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에서 일하는데, 정영신씨가 차 끌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총알같이 달려갔더니, 민예총사무실에서 인수 인계하던 서인형, 최석태씨도 함께 내려왔다.

일 마무리하며 뒤풀이로 술집을 가는 모양인데, 가다 가다 녹번동까지 갔다.

차 버려두고, 술 한 잔 하자는 배려였는데, 덕분에 양 갈비 집에서 한 잔했다.



    

 

매번 지나치던 집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인데, 정성스레 구워 준 양고기와 중국술 연태주가 찰떡궁합이었다.

과분한 술상에 기분 좋게 취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공모전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기획의 베테랑인 서인형씨와 추진력 있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민예총사진단체 구성을 위해 고민하는

정영신씨가 모인 자리라 대략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진 활동을 해 오는 동안 제일 진절머리를 낸 것이 사진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이란 상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의 공모전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왔.

그 상을 놓고 벌이는 주최 측이나 심사위원들이 벌이는 구역질나는 형태를 생각하니,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취기도 올랐지만, 사라지는 게 덕일 듯싶어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하니, 공모전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과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신인 등용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의 경험담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무렵인 70년대에도 사진공모전이 대세였다.

주로 '사협'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인데,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점수를 축척해야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 한 장으로 작가의 능력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협회에 가입해야 작가로 인정받는 줄 알았으니, 공모전에 매달린 것이다.

공모전이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에는 해악이 될 뿐이다.

연출이던 조작이던 튀는 이미지만 만들어 내면 백발백중이다.



국전에서 분리되어 개최된 첫 '한사전(1981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씨의 '환회'


 

그 땐 전국 지부에서 공모전이 있었으니, 점수 채우기는 쉬웠다.

그러나, 준회원은 최초 입선에서 2년이 경과되어야 했고, 정회원은 4년이 경과되어야 가능했다.

세월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입회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공모전이란 것이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상 따먹는 재미인 셈인데, 자신의 작업은 뒷전이고, 심사위원들 비위 맞추는 사진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 심각한 폐해를 깨달은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던 중 81년도 무렵,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제2회 '한사전'(1983년) 대상 수상작인 고) 양은환씨의 '나들이'

몽타쥬에 의해 만든 작품으로 연출냄새가 나는데다 화면 배분도 엉성하다.


 

신문에 동아미술제공모 수상작이 게재되었는데, 대상에 차용부씨의 기지촌의 이후가 발표되어 있었다.

이 또한 공모전이긴 하지만, 방법이 달랐다.

일단 새로운 형상성이란 기치를 내걸었고, 이년 전에 공모할 주제를 미리 공고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구미를 당기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연작사진으로 출품하는데다

85년도 공모작의 주제가 직업인으로 발표되어 있었다.

당시는 사창가인 전농동 작업을 준비하며 주위를 맴돌아 다닐 때인데, 그 작업에 추진력이 붙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아 다섯 장의 사진으로 조를 맞춘 홍등가라는 사진을 출품했는데,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으로 뽑힌 것이다.



1985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작인 조문호의 '홍등가'와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김희룡씨의 '풍어제'



빈 집에 소 들어온다는 속담처럼, 상금에다 작품 매입대금까지 들어왔으니 횡재한 것이다.

청량리 588에 입주할 돈이 생겼으니, 도랑치고 게 잡은 셈이었다.

상금이란 바로 이처럼 사진가의 작업경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동아미술제'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에 의해 취지가 흔들맇 수밖에 없으니,

세월 따라 변질되다 결국 없어지고 말더라.



제9회 한사전(1990년) 대상 수상작인 최주억씨의 '북소리'

 


그 뒤 이름도 거룩한 한국사진작가협회에 편집장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호구지책으로 똥 판에 들어갔지만, 이 기회에 사협이란 회보지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협이란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다 보니,

그 곳에서 진행되는 공모전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장삿속이었다.



한 때 박근혜가 이사장이었던 '정수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제11회 '대한민국 정수사진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종두씨의 '저산 팔읍 길쌈놀이'다

이 사진이 대통령상이라는데, 누가 뽑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 뒤 87년도 무렵 민주항쟁개인전을 하려니, 이사장이란 자가 전시를 말려,

기회다 싶어 사직서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참 후에는 국전 급에 해당되는 한사전공모전의 실태가 세상에 까발려 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전에 여관방에 모여 입을 맞추는 추태가 들통 난 것이다.

