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이청운화백 문병가자는 연락이 왔다.

병문안 간지가 2년이 넘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때라 걱정되었다.

이미 간다는 약속이 된 터라 내가 안 된다고 우길 일은 아니었다.

 

죽고 사는 것은 운에 맡기고, 죽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에서 따라 나섰다.

약속한 서부경찰서 앞으로 가니, 전활철, 김명성, 조해인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이어 김상현씨가 나타나 다섯 명이 모여 병문안을 한것이다.

 

이화백이 자리에 누운 지가 벌써 6년이 지났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부인 이상랑여사가 반겼는데, 얼마나 고생 했으면 늙어보였다.

밤낮을 지극히 보살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듯, 자리 털고 일어날 때도 되었다.

 

! 그런데 이청운화백을 보니 화색이 좋아졌고, 눈빛에서 재기의 자심감이 보였다.

오래 전 만났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애통한 눈빛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 빨리 일어나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그림에 혼을 불어 넣어라.

 

오래 있을 수 없어 다들 연신내로 자리를 옮겨 술 한 잔 했다.

미리 약속했는지, 선수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었다.

먼저 온 네 사람 외에도 김각환, 최석규, 이상훈, 서길헌, 강찬모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

 

복권 일등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연신내 복권매장에서

김명성씨가 복권10장을 사와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나야 복권 살 돈도 없지만, 어떻게 번호를 맞추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도 한 장 얻었는데, 주머니에서 돌아다니다 결국 확인도 못한 채 버렸다.

평소 요행을 바라지도 않지만,

만약 일억짜리에 당첨되었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물음에 멍해졌다.

돈이 생겼다는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팠다.

 

방향이 같은 조해인씨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코로나는 물러가고, 이청운화백도 일어나라.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예술감독 안애경씨가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핀란드와 서울을 잇는 친환경 예술프로젝트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그녀 가방 속에 있다.






지난 7일 에로 수오미넨 주한 핀란드 대사 만찬 초대로
성북동 대사관로에 있는 대사관저를 찾았다.






안애경씨를 비롯하여 서울시 푸른도시국 최윤종국장, 유영봉과장,
조윤주 문화팀장, 서서울호수공원을 설계한 건축가 최신현, 고은영부부,
도자문화교류센터 서해진대표, 사진가 정영신씨, 김영미, 이상훈씨 등
십 여 명이 초대되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 핀란드 대사 홍보담당관 엔니, 한네도 함께했다.






처음 가본 대사관저는 너무 멋졌다.
정통 북 유럽식 집이나 한국식 느낌이 나는 저택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함과 실용성이 돋보였다.
카펫으로 거실을 구분해 두었는데, 조명들도 인상적이었다.






동자동 쪽방 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영화에서나 본 듯한 호화저택이었다.






관저보다 더 좋았던 것은 이웃집 아저씨 같이
소탈한 에로 수오미넨 핀란드 대사였다.
익살스런 표정의 친근감에 마음이 끌렸다.






이미 천민 생활에 물들어, 맛있는 요리는 뒷전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사람답게 사는 생각뿐이었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사람이 희망이더라.


사진, 글 / 조문호





































































몇 일간의 외유가 끝나면 습관적으로 인사동을 들린다.
늘 그렇고 그런 거리풍경인데다, 약속하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 없으나 나간다.
마치 출근부 도장 찍듯 사진 몇 장 찍고 인사동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군에 입대하는 정영신씨 조카 김희중이 저녁 식사 모임에 갔다.
역촌역 인근에 있는 그 고기 집은 한 사람 당 11,900원을 내면

원하는 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어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 가는 곳이다.
난, 별로지만 따로 놀 수 없었다.






옛날에 비하면 요즘의 군대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엄마 되는 정주영씨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총각 딱지는 떼고 가야하지 않느냐’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데,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동 ‘유목민’으로 나올 수 없냐는 것이다.






술 마실 일도 아니고, 뭔가 의논할게 있다기에 안 나갈 수 없었다.
가능하면 정영신씨와 함께 왔으면 좋겠다는 부탁에 그만 일어나야했다.
인사동을 하루에 두 번 걸음 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목민’에 들렸더니, 김명성, 전활철, 이상훈씨를 비롯하여
요즘 잘 보이지 않았던 화가 전인경씨와 허미자씨도 있었다.
술집 안주를 제쳐두고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있었는데,
무슨 요리인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었다.






