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수요일은 인사동 사람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전시도 보고,
반가운 분들과 술 한 잔 하는 날로 정한지가 오래되었지만,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오래 된 인사동 사람은 너무 잘 알아 지겹기도 하겠지만, 인사동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관심 갖는 인사도 더러 있어, 나가지 않을 수도 없다.






지난 17일은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김진열씨의 목판화전으로, 그런대로 많은 분을 만났다.
전시장에서 김진열씨를 비롯하여 김진하, 이태호, 최석태, 김 구, 손기환, 나종희, 이흥덕,
이인철씨를 만날 수 있었고, 뒤풀이집 ‘자미향’에서는 정복수, 김종업씨도 만났다.
그런데,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한 장경호씨가 나타나 불편한 술자리가 되었다.
더 슬픈 것은 사과는 커녕,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 듣고도, 술이 목구멍에 넘어갈까?





간다는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골목에서 이인섭씨와 노광래씨를 만났다.
다들 술이 고픈지, ‘평화만들기’에 한 잔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유목민’에 잠시 들렸더니, 조해인 시인과 남해의 진공선사와 함께 있었으나,
반가운 설 주 한잔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 페북을 열어보니, 귀가 찬 내용이 올라와 있었다.
몇 일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만났던 박윤호씨가 이상한 표정의 내 사진을 올려놓고,
줄줄이 장난질의 댓글을 올려놓았다.






그는 사진을 찍어도 너무 공격적으로 찍는다.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사진을 고른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명색이 변호사란 최혁배씨가 문호 꼴 보기 싫다는 등 작난 글을 올려 놓았는데,
내가 지 친구거나 후배라도 그 따위 말을 페북에 올릴 수 없다.






그보다, 미운 정이니 어쩌니 댓글 단 박윤호씨의 처사가 더 괘씸했다.
그것도 나에게 링크까지 해둔 걸 보니, 나 보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속이 뒤집어 졌지만, 지랄 떨다 내리겠지 생각하고 양양으로 촬영을 떠났다.
한 밤중에 돌아와 확인하니,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의 처사를 나무라며, 지켜보겠다는 댓글만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자고 일어나 확인하니,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문제의 댓글만 지워버린 것이다.

사진은 그대로 있었지만, 나도 사진 찍어 올리면서 사진 내려달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럴려면 나부터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 놓는 박윤호씨 사진은 모두 내려야 했다.





작심하고 컴퓨터에 눌러 붙어 박윤호씨 이름과 사진을 모두 지우기 시작했다.
몇 년을 인사동에서 만났으니, 그가 찍힌 사진이나 글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때문에 함께 찍힌 다른 분들 사진까지 내려야 할 경우가 많았다,
온 종일 찾아 지웠는데, 내가 뭣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다 지우고 나서, 다시 페북에 들어가 당신의 사진과 글은 모두 삭제했으니, 내 사진을 내려 달라는 글을 올렸다.
한 참 후에야 사진을 내리고는 줄줄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체의 전화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내가 여러 후배들에게 이 따위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단지 죄라면 30여년 인사동을 들락거리며, 웃기려 애썼던 것 뿐이다.
술자리에서 개똥철학이나 풀며 거룩한 표정 지어봤자, 피차 피곤하다.






씨잘 데 없는 소리지만, 술 자리에서 한 번 웃으려고 한 말을 두고,
그 자리에선 좋아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비웃고 욕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흑사리 쭉지로 알고, 몰캉하게 본 것 같다.

이젠 사람 좋다는 옛날의 조문호가 아니다.






씨바! 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막다른 길의 싸움꾼이다.
선배고 후배고 세상에 민폐 끼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도, 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이다.






한 번 지켜보라. 나쁜 놈들을 어떻게 작살내는지...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이 만나는 셋째 수요일은 죽는 날까지 지킬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화가 박흥순씨가 아들 조햇님에게 결혼 선물을 보내왔다.
4년 전에 그린 내 초상화로, 아들 내외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단칸 방의 좁은 공간이라 결혼사진 걸 자리도 빠듯할 텐데,
징글징글한 애비 얼굴을 매일 보는 게 큰 고문이 아니겠는가?
장롱 위에 숨겨두었다 죽어 생각나면 한 번씩 꺼내 보거라.

