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세월


현일영(1903-1975)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진가로 평가받는다.
객관적인 향토서정주의가 판치던 시절에 신즉물적인 경향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분이다.


좌로부터 현일영, 박필호, 서순삼선생


1958 무제


그는 일본에서 사진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에 심취한 지식인이었다.
30년대에 종로에서 ‘현일영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고, 
5-60년대에 세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며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1960 실패


1960 태극기


그는 이야기를 끌어 담는 걸작주의를 피해, 사물과의 관계성에 치중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독한 탐색’이란 작가의 말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선생의 고뇌에서 나온 사색의 파편이었다.


1960 무제


1960 손목시계


사진만 봐서는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혁명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알 수도 없었지만, 너무 깊숙이 알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그 정도만 알고, 존경의 마음을 가져 왔었다.


1958 무제



지난 2일, 원로사진가로서 제일 연세가 많은 이명동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새해 인사차 약수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모님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다, 85년 “예술계”란 잡지에 투고한, 내 사진에 대한 글을 찾았다며
전해 주기도 했다. 꼼꼼하게 챙기시는 성격은 여전하셨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 들렸는데, 기어이 설렁탕 먹으러 가자신다.
밥값 낼 요령인지, 얼핏 사모님에게 용돈 타시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선생님도 사모님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걸, 안 것이다.



설렁탕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소주까지 주문하셨다.
나를 위한 배려지만, 새해에 건배라도 한 번 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건배를 하고, 이 날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여쭈었다.
현일영선생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발동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돌아가신 현일영선생님, 아시는 것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이소.”


그 분은 남다른 면모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모두가 그 분 사진에 관심은 많았지만, 동조한 사람이 별 없었다는 것이다.
좌익이란 빨간딱지까지 붙어, 요시찰인물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거라 하셨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더 깊숙한 얘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사물이 주는 시적 울림까지 드러낸 현일영선생의 사진은, 앞서가도 한 참 앞선 것이다.
그러니 사진계 이단아로 취급되어 뒷전으로 밀려난 게 아닐까?
한 발 앞서면 지도자가 되고, 두발 앞서면 미친놈 소리 듣는 다는
스코트 니어링의 명언이 생각난다.


글 / 조문호


현일영선생 작품사진은 '한국사진역사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사진의 힘이 커졌다.


옛날엔 글로 역사를 남겼으나, 이제는 사진 또는 영상으로 남기는 세상이다. 사진은 역사이기 이전에 세상을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60년 눈에 최류탄이 박혀 마산 앞바다에 떠 오른, 김주열군의 시신을 찍은 ‘국제신문’ 허종기자의 사진 한 장이 4,19를 유발시켜 역사를 바꾸지 않았나.

사진이 처음 들어 온 광복 이전에는 외국 사진가나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 고작이다. 본격적으로 사진이 자리를 잡은 것은 광복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당시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의해 남긴 사회 기록상도 더러 있지만, 시대적 사건이나 정치적 이슈를 담은 대부분의 사진들은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남긴 것 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승만 정권이 하야하기 전 후의 많은 사진파일들이 폐기처분된 것이다. 사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그 당시 신문사진 현장의 최 일선에서 계셨던 이명동 선생의 증언은 충격 자체였다.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에 끼친 영향력도 워낙 크지만, 보도사진가로서 기자정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4,19때 총탄이 쏟아지는 경무대 앞에서 찍은 사진을 비롯해, 육군교도소에 잡힌 서민호선생을 찍기 위한 위장 사건, 정치깡패 추적 사진 등 사진 계에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 낸 분이다. 그 외에도 사진단체 창설 등 사진사에 남을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생께서 주도하셨다.


이명동선생은 한국사진계의 전설이자 산 증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선생께서 기록한 그 많은 사진자료들이, 역사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일부 몰지각한 사람에 의해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이명동 선생이 몸담고 계셨던 일개 ‘동아일보’사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더 심각성이 크다.

이명동선생께서 ‘동아일보’ 사진부장으로 계실 때, 일정한 기간이 지난 필름과 사진을 모아 조사부로 넘겼다고 한다. 조사부에서는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사진필름들이 하나의 천덕꾸러기 신세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조사국에 들렸더니 넘긴 필름들이 깡그리 사라졌더라는 것이다. 폐기처분했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단다. 차라리 폐기처분하기 보다 누가 훔쳐갔으면 좋겠다.

그 것은 선생께서 평생 몸 바쳐 온 사진작품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신문사에서 월급 받고 신문사 필름을 사용했으니, 그 사진들은 모두 신문사 사진이라”며 필름 한 컷 넘보지 않은 아주 고지식하게 사신 분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지켰던지 평생을 사진하셨지만 댁에 사진 한 장 없다. 몇 해 전 구순을 기념하는 개인전 때도 제자 김녕만씨가 간신히 수소문해 종군기자 무렵의 사진들과 보도된 신문 복사로 전시한 게, 생애 첫 전시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그 시절 사진이래야 일부 사진기자로 부터 흘러나온 필름들이 고작이다. 그 것들이 간신히 살아남아 우리의 역사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양심이 양심을 이기는 사례도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양심도 버려야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잘 못된 법을 만들어 휘둘러대는 부패한 정권에서는, 법을 어기는 국민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듯이, 결코 사라진 사진들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약수동에 계신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 댁을 찾아 갔다.

