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광수선생을 좋아하는 건 단지 588사진집의 발문을 써주어서만이 아니라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피 끓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다.

이광수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올 들어 전시장에서 몇 차례 만나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마침 지난 동강국제사진제에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의 강직한 의지와 소탈한 인간적 면모에 매료된 것이다.

무슨 일이던 개혁을 하려면 혁명가기질의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하다.
바른말을 쏟아내는 이규상선생의 투사정신도 이광수선생 못지않지만

'눈빛출판사'를 운영하며 긴 세월 얽혀 온 사진판의 인맥들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느지막에 사진평론가로 등장한 이광수선생은 그 부분에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일신상의 손해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왕따에다 직업 또는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 할 건 불을 보듯 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약자들을 위해 강자들과 싸울 전사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 사진판 개혁을 운운하는 네가 직접 나서 칼을 휘두르라 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나설 자격을 이미 상실했다.

긴 세월 이어져 온 공모비리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여러 사진단체 일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지난 14회 동강국제사진제 워크샵의 첫 날 최민식사진상 문제가 언급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몇몇 사람의 문제 제기에 대부분의 사진인들이 입을 다물었고, 특히 2-30대의 젊은 사진인들이 나서지 않아 힘을 얻지

못했다는데, 왜 사진인들이 남의 일처럼 등짐을 지고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귀찮아서, 아니면 찍힐까봐.. 

 

그리고 동강사진제에 다녀 와 올린 어느 사진가의 글도 이해는 되었다.

기득권에 줄 대려 살살거리는 꼬락서니에 염증을 느껴 이후로 아예 신경을 끊겠다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10여 년 전 똑 같은 생각을 하며 내 일만 하고 지냈으나, 뿌리만 더 깊어졌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일이기에 끝까지 물고 널어져야 하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말도 있지만, 더러워도 밟아 짓이겨버려야 한다.

이 명경알 같이 밝은 세상에 아직까지 개 같은 일들이 계속된다는데 분통이 터진다.
힘들어도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많은 다큐사진가들의 좌절감을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최민식사진상에서 터져 나온 논란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진판의 병폐 중 조그만 불씨에 불과하다.

이제 시작된 기득권과의 전쟁에서 기어이 이겨내야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의 안미숙선생께서 지난 달 제주도에서 다리를 다쳐 한 동안 꼼짝을 못하셨다고 한다.

고생 끝에 사무실에 출근하였다기에 아내가 점심을 쏜다며 자리를 만들었다.

 

겨우 회덮밥 한 그릇 대접하고, 차 값에다 선물까지 받는 민폐를 끼쳐 버렸다.

안선생께서 아끼는 오미자 원액을 한 병 가져 온 것이다.

안선생, 선물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보약 먹고 힘 넘치면 어쩌지?



사진, 글 / 조문호

 

 




팔레스타인 가자 현장 찾았던 유일한 한국 사진작가 김상훈씨

사진집 내고 전시회 열어 실상 고발… "전쟁터 殺氣 만드는 건 결국 인간

김상훈이 포착한 가자지구는 고통과 증오로 가득하다. 임시 피난처로 사용되던 유엔학교마저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눈빛 제공

 

 

2014년 7월 8일 이스라엘이 ‘프로텍티브 에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8월 26일 휴전까지 50일간 이어진 전쟁에서 가자 주민 2,100명이 숨졌고, 주택 약 2만채가 파괴됐으며, 45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김상훈(44)은 일방적인 열세의 전쟁을 겪으며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가자로 찾아간 유일한 한국인 사진작가다. 그가 2009년 가자 지구 밖에서 촬영한 사진과 2014년 7월 가자지구 내 참상을 촬영한 사진을 묶은 사진집 ‘가자전쟁-미로의 벽’(눈빛 발행)을 냈다.

