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 ‘한국종합예술대에서 교편 잡는 사진가 이주용 교수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평창동 연화정사옆에 있는 작업실에서 10년 넘게 일해 왔다는데, 전망이 끝내 주었다.

북한산 자락의 옹기종기 몰린 집들이 석양에 물들고 있었고, 작업실은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희귀한 대형 박스카메라들이 즐비했고, 온갖 석불과 오래된 물건들이 여기 저기 진열되어 있었다.

 

30여년 전 이주용교수가 미국서 공부할 때, 안젤 아담스를 비롯한 미국 전역의 사진계 거목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취재한 원고를 내가 근무했던 월간사진으로 보내주어 2년 가까이 연재했는데,

국내사진인들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하였다.


그 뒤 귀국해서는 포토291“이란 사진잡지를 창간하여 새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원래 좋은 잡지보다 아마추어를 상대로 한 대중잡지만 간신히 살아남는 현실은, 오래 지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이후, 이교수를 전시장에서 한 두 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작업실을 방문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몇 일전 동자동 쪽방촌 작업에 필요한 자재 도움을 페북에 올렸는데, 그 걸 보고 도와주겠다며 전화해 준 것이다.

사용하는 비싼 프린트기를 빌려주려다, 아예 새것으로 사 주겠다는 것이다

 그토록 고마운 인정을 베푸는데, 이주용교수가 어떤 작업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게, 창피했다.


그동안 동북아 天然堂사진관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 동경을 거쳐 오사카,

북경을 잇는 한,,3국의 현재와 과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 작업이었다.

역사적 기록성과 사진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공유한 중요한 전시였다.

또한 순회전이 열린 도시에서 만난 가족들의 초상사진을 촬영함으로, 동시대 초상사진의 사회학적 의미를 주지시키기도 했다.

 

그런 중요한 작업을 직접 못 본 게 아쉬웠지만, 인물을 통한 사회적 다큐멘터리 작업은 계속된다니, 기대되는 바가 크다.

방문한 작업실에는 사진관의 배경그림을 그리는 화가 조수 나우미씨와 함께 있었는데,

그런 훌륭한 조수와 함께 작업한다는 것도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작품들과 작업실에 늘린 기자재들에 취해, 평소 습관처럼 해왔던 사진 찍는 일과

서울도시빈민 프로젝트에 대한 자문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프린트 기자재를 구입해 주려, 내가 사는 쪽방까지 방문해 자문을 구할 수 있었다.

 

결론은 모든 것을 쉽게 결정하지 말고, 신중하게 접근하라는 말인데,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한 현장조사는 물론이고, 주민들의 마음이 열렸을 때, 논의할 문제라고 했다.

한 지역에 많은 사진가들이 몰리면 자연적으로 부작용이 일어 날 소지가 많다며,

인간적인 소통보다 사진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진가가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서울 전역 빈민가의 철저한 현장조사가 선행된 후, 사진가들이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구역별로 나누어 한 지역에 한두 명만 들어가, 상호 협력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기획전문가인 브레송의 김남진 관장께 부탁할 생각인데, 본인이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경험 많은 사진가들의 자문을 구한 후, 좋은 방안이 마련되는 대로 공개할 작정이다.

 

그리고, 저녁 무렵엔 부산에서 활동하는 다큐사진가 조성기씨를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성기씨는 10여년 전 강원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에 함께 한 적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이산가족 같은 감은 있었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 자리에는 조성기씨를 비롯해 사진가 박종면씨와 인성욱씨가 동행했는데, ‘유목민매상께나 올렸다,

서로간의 정보 교환은 물론, 사진판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일화를 안주삼아 퍼 마셨는데,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와 푸른별이야기 최일순씨, 그리고 뒤늦게 시나리오작가 최건모씨도 합류했다.

다 연줄연줄 아는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성기씨가 부산가는 열한시 기차표를 취소하고,

내가 사는 서울역쪽방에 끼어 자겠다고 했다. 내 사는 꼴도 보고 싶었겠지만,

서울 올라 온 김에 눈빛에서 나오게 될 사진집 서문을 부탁하러 이경홍교수를 만나려는 것이다.

 

쪽방 갈 놈들이 겁도 없이 택시까지 잡아타고 갔는데,

입주한지 몇 일 되진 않았지만, 긴 밤 손님은 처음 받았다.

술이 취해 매점에서 소주와 이 것 저 것  별의 별 것을 다 집어넣었다. 내일도 처먹어야 사니까...

