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80년 5월, 부산역 인근 초량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에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꺼내야겠다.

그 무렵, 부산 남포동에서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한마당’이란  술집을 했다.
사진에 미쳐 장사는 뒷전이었으니 믿을 수 있는 종업원이 필요했기에,
평소 신임했던 전라도가 고향인 종업원에게 계산대를 맡긴 것이다.

손님은 평소에도 많았지만, 년 말에는 밤 늦게까지 미어터졌다.

문제가 생겼던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손님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끝나, 집에 갈 겨를도 없이 종업원들과 잠자리에 든 것이다.

서너 시간 후 눈을 떠보니, 가게 문이 열려있고, 수제금고가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깨워 확인해 보았더니, 내가 제일 믿고 신임했던 종업원이 없었다.
당시는 카드결제도 없을 때지만, 그 날 영업한 현금도 평소의 두 배가 넘었다.

문제는 금고 안에 손님들로 부터 잡혀 둔 시계나 학생증이 많아 난감했다.

사방팔방 찾아보았으나, 헛일이었다.

요즘에는 주민등록번호만 있으면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땐 소용없었다.
그래서 시계 찾으러 온 손님들께 배상할 때마다, 그 녀석이 전라도 놈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 때부터 지역감정에 편승해, 전라도 사람은 믿을 사람이 못된다고 착각했다.

한 사람의 과오였지만, 전체 지역민에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금고를 잃어버린 이듬해 오월 무렵,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초량에 간 적이 있었다.
우연히 실내장식 하는 가게 앞에서 사진 속에 있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무작정 집 나와 갈 곳이 없다고 했다. 그는 당장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단지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를 데려 가지 못한 것이다.

그 이후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해 같이 살게 된 여자가 전라도 여자였는데,
살아보니 바보처럼 착했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몇이나 있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정치판이 만들어 논 지역감정이란 더러운 틀을 벗어 던질 수 있었던 거다.

벌써 35년의 세월이 흐른 이 사진은, 그 때를 반성케 하는 회한의 사진이 되어버렸다.

그도 중 늙은이가 되었겠지만, 처자식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편견으로 전체 전라도 분들을 불신한 지난 날을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말의 발굽에다 편자를 박는 장면이다.
말이 날 뛰지 못하게 나무틀에다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장제사는 편자를 박기위해 말발굽을 점검하고 있고,
말 주인 같은 사람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정비소에서 타이어 바꾸는 일일게다.
세상은 엄청 살기 좋아졌으나, 예전처럼 재미가 없다.


1969년 온양에서 찍은 홍순태선생 사진으로,
“3인의 교수전”작품집에서 옮겼다.


1966 세월


현일영(1903-1975)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사진가로 평가받는다.
객관적인 향토서정주의가 판치던 시절에 신즉물적인 경향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분이다.


좌로부터 현일영, 박필호, 서순삼선생


1958 무제


그는 일본에서 사진교육을 받았으며, 사회주의에 심취한 지식인이었다.
30년대에 종로에서 ‘현일영사진관’을 운영하기도 했고, 
5-60년대에 세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며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1960 실패


1960 태극기


그는 이야기를 끌어 담는 걸작주의를 피해, 사물과의 관계성에 치중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고독한 탐색’이란 작가의 말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선생의 고뇌에서 나온 사색의 파편이었다.


1960 무제


1960 손목시계


사진만 봐서는 철학자인지 시인인지 혁명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알 수도 없었지만, 너무 깊숙이 알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그 정도만 알고, 존경의 마음을 가져 왔었다.


1958 무제



지난 2일, 원로사진가로서 제일 연세가 많은 이명동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새해 인사차 약수동 자택을 방문했는데,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사모님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다, 85년 “예술계”란 잡지에 투고한, 내 사진에 대한 글을 찾았다며
전해 주기도 했다. 꼼꼼하게 챙기시는 성격은 여전하셨다.



일부러 식사시간을 피해 들렸는데, 기어이 설렁탕 먹으러 가자신다.
밥값 낼 요령인지, 얼핏 사모님에게 용돈 타시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선생님도 사모님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는 걸, 안 것이다.



설렁탕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소주까지 주문하셨다.
나를 위한 배려지만, 새해에 건배라도 한 번 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건배를 하고, 이 날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여쭈었다.
현일영선생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발동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돌아가신 현일영선생님, 아시는 것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이소.”


그 분은 남다른 면모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모두가 그 분 사진에 관심은 많았지만, 동조한 사람이 별 없었다는 것이다.
좌익이란 빨간딱지까지 붙어, 요시찰인물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거라 하셨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더 깊숙한 얘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사물이 주는 시적 울림까지 드러낸 현일영선생의 사진은, 앞서가도 한 참 앞선 것이다.
그러니 사진계 이단아로 취급되어 뒷전으로 밀려난 게 아닐까?
한 발 앞서면 지도자가 되고, 두발 앞서면 미친놈 소리 듣는 다는
스코트 니어링의 명언이 생각난다.


