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엔 폭우가 무섭도록 쏟아졌다.
승용차가 개울에 떨어져 가족들이 병원에 실려 가는 등,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정신을 놓아 어떻게 시신을 땅에 묻었는지 기억마저 없다.

울 엄마 만지산 입산 신고식은 그렇게 힘들게 치루었다.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무심한 세월이 벌써 십년이나 흘렀다.

아내는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려 몇 일째 꼼짝을 못하는데,
태풍마저 온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겁다.
새벽4시부터 일어나 음식들을 싸들고 혼자 정선으로 떠났다.

양평을 벗어나 횡성 가까이 쯤에서 운해에 휩싸였던 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조개구름을 비집고 햇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태풍 대신 폭염을 예고하고 있었으나, 푸드덕 나는 새가 길조이길 바랬다.

열흘 만에 찾은 집은 잡초도 무성하지만, 텃밭의 채소도 몰라보게 컸다.
만지산 산소에 가족들이 온다는 연락에 혼자 바쁜 걸음 쳤다.
청소하고 밥 짓고 밤 깎는 등, 두 시간이 금새 지나버렸다.

이번 기일엔 모두들 살기 바쁜지 많은 가족들이 빠졌다.
누님(조영희)과 동생(조창호), 형수(김순남)와 조카(조영란)만 왔는데,
조카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할머니 좋아하는 꽃바구니를 사들고 온다.
생전에 조카를 끔찍이 좋아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요즘 애들 같지 않다.

제삿날마다 비 아니면 폭염이 쏟아져 각오는 했지만, 땀이 팥죽처럼 흘렀다.
아무리 산중이라지만 찬바람 나는 에어컨이 그리웠다.
산소에 차린 음식마저 마다하고 모두들 읍내로 외식하러 나갔다.

시설 좋은 집 찾느라 ‘국향’까지 갔는데, 왠지 바가지 쓴 기분이다.
곤드레 정식 일인분에 17,000원이라니...
식당 안내 잘 못한 죄로 병방치 스카이워크까지 갔으나, 그 또한 쓸데없는 짓이였다.

모두들 떠나가고 혼자 쓸쓸히 제사상을 차려야 했다.

 

 

 

 

 

 

 

 

 



요즘 자동차 없는 덕분에 산책시간이 좀 많아졌다.

산골짜기서 차 없이 산다는 게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앞만 보고 달리던 일상에서 다시 한 번 뒤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빨리 빨리 보다 천천히 살자는 말은 자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구나 현장을 쫓아다니는 다큐멘터리사진가에게는 그럴 여유도 없지만, 금세 잊어버린다.

십년 넘게 전국의 장터와 인사동을 기록하러 다니다보니 대인관계는 물론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다. 이젠 신용카드 없는 신용불량자에서 자동차마저 멈춰 섰으니, 완전 무장해제 된 기분이다.

요즘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에서 버스 정류소까지 2킬로 남짓한 산길을 자주 걷는다. 일하는 시간이 좀 줄긴 하지만, 대신 걷거나 버스 기다리는 동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십오 년 넘게  만지산을 오갔으나 이렇게 꼼꼼하게 자연환경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과히 생활의 재발견이라 할 만큼 모든 게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먼 산도 자세히 보니 미세한 숲의 일렁임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고, 뼝대의 속살이나 형상들은 어느 조각가도 흉내 못 낼 걸작들이었다. 길섶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의 속삭임과 흐르는 강물소리의 절절함에 이르기 까지 자연환경과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전국 장터도 대부분 찍었고, 인사동도 대충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사진원고를 정리해 출판사에 넘기는 일만 남았으니, 진짜 천천히 살아 볼 작정이다.

장모님 생신날에는 기차타고 갈 작정인데, 텃밭에서 뽑은 채소와 카메라, 옷 보따리 등 짐이 많아 걱정이다. 장에 나오는 노인들처럼 봇짐, 등짐 짊어지고 가야할 처지지만, 벌써부터 그 날의 기차여행이 기다려진다.

