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진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으로 이명동선생을 꼽을 수 있다.
보도사진은 물론 학술적인 이론과 평론, 출판을 위시하여 사진계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 그의 업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 원로작가께서 아흔다섯이나 되는 연세에 처음으로 사진전을 열게 된 것이다.  전무후무한 이번 사진전은 ‘사진예술’ 발행인 김녕만씨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는데, 문제는 그 첫 전시에 내놓은 사진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종군기자 때 찍은 한국전쟁의 가슴 아픈 사진들과 자유당시절의 민주화 운동 및 김 구, 신익희, 조병옥씨 등 우리나라 거목들의 마지막 초상사진에 이르기까지 작품성을 떠나 중요한 역사적 사료들을 망라했다는 것이다.

전선에서 찍은 어린 병사의 기념사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미어지게 만들었다. 고향 부모에게 보내려고 찍어 달랬다는데, 그의 총구에는 예쁜 인형이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개막식에서는 이명동선생의 인사말씀과 사진가 윤주영, 송영숙(한미미술관장)씨의 축사, 장사익씨의 축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많은 참석자들의 뜨거운 축하박수를 받았다.

 

지난 7월5일 오후5시에 개막된 ‘먼 역사 또렷한 기억“ 이명동사진전은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14에 위치한 ”한미사진미술관“ 19층에서 오는 31일까지 열린다.

개막전에 참석한 사진가는 다음과 같다.
정범태, 김한용,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황규태, 강운구, 임범택, 김테레사, 차용부, 박영숙, 송영숙, 이완교, 윤주영, 박용윤, 전민조, 구자호, 최봉림, 김녕만, 윤세영, 이병용, 최광호, 김대수, 이주용, 이갑철, 이기명, 김영태, 박상훈, 곽명우, 손영자, 이종화, 김가중, 정태만, 유건식씨 등, 그 외에도 옛 현대칼라 대표였던 장남수씨를 비롯하여 동아일보 사우들과 이명동선생 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6·25 종군사진가 이명동씨가 기록한 ‘그날, 그 사람들’
입대해서 처음 글 배워 아버지께 편지 또박또박
“훌륭한 군인이 된 모습 사진 한장 찍어줄수 있습니까”
편지 들고 해맑게 웃던 병사, 이튿날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총에 인형 달고… 이명동 월간 ‘사진예술’ 고문이 6·25전쟁 당시 전선에서 찍은 어느 병사의 사진.

군대에서 한글을 배워 아버지께 처음 쓴 편지를 든 앳된 병사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아래쪽 작은 사진은 전쟁 중 국군이 눈 속에서 행진하는 모습. 이명동 고문 제공

 

흑백사진 속 국군병사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머리에 쓴 철모가 헐거워 보였다. 오른쪽 어깨에 자랑스럽게 M1소총을 기대고 풀밭에 앉아 두 손에 쥔 편지를 바라보는 모습. 소총 끝에 매달린 인형이 병사의 어린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비극적인 6·25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명동 월간 ‘사진예술’ 고문(94)이 찍은 한 병사의 사진이다.

한국 사진계 원로인 이 고문은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 종군사진가로 활동했다. 육군 보병 제7사단에서 군무원 자격으로 전투 기록 사진을 찍었다. 24일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사무실에서 만난 이 고문은 전쟁 발발 64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렸다. 당시는 꽃다운 젊은이들의 피가 한반도를 붉게 물들이던 때였다. 전장에서 마주친 참혹한 광경들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신이 찍어 준 어느 병사의 사진이다.

1953년 강원 중부전선에 있을 때였다. 한 병사가 카메라를 보고 그에게 다가왔다. “아버지에게 보낼 사진 한 장 찍어주실 수 있습니까?” 병사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숯을 구우며 살았다. 가난한 형편에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입대한 뒤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혼자 남은 아버지께 처음 편지를 썼는데 같이 보낼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병사는 “이렇게 훌륭한 군인이 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며 군복 주머니에서 돈 몇백 원을 꺼내 내밀었다.

카메라 앞에 선 병사는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글을 읽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경남 함양에 사는 친척의 주소가 적힌 편지를 남기고 그날 밤 최전방 고지로 떠났다. 며칠 뒤 이 고문은 병사가 사진을 찍은 이튿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처음 쓴 편지가 마지막 유품이 돼버린 것. 이 고문은 그의 사진을 영정용 사진 크기로 다시 만들어 돈 몇천 원을 보태 편지와 함께 함양 친척 집으로 부쳐야 했다.

