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들은 두번째 벌목날, 동행한 아내(정영신)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작업에 드디어 제동이 걸렸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실에 갇힌 지금에서야 모든 상황을 되 돌아보게 되었고, 이번 사고의 원인과 입원하기까지의 과오를 뉘우치며 반성문을 쓰게 된 것이다. 자연을 해쳤고, 비록 자신의 몸이지만 인간의 신체를 학대한 것에 대하여...

지난 달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의 벌목 작업을 시작했다.
만지산에 들어 온지 15년이 넘었지만, 자연스러운 환경을 좋아하는 탓에 가능하면 주변의 자연환경에 손대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생각은 달랐다. 나무를 잘라 집 주위를 트이게 하라는데, 어느 날 최종대씨가 찾아와 말했다.
“작가님! 저 상수리나무 베어야 합니다. 강풍에 넘어지면 큰 일 납니다.”
사실 나도 그 상수리나무가 눈에 걸렸다. 예전에는 그림 같이 잘 생긴 소나무 사이로 떠 오르는 일출을 방안에서도 내다볼 수 있었는데, 20m 높이로 자란 상수리나무가 그 기막힌 풍경을 막아버렸다. 이젠 주변 잡목들까지 더해 입구를 음습하게 만든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수리나무부터 잘랐다. 워낙 덩치가 커 나무에 톱날이 끼이기도 했고, 톱날이 망가져 정선 읍내를 오가느라 나무 한 그루 베는데 온 종일 걸려야했다. 그리고 경사진 위치의 불편한 자세에서 기계톱을 들고 뒤로 넘어지는 실수도 했다. 머리 위를 스친 톱날이 모자를 갈기갈기 찢었는데, 정말 식은땀 흐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후 11월 2일, 정선아리랑시장 촬영으로 아내와 동행하여 나머지 잡목들을 잘랐다. 아내가 도와주려 나섰으나 사양했다. 나는 남들이 도와주는 것을 싫어한다. 도움에 따른 심적 부담도 따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마무리를 감안할 때, 좀 늦어도 혼자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을 아는 아내인지라 잘라놓은 나무들만 낑낑대며 마당으로 옮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 몸살을 앓아 하루 종일 일손을 놓아야 했다.

지난 11월 14일 다시 정선을 찾았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관광객들이 줄어드는 비수기를 맞아, 향토음식 뷔페시범운영을 마무리하며 시장을 위해 고생한 분들에게 식사 접대하는 자리를 만든다기에 찾아 간 것이다.

전날 아침 일찍 귤암리에 도착해 남은 나무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밭에서 콩대를 실어 옮기던 최종대씨가 다가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하란다. 담배를 부쳐 물며 "주변에 상수리나무는 많은데, 왜 도토리가 하나도 없냐?"고 물었더니 올 해는 농작물이 풍년이라 도토리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토리는 흉년에만 열려 농민들의 보릿고개를 메워준다는 말인데, 아마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없는 악천후를 도토리가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최씨는 “혼자 벌목하다 나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던지고는 다시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그 말을 남기고 출발한 지 얼마지 않아 갑자기 비슷한 사고가 일어 난 것이다.

 

기계톱으로 큰 잡목의 밑 둥지를 잘랐는데, 앞쪽으로 넘어져야 할 나무가 칡넝쿨에 걸려  왼쪽 발등에 떨어진 것이다. 발이 어스러지는 통증에 비명이 튀어나왔으나, 더 난감한 것은 나무둥지에 눌린 발목이 빠져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발을 빼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만 더 커져갔다.
“창수 아버지~”라며 목이 터져라 불렀으나 “탱~탱~탱~탱~“하는 경운기 소리만 멀어져 갔다.

꼼짝 못한 채 나무에 붙들려 있어야 했는데, 그 충격적인 고통도 시간이 갈수록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이런 저런 걱정을 하다 ”그래 발가락 쯤 없어도 사진 찍는 데야 지장 없겠지, 차라리 장애자등급이나 받아 자동차 운행에나 덕 좀 봤으면...“하는 방정을 떨기도 했다. 힘이 빠져 땅바닥에 퍼져 앉아 나무둥지에 끼인 발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꼬챙이로 신발 밑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에 약간의 틈이 생겨 신발과 양말을 둔 채, 발목만 간신히 뽑아 낼 수 있었다. 마치 피지처럼 납작해 진 발가락과 시퍼렇게 변한 발등에 놀라 병원을 가려 했으나 잡목들이 길을 막아 차를 빼 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나무를 다 치우고 나니 서서히 어둠이 밀려왔다.

정선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엄지발가락의 뼈는 완전히 어스러졌고, 주변 인대 손상도 많았단다. 젊은 의사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엄지발가락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 받아야 한다며 소란 떨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일 정오에 시장에서 한 시간 쯤 일 하고 가야하니 응급조치와 깁스만 해 달랬으나 "무슨 일이 자기 몸보다 더 중요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틀 날 정선아리랑시장으로 촬영하러 나갔다. 정선시장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앞서 시장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격려하며 정을 나누는 모습들을 기록하려는 사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사장의 상황은 예상을 빗나갔다. 사람들이 몰리는 장날을 피한 탓인지 노점상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았고, 관광객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지나친 집착과 고집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목발에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촬영은 했으나 내가 찾는 정경은 만날 수 없었다. 갑자기 목표에 대한 긴장감이 풀려 허탈해지니 발등은 더 아파왔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정신없이 차를 몰아 왔는데, 내부순환도로에 접어들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변속하느라 다친 발로 크라치를 반복해서 밟았더니 진통이 몰려와 입술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즉시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이틀 날 뼈를 고정시키는 핀 두 개를 박았다. 하반신 마취가 덜 풀려 좀 몽롱한 상태였지만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고에 대한 미안함보다 병원비 청구서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실 침대에 노트북을 올려 아내에게 올리는 반성문을 쓰게된 것이다.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이 늙은 중생을 굽어 살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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