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들은 페이스북 Designersparty 사진첩에 올라 온 사료들을 스크랩했다.
이경모선생이 기록한 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라이프지 기자들이 촬영한사진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 명의 민간인이 살해 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5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뚜렷한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북조선에는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일반 근로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을 정도로 공산주의는 해방 이후 나라의 주도권을 선점하였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였고, 극심한 혼란과 대립의 격랑을 겪게 된다.
빨치산의 시발점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었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반탁을, 박헌영을 중심한 좌익 세력은 찬탁을 외쳤고,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7월,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전술,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각종 반정부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6년 9월 23일 공산당은 흉흉한 민심을 선동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철도노조의 총파업을 일으켰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 전평)의 주도하에 대구 10.1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은 ‘구(舊)빨치산’이라 불렀다.
1948년 2월 7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은 당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로당은 경찰이 빠르게 진압한 것에 놀라 앞으로의 5.10 선거 반대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8년,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함을 목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다. 1947년 가을부터 무장폭동을 준비하고 있던 인민유격대는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펼쳤다. 육군본부에서는 제주 폭동 진압을 위해 여수 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남로당 50여명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들은 여수 시내에 있던 6백여 명의 좌익 세력과 합류하여 여수 시내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 좌익 세력뿐 아니라 지방 좌익 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함으로써 그 세력은 여수에서 순천까지 확대되었다. 사건 발생 8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일부 반란군은 백운산을 경유,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빨치산 부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산을 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동안 정부에 계속 저항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 항전으로 결정하고, 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다. 반란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빨치산의 재조직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단행된 한국국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의해 전선이 급속하게 북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퇴로가 막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부대와 패잔병들의 상당수가 각 지역의 산악 지대로 잠적하여 그 곳에서 지방 빨치산 부대들과 합세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비정규전을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 교란 활동을 계속하였다. 비정규전 부대의 규모는 38도선 이북 지역에 약 10,000명, 38도선 이남 지역에 약 15,000명 정도였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빨치산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빨치산의 최후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년 10월 빨치산 소탕을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였다. 1951년 3월에는 3개 사령부를 신설하였고 11월 26일에는 백야전사령부를 설치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을 거친 후 빨치산은 대폭 감소하였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아 대부분 사라지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자수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빨치산 중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이후 빨치산은 이현상을 탄핵, 사살했으며 그의 사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완전히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다.
1948년 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의 모습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반공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옳거나 그름으로 판단했다. 옳음의 기준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적’이 되었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 사람마저 ‘적’으로 간주했다.
‘적’으로 간주한 국민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 권력이 동원되었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 변화에 국민들도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부의 왜곡된 세뇌는 여순사건 자체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것은 ‘용공주의자’이며 ‘빨갱이’이며 ‘적’이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롯이 이승만 정부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더 고착화되었다. 세간에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빨갱이’ 탄압에 더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중 여수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다.
이우헌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인물이다. 1963년에 있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처음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여수지역구에는 유경식(1911년생)과 이우헌(1902년생)이 민주공화당 공천을 신청했다. 유경식은 여수에서 유명했던 제중의원 원장으로 의사였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경식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이우헌이 공천을 받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옮겨보면, “1948년 여순사건 발발 당시 박정희가 14연대 대위였으며, ‘반란’의 주모자로 쫓기던 중 이우헌이 집에 숨겨주어 살아났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보은차원에서 이우헌을 공천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풍문이다.
박정희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여 언론에 노출된 것은 평화일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참모로서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자회견이 보도된 다음 날인 11월 11일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박정희가 사형을 언도받고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풀려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송호성 장군은 함경도 함주에서 출생했다. 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2]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한 그는 대한독립군에도 투신한 적이 있으며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대한독립군 시절 홍범도, 김원봉 등과는 대립하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비극을 겪기도 한 있는 그는 광복군 훈련처장을 거쳐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1946년에 귀국하여 광복군 출신으로는 드물게 유동열이 미군정의 통위부장에 임명된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년 12월 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년 6월 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정부수립 후 초대 육군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그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과 함께 복무한 이범석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사실 이범석과는 광복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송호성의 배경은 유동열이었으며 이범석은 기존 임정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 여순반란사건을 참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군의 광복군계의 송호성의 등용은 광복군계 중용을 통한 군의 정통성 확립과 광복군의 중국군 계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김홍일·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아닌 지휘체계상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과 직접 협의하였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과 직접협의하며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며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송호성은 진격하는 도중 여수 북방 약 8km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고막이 터진다.
육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통위부 차장(1948년 6월), 1949년 3월 호국군 사령관, 육군 제5사단장(1949년 5월 12일), 1949년 7월 12일을 기하여 육군 제2사단장(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겸임),
1950년 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1950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 이후 1950년 6월 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
김구의 측근으로, 김구의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나며 1950년 5월 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6년 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주석의 접견했으며 또 1957년 10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뎐 중 김일성주석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는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1948년 2월 7일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
/ 1948년 2월 26일
유엔 임시총회에서 미국측의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가결, 남한은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5월 10일 단독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
/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발생. 미군이 진압 개시.
/ 1948년 5월 4일
현지 모집 인원과 광주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여수 14연대가 창설.
/ 1948년 10월 1일
여수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
/ 1948년 10월 19일
여수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 남조선노동당 일원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
/ 1948년 10월 20일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기관 장악하고 이어서 순천을 점령.
/ 1948년 10월 21일
반란군이 남원·구례·보성을 장악. 친일파를 처단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
정부, 광주에 반란토벌사령부 설치.
/ 1948년 10월 22일
반란군이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 전체를 장악.
정부군,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 순천으로 진격하여 저녁 무렵 전역을 탈환.
/ 1948년 10월 24일
정부군, 여수 전역 탈환.
/ 1948년 12월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 1949년 2월
여수·순천 지구 계엄령 해제.
/ 1949년 4월
여수 반란군 주도급 인물 모두 사살.
/ 1949년 9월
이승만 정부,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을 공포. 중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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