“참 아까운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어린 병사도 많았고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우리 국군이 얼마나 용감했는지….” 이 고문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눈앞에서 적군의 공격으로 즉사한 아군의 참혹한 시신, 혹한에 동상 걸린 발로 행군을 계속하던 병사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적군의 습격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서 국군의 훈련하는 모습과 생활상 등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 사진부장, 월간 ‘사진예술’ 창간 발행인 등을 역임했다.

다음 달 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먼 역사 또렷한 기억’에서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 /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사진마을] 한국 사진계 대원로 이명동 작가

 

이명동(94)씨

 

한국 사진계의 대원로인 이명동(94·작은 사진)씨의 생애 첫 개인전 <이명동 사진전>이 7월5일부터 31일까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월간 <사진예술>사에서 이명동 선생과 인터뷰를 했다. 사진가이자 사진예술 발행인인 김녕만(65)씨가 자리를 같이했다.

 

이명동 선생은 살아있는 한국 사진의 역사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성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14살 때 아버지가 황소를 사려고 마련해놓은 돈 12원을 훔쳐 사고를 친다. 등·하굣길에 홀리듯 보던 학교 근처의 일본인 가게에서 “절대 물러주지 않는” 조건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던 것이다. 발각이 되자 이틀 동안 산에 숨어 지낸 끝에 “손자 죽이겠다”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용서를 받아서 사진 인생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나오는 사진잡지 <아사히카메라> 독자사진 응모란에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1942년에 일본 법정대학교 부속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본격 사진가의 길을 걷는다. 한국전이 나자 군무원의 신분으로 종군해 육군 보병 제7사단에서 종군사진을 담당했고 이 공로로 세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3년 종전 직후 군생활을 마무리했다. 1953년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다른 신문)에서 사진부장을 맡았다가 1955년에 <동아일보> 사진부로 옮겼다.

 

이때의 사연도 재미있다. 이해 2월18일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가 세상을 떴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에 늘 비판적인 야당지 동아의 사주 빈소에 문상을 온 사진을 기관지 격인 중앙일보의 이명동만 찍고 막상 동아일보 기자는 물을 먹었다. 크게 화가 난 김상만이 단독보도를 한 이명동을 불러 간단하게 면접을 보고 스카우트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1979년까지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이명동은 4·19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학생 시민들이 경찰의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 등 역사적 장면을 특종취재했다.

 

 경교장에서 촬영한 백범 최후의 사진(1949년 6월23일)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총탄에 쓰러지는 학생 모습 등
역사적 장면 숱한 특종 취재
한국 사진계 토대 구축 힘쓰고
일흔 나이에는 사진잡지 창간
생애 첫 개인전 다음달 열어

 

 

이미 그 전인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3일 전에 김구의 최후 모습을 찍었던 이명동은 1956년 5월5일엔 호남선 열차에서 사망한 신익희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3시간 전에 찍기도 했고 1959년에는 조병옥 박사의 최후 사진도 기록했다. 이는 마치 마하트마 간디를 인터뷰하고 돌아서 나온 바로 몇 시간 뒤에 간디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간디의 최후 사진을 찍게 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자신의 입으로 “나는 운이 좋았는지 세계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세계적인 사건의 현장과 마주칠 수 있었다”고 말한 대목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사진기자로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계의 토대 구축에도 공을 들였다. 1963년에 동아사진콘테스트를 만들고 1964년에는 대한민국 국전에 사진 분야를 포함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의 개인사진집에 해당하는 최민식의 <인간>이 동아일보사에서 나오는 과정도 주선했다. 이명동은 동아일보와 다른 매체의 지면을 통해 한국 사진계의 발전, 각성을 촉구하는 기사를 수차례 썼고 사진전시와 사진작가 소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석제 제5회 사진전을 보고>는 1955년 중앙일보에 썼고 <제6회 사협전평>을 통해선 “내용 없는 작품을 형태만 크게 한다고 효과적이 될 수 없다”고 일갈했고 1957년엔 당시 경기고 2년생이던 김희중(에드워드 김)의 개인전을 소개하며 “사진계의 비상한 관심”을 전했다. 1969년 <신동아> 지면을 통해 “젊은 사진작가 주명덕”의 사진집을 소개했다.