아무튼, 박흥순씨께 거듭 감사 인사드린다.






인사동 ‘풍류사랑’에 맡겨 둔다기에, 나가는 걸음에 잠시 들렸다.
진즉 정선으로 떠나야 했으나 몸이 편치 않은데다,
모처럼의 ‘인사모’ 모임이 있어 이틀 동안 꼼짝도 않고 드러누워 있었다.


어제는 가봐야 할 사진전만 세 군데나 있었지만, 모두 포기했다.
북촌 ‘서이갤러리’에서는 이완교씨의 전시가 열렸고,
인사동 ‘나우갤러리’에서는 오상조씨의 전시가,
‘토포하우스’에서는 조명환씨의 사진전이 열렸는데, 다 같은 시간에 개막되었다.





이제 전시가 줄줄이 열리는 가을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조용한 시간에 들릴 작정을 하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사진전 개막식에는 반가운 사람들도 많겠으나,
거들먹거리는 보기 싫은 사람이 많아, 가능하면 안 가는 것이 속 편하다.


문제는 반가운 사람 만나면 사진 찍는 습관 때문이다.
보기 싫은 사람은 안 찍으면 되겠지만, 그게 안 된다.
개밥에 도토리 끼이듯이 꼭 끼어든다.





다음 날 ‘인사모’ 모임 가는 길에 초상화를 맡겨 둔 ‘풍류사랑’에 잠시 들렸다.
술집 안을 들여다보니, 술시로는 이른 시간에 장경호씨가 앉아 있었다.
최혁배 변호사를 기다린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최혁배씨와 휠체어를 미는 공윤희씨가 서 있었다.
제일 반가워하는 분은 보영이 엄마였다.
버선발로 뛰어나가 뽀뽀세례를 퍼 붓는데, 혁배씨가 얼떨떨한 모양이다.





난 언제 저런 환대 한번 받아볼까?
생기길 잘 생겼나? 그렇다고 돈이라도 많나?
하는 일이란 게 미운털 박힐 일만 도맡아 하고 다니니,,,ㅉㅉ

사진, 글 / 조문호













“6FIGURATION”전시뒤풀이가 인사동 유목민에서 있었다.

 

김진열, 성병희, 이샛별, 이세현, 장경호, 정복수씨 등 참여 작가를 비롯하여 김진하, 하태웅, 배성일씨가 먼저 자리 잡았다.

뒤늦게 미술 평론하는 유근오씨 등 반가운 분들이 나타났다. 건축가 임태종씨와 공윤희씨, 풍기에서 소설 쓰는 배평모, 구중관씨, 삼천포에서 도자기 굽는 박영현씨, 이회종, 이도흠 교수, 최혁배 변호사, 사진가 정영신씨 등 많은 분들과 여흥을 즐겼다.


그런데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득하게 마실 수가 없더라. 술판은 뭉쳐야 되고, 시끄러워야 술 맛 나는데...

 

사진, / 조문호










































구로구청장 이 성씨와 홍현숙씨의 장남 홍일군의 결혼식이
지난 10월24일 오후6시, 신도림 테크노마트 웨딩시티에서 있었다.


홍일 군은 오래 전에 한 번 보았는데, 너무 어엿하게 자라 있었다..

지금은 '우리은행' 두뇌로서의 역활을 충실히 한다는 소개도 있었다.
긴 주례사가 이어졌으나, 아무 소리 안 해도 잘 살 커플 같아 보였다.

축하객들이 많았으나 인사동사람으로는 최혁배 변호사 내외를 비롯하여 ‘아라아트’ 김명성씨와

공윤희씨, 소설가 박인식씨, 화가 전인경씨, 큐레이트 전인미씨를 만났을 뿐이다.

모두들 ‘아내는 왜 오지 않았냐?’지만, 어찌 심사임당 지폐 한 장 넣고,

두 사람이나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벼룩도 낯짝이 있지...