사모님 점심 챙겨드리고 나오셨다는 선생님의 체력은 여전 하셨다.

이제 일흔도 안 돼 빌빌거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120세가 아니라 더 높게 잡아야 되겠네요랬더니 씰데 없는 소리라신다.

입에 발린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아흔다섯이니 선생님 건강 상태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또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상황묘사까지 생생하다.

 

주문한 설렁탕이 나왔으나 수저만 담그신 채, 연신 말씀을 하신다.

이 날은 평소에 듣지 못했던 사진계 뒷이야기라 귀가 쫑긋했다.

글로 옮기기 곤란한 웃고 넘길 이야기라 그런지 더 흥미진진했다.

선생님께서 긴 세월 모셨던 분의 이야기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동아일보에 계실 때 있었던 신문사이야기로 옮겨갔다.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필름을 관리해 조사국으로 넘겼는데, 한꺼번에 폐기처분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이미지도 아니고 매일 매일 찍어오는 필름 관리가 힘들었는지 모르나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소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찍었던 4,19당시의 특종사진들을 비롯한 모든 사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용 하려면 당시 신문을 복사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록 동아일보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사진 가치에 대한 인식들이 부족한 시기기도 하지만, 보관 관리에 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때다.

차라리 회사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기자들에게 돌려주어 관리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현대사를 증언할 중요한 사진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일부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이나, 사진기자 수첩에 끼어 흘러 다니던 필름들에 의해

그나마 우리의 현대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들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차라리 그 땐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뒤집으려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말이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17일 아내와 함께 한정식선생의 인사동 작업실을 방문했다.
한선생 께서는 요즘 암실작업을 많이 해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제자들이 많지만, 싫은 소리 꺼내줄 몰라 늘 고달프게 사신다.

‘대청마루’에서 선생님 모시고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 했다.

그 자리에서 스승이었던 이명동선생님 말씀을 꺼내셨다.
이명동선생은 항상 앞에 나서지를 않는 분이라는 것이다.
긴 세월동안 돌아가신 임응식 선생을 내세워 모셔왔는데,
상찬은 임응식 선생이 다 받고, 욕은 이명동 선생께서 다 덮어 썼다고 한다.
인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분이라, 절대 도리에 어긋난 일도 못한단다.

이명동선생께서 평생 사진기자로 일했지만, 집에 작품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다.
특종 사진도 많이 발표되었지만, 그 흔한 사진집 한 권 못 만드셨다.
작년에 제자 김녕만씨가 종군기자시절의 필름을 찾아 내,
한미사진미술관 초대전을 가졌던 게 고작이다.


신문사에서 월급 받아 신문사 필름을 사용했으니
그 사진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오늘 이명동 선생님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점심 사 줄 데니 마누라 데리고 약수동에 오란다.
돌아오는 월요일에 찾아뵙고,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 대접해야지...

사진,글 / 조문호










이 사진은 정범태선생께서 1956년도에 인천소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요즘 우시장은 통장으로 바로 이체되지만, 옛날에는 이렇게 돈뭉치를 싸들고 다녔답니다.

자기앞수표는 수수료가 들어 기피하는데다, 수표보다는 현찰을 더 신뢰했던 시절입니다.


소 팔아 술 한 잔 하고는, 늦은 산길가다 강도에게 털리는 등 소판 돈에 얽힌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좀 불편했지만, 두둑한 돈뭉치 만지는 기분도 괜찮을 듯합니다.

소 판돈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 사진계 전설이 있습니다.
원로이신 이명동 선생께서 집에서 소 판돈 훔쳐 나와
카메라 사서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 사건 말입니다.

그러나 사진 우측에 고개 숙인 소의 슬픈 눈망울을 보니 가슴이 찡합니다.
단지 말을 못할 뿐이지만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정범태사진집-카메라와 함께한 반세기-(눈빛출판사)에서 옮겼습니다.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을 모시는 오찬회가 지난 22일 인사동 ‘양반 댁’에서 있었다.
그 자리에는 이명동 선생을 비롯하여 김영수, 육명심, 이기명, 이완교, 유병용, 전민조,

한정식, 최경자씨 등 열 분이 오랜만에 만났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에는 ‘차 박물관’에 들려, 차를 마시며 환담의 시간도 가졌다.

오는 11월 9일 오후3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전민조 선생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라는 기획전 개막식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고,

12월 7일부터 6개월 동안 열리는 육명심선생의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말씀도 들었다.

육명심 선생께서 “모임을 자주 갖자”는 말씀에 이명동선생님의 사모님께서 편찮아 모임이 늦었단다.