 

그는 동아일보를 떠난 뒤 여러 대학에 보도사진 강사로 활약하며 후학들을 길러냈다. 70살의 나이에 사진잡지 창간에 도전했다. 이 선생은 “설날에 세배 온 후배 사진가들이 230만원을 모아서 주더라. 거기에 할머니(이 선생의 부인을 가리키는 표현)가 마련한 곗돈 500만원을 보태서 사무실을 얻고 창간호를 만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2001년에 <사진예술>을 아끼는 제자이자 후배인 김녕만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물려주었고 잡지는 올해로 창간 25년이 되었다. 김녕만은 “이 선생이 어렵게 창간한 잡지라서 물려받은 것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고 말했다. 이명동 선생에게 창간 때와 25년 된 지금의 사진예술을 비교하면 어떤지 물었다. 이 선생은 “하늘과 땅 차이다. 좋아졌지”라고 했다.

연평도(1956년).

 

 보병 제7사단의 중동부전선(1952년).

 

2대 발행인 김녕만과 이명동의 인연은 그야말로 각별하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김녕만씨는 스물두살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고 대학 사진과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고창군청 공보실에서 사진담당으로 일했다. 1974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서 <강제등교>로 입상하였고 대학생 시절에는 각종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등록금을 조달했다. 김녕만씨는 사진학과 2학년이었던 1974년에 당시 동아일보 부국장인 이명동 선생의 보도사진강의를 듣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결국 1978년 “꿈속에서도 그리던”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진기자 선후배의 관계가 되었다.

 

<80년 광주>를 기록했던 김녕만씨는 이명동과 달리 기자 시절부터 수많은 사진전에 참가했고 개인전도 열었으며 사진집 등 저서도 여럿 펴냈다. 가장 최근의 사진집은 지난해 나온 <시대의 기억>이며 가장 최근의 개인전은 6월13일에 끝난 <김녕만, 해학을 공유하다>였다. <사진예술> 윤세영 편집장이 곁에서 인터뷰를 듣다가 “김녕만 현 발행인은 사진 인생 내내 이명동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 선생님이 김 발행인의 뒤를 따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명동은 평생 사진을 하면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보도사진을 찍었고 사진계를 위해 일했지만 자신의 것을 돌보지 않았으나 이번에 한미사진미술관의 호의로 첫 전시를 열게 되었다. 그런 만큼 개막일에는 많은 사진가 등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겨레신문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하는 사람으로 이명동선생 모르면 간첩 소리 듣는다.
한국사진계에 끼친 영향력도 워낙 크지만 보도사진가로서의 기자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4,19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에서 찍은 사진과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서민호선생을 찍기 위해 위장한 사건 등으로 사진계에 전설을 일구어 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올해로 95세를 맞은 원로 사진가다.
어린 시절, 소 판돈 들고 나와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종군기자로 시작된 사진인생은 육군본부에서 주최한 전투사진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막을 열었고,

화랑무공훈장을 무려 3개나 받았다.
동아일보 인촌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식장을 지켜, 갑자기 조문 온 이승만대통령을 찍어 특종 하였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했다. 여지껏 사진기자 출신으로 부국장 반열에 오른 사람도 없거니와, 

일하는 동안 몸 아끼지 않는 그만의 기지로 많은 특종을 만들어 냈다.

특히 국내 최초로 시작된 동아사진콘테스트와 동아국제살롱사진, 사진단체 창설 등 사진사에 남을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생께서 주도하셨다. 대학에서 보도사진을 강의해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선생의 날카로운 사진비평은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사진계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한국화보'와 '서울화보'를 발간하여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렸으며, 그 이후 '사진예술'을 창간하여 낙후한 국내사진잡지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그동안 사진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현대사진문화상, 제비꽃 특별사진가상, 옥관문화훈장, 건국포장, 언론부문의 인촌상 등을 받아 온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의 전설이자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지난 2월 24일 아침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생각지도 않은 이명동선생의 전화를 받아 어리둥절했는데,

자택이 있는 약수동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는 말씀이셨다.