결국 농간을 부렸던 사무국장이 구속되며 사진인들 얼굴에 똥칠 시켰다.


만 명이 넘는 거대 단체로 성장한 원인도 바로 사진공모전이 효자노릇을 했으나, 사람은 많으나 사진이 없다

그 것을 본보기로 좋은 공모전을 만드는데, 참고할 일은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뒤 아들 조햇님이가 부산경성대 사진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식 등록금을 마련 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콜이 온 것이다.

삼성카메라클럽이란 전국적인 단체를 만드는데, 사무국장직과 삼성포토패밀리라는 계간지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얼씨구나!’하며 계약직으로 들어가 자식이 졸업할 4년 동안 일한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강수씨의 "서울' (20매 중 4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공모전을 만들어 신인을 발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모임이라 그들의 입맛에 맞는 단사진 공모 부문도 있었지만,

연작사진부문을 추가한1한국사진대전을  95년도에 공모한 것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홍순태선생과 육명심, 한정식선생께서 운영과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결과 연작부문의 ‘95한국사진가상우수작으로 송미경, 이강수, 장석주씨 세 사람이 뽑힌 것이다.

다 젊은 신예작가로 개성이 뚜렷했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 (20매 중 4매)


 

이강수씨는 서울을 주제로 도시의 그늘진 풍경을 보여주었고,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은 나환자촌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성작가였는데, 공단 여공들의 매춘을 다룬 소재로 충격적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작에 선정되었으나, 삼성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 담당 전무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입상을 취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수상자들


 

예사 일이 아니었다.

사무국장직을 그만두고 문제 삼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한정식선생께 전화드려 부탁한 것이다.

결국 상은 주지만, 전시는 안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원하는 사람만 입상작을 볼 수 있도록, 전시장에 입상작 사진과 면장갑을 준비한 것이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최우수작 조임환씨의 '이농지대'(20매중 3매)


 

그 다음해인 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사진 부문의 수상자는

최우수상에 조임환씨의 이농시대가 뽑혔고,

우수상에는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와 신 옥씨의 초충도가 결정된 것이다.

첫 해에는 완전한 신인들의 출현이었지만,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의 출현이 달라진 점이나

성공적인 공모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20매중 3매)


 

그러나 다른 입상작은 작품집에 남아 있으나 문제의 작품인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은 자료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송미경씨의 그 이후 활동조차 알 수 없어 더 안타까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작가를 수소문해, 그 때 사진들을 재조명하고 사진사에 남기는 것도 숙제로 생각한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신옥씨의 '초충도'(20매중 3매)


 

그러나 한국사진대전도 그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항공사장이 바뀌며 강남 삼성동에 있던 삼성포토스페이스를 없앤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진가회' 첫 회장이신 고,홍순태선생과 김한용선생의 현판식 장면



반 협박에 가까운 비장의 카드를 꺼내 얻어낸 것이 충무로 세기양행2층에 마련한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 임대보증금과 운영비 일부 보조였다.



돌아가신 후 '최민식사진상'으로 구설수에 오른  최민식선생의 생전 모습

 


그 이후에는 공모전에 관련될 일이 없었는데, 뒤늦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동강사진상이 작업 성취도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는 상이라면,

최민식 사진상은 주최 측의 시상 목적대로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한 다큐사진가를 뽑는다고 했으나,

그 또한 성취도 위주의 동강사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일으킨 최광호씨의 '천제'



형식만 포토폴리오를 제출하는 공모 형식이었지, 끼리 끼리 노 잔치였다.

첫해는 이갑철씨가 받아 그냥 넘어갔으나, 두 번째는 최광호씨가 받아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부산의 이광수교수 문제 재기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그 공모전도 두 번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모전은 절대 운영위원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 사진상들이 잘못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인들에게 많은 빈축을 사왔기에, 공모 형식의 사진상이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이젠 중견작가들을 위한 포상식의 작가주의 사진상은 그만두자. 첫번 째로 '동강사진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뒷자리로 물러 난 사진가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신진들을 발굴하는데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최광호씨를 지지했다”고 말하는 이상일 운영위원장


 

많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다.