아래 사진들은 지난 15일 오전9시 무렵의 윗 만지산길이다. 집에서 귤암리 버스정류소로 가며 만난 풍경들이다.

 

 

 

 

 

 

 

 

 

 

 

 

 

 

 

 

 

 

 

 

 

 

 

 

 

 

 

 

 

 

 

 

 

 

 

 

 

 

강원도 태백에 정영신씨만 나타나면 어김없이 폭설이 쏟아 졌다.

지난 5일, 태백 통리장을 촬영하려는 삼척MBC 황지웅PD와의 약속으로 정선에 갔으나,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일정이 눈 때문에 무려 세 차례나 헛걸음을 해 이번에 못 찍으면 그만 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걱정도 팔자'였다.
못 찍는 것은 나중 문제고, 일단은 백설이 휘날리는 만지산 설경에 푹 빠질 수 있어 좋았다.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지, 눈송이에 가려 카메라 화인더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무렵 황PD가 도착해 “작가님은 눈을 몰고 다닙니까?”라고 물었다.

 

예정된 통리장은 다른 장터와 달리 10일만에 서는 장이라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통리장에 할머니들은 나오지도 않았고,

장돌뱅이 몇 사람 나와 눈보라 휘날리는 난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것 저 것 사진도 찍고 인터뷰는 했으나 아무래도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았다. 

 

아침 겸 점심 먹으러 간 장터국밥집에서 황PD가 말을 꺼냈다.
“작가님 강원도에 찍지 않은 장터는 없습니까?”
“태백 철암장, 딱 한 곳 남았다”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출연료를 2회분으로 주겠다며

오는 10일, 한 번만 걸음을 더해 달라는 것이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한국의 장터'

책 소개나 제대로 해달라며 다시 일정을 짜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왜 일이 자꾸 꼬이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돌아오는 길은 언제 눈이 왔느냐는 듯 따스한 햇살이 내려 비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차에서 내려 눈 내린 산세를 감상하는 것으로 위안해야만 했다.

 

 

 

 

 

 

 

 



 

 

 

 

                                               이 사진들은 두번째 벌목날, 동행한 아내(정영신)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작업에 드디어 제동이 걸렸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실에 갇힌 지금에서야 모든 상황을 되 돌아보게 되었고, 이번 사고의 원인과 입원하기까지의 과오를 뉘우치며 반성문을 쓰게 된 것이다. 자연을 해쳤고, 비록 자신의 몸이지만 인간의 신체를 학대한 것에 대하여...

지난 달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의 벌목 작업을 시작했다.
만지산에 들어 온지 15년이 넘었지만, 자연스러운 환경을 좋아하는 탓에 가능하면 주변의 자연환경에 손대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생각은 달랐다. 나무를 잘라 집 주위를 트이게 하라는데, 어느 날 최종대씨가 찾아와 말했다.
“작가님! 저 상수리나무 베어야 합니다. 강풍에 넘어지면 큰 일 납니다.”
사실 나도 그 상수리나무가 눈에 걸렸다. 예전에는 그림 같이 잘 생긴 소나무 사이로 떠 오르는 일출을 방안에서도 내다볼 수 있었는데, 20m 높이로 자란 상수리나무가 그 기막힌 풍경을 막아버렸다. 이젠 주변 잡목들까지 더해 입구를 음습하게 만든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수리나무부터 잘랐다. 워낙 덩치가 커 나무에 톱날이 끼이기도 했고, 톱날이 망가져 정선 읍내를 오가느라 나무 한 그루 베는데 온 종일 걸려야했다. 그리고 경사진 위치의 불편한 자세에서 기계톱을 들고 뒤로 넘어지는 실수도 했다. 머리 위를 스친 톱날이 모자를 갈기갈기 찢었는데, 정말 식은땀 흐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후 11월 2일, 정선아리랑시장 촬영으로 아내와 동행하여 나머지 잡목들을 잘랐다. 아내가 도와주려 나섰으나 사양했다. 나는 남들이 도와주는 것을 싫어한다. 도움에 따른 심적 부담도 따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마무리를 감안할 때, 좀 늦어도 혼자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을 아는 아내인지라 잘라놓은 나무들만 낑낑대며 마당으로 옮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 몸살을 앓아 하루 종일 일손을 놓아야 했다.