선생님을 만나뵙고 갈비탕과 차를 들며 즐거운시간을 가졌지만,

계산을 먼저 해 민망하게 만들었다. 
사시는 모습을 기록하려 찾은 자택에는 사모님 혼자 계셨는데,
거동이 불편한 사모님을 위해 직접 밥을 지어 차려주고 나오셨다는 것이다.
연로하신 선생님께서 시장보아 음식 만들고, 간병까지 한다니 기가 막혔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많은 공적과 화려한 명성도 세월 앞에는 다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좁은 방에서 장모님 간병하는 아내가 안타까워 투정했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한 수 가르쳐 주신 것이다.
갑자기 전화주신 것도 내 처지를 아셨던 모양인데, 이것이 말없는 교육이었다.
떠나올 때, 장모님 맛있는 음식 사드리라며 주머니에 강제로 찔러 넣어 준,
꼬기 꼬기 접은 오만원권 지폐 두 장이 결국 나를 울렸다.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자리가 지난 21일 정오, 인사동 '양반댁'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명동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정식, 육명심, 이완교, 김녕만, 구자호, 최재영, 유병용, 이기명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김기찬씨의 미망인 최경자씨 등 모두 열 한분이 참석한 가운데 오찬회를 가졌다.
올 해로 95세인 이명동선생님께서는 아직까지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지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모두들 선생님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축배도 들었다. 독일에서 곧 열리게 될 비엔날레에 한국작가로 참여하게 된 이완교씨와 대구사진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은 구자호씨로 부터 외국과 국내와의 비엔날레 운영에 대한 차이점을 듣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진계 문제점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거론되었으나, 주요 화제는 사진협회에서 주관해 온 사진공모전의 오래된 비리였다.

사협 공모전 비리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0년에는 '한사전' 심사비리가 발각되어 사무처장 김모씨가 사전 구속되고 이사장을 비롯한 심사위원, 출품자 등 42명은 불구속 입건하는 등 사진계 초유의 비리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씨는 2008년 4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대상수상을 부탁하는 진모씨로부터 3,000만원을 받는 등 2007년년부터 2010년까지 출품자 42명으로부터 총4억여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다. 그는 보통 대상작에는 3,000만원, 그 외는 300만원에서 1,500만원을 챙겼다고 한다. 김씨는 심사위원들을 협회 이사장실이나 모텔로 불러 미리 출품작의 샘플사진을 보여주며 '눈도장'을 찍게 하거나 심사장에 여직원을 들어오게 해 해당작이 나오면 자리에서 일어서는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 특정 사진을 수장작으로 만들었는데, 김씨가 기획부터 심사위원 선정까지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의 모든 과정을 총괄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8.000여명이나 되는 사단법인 단체에서 일개 사무처장에 의해 심사위원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공모전 비리 문제는 '사협'이란 단체가 결성될 때부터 이어져 온 구악이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러한 비리물증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물증을 근거로 출품자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다 고소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부탁한 사람들의 샘플사진 이면에 공모전명, 제공한 금액, 결과 등이 상세히 기록된 협박용 물증의 분량이 라면박스에 가득하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결론적으로 사협이란 단체에 작품사진을 심사할 능력 있는 분들이 없다는데 문제가 더 크다. 20여 년 전, 만연한 비리에 식상한 대학교수와 프로사진가들이 모두 탈퇴하였기 때문이다.

이명동선생님께서는 옛날에 있었던 비리의 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어느 출품자가 심사위원들에게 같은 양복기지(원단)를 뇌물로 돌렸는데, 출품자가 의뢰했던 양복점에서 심사위원들이 똑같이 양복을 만들어 입고 심사장에 나와 서로가 놀랐다는 이야기에 모두들 배꼽을 잡았다.

오찬 모임이 끝난 후 육명심선생과 함께 '갤러리 나우'에 들려 이순심관장과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사진평론하는 진동선씨와 김영태씨가 등장하여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난 2월 21일 인사동 오찬 모임으로 나섰는데, 인사동은 나설 때마다 마음이 늘 바쁘다.
갈 곳도 할 일도 많다는 생각이 앞서나 막상 당도하고 나면 새로운 전시를 찾거나 길거리를 돌며

사진 찍는 일이 전부다. 수시로 드나드는 인사동에 무슨 사진찍을 것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사진은 만남의 예술이고, 발견의 예술"이기에 부지런히 돌아다니는게 상책이다.


