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이완교(82) 선생께서 지난 513()일 돌아가셨습니다.

사진가로 반세기를 사셨지만, 한 번도 사진가다운 대접 한 번 받지 못하고 가셔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의 대표사진가로 꼽히는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 삼교수를 비롯하여

지금의 원로급 사진가가 다 친구며 사진도 거기서 거긴데, 왜 번번이 선생만 밀렸을까요?

다른 분과 달리 대학 강의도 항상 보따리 장사만 하시고...

이완교 선생의 실력이 미치지 못할까요?

'기운 생동'하는 선생의 사진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봅시다.

 

그것은 한 번 갑이면 영원한 갑이고, 한 번 을이면 영원한 을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억울하다고 역정도 더러 내셨지만, 잘 참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언젠가 선생 가신 길 따라가서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빈소 : 분당서울대병원 39호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300

전화 031-787-1500

 

발인 : 2022, 516() 630

장지 : 성남 시립봉안당

 

조의금 보내는 곳

하나은행 143-910101-30207

예금주 : 이선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보이는 고인 기념사진을 무작위로 올렸습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주기적으로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가졌습니다.

아래 단체 사진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양반댁' 앞에서 찍었는데,

이완교 선생의 모습은 7-80%가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네요

 

아래 사진 석장은 '양반댁' 주모께서 찍었는데, 나보다 훨씬 잘 찍었네요.

아래 사진 넉장은 홍순태선생 마지막 전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정영신 / 이명동선생 사진전에서...




지난 26일은 경북 성주장을 찾아 나섰다.

성주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게 사진계 전설로 통하는 이명동선생이시다.
삼 년만 있으면 백순을 맞는 이명동선생 고향이 바로 성주가 아니던가.
소 판돈 몰래 들고 나와 카메라 구입했던 그 현장이다.






선생께서는 고향 조카들에게 부탁하여, 성주 참외까지 보내주는 자상하신 분이다.
그 짱짱하시던 선생님께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외출도 않으시고,
이젠 몸도 많이 수척해 지셨다.
한 번 찾아뵙는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성주에 당도하니 갑자기 죄책감으로 밀려드네.






그런데, 3년 만에 들린 성주장은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었다.
그 고색창연한 장옥의 정겨움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구조물로 바뀌어 버렸다.
그동안 가볼만한 장터로 성주장을 빼 놓지 않고 소개해 왔는데,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오래된 문화를 깡그리 말살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문제는 돈 들여 장옥을 바꾸었지만, 장사가 잘되기는커녕 장사꾼들의 불만만 더 높았다.
손님은 날로 줄어드는데다, 도저히 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본 후,
행여 추억의 자락이라도 만날까 장터 주변을 맴돌았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노부부가 열심히 텃밭을 파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왜 파내냐고 물었더니.
“자식들이 찾아와도 차댈 곳이 마땅찮아 주차 공간 만든다”고 하셨다.
골목이 좁아 텃밭이라도 깎아내어, 자식들 편하게 주차하라는 배려였다.






차 댈 곳이 없어 자식들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을 자식이 알기나 할까?






도식화되어가는 농촌의 모습을 성주장에서 다시 확인할 뿐이지만,
마냥 자식만 기다리며 사는 시골 노인들의 외로움이 더 가슴에 묻힌다.
이젠 주변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마저 메말라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다면 전화라도 자주 드리자.
이러다, 죽기 전에 가족 해체되는 세상 올까 두렵다.

사진, 글 / 조문호

























좌로부터 월간사진 발행인 황성옥,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선생



85년 무렵,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월간사진’사무실에서 진행된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께 듣는다“란 좌담회 장면이다.

당시 월간사진 발행인이었던 황성옥씨와 사진가 김회중, 한정식, 이명동 선생께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명동선생의 지도로 사진에 입문하여 ’내셔널 지오그래픽‘편집장을 지낸 김회중(에드워드 김)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는데,

다들 현역으로 활동할 때의 모습이라 다소 낯설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9일 한정식선생과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열흘 전부터 한번 찾아뵙자는 선생의 말씀이 계셨지만,
이런 저런 날을 피하다보니, 토요일로 정해 진 것이다.

그동안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한 번 밖에 찾아뵙지 못했는데,
요즘은 출입을 일체 안 하시어, 신경 쓰였든 터라 기회다 싶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이명동선생 좋아하는 장어구이를 주문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먼저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더니,
혼자 계셔야 할 집에 여러 사람이 와 계셨다.
이명동선생의 아드님과 따님, 그리고 사위까지 있었는데,
그 날이 마침 이명동선생의 생신이란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있듯이, 잔치 날이었다.