피로연장은 8층에 있는 뷔페식당이었는데, 여러 곳에서 이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연회장이 얼마나 넓은지, 음식 가지러 갔다가 가방 둔 좌석을 찾지 못해 뷔페식당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

함께 있던 공윤희씨가 가방을 들고 다른 자리로 옮겨 버렸는데, 더 황당한 것은 자리는 찾았지만,

챙긴 음식 놓은 자리를 몰라 다시 찾으러 다닌 것이다. 완전 시골 노인 서울서 헤맨 격이었다.

기둥에 적힌 구역번호만 기억했으면 그런 곤욕은 치루지 않았을 텐데...

좀 있으니 이성씨 내외가 식사하러 왔으나, 이곳은 혼주의 테이블도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낸 우리가 일어나고 두 내외가 앉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축하객에게 인사 드리려,

국수 몇 젓가락만 들고 바삐 일어서야 했다.
오늘 같이 경사스러운 날, 한 끼쯤 굶어도 괜찮겠다마는, 왠지 안 서러워 보였다.

사진,글 / 조문호









 

 

목판화가 정비파선생의 ‘국토’전이 끝나는 지난 20일, ‘아라아트’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작품들에 대한 여운이 남아 철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감회를 맛보기 위해서다.

전시장 한 가운데 놓인 탁자에 앉아 한 시간 넘게 사방에 걸린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국토의 혈맥들을 섬뜩하게 드러낸 작품들은 장엄함에 앞서 슬픈 비애감에 빠져들게 했다.

6미터나 되는 ‘백두대간’ 작품의 주름 잡힌 산 줄기 줄기에서 우리민족의 통한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 쪽 벽면에는 외세나 다름없는 독수리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부리를 들이대고 있었고,

또 한 쪽에는 피 냄새 맡은 까마귀 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바로 우리 국토가 겪은 피의 근대사였다.

그 산골짜기 골골을 칼창으로 파내며 분노했던 작가의 투혼이 느껴졌다.

나는 미술평론가도 아니고, 작가와의 친분도 그리 깊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은 한다.

들은 바로는 정비파선생이 이 작품들을 제작하기 위해 수도승처럼 10년 동안 외부와 연을 끊은 채,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일이 풀리지 않아 목 놓아 운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란다.

도대체 그런 작가가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며 작품보다 그들의 인간성을 더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무리 재주 좋아 유명세를 타는 작가라도 인간성이 돼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선배들 말씀처럼 “작품 이전에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작가들은 참 많다. 그러나 잔머리 쓰는 작가들은 오래지 않아 들통 난다.
온 몸을 바치는 작가들도 많다. 그도 정신적 바탕이 깔리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정비파씨를 처음 만난 것은 올 6월 ‘아라아트’광복70주년 특별전을 기획하며

‘아라아트’ 대표 김명성씨와 ‘제주4,3연구소’ 김상철이사장이 함께 한 자리였다.

오래 전 전시장에서 한 두 차례 지나친 적은 있으나, 같이한 자리는 없었다.

그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주는 작품 이미지들에 일단 놀랐고,

대부분이 가로 6미터나 되는 대작이라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7월15일, 그의 ‘국토’전 개막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지어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대단한 감동이었다.

내가 만약 재벌이라면 그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까지 통째로 사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전시 끝나는 37일 동안 가까이서 멀리서 그를 지켜본 것이다.

시쳇말로 뒷조사를 한 것이다. 그의 인간성에 대해...

정비파선생의 군 복무시절, 공윤희씨가 해당 부대 직속장교로 재직하였기에 그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사람 됨됨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평소 전시기간동안 작가가 얼마만큼 전시장을 지키는지를 보며 그 작업에 쏟아 부은 열정의 부피를 가늠한다.

이 일 저 일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은 한 곳에 쏟아 넣을 열정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도 아니고 경주에 사는 그를 인사동 나올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의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전시 끝나기가 무섭게 짐 싸들고 가기 바쁘지만,

전시가 끝나는 마지막 날, 신세진 분과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뒤풀이를 한 번 더했다.

마지막 날의 뒤풀이도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작품은 물론 크기도 한국판화사의 새로운 기록이었다.

