹지 않았다.

소주 안주로는 얼큰한 매운탕이 더 좋았는데, 비싼 회집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결국 그 회를 싸가지고 정영신씨 갖다 주었지만, 돈만 쓴 김수길씨에게 미안했다.

 

난, 돈 맛도 모르는데다 음식 맛까지 모르니, 끝난 인생이다.

그래도 아는 맛이 하나 있긴한데, 알랑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앞만 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살아가니, 하루가 편한 날이 없다.
옛날 같으면 고려장할 나이에 사진 찍다 두들겨 맞지를 않나,
주변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우환이 끝일 줄 모른다.


녹번동에서 개기는 지난 일요일,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심봉사 잔치처럼, 인사동 사람들 불러모아 풍류 자리 만든 김명성씨였다.

연신내 ’연서시장‘에서 소주 한 잔하자는 것이다.






‘인사동 백년을 걷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나갔더니, 응암동 사는 조해인씨도 와 있었다.
연서시장 ‘파주집’에서 세 사람이 둥지 튼 것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조해인 시인이 술을 끊었단다.
건강 때문인지 무슨 결심인지 모르지만, 이제 호탕한 그의 구라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까 걱정되더라.
잘 했다며 박수 쳐 주어야 할 일을 걱정부터하니, 나도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김명성씨는 인사동 잔치에 오백만원 쯤 들어갔다는데, 잘 했다 싶더라.
전국에서 몰려든 백 오십 명의 풍류객과 한데 어울릴 수 있는 날이 이제 몇 번이나 더 있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얻은 마음의 덕은 얄팍한 돈으로 계산되지 않을 것이다.





조해인씨가 별 이야기가 없으니, 김명성씨만 썰을 풀었다.
이 친구는 ‘아라아트’ 건물을 날리고 빚더미에 앉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 하며 열심히 살았다.
본래부터 고미술 수집 전문가였으나, 이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미쳐 있었다.

재기를 위해 아내가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 왔다는데, 그 돈을 독립운동 사료 모우는 데 써 버린 것이다.
고미술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운동사도 정확히 모르고는 대들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독립 운동사를 파고들었던지, 모르는 게 없었다.






술 마시며 제일 분개한 일은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조작된 사실이란다.
백년이 가까운 빛바랜 고서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난, 내일 새벽에 정선 가는지라 더 마실 수 없었다.
소주 반병으로 끝내고, 먹다 남은 생선조림을 비닐에 담아 먼저 일어났다.


동자동을 들려 정선으로 출발했는데, 양평을 거치는 국도로 장장 네 시간을 달렸다.
팽창농협에서 비료까지 실고 갔는데, 기절초풍할 일이 생겨버렸다.
집에 들어 갈 열쇠를 두고 온 것이다.
항상 자동차 열쇠에 달려 있었는데, 정영신씨가 폐차시킨다며 분리한 걸 모르고 차만 끌고 온 것이다.






차에 실어 온 의자와 짐을 부려야 하지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요즘 시골인심도 예전 같지 않아 좌물 통도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연장은 물론 장갑까지 집 안에 두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루 머물지 않고 밤중에 돌아 갈 작정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했다.
한 달 동안 잘 자란 상추와 부추, 고추는 거둘 수 있었지만,
작물을 휘감은 칡넝쿨이나 잡초 뽑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장갑이 없어 맨손으로 뜯다 보니, 날카로운 풀에 배어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니기미! 약은커녕 그 흔한 일회용 밴드조차 없어 휴지를 칭칭 감아 칡넝쿨로 묶었다.
이 장마철에 그곳만 비가 피해 갔는지 작물은 혀를 날름거렸다.
바가지 하나로 떠나르며 물 주느라 생 똥을 싼 것이다.





시간이 없어 울 엄마 산소도 들리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시간 낭비나 고생은 차지하고, 오고 가며 쏟아 부은 기름 값이 아까워 미치겠더라.
수확한 것은 상추 한 바구닌데, 너무 비싼 상추라 목구멍에 넘어갈지 모르겠다.






미련한 곰탱이 같은 나 더러, 강물에 묻힌 석양이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아~ 인간아~ 왜 사니?”
살고 싶어 사냐? 죽지 못해 산다.






저승길 이 되던, 천당 길 이 되던, 또 네 시간을 졸라 달렸다.
갈지자 졸음운전 깨우는 경적을 음악 삼아 기적적으로 살아왔다.

죽느냐? 사느냐? 그 것이 문제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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