지난 11월 14일 다시 정선을 찾았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관광객들이 줄어드는 비수기를 맞아, 향토음식 뷔페시범운영을 마무리하며 시장을 위해 고생한 분들에게 식사 접대하는 자리를 만든다기에 찾아 간 것이다.

전날 아침 일찍 귤암리에 도착해 남은 나무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밭에서 콩대를 실어 옮기던 최종대씨가 다가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하란다. 담배를 부쳐 물며 "주변에 상수리나무는 많은데, 왜 도토리가 하나도 없냐?"고 물었더니 올 해는 농작물이 풍년이라 도토리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토리는 흉년에만 열려 농민들의 보릿고개를 메워준다는 말인데, 아마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없는 악천후를 도토리가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최씨는 “혼자 벌목하다 나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던지고는 다시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그 말을 남기고 출발한 지 얼마지 않아 갑자기 비슷한 사고가 일어 난 것이다.

 

기계톱으로 큰 잡목의 밑 둥지를 잘랐는데, 앞쪽으로 넘어져야 할 나무가 칡넝쿨에 걸려  왼쪽 발등에 떨어진 것이다. 발이 어스러지는 통증에 비명이 튀어나왔으나, 더 난감한 것은 나무둥지에 눌린 발목이 빠져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발을 빼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만 더 커져갔다.
“창수 아버지~”라며 목이 터져라 불렀으나 “탱~탱~탱~탱~“하는 경운기 소리만 멀어져 갔다.

꼼짝 못한 채 나무에 붙들려 있어야 했는데, 그 충격적인 고통도 시간이 갈수록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이런 저런 걱정을 하다 ”그래 발가락 쯤 없어도 사진 찍는 데야 지장 없겠지, 차라리 장애자등급이나 받아 자동차 운행에나 덕 좀 봤으면...“하는 방정을 떨기도 했다. 힘이 빠져 땅바닥에 퍼져 앉아 나무둥지에 끼인 발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꼬챙이로 신발 밑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에 약간의 틈이 생겨 신발과 양말을 둔 채, 발목만 간신히 뽑아 낼 수 있었다. 마치 피지처럼 납작해 진 발가락과 시퍼렇게 변한 발등에 놀라 병원을 가려 했으나 잡목들이 길을 막아 차를 빼 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나무를 다 치우고 나니 서서히 어둠이 밀려왔다.

정선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엄지발가락의 뼈는 완전히 어스러졌고, 주변 인대 손상도 많았단다. 젊은 의사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엄지발가락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 받아야 한다며 소란 떨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일 정오에 시장에서 한 시간 쯤 일 하고 가야하니 응급조치와 깁스만 해 달랬으나 "무슨 일이 자기 몸보다 더 중요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틀 날 정선아리랑시장으로 촬영하러 나갔다. 정선시장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앞서 시장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격려하며 정을 나누는 모습들을 기록하려는 사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사장의 상황은 예상을 빗나갔다. 사람들이 몰리는 장날을 피한 탓인지 노점상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았고, 관광객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지나친 집착과 고집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목발에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촬영은 했으나 내가 찾는 정경은 만날 수 없었다. 갑자기 목표에 대한 긴장감이 풀려 허탈해지니 발등은 더 아파왔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정신없이 차를 몰아 왔는데, 내부순환도로에 접어들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변속하느라 다친 발로 크라치를 반복해서 밟았더니 진통이 몰려와 입술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즉시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이틀 날 뼈를 고정시키는 핀 두 개를 박았다. 하반신 마취가 덜 풀려 좀 몽롱한 상태였지만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고에 대한 미안함보다 병원비 청구서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실 침대에 노트북을 올려 아내에게 올리는 반성문을 쓰게된 것이다.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이 늙은 중생을 굽어 살펴 달라”고...