그리고 오래 전 작고하신 왕상혁 선생 이야기도 나왔다. 그 분은 은행원으로 사진을 하셨는데,

사진 때문에 은행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사진에 빠졌는지 짐작이 가는 이야기였다.

유병용 교수는 조기정년으로 사진하는 분들이 널어 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문제는 사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아마추어들이 지도하는 경우가 많아,

대개 관광사진이나 찍으러 다닌다는 것이다. 한 삼년 쯤 허송세월 하다 제물에 지쳐 그만둔다는데,

꼭 사진에 한한 것만도 아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미래가 보인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사진을 재미로 한다면 관광 삼아 다니는 것도 괜찮겠지만, 사진을 제대로 하려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왜 사진을 찍을 생각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스스로의 확신이 선 후,

그 방면의 공부를 해야 하고, 지도 받을 선생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의 생활사 기록에 충실한 것이 더 보람일수도 있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가 류경선씨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중대사진동문들이 마련한 일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6일 인사동 ‘경인미술관’3전시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사진가 강운구, 최인진, 최재영, 김녕만, 양재문, 차정환, 김종호, 이평수, 고 헌,

노연덕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된 사진들과 그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돌아보니 지난날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아마 ‘사진협회’ 이사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늘 해왔다.

왜 쓸데없는 감투에 그리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필자도 당시 ‘사협’을 개혁하려는 욕심에 두 차례에 걸쳐 이사장선거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이명동선생을 후보로 모셨고, 두 번째는 류경선씨를 도왔는데, 두 분 모두 백현기씨의 치밀한 조직에 밀려났다.


이명동선생이야 선거비용을 주변에서 조달해 모셨으나, 류경선씨는 자기 돈 쓰 가며 집착했다.

그는 낙선해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이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사장에 당선되었지만 ‘사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출마의 변으로 변화와 창조란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고 실추된 한사전을 새롭게 부활시키겠다고 내 세웠지만, 조직에 둘러싸여 못했다.

결국 임기 중에 병석에 드러누웠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겠는가?

그 이사장 자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인데,

전임이었던 문선호씨와 백현기씨도 이사장자리로 수명을 단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다툼과 공모전에 따른 이권 배분 등, 숱한 비리 한 복판에서 처신하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류경선교수는 사진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사진인생을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줄곧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해 왔다.

정년을 한 해 앞두고는 1톤 트럭을 개조해 0,5mm 구멍을 뚫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전국 해변을 돌며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흐릿한 안경너머로 떠오르는 옛 그림자를 회상하는 듯한 ‘바다, 그 기억을 그리다’전이 그의 마지막 전시였다.


사진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한 평생을 사진에 바친 그의 흔적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그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정년퇴임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사협’ 이사장에 머리 싸 맬 것이 아니라 작품활동에 혼신을 다했어야 했다.

명예롭지 못한 경력 한 줄에 모든 걸 바친 고인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파 드리는 말이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이승에서 못 다한 모든 걸 성취하길 기원한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9일 벼루고 벼루던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키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선생님께서 한 번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날짜를 잡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렸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선생님 핸드폰은 잘 연결되지 않는 고물이라 내심 걱정되었다.
네 번째 전화에서 어렵사리 연결되어 아내와 함께 부랴부랴 약수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마중 나온 선생님보다 밝게 웃으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더 좋았다.
끼니마다 선생님께서 쑨 죽으로 연명해 그런지 초채한 모습이긴 하나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셨다.
“하도 죽을 많이 끓여 이젠 죽 박사가 됐다”며 선생님도 웃으셨다.

탁자 위에는 이번에 나온 “사진예술“8월호가 놓여 있었다.
최민식선생 사진상 논란을 대충 아실 것 같아 선생님 생각을 여쭈어 보았다.
"1968년3월1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든 개인사진집이 최민식 휴먼1집이다"며
말문을 여셨다.

선생께서 추천해 동아일보에서 그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정신이나 사진들이 좋아 만들었는데, 그 일로 중앙정보부까지 끌려 같다고 한다.
거지일색으로 찍은 사진 책을 만든 것이 북한의 사주를 받지 않았냐는 것인데,
동아일보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하셨단다.
요즘 젊은 사진가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비하하는 것은 두고 꺼낸 말씀이시다.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의 시대적 배경부터 생각해야 한다며,
평생을 몸 바쳐 일군 업적을 얄팍한 논리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맥에 의한 수상자 결정은 사람들이 정에 약해 그런 것이지만,
이젠 바뀔 때도 되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서둘러 일어 나셨다.

“요 앞에 잘 하는 도가니탕 집이 있으니 가자”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러 왔으니 선생님께서 계산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씰데없는 소리’라며 말을 자르신다.
가게 가서는 주인더러 ‘이 사람한테 돈 받으면 다시 안 온다’며 엄포까지 놓으신다.

자리를 끝낸 후 댁까지 모셔 드리겠다는 말도 일거에 뭉게버리고,
지하철 에리베이터까지 따라 내려 오셔서 민망스럽게 만든다.
“선생님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저도 마누라 아프면 선생님께 죽 쑤는 거 배우러 올게요.”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