그 날 밤 술 마시며, 전 주인이 남겨 놓고 간 유품, 꽃그림을 안겨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상도 말로 참 욕봤다!

 

하루 일기가 길었던 만큼, 그 이튿날은 죽어나야 했다.

 

사진, / 조문호











내가 사는 동자동 쪽방입니다

그림은 전에 살던 분이 남기고 간 유품이지요. 




 




서울역 건너편은 우리나라 대기업 빌딩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굴지의 기업 GS건설빌딩과 전 대우빌딩인 금호빌딩도 있고, 남대문경찰서 뒤로 서울시티타워인 그린화재빌딩과

힐튼호텔, CJ홈쇼핑 건물도 보인다.

그러나 그 거대한 빌딩 틈으로 쪽방들이 코딱지처럼 다닥 다닥 붙어있다.
옛날 사창가였던, 양동을 비롯해 동자동, 도동 등지에 전세 100만원에 월20만원 정도하는 한 평 남짓의 쪽방들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보기로 작정했다.

그 실상을 전해 들어 마음 굳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공식적인 길을 따르기 앞 서, 그들의 실상부터 파악할 겸, 추석 이튿날 동자동을 찾았다.

명절이라 그런지, 동자동 놀이터에 많은 분들이 모였더라.

일단, 그분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갔으나, 나도 모르게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갔다,

개성이 독특한 분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마치 공원자체가 연극 무대 같았다.






몸이 불편한 분들이야 나오지 못하지만, 웬만하면 답답한 방안보다 공원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 날 공원 곳곳에 낮술을 즐기는 분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그런지 모르지만 술 인심이나 담배인심은 좋았다.

처음에는 인사로 권하는 줄 알았는데, 담배가 없으면 아무에게나 담배를 달라 했다.

예전에야 담배 인심 하나는 좋았으나, 담배 값이 비싸진 이후론 보기 드문 미덕이다.






그러나 원색적인 욕설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겉으로는 거칠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진 않겠지만, “야이 씨발놈아”란 말이 일상적인 언어였다.

듣는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 걸보니, 그냥 친근함을 나타내는 악의 없는 욕설이더라.


그런데, 그 곳에도 남자들이 여자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성태엄마란 분은 아무 남자에게나 시비를 걸고 쫒아 다니며 진득이를 붙어 결국 도망가게 했다,

가겟집 할머니가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쳐가며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날, 세상살이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술에 가두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오죽하면 공원 주변에 술중독자 상담을 위한 현수막이나, 공원에서 술 담배를 즐기는 것을 더 이상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성 플래카드도 걸렸으나. 공염불인 것 같았다.

놀이터에 가뭄에 콩 나듯 한 어린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노인들의 해방구라 그냥 묵인하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런데 놀이터의 분위기를 확 바꾼 것은 하투놀이였다.
한 남자분이 신문지를 깔고 화투판을 벌였는데,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 여섯 사람이 돌아서서 섰다판을 벌였는데, 투전이라기보다 하나의 나누는 놀이였다.

돈을 딴 사람이 구경하는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 딴 사람은 없고 잃은 사람 뿐 이었다.

가진 자보다 없는 자들이 더 인정이 많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잠시, 환자들이 누워계신 쪽방 몇 곳을 찾아보았다.
어떤 분은 귀가 어두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셨지만, 어떤 분은 내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자식들이 있지만, 찾지 않는다는 분도 계셨고, 죽는 날만 기다린다며 체념한 분도 계셨다.

다들, 복에 없는 돈보다는 사람 사는 정에 목말라 했다.

그렇지만 한 푼이라도 생기면 가난한 자식에게 주고 싶다는 말씀도 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게다. 다시 찾아 올 날을 적어드리고, 물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서울역 주변에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사는 쪽방촌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다들 가난을 물려 받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 뿐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으로 사는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라도 안겨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기초생활 수급비 60만원에서 집세 20만원을 제하면 남는 게 뭐있겠나?

임대료를 도와주거나, 추위나 더위, 화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정책과 지원이 절실했다.

내일은 양동과 도동 방향을 돌아보고, 월요일부터 작업에 들어 갈 작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날씨가 너무 더워, 오래된 얼음사진을 찾아보았다.
1958년 손규문 선생께서 한강에서 찍은 채빙 사진인데, 카메라 앵글이 독특하다.
전면의 소로 인해 지루함, 기다림 같은 느낌은 강조되었으나,
얼음이 주는 시원함이나 역사적 상황의 현장묘사는 반감되었다.
사진을 예술로 이끌려는 선배들의 고심이 역역한 사진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소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목에 감은 군용 혁대가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 준다.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한국사진과 리얼리즘’에서 옮겼다.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 어린것들까지 남의 집에 품 팔러 보내야 했던 시절이다.