 


 

[이 로고는 창원의 그라픽 디자이너 김의권씨가 제작하였습니다]

 

“사진굿당이 무당들 굿하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굿이란 신명나는 구경거리를 의미합니다, 영문으로 Good이란 뜻도 되지요.” 가끔 듣는 질문으로 그냥 '사진과 함께 신명난 굿판 벌이는 집' 쯤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개인 작업실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4년, 정선읍 귤암리 윗만지산 자락에 ‘한국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주 환경 친화적인 사진굿판을 벌여 보자며...

 

 

내가 이곳에 들어 온 지는 이름조차 낯설던 동강이 댐 문제로 시끌벅적, 세간의 관심을 끌던 1997년도였습니다. 내가 팀장으로 있던 ‘한국환경사진가회’ 회원들의 생태환경기록 캠프로 자리 잡았으나, 그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발목 잡힌 게지요.

 

1999년 12월 “아우라지 물길 따라 200리, 동강”이란 사진집 출판을 끝으로 팀은 철수했으나 동강 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해 혼자 눌러 앉은 것입니다. 2000년 9월 23일 옛 귤암분교에서 “동강변 주민을 위한 굿마당‘을 개최하며 ‘동강 백성들’ 포토에세이집도 함께 출판했습니다. 인사동 예술인 100여명이 버스 3대로 나누어 행사장에 오셨는데, 동강 각 마을의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귤암리 도로가 막히는 일대 소동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행위예술가 무세중선생 일행의 ”동강 넋 건지기“퍼포먼스와 민영선생을 비롯한 시인들의 시 낭송회, 이원창 당시 군수의 격려사, 주민들의 노래자랑 등 밤늦도록 신명난 굿판을 벌였습니다. 숙소가 모자라 폐교 교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지만 별탈없이 행사를 잘 치룰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동강주민들과 인사동 사람들의 도움에 의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아라아트‘ 김명성씨의 후원에 대한 고마움은 아직 잊지 못합니다.

 

동강변 주민들을 위로하는 축제도 좋지만, 분쟁에 휩싸여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동강수몰지역대책위원장이었던 이영석씨의 아내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고, 수동마을의 김진수씨도 빚 때문에 강물에 투신했습니다. 노한 주민들이 무작정 상경하여 추운 겨울 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연로한 노인들이라 걱정스러웠습니다. 밤늦게는 저희가 사용했던 충무로의 사진강의실에 어르신들을 모셔 추위를 피하게 하고, 죽어가는 주민들을 담은 전단을 인쇄해 명동에서 뿌리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각 언론사에는 보도자료를, 김대중대통령에게는 탄원서를 발송했습니다. 이튿날 문화일보 사회면 전면에 실상이 보도 되었고, 오후 늦게 청와대에서 대책위원장을 호출하는 연락이 닿으므로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사진굿당’이란 현판을 내걸고 부터는 두메산골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보상금에 의해 급변하는 농촌 환경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진으로 강원도의 강원다큐멘터리 지원금을 받았고, “두메산골 사람들”사진집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는 구름 속에 가려지는 산 풍경(산을 지우다)도 찍었습니다. 인본주의를 사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왔으나 "팔리지 않는 사람 사진만 찍지 말고, 팔릴 수 있는 풍경사진으로 전시 한 번 하자"는 ‘통인옥션’ 김완규씨 제안에 따른 것인데,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몇 점은 팔았습니다.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사동과 귤암리를 한 달에 몇 번씩 들락거리면서 “사진굿당”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했습니다.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두 차례 가졌고, 산에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팀을 초청하여 만지산에 산삼을 심기도 했지요, 그리고 재미있게 놀 줄 모르는 현대인들을 위한 ‘놀자 학교’를 만들어 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젊은 주민들의 비협조적인 처세에 의욕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이후 아내의 ‘장터’프로젝터에 합류함에 따라 ‘사진굿당’ 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사진굿당'에 들리지만 관리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전국장터 촬영이 마무리되는 내년 쯤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병방산에서 내려다보는 열두절여울의 풍경으로, 뽀죡한 만지산 수리봉 자락에 '사진굿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강길 따라 '사진굿당'으로 가다보면 수리봉이 물에 반영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귤암리 다리 위에서 본 '사진굿당'으로 가는  풍경입니다,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윗만지산길이 나옵니다. 