기존의 공모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 전시회를 평가해 상을 주자는 것이다.

일단 수순을 밟은 작가가 민예총에 등록하여 개인전을 열면

여러 명의 미술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이 비밀리에 전시를 돌아 본 후,

일 년 동안의 개인전을 모아 총평가하여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수상자에 대한 수상작 전시는 물론 전시를 둘러 본 평론가들 모두가 작품을 평론하는 등

제대로 된 작품집까지 만들어 문제작가로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제1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그 세부적인 운영은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인 최석태씨를 비롯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마련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날 술자리에서 드리지 못한 의견을 이 글로 대신함을 양해 바란다.

아무튼,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제2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전통혼례와 비슷한 기독교식 결혼식이라는데, 구경꾼들이 지붕 위를 가득 메웠다.
그것도 동네 개구장이들이 아니라, 갓 쓴 어른들이라 이해 되지 않는다.

점잖은 체면도 말이아니지만, 지붕 위의 기왓장 다 부수겠다.
이러다 집 넘어가지 않을가 걱정된다.





1904년도에 찍은 사진으로 ‘Designersparty’ 페이스 북에서 스크랩 했다.
photo Moffet Korea Collection




이 사진은 40여 년 전에 진주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이다.

부산에서 최민식선생 인간사진집에 빠져 카메라 장만한지 얼마 안 된 무렵이다.

사실 그땐 사진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던 때라,

음악 찾아가는 여행길에 카메라가 따라 붙었을 뿐이다.

 

, 어릴 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독을 잘 씹었다.

왕따 같은 버릇을 고치려 친구들을 유별나게 좋아하게 되었고,

그러다 술만 마시면 백팔십도로 바뀌는 괴짜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 술 마시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에겐 말도 못 꺼내는 쑥맥이다.

 

사진을 찍게 되면서 부터 여행을 자주 떠났다.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대로 갔는데,

그중 자주 갔던 곳이 서울 아니면 진주 진양호였다.

 

서울은 이태원에 레코드 사러 가며 신촌의 옥스라는 음악실에 들리는 일이 전부였다.

시커먼 공간에 쳐박혀, 시끄러운 하드락에 고막이 너덜너덜 하도록 개기는 것이 큰 낙이었다.

진양호는 까따리나라는 카페 때문이다.

고방자씨가 운영한 그 카페는 음악뿐 아니라, 대마초를 나누어 피우기도 했.


대마초 이야기가 나왔으니, 대개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지적해야겠다.

마약이라는 누명도 당치 않지만, 대개가 그걸 피우면 심각한 환각에 빠진다고 착각한다.

단지, 오감이 예민해져 평소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음이나 맛, 생각이 깊어지는 것 뿐이다.

조용한 베이스음까지 세밀하게 감지할 수 있는 그런 느낌 때문에 음악인들이 자주 피운다.

제발 대마초 피우면 홍콩 간다는 헛된 생각이랑 버려라.

 

까따리나에서 음악 들으며 석양의 호수를 내려다보는 감상은 귀가 막힌다.

사실 음악이야 휴대용 녹음기인 워크맨으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었지만,

좋은 오디오의 중량감있는 음악에다, 생각이 같은 벗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다. 

가끔은 혼자 진양호 주변을 산책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날, 대마초 한 대 피우고 인적 없는 진양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았는데,

그 때 헤드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킹 크림슨의 아일랜드였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에 빠져, 마치 무인도에 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옆쪽 포구에 없던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낑낑거리며 물 길어 오르는 소년과 그걸 쳐다보는 여인인데,

돕지도 그냥 두지도 못하는 여인의 어정쩡한 자세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 뒤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말자 불심검문에 걸려버렸다.

장발에 헤드폰을 낀데다, 한쪽 알은 노란색이고 한쪽 알은 파란색인 선 그라스를 꼈으니

의심 받을 만도 했다. 그 때 둘러 맨 카메라는 니콘 FM이었.

옆구리엔 권총처럼 워크맨을 차고, 한 쪽엔 탄창처럼 생긴 필름 통까지 달았으니 궁금했을거다.


꼴 볼견이라 가끔 쳐다보긴 하지만, 대개 코메리칸쯤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는데,

이 날은 좀 별난 세파트에 걸려 버렸다. 한사코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결국 파출소로 끌려 갔는데, 장발이야 개기면 되지만, 휴대한 대마초에 바짝 얼어붙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지품검사를 하겠단다.


