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전 아내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가 찍혔다.
작업실에 한 번 놀러오라는 화가 정복수씨의 문자였다.
벼루고 벼루다 지난 7일, 작업실 있는 안성으로 찾아 갔다.
양지IC에서 시골길로 한참 들어갔으나, 길을 못 찾아 헤맸다.
정화백이 찾아 나서야 할 만큼 깊은 곳이었다.

산 아래 외 딴 곳에 자리 잡은 정복수씨 작업실은 마치 정신 병동 같아 보였다.
40여 년 전 대마초 피우다 끌려간 부산 대연동의 ‘마약중독자 진료소’처럼 음습했다.
현관으로 들어가니 정신병원이 아니라 종합병원이었다.
사방에 가죽이 벗기고 사지가 잘린 육신들이 너덜거렸고,
각종 공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짐작은 했으나, 그의 작업을 보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연상했다.
작품들은 폭력과 야만을 가린 인간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평생 화두였다.

그는 경남 의령의 대갓집 자손으로 태어나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 그렸던 스케치북에도 사람의 형상들이 그려졌는데, 일찍부터 인간에 집착 했다.
그 이후 홍익대에 진학하면서 잠재적 문제의식이 고개를 들고 일어 난 것 같았다.
70년대 후반에는 충격적인 그로테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40년 동안 줄기차게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했기에,
오늘 날 한국현대형상회화에 중요한 획을 긋게 된 것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는 미쳐야 한다지만, 정복수씨는 미쳐도 제대로 미친 사람이다.
정말 미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그 외딴 곳에서 온 종일 인간 육신과
씨름 한다는 게 말처럼 쉽겠는가? 그의 말처럼 그는 그림으로 통곡하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많아야 한다. 너무 사이비들이 판친다.

그는 인간의 골수로 그림을 그린다지만, 그 날 우리는 인간의 피로 술을 마셨다.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니, 사는 게 걱정되었다. ‘그림은 좀 팔리는 기요?’라고 물었더니.
파는데 신경 쓰면, 마음대로 그릴 수 가 없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작가가 그걸 모를까마는 어려운 문제다. 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 그놈의 돈이 도대체 뭔지? 돌아오는 내내 돈타령을 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정화백이 태어나기 전인 80년전, 조부의 회갑잔치다. 의령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의 작업 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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