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짬 내 정선 갔더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네.
‘우루ㅡ루 쾅’ 천둥소리에 놀란 가슴 삭이며,
일손 놓은 채, 담배연기로 시름 달랜다.

시원해 좋긴 하다만, 밀린 일은 언제 할까?
칡넝쿨은 나무를 뒤덮고, 불 지필 화덕에 코스모스가 웬 말이냐?
텃밭의 상추 대는 하늘로 치솟고, 잡초들만 제 세상 만났는데..

맛도 보여주지 않고, 가버린 님은 얄밉지만,
고추, 옥수수 같이 반겨주는 것들도 남았구나.
공들인 것 만큼 거둔다는 이치 따라, 또 다시 땀을 흘린다.

“아이구! 허리야”
이러다 밤일 못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랜만에 정선 만지산에 들렸다.
일에 쫓겨 차일피일 미루다, 그 많은 더릅이 피어버려 못 먹게 되었다.
쌉쌀한 맛에 소주한 잔 하려던 생각은 고사하고, 선물할 곳도 많아 걱정이지만 어쩌랴!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꼭 가는 집이지만, 요즘은 기름 값 걱정에 그마저 못 갈 때가 많다.
이번엔 야채파종과 축대를 보수하려 했으나, 막상 부딪쳐보니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언 땅이 풀리면 밭을 오르는 계단이 허물어져,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해야 하는 일인데다,

돈 못 버는 주제에 야채라도 많이 심기위해 빈 땅을 개간했으니 접힌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고추가 주종이었으나 개간 못한 땅엔 옥수수를 심었는데, 윗집 최종대씨가 걱정스레 말했다.

“밭에 전기철망 치지 않으면, 멧돼지가 쑥대밭 만듭니더”

그렇게까지 해 가며 농사지을 생각은 없어, 사람이 먹던 짐승이 먹던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차라리 노동이 필요 없는 딸기 같은 과일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나 살던 집은 손 볼 곳이 많아도 노동력으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귤암리에선 제일 오래된 집이 우리 집일 것이다.

한 때 동강 댐이 무산되며 주민들 보상책으로 정부에서 주택건설비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정겹던 옛집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이상한 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옛집의 불편한 점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래된 집이라 수시로 손을 봐줘야 하는데다, 수세식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없으니,

개량주택에 길든 여인네들은 질색이다. 그러나 군불 지펴 따뜻한 온돌에 더러 눕는 그 맛이 쥑인다.

불과 반세기밖에 지나지 않은 집이지만, 구옥을 하나라도 지키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사진만 팔리면 신용불량자 신세도 면하고 집수리도 할 작정이었으나, 매번 공염불이 되고 만다.

예전엔 떠돌다 힘들면 마음편이 쉬려 정선 집에 갔으나, 이젠 일할 때만 정선가는 꼴이 되었다.

낡은 집이 남은 내 수명까지 버텨주면 고마우련만, 허물어진 내 몸보다 못하니 그게 문제로다.

차라리 잠자다 무너져내려 같이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푸념에 아내의 핀잔을 받기도 한다.

가족 생각은 아랑곳 않는 무책임한 말에 자괴감은 느끼지만, 이 모순투성이 세상이 싫은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이젠 한 가지 고민이 더 생겼다.

한적한 시골에 살려면 이웃이 좋아야하는데, 염치없는 사람이 옆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본래 살았던 노성수씨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집이 팔렸는데, 새로 이사 온 사람의 무례가 도를 넘고 있다.

이사 올 때부터 이웃과의 인사도 없이, 재 측량한다며 남의 집에 빨간 막대를 꽂아 불쾌하게 만들었다.

우리 집 마당을 자기 주차장처럼 사용하는데다, 자기 땅도 많은데 남의 땅에 고추를 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서울서 살러 온 사람들이 지역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이제 정선마저 싫어졌으니, 더 이상 내 쉴 곳은 없다.

사진,글 / 조문호




















정선 만지산 골짜기에도 봄이 왔다.

마당의 목련은 처녀가슴처럼 부풀었고,
할미꽃도 수줍은 듯, 고개 내민다.

자연은 온통 봄소식 전하느라 바쁘건만,
만지산 사람들은 싸우느라 정신없다.

원주민과 이주민들의 기 싸움질이다.
마치 정치판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툇마루의 낡은 가림 막은 깃발처럼 펄럭이고,
시멘옹벽이 무너져 주춧돌을 협박한다.

함께 살자던, 자연마저 나를 버리려는가?
낯 술에 취해, 울 엄마 무덤을 찾았다.