탄창처럼 생긴 케이스부터 열어보라기에 필름 세통 꽂힌 것 중에

첫 통에 든 트리이액스 필름을 꺼내 보였더니, 대마초가 든 필름 통은 그냥 통과되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얼굴색이 완전 똥색이었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고 가라지만, 못 자른다고 버텼으니,

다음 날 즉결재판 때 까지 구치소에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치소화장실에 대마초 버리느라 007작전 버금가는 신경전을 펼쳤다.

 

그 이틀 날 집에 돌아와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부터 현상해 보았다.

별 것 없는 서정적 포구풍경이지만, 여인의 감정이 읽혀져 마음에 끌렸다.

부산의 원로 사진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해보고 싶었으나,

대개 트리밍 자나 들이대는 수준이라 싫었다.

나 혼자 별 것도 아닌 사진에 꽂혀 여기 저기 공모전에 출품도 해보았지만,

보내는 곳마다 미끄러졌다.


왜? 그 사진 한 장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같은 생각인 분이 있을 것 같아, 조그만 견본사진까지 갖고 다녔다.

한참 후 서울에서 언론인 출신의 평론가 서상덕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시던 선생께서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조형! 뜬 구름 잡는 예술사진은 하지 마세요.

사람을 찍을 생각이라면, 카메라를 그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드세요.”

사실, 평론하는 자신도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솔직한 선생의 충언에 할 말을 잃었다.

 

말씀을 새겨들었으나, 과연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건, 자신을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비우는 작업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진 아직까지 못 이루었으니, 사진이란 끝없는 고행이다.

아마, 진양호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그토록 못 잊어 한 것도,

그 깨우침을 두고 두고 새기라는 뜻인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지난 금요일 은평구청 앞에서 농성하는 부부가 있었다.
명절을 눈앞에 두고, 생존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나 가능성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짓고 있는 아파트를 이제와 어떻게 하겠나?
가진 자들의 놀음에 없는 자들만 내 몰리는 세상이다.


사진,글 / 조문호




사진가 조성기의 초창기 사진이 긴 잠에서 깨어나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학생때, 방학을 이용해 지리산 산골에 들어가, 한 우체부를 대상으로 기록한 사진이

눈빛사진가선 ‘우편집배원 최씨’란 사진집으로 나오며, 뒤늦게 조명 받은 것이다.





지난 18일 오후, 충무로 '반도갤러리'에서 열리는 ‘집배원과 산골사람들’ 사진전을 찾아보았다.

마침, 무의도를 예술 섬으로 만들기 위해 긴 세월 애쓰는 무의도 촌장 정중근씨와

‘예당국악원’ 원장인 소리꾼 조수빈씨와 연락이 다아 함께 간 것이다.

다행히 사진가 조성기씨가 자리에 있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암실에서 프린트한 오리지널 프린트 40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정겨웠다.

한 우체부의 삶을 통해 산골마을 사람들의 삶을 골고루 조명하고 있었는데,

심심산골의 소박한 정취를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비록 지리산 산골의 한정된 기록이지만, 이는 한 개인과 지역을 통해 인간 본연의 삶을 조망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잘 찍거나 못 찍거나 사진가의 기량은 부차적인 문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작가 의도만 분명하다면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가치는 더 빛나게 된다.

조성기 사진 역시 와인처럼 오랜 세월의 숙성을 거쳐 나왔으니,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당시 아름다운 풍경이나 찍었다면, 한 낱 쓰레기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 아는 이야기 해보았자 잔소리에 불과한 것을 알면서도 지껄이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사진의 진정한 가치를 잘 모르는 분들의, 안타까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그 날 전시장에 함께 간 명창 조수빈씨가 사진을 둘러 보더니,

아득하게 먼 어린시절이 떠올라 즉흥적으로 부른 노래는 바로 조수빈표 ‘정선아리랑’이었다.

정선에 살며 숱하게 듣는 ‘정선아리랑’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다.

본래의 노래가 한에 메였다면, 그 한을 추억으로 이끈다. 그보다 더 좋은 축가는 없을 듯싶다.
뒷 날 당시 주인공이었던, 최동호씨가 전시장에 온다지만, 시간이 없어 뵐 수는 없었다.