 

한국에서 8,000㎞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전쟁은 먼 나라에서 벌어진 다른 종교, 다른 민족 간 분쟁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김상훈의 사진을 보면 전쟁의 참상은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이다. 공포와 혼란에 빠진 피난민들, 폐허가 된 집들 사이를 처량하게 지키고 선 놀이기구, 포격의 흔적이 남은 학교의 벽, 그리고 무장단체의 깃발을 온 몸에 두른 채 “이스라엘 박살내자” 같은 구호를 외치는 어린이들까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은 무장단체 하마스 조직원의 장례식에 참석해 "이스라엘군을 박살내자"고 외친다. 눈빛 제공

 

 

김상훈은 사진집 발간에 맞춰 3일부터 서울 충무로2가 갤러리 브레송에서 ‘살기 품은 풍경’이란 개인전을 열기에 앞서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가자 전쟁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월등한 이스라엘이 서울 절반 정도의 면적인 가자지구에 갇혀 오갈 데 없는 180만여명의 민간인을 수시로 공격하는 현장”으로 요약했다. 그리고 “오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때문에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이 커지고 있다”며 “외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중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상훈은 1993년부터 군사전문지 기자로 일했고 2006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전쟁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 등 중동 분쟁지역을 꾸준히 촬영해오고 있다. 아무도 차마 가지 못하는 전쟁터로 향하는 이유는 뭘까. ‘기록에 대한 집착’이다. “전쟁은 인류의 비극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기도 합니다. 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전쟁터에서도 평상심을 지니도록 노력합니다.”

 

 

사진작가 김상훈

 

 

전쟁터에서 직접 찍은 풍경사진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군인이나 무기의 모습이 없었다면 그냥 풍경사진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전쟁터의 풍경에는 ‘살기’가 버무러져 있다”며 “그 ‘살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일까지다. (02)2269-2613

 

 

 

[한국일보]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최원호의 美美하우스] 최민식의 (휴먼선집)

비평가 이영준은 2008년 출간한 <비평의 눈초리>(눈빛 펴냄) 서문에서 '사진의 본질' 같은 것은 이제 개념 없는 지도교수들조차 쓰지 않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한물갔다는 뜻이다. 본질이니 정수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후기 구조주의를 받아들인 사진 비평계에서 방을 뺏긴 지 오래였다.

사진가 최민식은 2009년 출간한 <사진은 사상이다>(눈빛 지음)에서 끝없이 사진의 본질과 정수에 대해 말했다.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은 리얼리즘 사진을 위한 프로파간다 텍스트라 할 만하다. '인간', '메시지', '감동', '사회', '삶-인생', '가치', '깊이' 등의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해 등장한다.

그리고 이영준은 2012년에 출간된 최민식의 사진집 <휴먼 선집>(눈빛 펴냄)의 서문을 썼다. 재미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서문에서 이름을 막 발견했을 때는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서문은 예상대로 (이제 와 비평적 요소로 삼기에는 곤란한) 최민식의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열망 이외의, 동시대에 비평적으로 적용 가능한 특성을 찾았다. 동시에 최민식의 사진들이 사진가 본인의 의도대로 작용하기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쉬움을 전한다.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 알아봤다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범주적으로 늦은 것이다. 즉 그의 사진이 한참 시대의 결을 거스르고 빛을 발할 때는 못 본 척하다가 시절이 좋아지고, 뭐든지 표상 가능하고, 따라서 그의 사진의 힘이 상대화하여 흐물흐물해지고 나서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은 너무 일찍 나타났거나 너무 늦게 나타났다."


사진가가 세상을 뜨고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서문은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운 헌사처럼 보였다. 최민식의 사진이 소비될 수는 있으되 작동하기는 어려운 상황. 나는 거기에 대해 부연하고자 한다. '사진가 최민식'이 위대한 인간임을 증언하는 말들은 이미 많으므로, 그의 유일한 유산인 사진들의 작동 여부에 대해 말함으로써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리고 싶다.

▲ <휴먼 선집>(최민식 지음, 눈빛 펴냄). ⓒ눈빛

최민식이 사진을 찍기 시작할 전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최민식 사진의 지류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 가족전' 사진들이며, 또 하나는 화가 밀레다.

'인간 가족전'은 20세기 중반에 사진가이자 기획자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이 기획한 대규모 전시회였다. 많은 사진가들의 작품들 중에서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선택되었다. 사진이 찍힌 조건은 다양했다.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후진국, 핵가족과 대가족…. 사진 속의 사람들이 처한 환경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모두 공통된 태도, 즉 가족을 위시한 국지적 소집단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인간 가족전'은 반복되는 '훈훈한 휴머니즘'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인류라는 하나의 대가족을 느끼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대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어떤 위기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촛불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가족전'의 주제는 이토록 노골적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류의 보편적인 미덕, 사랑 말이다.