 

윗만지산 중턱에서 본 풍경입니다.

 

힘들면 귤암리를 떠나게 될까봐 어머니를 만지산에 묻었습니다. 가끔 산보가는 곳이기도 하지요.

 

'사진굿당'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구름 속에 수행중인 스님의 이름없는 절집이 있습니다.

 

'사진굿당' 입구에 세워진 현판입니다.

 

새로 변경된 주소입니다. '정선읍 윗만지산길 56-5'

 

쓰러지는 국화를 서로 묶어 두었습니다. 옆에 있는 나무는 관상용 복숭아나무인데, 꽃이 너무 예쁘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마당이지만, 아내가 없어서인지 쓸쓸해 보입니다. 

 

도라지 밭과 '소나무 숲 쉼터'로 오르는 돌계단입니다.

위험해 보이지만 한번도 넘어진 사람이 없답니다. 다들 조심하니까...

 

올 해는 너무 바빠 가마솥에 소머리 한 번 삶아먹지 못했네요.

 

소나무숲 쉼터로 가는 길목의 돌탑인데, 밭에서 나온 돌맹이 들이랍니다. 

 

한 때 최고의 휴식처였던 소나무숲 쉼터에 젖은 낙엽만 쌓여 있습니다.

한 여름철 여기 오르면 등골이 시원해 진답니다.

 

도라지밭 위에 버티고 선 나무가 옻나무 입니다.

옻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칡능쿨이 마치 구렁이같습니다.

 

방에서 보이는 소나무 풍경인데, 한 그루가 잘려 품위를 잃었습니다.

 

4년 전 심은 목련인데, 올 해 처음으로 꽃망울을 터 트렸답니다.

 

텃밭에 힘을 실어 줄 두엄밭입니다.

 

올해도 고추가 신통찮습니다.

 

'사진굿당' 곳곳에는 산초나무가 많습니다. 작년에는 시기를 놓쳤으나, 올해는 '정선아리랑제'

행사 때 다 땄습니다. 산초기름 짤 작정인데,가시나무에 글킨 상처들이 작난 아니네요.

 

산에서 담배 피우면 큰 일 나지만, 나만의 비밀 흡연실입니다.

 

마당으로 내려가는 길 가에 뽕나무가 있습니다.

엄청 달고 많이 열리지만 따는 시기를 번번히 놓친답니다,

 

'큰무당노린재' 가족들이 뽕잎에 붙어 잠들어 있습니다.

 

이 나무가 개복숭아 나무입니다. 두 가랑이를 쩍 벌린 그 자태 자체를 좋아합니다.

열매는 많이 달리지만 벌레 때문에 대부분 떨어지지요. 벌레먹은 개복숭아술은 약이지요.

 

지방으로 돌아다니다 오랫만에 들린 '사진굿당'의 우체통입니다.

 

퇴색한 사진 느낌은 별로지만, 여기 앉아 멍하니 앞 산을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방 안에서 내다 본 바깥풍경입니다. 햇살이 싱그럽네요.

 

방문 위에 걸린 사진은 '인사동, 봄날은 간다'전에 걸렸던 사진이지요.

신경림, 채현국, 무세중, 심우성, 황명걸, 장사익, 김신용, 최백호, 한봉림씨 등 보고싶은 분들이 많군요.

그동안 저승으로 떠난 친구도 둘이나 보입니다. 화가 여 운 과 시인 적음 말입니다. 

 

여기가 식당이며, 작업장이고 침실입니다. 옛날에 고추 말리려고 큰 방을 만든 모양인데,

군불 때는 아궁이도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겨울에는 우풍이 심해 엄청 춥습니다.