마침 인터뷰하러 온 정영신씨를 만나 정중근, 조수빈씨와 함께

충무로 복집에 들어 가 시원한 국물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했다.


술을 마시면서도 머리에 떠나지 않는 것은, 추억에만 메여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눈앞에 너무 가슴아픈 처절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쪽발이 말이지만, 이제 그만 오사마리하고 싶다.






그리고, 내일이면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 사진전을 보기도 바쁘고, 추워 외출하기도 힘드니,

눈빛아카이브에서 나온 '우편집배원 최씨' 사진집을 구입해 보시라.

만 이천원 밖에 하지 않으니, 인터넷으로 구입해 두고두고 보세요.

한 번 보고 잊을 추억은 아닌 것 같다.

행여 손해 보았다고 생각되면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기꺼이 받겠습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바닥에 고인 물을 건너뛰는 두 사진이 너무 대조적입니다.


고인이 된 이형록선생의 ‘흙탕물’과 앙리카르띠에 브레송의 ‘파리 생 라자르 역 뒤에서’란 작품인데,

브레송 작품은 너무 잘 알려진 명작이라 사진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요.


'결정적 순간'이란 작가의 유명세가 한 몫 했는지,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 난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형록 선생의 흙탕물이 훨씬 정감이 갑니다.


각각의 사진이 주는 메시지나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으나,

여러분은 어느 사진에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지요.






이 사진이 찍힌 70년대에는 연탄이 추운 겨울을 나게 하는 유일한 월동대책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연탄 수레를 끌고 미는 장면에서
고달픈 서민들의 삶이 한 장의 그림처럼 묘사되어, 아련한 추억을 끌어들인다.

예전에는 한겨울을 나려면 연탄을 들이고, 김장하는 게 집안의 큰 일이었다.
때로는 연탄이 부족하여, 마을에 연탄 차 들어오기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시간 맞추어 연탄가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지만, 잘 못 꺼트렸다간 연기깨나 뒤집어썼다.
요즘에야 번개탄이라도 있지만, 그 때는 장작이나 숯불에 붙였다.

유독 나에게 연탄은 가슴 아픈 기억이 더 많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였다. 창녕 영산의 고향집은 연탄아궁이가 길 쪽에 나 있었는데,
얼굴이 연탄불에 새까맣게 타 죽은 여자걸인을 새벽에 발견한 것이다.
추운 겨울밤에 불 쬐며 졸다 연탄가스에 질식해 화덕에 얼굴을 묻은 것 같았다.

그 끔직한 기억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부산에 가 계셨던 형님 두 분이 하숙방에서 연탄까스에 질식해 돌아가신 것이다.
연탄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그러나 결코 멀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무서운 불덩이와 다들 동거동락하며 살았다.
그리고 채탄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나 많은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서울로 상경해서는 웃지 못 할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천상병선생께서 돌아가시어 조의금 받은 돈뭉치를 할머니께서 연탄아궁이에 숨겨놓았는데,
밤 늦게 돌아오신 목여사님이 방 데우려 불을 붙이다, 고스란히 재가 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되어, 그 재를 고스란히 한국은행에 가져가 일부 되돌려 받았다지만,
연탄과 관련된 별의 별일들이 많았다.

오늘따라 발갛게 타오르는 연탄불이 그리워진다.

70년대 ‘월동전쟁’이란 제목으로 나경택 기자가 발표한 사진을 보도사진 연감에서 옮겼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7일에는 ‘동자희망나눔 회원증’을 받았다.
지자체의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발급하는 이 회원증은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일단, 동자희망나눔센터의 샤워시설과 세탁시설을 활용할 수 있고, 각종 민간단체에서 지원하는 식료품을 받을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도 똑 같은 쪽방촌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동자동 주민기자증으로 느껴졌다.

내가 체험하고 느끼는 문제점은 물론,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알리고,

주민들이 살아가는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함께 권리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시나리오작가 최근모씨와 사진가 김시우씨가 찾아왔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프린트기 지원내용을 알아 보러 왔다가, 동자동 사랑방에 들려, 내가 못한 부탁을 해 주기도 했다.