최민식은 이 사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들 중에서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 가족전'적으로 기능한다. 고난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인생의 희로애락.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는 최민식의 사진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 가족전'이 비평가들에게 비판받았던 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전시회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사회경제적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보편적인 애정을 통해 하나로 묶이면서, 그들은 단일한 인류처럼 보인다.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뒤로 숨겨지고 '인류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 가족전'이 순회 전시되던 세계 대도시의 관람객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열악한 환경의 드라마틱한 피사체들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인류 보편이라는 감수성은 사진 속의 사람들을 자신들(관람객들)과 같은 위치로 손쉽게 끌어올려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미국 중산층의 가정과 아프리카의 험난한 상황 속에서 지은 웃음이 같은 것일까? 한 번 웃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고통의 양은 동일한가? '인간 가족전'은 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진들 속의 웃음은 그런 질문을 거부한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인간 가족전'과 똑같은 약점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참담한 민중의 삶을 보여주려던 작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와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 인터넷 서점의 어떤 최민식 사진집에는 철암 출신의 한 독자가 쓴 리뷰가 있다. 그는 타지 사람들이 철암을 찍은 사진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구경거리화하는 대중적 사진 소비 방식 때문이다.

 

▲ '인간 가족전'에 포함되었던 작품 '플룻 연주자'. ⓒ유진 해리스(Eugene Harris)

 


 

 

최민식의 사진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상 '인간 가족전' 유의 인류 동조화 시스템은 언제든지 동작 가능하다. 게다가 그 시스템의 동작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최민식이 사진을 찍은 시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가족전'이 공간적(선택된 대도시)으로 사진 소비자들을 비극적 현실과 격리시켰다면, 최민식의 사진들은 시간적으로 사진 소비자들로부터 서서히 격리된다. 최민식의 사진들은 정말로 너무 늦게 다가온 것이다.

사진이 동시대에서 벗어나 노스탤지어로 진입하는 순간, 사진의 고발은 '그때는 그랬었지'라는 회고의 형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일'로 타자화된다. 이 두 가지 반응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해함은 '우리(시공간을 넘어선 희로애락의 공동체)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 가족전'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는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고발한다는 최민식 사진이 맞닥뜨리는 커다란 딜레마다. 특정 시공간에서 벗어나 보편성 속으로 던져진 고발은 작동 가능한가?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발은 이미지 속의 인간-피해자를 사물화된(인간성을 박탈당한)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왜 인간이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반대의 방향을, 낮은 곳에서의 역설적인 존엄을, 폭력 또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고 우는, 신성불가침의 휴머니즘을 선택했다.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밀레의 대표작들은 주로 노동하는 농민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다. 이 노동들은 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그 엄숙함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노동을 노동 이상의 행위로 치환함으로써 노동과 농민의 삶에 대한 질문을 차단시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의 농민 그림들은 열렬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노동을 감동과 숭고함으로 치환하면서 불안의 그림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인텔리였던 밀레와는 달리 민중을 삶 속에 직접 품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밀레처럼 노동자를 엄숙화한 미적 사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밀레의 그림처럼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 최민식의 '부산, 1965'. ⓒ눈빛출판사

저널리즘 사진의 한 분야인 피처(feature) 사진은 어떤 사실의 전달보다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통해 간접적인 정보 전달과 감정적인 자극을 목표로 하는 분야다. 최민식의 능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피처 촬영 능력이다. 때로 구도 등에 아랑곳 않고 완전히 피사체 자체에 집중해 결정적인 제스처를 잡아내는 그의 능력은 단연 눈에 띈다. 민중의 희로애락을 포착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인상 깊은 표정을 잡아내는 과정을 통해 피사체를 어떤 특별한 위치로 이끈다. 그런 사진들 속에서 가난한 민중들은 빛이 난다. 위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화면 전체를 장악한 피사체가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를 뿜어내는 순간, 사진이 주는 이야기는 완결되어 버린다. 사진 속의 표정과 몸짓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 뒤에 자신이 표출하는 감정을 이야기의 종결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피사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작은 세계의 의미계를 장악하는 순간에 그 피사체는 그 사진 속의 신이 된다. 이것은 어떤 숭고함, 즉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일거에 상쇄시키는 편리한 숭고함이다. 던져질 수도 있었던 질문과 불편함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인간성인가)이라는 편리한 형태로 번역되어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보는 이는 마음 편히 감동에 임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사진은 고발할 힘을 잃어버린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이라고 불리는 순간, 휴머니즘은 고발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동의 형태로 번역된 휴머니즘은 민중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그의 삶은 완전히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맞추었던 초점이 그가 지향하던 곳을 정말로 향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최민식은 2007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바로가기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 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 아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야.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했어.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적 의미보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기도 해."