미주알 고주알 하소연하다, 잠들어버렸다.
꿈에라도 기다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다.

사진,글/ 조문호













보름 만에 찾은 만지산 집, 반갑게 맞이하네.

지천에 핀 코스모스 덩실덩실 춤춘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온 산천이 다 익는다.

오곡백과 만 아니라 내 마음도 익는다.




누렇게 늙은 오이, 늦게 옴을 원망하고

자라다 만 열무는 목마르다 소리치네.







문 지키는 현판은 꿈꾸자며 반기는데,

통도사수안스님, 꿈만 꾸라 쓰 주셨나?




방에 걸린 최씨 할매 기별 없이 떠나셨네.

무정타, 그 책임 아들에게 떠넘긴다.

 

놀러 온 이웃 양반,

네 엄마는 어디가고, 옆집 할매 붙여 놨노?”

 

울 엄마 보다 최씨할매가 예쁘다는 내 대꾸에

사진작가는 죽은 미인도 좋아하나?



울 엄마 산소에 벌초하러 올라가니,

누운 엄마 토라져, 못 본 척 말 던진다.

 

좋아하는 할매나 깎지, 여는 왜 왔노?”

 

사진, / 조문호

 

 


 

 

예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당이 도처에 있었다.
대개 서낭신이 붙어사는 오래된 나무나 돌 더미를 서낭당이라 했으나,
곳에 따라서는 사당, 즉 당집을 지어 서낭신을 모시기도 했다.

서낭당은 잡귀나 병을 막아주며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역할 외에도
마을 어귀에 자리 잡아 먼 길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거나 헤어지는
작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마음의 평안까지 안겨주는 곳이었으니,

이 얼마나 신성하고 드라마틱한 장소였던가?

이렇게 오랜 세월 민중과 함께 해 온 서낭당이 이젠 대부분 사라졌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우리 고유의 의식과 전통을 깡그리 없애 버린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란 깃발아래 씨를 말려 버렸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종교는 손대지 않았다.
미신이라 내쳤지만, 다른 종교도 결국 마음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힘센 다른 나라 눈치는 보면서 국민 아니 조상은 거지 발싸게 처럼 얕본 것이다.
그런 짓을 했으니 어찌 천벌을 아니 받겠는가?

우리 마을 만지산 서낭당이야기하려다, 괜히 열 받았다.
그렇게 서슬 퍼른 칼날에도 살아남은 곳이 내가 사는 정선 만지산 서낭당이다.
그만큼 깊은 산골에 숨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해마다 만지골 사람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기도 하고,
몇 년 전에는 만지산에 산삼 심으러 온 서울의 ‘농심마니’들도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 서낭당축제를 개최할 만큼 애착을 가진 곳이다.

그런데 올 들어 이 골에 자꾸 우환이 생기는 것이다.
모두 아흔은 넘겼으나 만지골의 어르신 두 분이 차례로 돌아가시더니,
두 달 전에는 옆집에 사는 노성수(60)씨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과음으로 팔을 헛짚어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가 난 것이다.

지난 8일 밤늦은 시간 아내와 서낭당 앞에 무릎 꿇고,
제발 우환을 거두어 달라며 서낭신께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만지골의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내친김에 이 사악한 세상까지도 바로잡아 주소서!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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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장수마을로 불리는 귤암리 아랫만지골의 최정규, 최연규, 최성규, 최윤규씨의

모친 유명철(94)씨가 지난 25일 노환으로 소천하셨다.

지난 27일 ‘정선장례식장’에서 옮긴 운구행렬은 오전10시경 귤암리 자택에 도착했다,
제를 올린 상주들이 꽃상여에 태워 선산으로 올랐는데,

상여꾼들의 구성진 어허넘차 소리가 만지산에 메아리 쳤다.

오호 너구나 넘차
너호 너호 너기나 넘차 너흐

명사십리가 해당화야~ 나무여~
꽃이 진다고 설워마라~ 나무여~
명년 삼월이 돌아오면~ 나무여~
너른다시에 피련마는~ 나무여~
우리 인생은 한번가면~ 나무여~
어느 시절에 돌아오나~ 나무여~

마을주민을 비롯한 문상객들은 고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사진, 글 / 조문호

 

 

 

 

 

 

 

 

 

 

 

 

 

 

 

 

 

 

 

 

 

 

 

 

 

 

 

 

 

 

 

 

 

 

 

 

 

 

 

 

 

 

 

 

 

 

 

 

 


무더위가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는 처서입니다.
처서가 됐다는 것은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분기점이 처서인데, 가장 대표적인 속담으로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처서가 되면 그만큼 날이 선선해지기 때문에 모기의 극성스러움도 덜해진다는 뜻이겠지요.

