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한국국제사진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황규태선생 작품이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새해를 맞아 일출과 관련된 이미지를 생각하다, 황규태선생의 '원풍경'이 떠올랐다.

사진을 찾으려고 83년도에 발행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도록을 뒤적였더니, 

뒤 페이지에 실린 원로평론가의 짧은 작품해설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운운하며 화면구성에 대한 이야기만 풀어놓았다.

그만큼 현대사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였다.


그건 생태환경의 변화를 예견한 경종이었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인 것에 대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한 황규태선생의 ‘원 풍경’은 

기록성과 고발성을 겸해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띄고 있다.

몽타주에 의한 그의 의외로운 해석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 보여 준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리얼리즘 사진이 주류를 이루던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80년대 후반 유학파들이 귀국하여 ‘한국사진의 수평전’이란 새로운 사진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위에 황규태 선생이 계신 것이다.

선생은 사진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중노출과 몽타주는 물론, 때로는 필름을 태워 이미지를 얻기도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런 실험정신 덕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진가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60년대 초반, '경향신문'기자로 사진을 시작한 황규태선생은 특파원1호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 곳에서 사진의 한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진세계를 개척해 낸 것이다.

그 뒤 사업에도 크게 성공해, 미국에서 사진 공부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튼 사진인 들에게 선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시적감성도 탁월하다.

흐드러지게 핀 벗꽃을 사진에 잔뜩 넣어놓고, 그 밑에 붙여 논 제목이 뭔지 아는가?

<큰일낫다 봄이 왔다> 강현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이다 후렴은 '가난한 내 사랑도 꿈틀거린다'이다.

서정춘시인의 '봄 파르티잔'에 버금가는 절창아닌가?

머지않아 팔순을 내다보는 연세지만, 탁월한 감각과 번득이는 에너지는 변함없으시다.
대형카메라를 이용한 픽셀 확대 작업이나 ‘기(banner)’시리즈 등의 작품 스타일 뿐 아니라,

생각이나 생활까지 젊은이들 빰친다.

기존상식을 희롱하고, 고상함에 야유를 던지는 선생의 자유로운 창작정신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글 / 조문호
 





                                       1969년부터 1972년 사진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작품집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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