계집아이는 빨래를 해 주고, 사내아이는 계절을 가릴 것 없이 주인집에 물을 길어주어야 했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가 아니던가?

살기 어려운 시절의 가슴 아픈 모습이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은 그 때의 양반이나 지금의 돈가진 권력자나 다를바 없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에서 옮겼다 (작가미상)




 




몇 일전 굴러들어 온 호박, 아니 라이카를 테스트 합니다.
오늘 아침 책상에 앉아 전화 받으며 낄낄거리는 걸, 마누라가 찍어보았지만,

나는 야외에서 첫 사격을 해보았습니다.

 

정오 무렵, 아내와 ‘눈빛출판사’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8월24일에 있을 정영신 개인전 오픈에 맞추어 출간될 ‘장날’(가제) 사진집에

실릴 사진을 전해주고, ‘산수갑산’에서 차 한 잔하며, 몇 컷 박았는데,

그 전의 니콘보다는 일단 동작이 빨라 마음에 듭니다.


스냅에 제일 중요한 것이 순간 포착 아닙니까?

매뉴얼만 익히면 카빈 소총으로 콩닥거리던 것을, 따발총으로 작살낼 것 같았습니다.

오늘 오후6시, 강남 ‘스페이스22’에서 있을 찍사 미팅의 첫 전쟁터에 투입됩니다.

지난 번 바이칼에서 사온 보드카 마시며, 무차별 사격해 볼 작정입니다.


그런데 ‘라이카’란 이름과 라벨이 기분 나빠 지워버렸습니다.
평생 주눅 들어 온 라이카란 이름에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찍을 때마다 걸리적 거리는 렌즈 캡은 아예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임자 잘 못 만난 그 카메라는 ​고생길이 훤합니다.

같이 술 마시고 같이 놀아야 하지만, 제 임무는 다 할 것입니다. ​

이제 내 카메라는 국적 없는 나의 첩입니다.
내가 화정터에서 사라질 때 까지, 천대받으며 함께 놀 첩입니다. 



글 / 조문호













다큐영화감독 이창주 만나 금정 산성막걸리에 맛이 갔다.


졸라 노래부르며 셀프로 찰깍~,


근데, 내가 봐도 징그럽네!

마치, 하마가 암컷 찾아 울부짖는 것 같다.


이런 음주사진은 불법 아닌가?

난, 술마시면 운전은 못하지만, 사진은 찍는데...

취권이 아니라 취사란 말 알랑가 모르겠다.​












1953년 추운 겨울,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린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쟁 중의 영세 상인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로 인기를 끈 국제시장은 해방되어 귀국한 동포들의 노점으로 시작되었는데,

본래는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 1948년 '자유시장'이란 이름으로 단층목조건물 열 두동을 지었는데,

전쟁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성시를 이루자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꾼 것이다.

그 당시는 속칭 양키시장으로 원조물자나 군용품은 물론 외제밀수품들이 판 쳤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예술가들도 국제시장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잖은데,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며 온갖 정보의 원천이었다.


이 사진은 김한용선생께서 찍었으며,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진과 리얼리즘’에서 옮겼다.







옛날에는 잠자리 한 모퉁이에 이처럼 요강을 두었지요.
화장실이 멀기도 했지만, 애들이 잠결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어두워 요강을 뒤집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단한 삶의 장면이지만, 가족들이 각 방을 사용하는 요즘보다 정겹습니다.
어머니 옆에, 그의 비슷한 꼬맹이들이 나란히 잠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가 이해문씨의 가족인 듯합니다.

옛날 스트로보는 램프 터질 때, 퍽 소리가 났는데,
얼마나 깊은잠에 빠졌는지, 그냥 잠들어 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난리 났을 것입니다.

어디 간 큰 남자가 아내의 자는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 댈 수 있겠습니까?
분명 미치지 않고는 이런 짓 못합니다.
이런 미친 분이 계시니까, 사진으로 옛 추억도 떠 올리고요.

60년대 곤궁한 삶의 잠자리 모습으론, 유일한 사진이 되었네요.
이게 바로 역사 아닙니까?

‘한국현대사진가선’ 이해문 사진집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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