푸른 하늘아래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만지산 풍경이 벌써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나의 가을은 이미 실종신고 되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추석으로 산소에 벌초도 해야지만 떠나지 못합니다,
구월 한 달 넘게 방구석에만 쳐 박혀 부지런히 일만 해야 할 처지입니다.
정선도 인사동도 잊어버린 채...

오래된 필름을 찾아 스캔 받고 수정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닙디다.

찍기만 하고 처박아 둔 자료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려니 온 몸이 저리고 아프지만,

시간이 없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습니다.

사진집을 출판하려는 계기를 떠나 자신의 반평생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그동안 관리해 온 블로거나 카페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처서였던 지난23일의 인사동거리는 주말이라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한낮에는 날씨도 후덥지근했습니다.

거리에는 그림 그리는 화상들이 여럿 나왔고, 사람 광고판도 등장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글을 써 붙인 거리악사의  서툰 노래 소리가 소음에 날리지만

어린이들은 신기한 듯 여기 저기 기웃거립니다.

술 한 잔하자는 벗의 당부를 물리치고, 아내와 처서음식 먹으려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처서에는 애호박과 고추를 넣은 칼국수를 끓여먹는 풍습이 있었지요.

추어탕은 가을대표 보양식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막힌 혈을 풀어준답니다.

그리고 가을 보약이라는 늙은 호박을 이용하여 죽을 끓여 먹으면 환절기 감기예방에 좋다고 합니다.

처서 무렵 가장 맛이 좋다는 복숭아도 잊지 말고 챙겨 드세요.

 

 



이 사람

자연 속에 묻혀 사는 풍각쟁이 김순배씨

 

 

‘정선아리랑시장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풍각쟁이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 뮤지션, 국악인 등의 통속적인 호칭은 많으나 난 그를 풍각쟁이로 부르고 싶다.

풍각쟁이 김순배(72세)씨는 자연의 이치대로 아주 자연스럽게 사는 자연인이다.

필자가 만지산에 입주할 무렵인 98년도에 처음 만났으니, 그가 귤암리에 정착한지도 어느 듯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래프팅을 즐겨 동강까지 왔으나 정선의 산세에 매혹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강변에 텐트 치고 살았으나 몇 달 뒤, 윗 만지산 골짜기에 터를 구한 것이다. 집도 외부 도움 없이 혼자 지은 토굴 같은 움막이지만, 신선이 따로 없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백발의 남정네가 서울사는 가족은 마다하고 허구한 날 북만치고 살기에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비아냥거림도 개의치 않으며 일인다역의 사물놀이 개발을 위해 북과 장구, 꽹과리 등의 악기들을 엮어 서양의 드럼 연주하듯 연습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야 서툴렀으나 흐르는 세월과 함께 누구도 흉내 못 낼 그만의 일인 사물놀이 연주자가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아코디온, 색스폰, 대금, 피리, 태평소 등 갖가지 악기를 스스로 체득하여 만능 아티스트가 되었다. 한 번도 누구의 지도를 받은 적이 없으나, 일찍 부터 음악적 재능은 타고 난 듯 했다.
2005년부터 그의 독특한 음악적 재능이 알려지기 시작하며 ‘동강할미꽃축제’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정선문화원에서 실버악단을 창단하는 등 외부 활동에 나선 적도 있다.

서울에는 아내와 2남1녀의 자녀가 있지만, 모두 출가해 버리고 아내 혼자 과부처럼 집을 지키며 산다. 가끔 남의 집 찾듯 들리기야 하지만, 그는 만지산에 혼자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 뒤주에 쌀은 남았는지, 남의 살림살이를 알 수는 없으나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 같다. 마음대로 음악을 즐기며 자연의 이치를 체득해 가는 자유인일 뿐이다. 유일한 외출이라면 정선장날 시장에 들려 막걸리 한 잔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철학은 있다. 자연이 좋아 자연인으로 살기에 절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니기가 불편해도 나무 한그루 자르지 않고,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 해치지 않으며 같이 동거 동락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산골에 살다보면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물도 편하게 쓰고 싶고, 산길이라도 넓혀 운송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게 사람 사는 기본적인 욕심이다.

아무튼 그는 음악에 미친 풍각쟁이이기 이전에 자연에 파묻혀 도를 닦는 도반에 다름 아니다.

 

사진,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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