 몇 년 전 '생활성서' 수녀님 두 분이 이곳에 취재왔다가, 너무 추워 밤을 꼬박 세운적도 있지요.

 

벽에 걸린 범종 당좌문양 사진은 부적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닙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 중에 제일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사진굿당' 맡은 편 골에 사는 최돈연씨인데, 아직 건강하십니다.

 

인화하던 암실입니다. 요즘은 서울서 디지털로 해결하니 그냥 창고가 되어버렸지요.

 

겨울철에 사용하려고 작은 방을 만들었으나 짐이 많아 여기도 창고가 되었습니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방문하는 분들을 위해 따뜻한 물과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예전에 찍어 둔 사진입니다. 

 

'신명' 설치사진전입니다.  햇볕에 노출되어 일년 정도 지나면 퇴색합니다. 

 

 

2008년 '만지산 서낭당축제'에서 무세중선생과 무나미선생께서 굿판을 벌입니다.

 

 

'두메산골 사람들' 설치 사진전입니다.

 

 

정영신의 '장터' 설치사진전입니다.

 

 

 

소나무숲 쉼터에 전기를 당겨 여름철엔 여기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설치미술가 김언경씨의 작품 '바람꽃 나무"입니다.

 

'놀자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각지에서 놀이꾼들이 모였습니다.

선생들은 많은데, 학생들이 없네요.

 

'농심마니'(대표:박인식) 회원 30여명이 만지산에 모여 산삼을 심기 전에 서낭당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뮤아트'김상현씨가 방문하여 절창을 하고 있습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만지산의 달밤  / 2012.5.13

 

농심마니의 2009년 가을 산행이 지난 31일부터 11월1일 까지 정선, 만지산에서 실시되었다.
이날 산행에는 본 회의 김명성, 박인식, 조문호, 이 성, 전인경, 김정남, 강기숙씨를 비롯한 농심마니 회원 30여명이 참여하였다
정선읍 귤암리에 여장을 풀고 전야제를 치룬 농심마니 회원들은 모두들 굳은 날씨를 걱정하였으나
다행이 이튿날에는 비가 먿고 날씨가 풀려, 모두들 낙엽에 싼 산삼을 들고 산속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강원지회 "한국사진굿당"이 소재한 만지산의 당집 앞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4년생 산삼 200그루와 씨앗들을 심었다.

산삼을 심고난 뒤에는, 구름이 연기처럼 만지산을 휘감는 장면이 연출되어 산의 정기를 눈으로 보는듯 신비로웠다.
그 이튿 날에는 첫눈까지 내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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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최종대씨 모친 장례식에서..|

 

지난 9월26일 최종대씨 모친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습니다.
서둘러 서울을 떠났으나 이미 장례행열은 끝나고 봉분을 다지는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선소리꾼의 매김소리에 상두꾼들의 '어 허 달구나'라는 뒷소리와 그들의 발질만 분주했습니다.

최종대씨 모친은 만지산에서 태어나 만지산에 뭍힌, 한 평생을 흙과 함께 살다 가신 분입니다.
오랫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셨기에 대개들 호상이라고 하나 이 또한 모순입니다.
강원도 산골의 밭들은 비탈져 대개 남정네보다  여인네들이 농사의 주체가 됩니다.
평생을 비탈진 밭에서 일하며 팔 남매를 낳아 키웠으나 부양의 부담 때문에 모두들 힘들었나봅니다. 
요즈음은 집안의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급속히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을 뵙기위해 가족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기일에나 겨우 만나는 실정입니다.
그것도 기독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으면 더욱 어렵지요.

장례가 끝난 후, 고생한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아 저녀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었는데,
'사진굿당'에서는 백설기 떡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맏 상주인 최종대씨는 장례식에서 손님치느라 고생한 부인 이선녀씨에게 하루동안 금주령을 해제해 주었습니다.
신바람난 이선녀씨의 노래소리가 오랫만에 만지산을 떠들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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