생신이면 음식도 준비해 왔을 터이고, 가족끼리 모인 자리라
날을 잘 못 잡은 것 같기도 했으나 어쩌라! 이미 저질러 진 일을...
곧바로 한정식선생께서 등장하셨는데,
이명동 선생께선 기분이 좋았던지,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 이야기에서부터
윤주영 선생 이야기에 이르기 까지 그침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많이 들었지만,
한 선생께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했다.
재방송이지만, 재미있게 들었는데,
오랫동안 들려 줄 사람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런데, 시간이 지났으나, 주문한 음식이 오지 않았다.
충무로에 있는 장어구이 집에 미리 계산해 두고
정오까지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는데, 30분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한정식선생께서 식당에 전화를 하니, 그 때까지 잊고 있었다.
빨리 보내 달라 했으나, 음식 장만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음식이 준비되었지만, 한정식 선생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겠는가?
한정식선생의 독촉전화에는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음식이 도착했지만, 배달꾼을 나무랄 순 없었다.






다들 시장했던 터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는데,
한정식선생께서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장어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명동선생께서는 그 걸 의식하였는지, 다른 음식은 두고 장어만 열심히 드셨다.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같이 늙어가며 서로 챙기는 두 원로사진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튼, 건강 잘 관리하시어 여생을 건강하고 재밋게 사십시오.


"이명동 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경하 드리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정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이명동선생님 자택을 방문했다.
지난 삼월 중순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낸 후, 처음 찾아뵙는 문안 인사였다.

약수동 아파트에 혼자 계신 선생님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초췌했다.
말씀으로야 혼자 있으니 편하다지만, 마음고생에 몇 년은 더 늙으신 것 같았다.
이게 혼자 사는 것과 함께 사는 차이인 것 같았다.
몸 단장이나 먹는 것에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선에서 가져 온 두릅도 사모님이 계셨던 예전처럼 그리 반갑지 않은 듯 했다.
맛있는 음식도 혼자 드시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사모님께서 돌아가시던 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몸이 불편해 요양원으로 옮기기 위해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고 한다.
앰블랜스를 기다리며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이며 편안한 죽음인가? 분명 축복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동아일보'에서 평생을 보내셨기에 신문도 ‘동아일보’를 보았고,
혼자 돌아가는 티브이도 A채널만 틀어놓고 계셨다.

거기다 '사진예술'까지 정기구독하고 계시니, 정치판이나 사진판 돌아가는 사정을 나보다 더 많이 알았다.

옛 제자였던 김희중(에드워드 김)씨가 중풍이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국 들어와 다방마담이었던 여자를 잘 못 만나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하셨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업소에서 일한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집안 일은 도우미가 찾아 와 도와준다고도 하셨다. 

이제부터 몸을 추슬러 가까운 곳이라도 산책을 즐기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사모님 걱정에 외출을 삼갔지만, 가까운 사진전에도 살살 찾아다니시며,

후배들에게 옛 이야기라도 들려주고, 격려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4년만 지나면 백수이시니, 부디 건강을 잘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글 / 조문호










-지난 여름의 사모님 모습-  



지난 14일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 사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갑작스런 비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한편으론 힘든 연명보다 저승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혼자 남게 된 이명동 선생을 어쩌랴!
사모님 죽 끓여 드리는 게 유일한 낙이셨는데,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까?


작년 여름 찾아뵐 때만해도 반갑게 맞이하며, 자식처럼 뭘 못 먹여서 안달이셨다.
유난히 수줍음도 많이 타셔서, 눈길만 마주쳐도 고개 내리시는 분이다.
날 좀 풀리면 찾아뵈려 문안을 미루었던 게 후회스러웠다.
예전에는 이선생님께서 설렁탕 먹자며 가끔 전화를 하셨는데,
요즘 연락이 통 없었던 걸로 보아 사모님께서 많이 편찮으셨나 보다.






정영신씨께 연락하여 함께 강남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장례식장에서 사진가 황규태선생을 만났으나, 아는 분이 없어 그냥 가신다고 했다.
한정식선생을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먼저 가셨다는 말씀도 하셨다.

이명동 선생도 자택에 가셔서, 아는 분이라고는 둘째 아들 태웅씨 뿐이었다.
예만 올리고, 황규태선생을 따라 나서야 했다.
황선생께서 같은 방향이라 태워 주셨는데, 걱정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돌아가신 사모님보다, 이명동선생님이 더 마음에 걸린 것이다.