글 / 조문호


현일영선생 작품사진은 '한국사진역사전,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한국현대사진60년'도록에서 옮겼다.




































내가 태어나기 한해 전 풍경으로, 좀 낯설지만 정겹다.
한국전쟁과 함께 서서히 사라진 이 인력거는 개화기 일본에서 유입된 잔재다.

그 시절엔 유한마담이나 귀부인들이 타고 다녔겠지만,
힘들게 사람이 끌고 가는데, 탄 사람의 마음은 편했을까?

오래된 영화스틸사진 같은 이 장면은 지금의 서울 중앙우체국 앞이다.
마치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는 것 같은 한적한 정경이다.

아침햇살을 받은 인력거 행렬에서, 한 시대의 삶을 읽을 수 있다.

1946년 찍은 임석제선생 사진으로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작품집에서 옮겼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모두들 초가 처마 밑에 몰려들었다.
낮선 여자 카메라맨이 의외인 듯, 모두들 웃음꽃이 만발하다.

아마 지금쯤 모두들 어른이 되어 어엿하게 살고 있겠지만,
이 사진을 보면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울까?

흙냄새를 모른 채, 기계처럼 돌아가는 오늘의 어린이들이 가엽다.
이게 사람 사는 정이고, 사진의 매력이다.

이 정겨운 장면은, 1980년 울산 배춘옥씨가 찍었다.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징집되어 열차에 오른 장병들과 헤어지는 가족의 애환이 담긴 인간미 넘치는 사진이다.
그 시절엔 영장을 받으면, 이처럼 한 곳에 모여 열차를 타고 훈련소로 떠났었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기에 입대하는 안타까움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겠으나, 어쩌랴!
다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인생인데...

등에 업은 애기를 남편에게 돌려 보이며 “빠이빠이” 하라고 얼르는 엄마와
창밖으로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장정의 표정에서 따뜻한 가족애를 맛 볼 수 있다.
이별을 실감 못한 간난 애기의 멀뚱한 눈길 또한 인상적이다.
지난 시절을 돌이키게하는, 가슴 아프면서도 정감어린 장면이다.

대구에 계셨던 신현국선생께서 1961년 찍은 사진인데, ‘한국현대사진의 흐름’ 사진집에서 옮겼다.


약수동에 계신 원로사진가 이명동 선생 댁을 찾아 갔다.

사모님 점심 챙겨드리고 나오셨다는 선생님의 체력은 여전 하셨다.

이제 일흔도 안 돼 빌빌거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120세가 아니라 더 높게 잡아야 되겠네요랬더니 씰데 없는 소리라신다.

입에 발린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아흔다섯이니 선생님 건강 상태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또 기억력은 얼마나 좋은지 몇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상황묘사까지 생생하다.

 

주문한 설렁탕이 나왔으나 수저만 담그신 채, 연신 말씀을 하신다.

이 날은 평소에 듣지 못했던 사진계 뒷이야기라 귀가 쫑긋했다.

글로 옮기기 곤란한 웃고 넘길 이야기라 그런지 더 흥미진진했다.

선생님께서 긴 세월 모셨던 분의 이야기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그 다음에는 동아일보에 계실 때 있었던 신문사이야기로 옮겨갔다.

사진기자들이 찍어 온 필름을 관리해 조사국으로 넘겼는데, 한꺼번에 폐기처분해 버렸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디지털이미지도 아니고 매일 매일 찍어오는 필름 관리가 힘들었는지 모르나

그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소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찍었던 4,19당시의 특종사진들을 비롯한 모든 사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용 하려면 당시 신문을 복사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록 동아일보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사진 가치에 대한 인식들이 부족한 시기기도 하지만, 보관 관리에 대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때다.

차라리 회사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기자들에게 돌려주어 관리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한국현대사를 증언할 중요한 사진자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일부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이나, 사진기자 수첩에 끼어 흘러 다니던 필름들에 의해

그나마 우리의 현대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들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차라리 그 땐 몰라서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은 알면서도 뒤집으려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말이다.



사진,글 / 조문호












 




한강 폭파한,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세월이 흘러, 그 목격자들도 하나 둘 저승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시인 강 민선생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1950년 6월28일, 당시 선생께서는

동네 교회를 지킨답시고 피난행렬에 끼지 않았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 곧 국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될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얼마 후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힘없는 백성들만 남겨둔 채,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권력자들만

불알에 요령소리 나게 도망친 것입니다.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입니다.
파괴된 한강철교 아래 임시통행을 위한 가교를 만들어 놓았군요.

이 사진은 서울이 수복된 후에 마산에 계셨던 남기섭선생께서 찍었는데,
‘한국사진역사전’ 도록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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