거리는 전통과 무관한 별의 별 장사들도 많지만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 인사동이다.
세상의 중심인 사람보다 더 좋은 사진 소재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함부로 찍을 수도 없는 시대다.

작년에는 인사동과 장터에서 사진찍다 문제가 생겨 종로경찰서와 안동경찰서에서 각 각 조서를

받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평생의 주제가 사람인데, 이제 와서 사진 작업을 접을 수는 없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허락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해 두고, 정면 입상사진을 찍어왔으나

스냅의 가치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가끔은 카메라를 휘 둘 때도 더러 있다.
찍을 때 사전 양해부터 구해야 되지만 순간적인 감정 표현이나 동작을 포착하려면 순서가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바뀌기 전에 찍은 후  인사도 하고 양해를 구하는 식이었는데, 본인이 거부하면 즉석에서 지워줘

말썽의 소지를 없애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을 찍지 않았는데, 찍었다고 우겨 가끔 문제가 생긴다.

정오무렵, 안국역 6번출구로 나오니 한 아주머니가 조각천을 이용한 밥상보등을 만들어갖고 나와

손바닥만한 노점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인사동에 어울리는 노점상이란 생각에 카메라를 들었더니

대뜸 손사레를 치며 “초상권 침해야~”라고 쏘아붙였다. 카메라는 내렸으나 뒷 맛이 씁쓸했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외국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면 오히려 포즈를 취해 난감할 정도로 적극적인데 비해, 

나이가 지긋 할수록 거부하는 분들이 많은 건 무언가 피해의식이 있는 듯했다.
초상권이란 얼굴모습을 분별할 수 있는 사진이 상업용으로 활용되었을 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정면사진이 아니거나 군중 속에 뒤 섞여 있는 조그만 모습까지 시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리에는 중국관광객들이 몰려다니기도 하고, 패션쇼를 홍보하는 모델들이 줄지어 다니기도 했다.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님을 만났고,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과 박찬성씨,사진가 육명심, 한정식, 이완교선생

그리고 현장스님도 만났다. 그래도 인사동 나들이의 묘미는 우연히 인사동 터줏대감이나 인사동을

사랑하는 유목민들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

'노마드'에 도착한 현장스님에게 카메라를 겨냥하자 쓸데없는 기념사진은 왜 만날 때마다 찍느냐고 반문하였다.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정식선생의 말씀처럼 "사진예술의 첫머리에 기념사진이 존재하고, 기념사진의 밑바닥에 초상사진이 존재한다"

는 것을 왜 모를까....

 

 

 

 

 

 

 

 

 

 

 

 

 

 

 

 

 

 

 

 

 

 

 

 


 

 

 

 

 

 

 

 

 

 

 

 

 

 

 

 

 

 

 

원로사진가 이명동선생님을 모시는 오찬회가 오랜 세월동안 한 해 두차례씩 이어져왔다.
지난 11월29일 인사동 '양반댁'에서 선생님을 모시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그 연세에도 마치 청년처럼 손 흔들며 활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

이번 모임에는 이명동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김녕만, 조문호, 유병용,
전용종, 이기명씨 등 여덟명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대구의 차용부씨가 거제도로 이주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변경된 주소는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천촌 도모로 99번지'

 

사진기자로 평생을 보낸 사진계의 전설


 53-55 중앙일보사 사진부장
55 동아일보사 기자
61 제10회 서울시문화상(언론부문) 수상
62 동아일보사 사진부 차장
63 동아일보사 사진부장
63-75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사
65-72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69-83 월간 신동아에 14년간 사진평론 연재
71-73 국전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73 KBS TV 사진강좌
73-95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강사
74-79 동아일보사 출판부 국장
74-92 신구전문대 강사
74-78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사
75-79 외국어대학교 홍보학과 강사
85-88 "한국화보" 및 "Seoul" 화보 발행인
85-90 상명여자대학교 사진학과 강사
88 "보도사진의 이론과 실제" 발간 (해뜸)
88 현대사진문화상 본상 수상
88 대한사진문화상 수상
89 월간 "사진예술" 창간 (발행인)
89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 발간 (사진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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