'동자동사랑방'의 박정아씨, 쪽방촌 사람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보수성향의 일부 주민들은 진보성향의 사람들이라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사업에 진보, 보수가 웬 말인가?

 

[동자동 사랑방 조합장]

 

그 친구들이 떠난 후, 상담소로 가다 김유례씨를 만난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았다며 자기도 찍어 달라 부탁 했다.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진을 강 호씨가 알아, 여기 저기 보여주며 소문 낸 것이다.

SNS의 위력을 또 한 번 실감했다.

덕분에 이기영씨의 안내로 몸이 아픈 김익윤씨를 찾아가 찍기도 하고, 이대영씨 등 여러 명의 영정사진도 찍었다.

프린트기만 들어오면, 찍은 모든 사진을 뽑아 주인에게 돌려 줄 작정이다.


김유례씨는 나와 동갑내기다.


강완우씨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늦게 나가 빵을 못 받고 돌아서니, 슬그머니 닥아와 자기가 받은 빵봉지를 내손에 쥐어 주었다.





오후 두시 쯤, 공원입구에 가보니, 일찍부터 정재헌씨가 술자리를 깔아 놓았다.

그 날은 강완우, 이기영, 김장수씨 등, 술 친구들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사내도 있었다. 용팔씨 이야기로는 오늘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턱 쏘았다. 벼룩도 낮 짝이 있다는데, 맨 날 얻어 마실 수만 없잖은가?

추교부, 나흥주, 장국태씨도 뒤늦게 나타나,  술과 담배 값으로 파랑새 석장을 날렸으나 기분 좋게 마셨다.

 

“니는 무슨 죄 짓고 교도소 갔노?” 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 대답이 걸작이다.

“안 만졌는데, 여자 엉덩이를 만졌다고 잡아가데요.”  용팔씨 설명으론 성추행범으로 잡혀 한 달 넘게 살다 나왔단다.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는 내 알바 아니지만, 요즘 초상권 문제나 성추행 문제에 너무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 쪽 팔릴까봐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내의 사진은 찍지도 않았고, 이름도 거명하지 않았다]

 

 

 

 

 

위에 있는 김장수씨는 부산 동성고등학교 출신으로 기계체조선수였는데, 고향은 경남 진영이라다.

나도 젊은 시절 '김해농협'에 근무할때, 진영에 자주 간 적이 있어 더욱 반가웠.




혼자서 얼마나 여자가 그리웠으면, 모르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을까?

옛날 같았으면 빰 한 대로 끝낼 수도 있는 일을, 감방까지 보내야 하는 세상이 너무 야박한 것 같더라.

그래서 그 친구에게 부탁했다. “내가 멋진 여자 알몸사진 한 장 뽑아 줄테니, 생각나면 그걸 보며 딸딸이나 쳐라”


어떻게, 이런 저런 설움을 알았는지, 하늘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술에 눈물같은 빗방울이 섞이니, 술 맛이 달더라.


[주민 자치회의 장면]


 

 

 

 

난, 그만 일어서야 했다.


오후 다섯 시부터 ‘동자희망나눔 센터’에서 주민자치회의가 열리기 때문이다.
술은 취했지만, 어떠한 이야기가 오가는지도 궁금하고, 모르는 분들에게 신고하고 싶어서다.

가보았더니, 말은 자치회의라지만, 여러 가지 일을 알려주는 공지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진료, 예방접종, 무료급식 등의 날짜를 알려주기도 하고, 필요한 물품을 신청받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대개 일인용 전기장판이나 이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분이 그 유명한 용팔씨랍니다.]



밖으로 나오니, 술마시던 친구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마시고 있었다.
비를 맞아가며, 세상 설움을 술잔에 풀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않아, 십팔번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목이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의 보안관 양반도 가족처럼 편안한 사람이다.

 


 

 

이 양반은 음악을 너무 좋아해 항상 레디오를 들고 다니며 춤을 춘답니다.

 

 

 

 

 

 

 

 

회의장에서 바라 본 바깥 풍경이 너무 쓸쓸하다.

 

 

 

족발안주를 보니 소주가 생각나네요.

 

쪽방 사람들보다 더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숙자입니다. 그들도 쪽방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노숙자들이 기초수급생활자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주민등록이나 가족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인데,

더 추워지기 전에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책이 나왔으면 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