예전에는 누가 돌아가시면 슬퍼하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틀린 말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병원에서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도 죽이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라 생각한다,
병원생활 오래 하게되면 가족 간의 정조차 메말라버린다.
환자도 힘들지만,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마, 사모님께서도 병원에 계셨더라면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댁에 계셨기에, 돌아가실 때까지 정 나누며 편안하게 영면 할 수 있었을 게다.
이젠 편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막지 말아야 한다.
고달픈 이승보다 고통 없는 저승이 훨씬 편하다.
사람 목숨 담보로 장사하지 말고, 안락사를 허용하라.






장례식장은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6호실이고, 발인은 3월16일이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서을시립납골당이다.


“사모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4일 어렵사리 약수동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했다.
보름 전에 설렁탕 사 주겠다며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늦은 것이다.

마침, 정선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캐 왔기에 약수동을 찾았다.
그런데, 선생님의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잘 걷질 못한다는 것이다.
좋아하시는 설렁탕집도 멀어서 못 간다고 했다.

먼저 ‘한미미술관’에서 열리는 황규태선생 전시에 못 가봐 걱정이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황선생과의 각별했던 사연들을 줄줄이 풀었다. 미국으로 경향신문 특파원1호로 가게 된 동기,
황선생께서 LA 동아일보지사를 설립할 때 만류했던 일, 대구 차용부씨가 미국 공부하러 갈 때, 부탁했던 일 등

그 오래된 이야기들을 소설책 읽듯 슬슬 풀어냈다. 아흔 여섯의 연세를 무색케 했다.

그 다음엔 스튜디오 조명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붙었다.
동아일보사에서 여성지를 복간할 무렵, 일본의 고단샤출판사를 들렸는데,
그 곳의 스튜디오 장비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텅스텐 조명을 사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새로 나온 스트로보에 홀딱 반한 것이다.

그 때부터 동아일보 김상만회장을 설득시켜 장비를 구입하고,

충무로 광고사진 스튜디오에서도 모두 구입하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적극적으로 보급했는지 코맷트 스트로보 회사에서 선생님을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그 덕으로 열악했던, 신구전문대와 돈보스꼬 대학 사진과에는 스트로보를 그냥 보냈다는 것이다.

“아이구 선샘 예! 배고파 죽겠습니더. 고마 밥 묵고 이야기 하입시더.”
다리가 아파 멀리는 못가시고, 가까운 곳의 된장끼게에 비벼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8일은 모처럼 일에서 해방되었다.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님의 점심약속을 핑계 삼아 하던 일을 잠시 밀쳐 둔 것이다.
일찍 나와 가까운 ‘은평평화공원’에서 봄볕도 쬐고, 대조시장에 들려 쑥떡과 딸기도 샀다.

약수역에서 내려 선생님 계신 아파트로 들어서니, 엄청 반기셨다.
그동안 허리가 아파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데,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아보았지만, 별 신통찮단다.
그래도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시는 일은 여전하셨다.

한 때 저축은행장이셨던 윤현수선생의 옥중 편지도 보여주었다.
삼년 후에 큰 백수잔치를 마련해 드릴 테니, 건강을 잘 지키시라는 말씀도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약통을 꺼내 약 한 알을 휴지에 싸 두고는, 나머지를 넘겨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 이기 뭡니꺼?”라고 물었더니, 모기만한 소리로 “비아그라~”라고 하셨다.
세상에!. 선생님 연세에 아직까지 비아그라를 사용하시다니...

이젠 허리가 아파 어려운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횡재한 것이다.
설렁탕집으로 자리를 옮겨, 나를 위해 소주도 한 병 주문해 주셨다.
술이 얼큰해, 이런 저런 고충들을 말씀드렸다.

“술이 깨야 자는 습관으로, 가끔 음주댓글로 말썽을 일으킨다.”고 했더니, ”큰 병이네“를 반복하셨다.
술을 안 마실 수는 없으니, 수면제라도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다.

소주 반병은 인사동에서 마실 작정으로 남겨왔다.
술기운에 인사동을 돌아다녔는데, 날씨 탓인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아라아트’ 공윤희씨를 비롯한 아는 분을 여럿 만나 선생님 하사품인 비아그라를 나누어 주었지만,

낯 술 같이 마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아시면 섭섭할지 모르나, 있을 때 나누어 먹어야, 없을 때 얻어먹거던.

‘갤러리 H’에서 열리는 하영준씨 전시를 둘러보고 집에 돌아왔더니,

내차 유리창에 비아그라 광고 명함이 꽂혀있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짜식~ 번지수를 한참 잘 못 찾았네, 나 오늘 비아그라 생겼어, 임마”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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