그러나 그 존엄성이 사진을 향해 던져졌어야 할 물음을 차단하지는 않았는가? 폭력적인 비극에 인간미와 숭고함을 덧붙였을 때, 그리하여 사진이 스스로 답을 던져주었을 때 누가 사진을 향해 질문할 것인가?

3년쯤 전에 후배와 저녁을 먹었다. 후배는 최민식 사진가를 얼마 전에 만났다고 했다. 후배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더니 그는 '아주 열심히 할 게 아니면 얼른 그만 두라'고 답했다 한다. 최민식 사진가는 워낙 힘들게 작업을 해 오신 분이니 그런 고생쯤 각오하라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별다른 조언은 아니어서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다 얼마 전 선생의 추모 웹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지나간 기사들을 뒤지던 중에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래 부분을 볼 때였다.

"내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없이 천착해온 인간이란 주제가 정말로 정직한 것이었던가 그는 이 책에서 되풀이해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라고 따졌을 때, "딸아이가 나에게 던졌던 말이 수도꼭지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나를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한겨레> 2006/12/15 기사)(☞바로가기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

 

사진가 최민식(1928~2013). ⓒ눈빛출판사


나는 후배가 조언으로 구해 들었던 '열심히'라는 말이 단지 외부적인 고난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호도 인간을 위한 리얼리즘을 의심한 적 없다는 그가, 의심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과 얼마만큼 싸워야 했을까 싶어서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잦아드는 회의와 의심을 평생 동안 '아주 열심히' 막아내며 살아야 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자기 확신의 과정이 최민식의 사진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그 힘이 도리어 원래의 의도를 벗어나게끔 조장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게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달리 어쩌겠는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토록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닌 척하고 두 발짝 물러나 사진을 찍고 빈 공간을 통해 질문을 던지겠는가 말이다. 이제 나는 <휴먼 선집>을 타협할 수 없는 인민에의 사랑으로 살아 온 한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읽는다. 아니, 그렇게 읽혀져 버린다.

 

 

 

5월16일은 군사 구테타가 일어 난 날이다.
그 끔찍한 날, '눈빛출판사'의 윤미양이 시집간다는 것이다.
더러운 세상 바꾸려고, 명표군과 윤미양이 구테타 작심을 했나보다.

따뜻한 봄날, 들뜬 마음으로 아내 정영신과 함께 결혼식장에 갔다.
그 곳에는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내외를 비롯하여
박 도선생과 전민조, 엄상빈, 최경자씨 등 아는 분들이 많았다.

그 날 주례는 원주에서 오신 박 도선생께서 서셨다.
박 도 선생께서 주례 선 커플은 여지 것 이혼한 사람이 없다고 하니,
머리가 파 뿌리되도록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그러나 '눈빛출판사' 일을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 곳은 이규상, 안미숙씨 두 내외와 윤미씨가 꾸려가는
가내 수공업 수준인데, 이젠 두 내외가 도맡아야 할 형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 처럼 어떻게 되겠지..

동갑내기 친구라는 인연으로 시작되어 연인과 부부로 바뀌어 간
홍명표군과 성윤미양의 행복한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세상일이나 사랑이나 모두 한결 같아야 하는 것이니라.

사진,글 / 조문호

 

 

 

 

 

 

 

 

 

 

 

 

 

 

 

 

 

 

 

1980년대 중반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밤 문화를 기록한 사진가 김남진(58)씨가 『이태원의 밤』(눈빛출판사)이란 제목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당시 27세였던 김씨는 서울 최고의 유흥가였던 이태원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태원은 누구나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지만 80년대의 이태원은 평범한 젊은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외국인과 혼혈인, 성 소수자들의 놀이터였고 나이트·디스코클럽, 게이바가 즐비했던 유흥가였다. 서울사람조차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던 낯선 공간이자, 우리 땅이면서 미국 땅 같은, 그야말로 ‘포토제닉’한 공간이었다.

