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순천 1948,10


무슨 철천지 원수졌다고, 같은 민족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
공산주의가 뭐고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단 말인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승만이 나쁜 놈이지만,

이를 조종하는 미국과 소련놈들은 더 나쁜 놈들이다.

긴 세월동안 중국과 일본 놈께 당한 것만도 서러운데,

끈임 없이 외세에 시달려야하는 우리민족의 이 기구한 원한을 어찌 달랠꼬?

이 여수, 순천반란사건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며 생긴 일이다.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선두로 제주도 4,3사건, “5,10 단선반대 투쟁”,

10월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 끈질긴 싸움들은,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인 처참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일어 난  무장유격투쟁이 시발점이었다.

제주도가 소요에 빠져 있을 때, 여수에서 제주도 토벌을 위해 정부군 제14연대를 보내려했으나

그 사병들이 출동을 거부하며 벌어진 사건이었다.

48년 10월 19일에 일어 난 이 반란은 약 1주일간 여수와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보성 지역을 휩쓸었다.

2,000여명의 사병들이 “일제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 등의 구호를 내걸며

여수시내로 진입하며 불이 붙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반란군 토벌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했지만,

토벌대의 일부가 반란군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반란은  장갑차, 경비행기, 군함 등이 동원되고, 여수가 불바다가 된 후에야 진정되었다.

토벌군과  반란군 모두  2,000여명이나 죽는 이 엄청난 사태는 이승만의 욕심에 희생된 재물이었다.

토벌군에 밀려 난 일천여명의 반란군이 김지희, 홍순석의 지휘아래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도피해

일단의 막은 내렸지만, 산발적인 싸움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남과 북이 갈라지는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갈수록 그 냉전체제는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그 지루한 싸움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정말 우리는 슬픈 민족이다.


글 / 조문호


사진은 1948년 이경모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의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사진집에서 옮겼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순천 1948,10 / 한 여인이 남편의 시신을 찾고있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담양 1951,2 / 부역혐의자들이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돼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없었다.




힘들었던 올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추웠던 것 같다.
빨리 추스려, 정선으로 떠나고싶다.
꽁꽁 언 마음, 봄 꽃에 녹이려..


진달래꽃을 안은 여학생을보니,
아련한 고향의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꿈 많던 소녀들은 다 어디갔을까?

유수같은 세월을 탓할 순 없지만,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1975년 김운기씨가 찍은 사진으로
‘삼성포토패밀리’ 96가을호에서 옮겼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뜨면서 한 때 국제시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세트장도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의 실제 모습은 이랬다.

나 역시 그 당시엔 가보지 못했으나 70년대 부산 남포동 살 때, 자주 다녔다.
잘하는 보신탕집이나 잡화상이 쭉 들어선 시장 길이 생각나지만,

방향감각의 착오인지 영화에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피난시절에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을 보니 실감난 것이다.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보았고,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아래사진은 그 무렵의 자갈치시장인데, 참 정겹고 그리운 풍경이다.
1951년 6월에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이경모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1974년 중랑천 하류의 판자촌]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과 76년 사이 일본인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찍은 사진인데,

그는 청계천빈민들의 참상에 충격 받아 청계천변 빈민구호와 선교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사진가들 눈에는, 이 참혹한 현장이 왜 보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사회적 현실도 안타깝지만, 빈민들의 삶보다 모델에게나 카메라를 들이댄

당시 사진계의 구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1970년대 하반기의 청계천변 판자촌은 복개공사의 끝 지점인 마장교부터 한양대학교 뒤편까지

청계천 양쪽으로 용두동, 전농동, 답십리동,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웃에 길흉사가 있으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고, 더러운 물이라도 받으려고

수 십 미터씩 줄을 섰고, 공중변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의료 사각지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그들이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외치면 경찰봉과

군화발이 사정없이 짓이겨 부서진 가재도구와 함께 주저앉아 눈물 쏟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당시 사회부기자였고 지금은 사회학자인 이태호씨가 증언했다.

1977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에 휩쓸려, 이 곳 개미 촌과 판자촌은 완전 철거되었다.

청계천이 복개되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책 없이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만 내몰리는 건, 변함이 없다.


노무라리포트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1973-1976 노무라 모토유키 사진집에서 옮겼다.

4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과 글들이 수록된 '노무라리포트'는 청계천의 역사다.

    

[1974년 개미촌 움막집 들]




[1973년 답십리 판자촌]


[1973년, 용답동 제3활빈교회 앞 김종길집사와 어린이들]






사진/정영신


설날이지만 혼자 쓸쓸하게 제사를 지냈다.
형, 동생 모두 예수를 믿으며, 시작된 풍속도다.
하나 뿐인 아들 녀석까지 교회에 나가니, 나 죽으면 이 짓 마저 끝이다.
우리 선조들은 조상 모시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차례음식 장만은 돈도 돈이지만, 엄청 힘들었다.
연료비 아끼려다 감기 걸려, 아픈 몸으로 장만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쓸쓸하게 술을 올린 후, 아내에게 말했다.
“나 죽어 제사상 차리면, 구신이지만 상을 확 엎어 버릴끼다.”
아내 대답이 걸작이다. “같이 죽을거니, 차릴 사람이 없어 다행이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는 서민들은 시국이 흉흉하거나,
새해들어 살기가 어려우면, 점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올 해는 좋은 일이라도 생길런지, 복점이나 한 번 볼까보다.

1946년 광주 월산동에서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1974년10월17일 새벽 뉴남산호텔에서 일어난 화재현장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알몸으로 뛰어 내렸겠는가?
침대시트라도 감고 내려오지, 무슨 행위예술의 한 장면 같다.
목숨 앞에는 체면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 것이다.

이 사진의 또 하나 볼거리는 아래층 창에서 고개를 내민 두 소방관의 표정이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을 게다.

전기누전으로 일어 난 화재는 호텔 4,5,6,7층을 태운 끝에,
19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44명에게 중경상을 입인 참사였다.

이창순기자가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의 ‘한국의 보도사진’에서 옮겼다.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을 버린 채, 부산으로 쫓겨났을 무렵이다.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그의 집에 초대한 인사라고 한다.

무례하게 군화발로 방에 들어간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여흥을 돋우기 위해 이화여대 학생들을 불러 노래를 시키고 있다.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의 치맛바람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1951년6월 부산,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대사, 박마리아, 콜트장군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사진집에서 옮겼다.




이 아낙이 팔려고 가져 온 좌판의 물건 값이 모두 얼마나 될까?

요즘 돈으로 환산해도 기껏 만 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가난한 서민들의 삶이란 곤궁하기 짝이 없다.

그마저 맘 편하게 장사할 여건이 아니었다.

단속원이 나타나면 잽싸게 도망쳐야 하니, 늘 바늘방석일 게다.


드디어 단속원이 떴는지, 아낙이 좌판을 들고 있어났으나,

좌판 아래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은 꼬마의 모습이 애처럽기만하다.


이 사진을 보니 수 십년 전, 마산 오동동 부근에서 살 때의 기억이 난다.

어시장 주변 길에 늘 행상들이 들어섰는데, 그 때는 단속을 왜 경찰이 했는지 모르겠다.

경찰백차 스피커를 수시로 울렸던 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아지메 함티 들고~ 아지메 함티 들고~”

그 소리만 들리면 부리나케 이동하였으나, 함티란 말에 묘한 뉘앙스가 깔려있다.

물론 큰 함지를 말하는 경상도 사투리지만, 엉덩이를 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힘 있는 놈들에겐 절절 기면서,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막말해대는 경찰의 횡포였다.


1974년, 대구 이영우씨가 찍은 사진으로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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