그 날 전시장에서 작가 내외와 함께 공윤희, 이종률, 장경호, 최혁배 변호사를 만났다.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전시장에서 만난 분들을 물론 조해인, 박찬함, 김상현, 조준영, 정영신씨 등

20여명이 모여 성공적인 전시를 축하하며 여흥을 즐겼다.

작가 정비파선생을 알게 된 것은 올해 최고의 인연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때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였던 철학자,

채현국선생의 팔순 잔치가 지난 5월4일 '낭만'에서 열렸다.

 

채현국선생은 작년 초 '한겨레신문'의 인터뷰로 뜬 분이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모든 건 이기면 썪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썪진 않았지. 노인 세대를 절대 봐 주지마라."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썪는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한 것뿐이다.

그건 세상에 나눠야 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와 같이 선생께서 남긴 수많은 어록들은 지금도 인터넷에 회자되어

7만 여명이 페이스북과 트위트로 공유하며 선생의 어록을 인용했다.
그 때문에 전국 곳곳에 강연 다니고, 수많은 사람 만나느라 바쁘시단다.

 

2014년 환경재단의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올 해의 인물'로 뽑혀 유명세를 더해가신다.
아쉬운 건 채현국선생을 인사동에서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존경스러운 오척단구의 거한 채현국선생께서 팔순을 맞아 

모처럼 인사동에 흥겨운 잔치판을 벌였다.

 

정오에는 강 민, 심우성, 이계익, 김승환, 우병철, 서립규, 김자동, 김이준, 이부영씨 등
많은 친구분들이 모여 축하오찬회를 가졌다고 한다.

오후6시경 있었던 만찬모임에는 채현국, 윤병희 내외분을 비롯하여 원로언론인 임재경선생,

국회의원 윤영석, 이인영씨, 연출가 임진택씨, 최혁배 변호사, 이희종, 박현수 교수,

서양화가 박불똥, 장경호씨, 김명성시인, 장순향 민예총부이사장, 전 경기도문화재단

전종덕 사무총장, 영화평론가 정준성씨, 무용평론가 이만주씨, '작은책' 유이분 대표와

안건모 발행인, 조경연, 공윤희, 노광래, 강선화, 이세기, 박혜숙, 박연화, 이요상, 김일호,

김영복씨등 50여명이 자리하여 선생의 생신을 축하했다.

그 날 축하연에서 임진택씨의 소리 한 마당이 잔치 분위기를 잔득 돋구었고,

채선생께서 부른 러시아민요 '볼가강의 뱃노래'가 절정을 이루었다.


사진,글/ 조문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였던 철학자 채현국선생의 팔순잔치가
지난 4일 오후6시경 인사동 '낭만'에서 열렸다.

최혁배, 강선화씨등 50여명이 참석한 축하연에서
평소 선생의 십팔번인 러시아민요 "볼가강의 뱃노래'를
열창해 축하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4월19일은 채현국선생께서 팔순을 맞는 날이었다.  

 

노광래씨로부터 전화는 왔으나 시간과 장소는 좀 있다 연락하겠다는 것이다.
아마 선생님께서 본인 스스로 잔치 상을 차리기도 그렇지만 평소 자신의 일로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후6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기에 선생님께 인사 전화를 드렸더니 빨리 인사동으로 나오라고 재촉하셨다.

부랴부랴 축하선물로 드릴 작품 한 점 프린트해 나갔으나 이미 파장이었다.
그나마 들어가시는 채현국선생 내외분과 구중관씨를 골목 입구에서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안내된 술집에는 신경림선생을 비롯하여 강신옥, 김태서, 최혁배, 장경호, 노광래, 편근희, 남민우씨가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채선생님께서는 팔순을 알리지 않은채, 인사동에서 만난 분들과 점심 때부터 술을 드신 모양이었다.  

 

남의 일에는 팔을 걷어 부치지만 스스로의 일로 내세우지 않는 선생님의 성품을 알면서도,

미리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팔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알게된 공윤희씨도 달려왔으나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모두들 ‘노마드’로 자리를 옮겼지만, 술이 취한 분들과 서로 사이클이 맞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배성일씨와 나재문씨도 만났지만, 그냥 줄행랑쳤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