김명성씨의 이야기로는 도봉산 입구에 매장을 차리는데,
주말만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냐는 것이다.
이벤트의 성격을 띤 옛날 사진관을 재현하여
등산객들에게 옛날식으로 사진을 찍어 주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한 곳에 메이는 것이 마음이 걸렸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니,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등산객을 대상으로 한 초상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나이에 돈벌이 한다는 자체가 신나는 일이지만,
또 한 가지의 프로젝트에 메일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말에 꼭 가야할 곳들이 생길 일이 난감했다.
그래서 동지 정영신씨를 끌어들여 공동 작업으로 해 볼 생각을 한 것이다.
정영신씨는 학비를 벌어야 하니, 일을 나누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정선에 있는 옛날식 뷰카메라를 가져와 개조하기로 하고 일어났는데,
이상훈씨가 여비하라며 신사임당 두 장을 찔러 주었다.
몸이 피곤하던 차에 택시비까지 주어 편안하게 돌아왔다.





돈은 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원흉이라 욕하지만, 사람을 편하게는 하였다.
그러니 돈의 중독성에 빠져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일까지 종종 생기지 않는가?
과연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지난 27일 김명성씨로부터 수상 축하주를 사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허구한 날 마시는 술이지만, 또 다른 술 마실 핑계 하나 만든 것 같았다.
마침 통의동 ‘인디 프레스’에서 열리는 양승우씨의 사진전에 들려서 가기로 했다.





이 날 따라 빌린 카메라의 전지가 소모되어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다.
다른 사진은 차지하고라도 전시리뷰에 사용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하는 수 없어 카메라를 가진 이상엽씨에게 한 장 부탁했는데,
아직까지 감감소식이다. 개막식을 하는데, 빨리 오라는 독촉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에 만난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 김정대관장,
이 전시를 기획한 황정수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으나, 살그머니 빠져 나와야 했다.





인사동 ‘유목민’에는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도예가 김상기씨와 김각환씨가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전주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벌인 포말 퍼포먼스 이후 처음 만났으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 때의 긴박한 상황으로 돌아갔다.

길길이 날 뛰던 김명성씨를 제압한 사람이 김각환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 사고를 친 이상훈씨가 한봉림씨께 죄송하다는 전화조차 없었던데 분개하고 있는데,

슬며시 이상훈씨가 나타났다.






양순하게 생긴 그의 모습에서, 악마 같았던 그 날의 모습이 오브랩되었다.
술이 원수인지 모르지만, 어떻게 그 지경을 만들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망쳐 나와 여지 것 전화 못했던 것도 너무 엄청난 일을 저질러 두려워서 못했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사과하며 찾아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다며, 그 날의 악몽을 되새겼다.






재미있게 놀 때, 전활철씨가 부른 ‘청춘’이란 노래도 한 몫 했을 것이다.
80년도 후반기 민주화 열망에 학교마다 전쟁터가 되었던 때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포커판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시다 모처럼 결정적인 패를 잡았는데,
느닷없는 포말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학생시절 직격탄을 맞은 최류탄으로 착각되어, 적개감에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아무턴 ‘미지랄’이란 전무후무한 역작을 탄생시켰으니, 언젠가 서명하러 가야 한다며 한 바탕 웃고 넘겼다.

뒤늦게 정영철씨와 정영신씨가 나타났다.
카메라가 없어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터라 죽은 사람 살아온 듯 반가웠다.
카메라를 건네받아 사정없이 갈겼더니 속이 좀 후련했다.
군인이 무기가 없으면 맥 못 추듯, 찍사가 카메라 없으면 찍사도 아니다.
찍고 나면 그 사진 정리하느라 낑낑대지만, 이게 업인데 어쩌랴!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위안잔치인 ‘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 한마당’이 지난 8일 오후1시부터 4시까지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열렸다.

남영동과 ‘남영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서 마련한 이날 축제는 늦가을의 낙엽이 흩날리는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열려 가을 정취가 한층 더 했다.

주민 300여명이 나와 함께 어울린 흥겨운 잔치였다. 




  


맨 먼저 구인선씨를 비롯한 7인조 난타그룹의 춤추는 난타가 공원을 들썩이며 축제의 포문을 열었다.

사회자 이상훈씨의 내빈소개로 단상에 오른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위로하며,

도덕과 예의가 땅에 떨어진 오늘의 현실을 걱정했다.

 



  


행사장에는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만이 아니라 남영동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다.

이 날은 신명나는 공연만이 아니라 다양한 봉사도 이어졌다.

‘용산보건소’에서는 어르신들의 혈압, 당뇨체크 및 건강 상담을 하며 응급체험관을 운영했고,

‘쎄아떼미용전문학원’ 봉사단들은 주민들의 머리손질하기 바빴다.

 




한쪽에선 스리랑카 음식 체험도 하고, ‘남영동새마을부녀회’에서는 우동과 녹두전의 음식 나눔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는 인형, 매듭, 향초, 차 등 공예품을 내놓았고,

‘소망을 찾는 교회’는 한지공예품과 무공해농작물을 판매하는 등 프리마켓을 열어 온 공원이 시끌벅적했다. 



  



무대에서는 은지노래와 백댄서 춤이 어우러지는 색스폰 연주로 어르신들을 흥겹게 만들었고,

김기환씨는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트럼펫으로 구성지게 불어 쓸쓸한 가을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최현선씨를 비롯한 4인조의 오카리나연주에 이어 가수 한경아, 김영남, 김시연씨가 나와

다들 좋아하는 트로트 곡으로 분위기를 잔뜩 띄웠는데,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인기곡이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포크가수 주석렬씨의 정겨운 노래에 이어 마지막으로 등장한 노숙인밴드 ‘민들레’는 최헌의 ‘오동잎’을 연주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 날 주민들에게 신바람을 일으켜 어께를 들썩이게 한 것은 단연 음악이지만,

한데 어우러지며 즐겁게 한 것은 가위바위보 등 다양한 게임을 벌여 주민들을 무대로 끌어들인 레크레이션이었다.

많은 경품을 준비한 효과도 있었지만, ‘신바람 나는 복지 공동체 만들기 사업’이라는 취지와 같이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정 나누고 협동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정해진 공연 중간 중간에 주민들의 장기자랑을 넣어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무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잘 모르는 가수들의 틀에 박힌 노래를 들으며 구경하는데만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

다소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친근한 주민들의 노래와 장기자랑도 함께 어우러진다면 금상첨화겠다.



  



모처럼 ‘서울역쪽방상담소’와 ‘동자동사랑방’ 등 민관이 협력하여 만든 멋진 동네잔치였다.

쪽방에 갇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겠는가?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는 동네 분들의 모습에서 진득한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봄 가을, 일 년에 두 차례씩 전국 오지를 찾아다니며 산삼 씨앗과 묘삼(2-3년생 산삼)을

심어 온 ‘농심마니’가 생겨 난지도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창립30주년이 되는 내년의 기념행사 준비를 위한 단합대회가

지난 24일 오후7시부터 이틀간에 걸쳐 장흥 ‘신흥레저타운’에서 열린 것이다.

‘농심마니’는 1986년, 산악인이며 소설가인 박인식씨가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회원은 백명이 넘어나 평소에는 3-40명 정도 모인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분들이 많다.

그동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젠 전국에 산삼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회원들 주머니 털어, 여지 것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산삼을 심어왔건만,

다시 찾아가 확인하거나 캐본 적은 없다.

심은 곳을 알려고도 말하지도 않는 것은, 심고 난 이후부터 오로지 자연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 날의 단합대회는 다른 일과 겹쳐, 두 시간이나 지난 오후9시경에 들렸다.

대회장에는 박인식 대장을 비롯하여 송상욱, 전유성, 김명성, 황예숙, 박세경, 서길헌,

김희갑, 김시인, 이상철, 김종수, 홍명도, 김정남, 송미향, 박용진, 조명환, 이상훈씨 등

20여명의 회원들이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산삼 심기 전의 전야제 같은 신나는 자리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의 기타 반주로 가요 반세기의 총 출동이었다.

‘농심마니’회원들은 삼산 심는 일만 열성인 것이 아니라 노는데도 한가락 한다.

“농심마니 잘 잤느냐 지난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로 시작되는

농심마니 노래는 산삼 심을 때 부르지만,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하나 있다.

그 날 밤엔 박세경씨가 불렀으나,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며 박인식씨 더러 다시 부르게 했다.

욕과 뒤섞여 재미있게 패러디 된 노래인데, 마지막 한 구절만 머리에 떠오른다.

“씹새가 다 파먹고 조껍데기만 남았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4일, 해 바뀌고 처음으로 인사동에 나갔다.





싸늘한 돌덩이 위에 잠든 노숙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화지업사’ 자리엔 또 다른 대형건물이 들어 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거리는, 힘든 사람이나 인사동이 변하는 것엔 관심없는 듯 분주했다.




“인사동사람들”에 들리니, 강 민선생님 혼자 쓸쓸이 계셨다.
선생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든 없던, 인사동에 나와야 마음이 편한 분이다.
양촌리 커피 한 잔에 시름 달래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활철씨가 반갑게 맞았으나, 유작전 개막으로 오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복분자 한 잔 마시고 일어나려 했으나, 주머니가 비어 난감했다.
마침, 안쪽에 김명성씨와 이상훈씨가 술 자리에 있어 떠넘겨 버렸다.




그렇게 새해의 인사동은 쓸쓸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해들어 시작한 '문화알림방' 일거리가 하나 둘 들어오고 있다.
그 일에 신경써느라, 이 이야기도 늦었는데, 이젠 예전처럼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작가를 인터뷰하여 보도자료를 작성 배포하는 일에서부터, 행사장 촬영 등
잡다한 일에 메여, 찍어 놓은 사진들도 정리 못하고 있다. 늙어 철든 건지, 노망든 건지...
하다보면 요령이 붙겠지만, 책임감에 섣불리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탁받은 행사의 성공 여부가 바로 ‘문화알림방’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볼 작정이다.

2016,1,4 /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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