김씨는 84년부터 86년까지 일주일에 2~3번씩 이태원의 길거리와 업소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이곳 이미지에 휩쓸려 환락의 거리를 찍었다. 뱀쇼·봉쇼·스트립쇼부터 번쩍이는 불빛 아래 춤추는 무희들, 술에 취한 여장남자, 불나방 같은 하룻밤의 쾌락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내 “이곳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업소에서 ‘영계’라 불리는 젊은 여자들과 웨이터들은 대부분 가난을 물리치고자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 이태원은 단지 치열한 일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잠시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요기와 말초신경을 위한 감정의 해방구일 수 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도 격양된 흥분도 찾기 힘든 황폐한 땅이었다”고 고백했다. 이곳 사람들은 어느덧 익숙해진 김씨와 그의 카메라에 경계심과 거부감을 풀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함부로 카메라를 꺼낼 수 없는 곳에서 용기 내 찍었던 이 사진들은 당시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쉽게 발표할 수 없었다. 일부 사진들이 87년 4월에 열린 전시에서 빛을 봤지만 이후 안타깝게도 김씨는 필름을 몽땅 잃어버렸다. 사진집『이태원의 밤』은 전시를 위해 인화했던 사진을 스캔해서 만든 것이다. 28년의 시간을 간직한 빛바랜 사진들은 3일부터 열리는 출판기념전을 통해 소개된다. [사진 김남진]


◇김남진 사진전 ‘이태원의 밤’. 4월 3일부터 4월 14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B1. 02-2269-2613



중앙일보 /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청량리588‘전시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전시 종료를 이틀 앞둔 지난 주말에는 시인 강 민, 김가배 선생께서
김수영시인의 미망인이신 김현경선생을 모시고 오셨다.

김현경선생께서는 구십을 넘긴 연세지만 아직 짱짱하시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김수영선생의 생전 일화들을 심심찮게 들려주신다.
‘청량리588’전시를 둘러보신 후, 익숙한 풍경이라며 말씀을 꺼내셨다.

돌아가신 김수영선생께서 옛 홍등가인 ‘종삼’에 가끔 들리셨다는데,
한 번은 술이 취해, 아끼는 군용 털내의를 두고 나와 통탄해 하셨다고 한다.
어느 집, 어느 방인지도 몰라 안타까워하시기에, 다시 사주겠다며 달랬다는 것이다.
정말 간 큰 남편이고, 통 큰 아내였다.

그 날은 가수 최백호씨와 기와장 오세필씨도 들려 김명성씨와 함께 '툇마루'에서 점심을 먹었다.

최백호씨는 축구를 하다 넘어져 한 달 넘게 고생하였다고 한다.

점프를 하다 그만 발에 걸려 넘어졌는데, 머리로 바닥을 쳤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큰 일 날뻔한 사고로, 좋아하는 축구도 이제 못하게 됐다.

 

사진가로는 한정식, 전민조, 변홍섭씨가 오셨고,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사진가 구본상, 이경수, 김봉규씨와 함께 들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 날엔 막차로 서양화가 장경호, 김정대씨가 찾아 와 ‘화신포차’에서 소주 한 잔하였는데,

이 날은 이대훈, 노인자 내외가 늦게 와 염소 고기집에서 소주 한 잔 했다,
옆 자리에는 서양화가 김종숙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박인식, 조근숙씨 일행도 있었다.

 

술, 웬수같지만 난 버리지 못한다. 세상이 술 취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게 만드니까.

술, 담배, 섹스, 모두 마약처럼 중독성을 가졌지만, 버릴 수 없고 버리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그 것 다 버리면, 사는 재미가 뭘까?.... 

 

 

글:조문호/사진: 정영신, 조문호

 

 

 


 

 

 

 

 

 

 

 

 

 

 

 

 

 

 

 

 

 

 

 

 

 

 

 

 

 

 

 

 

 

 

 


 

예스터데이



박신흥 글·사진|눈빛|160쪽|1만5000원

흑백사진 속 열 살 남짓 아이는 이제 쉰 살 어른이 됐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세로쓰기 신문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잡지 '선데이서울'이 표지가 보이도록 꽂혀 있다. 껌과 개비 담배를 함께 파는 가난한 좌판이다. 엄마는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아이가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작은 손에 연필을 쥐고 낡은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다. 이번 받아쓰기 시험엔 꼭 백점을 맞겠다는 듯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1970년대 사진 속 풍경은 아련한 추억으로 달려가게 한다. 수도 시설 없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에 '물차'가 오는 날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1.8t 트럭에 실려온 물을 받으러 판잣집 주민이 다 모였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물통 두 개를 양손에 든 아이, 젖먹이를 업고 나온 엄마, 어린 동생을 안은 여자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삶의 힘을 읽을 수 있다. 변변한 놀이 시설은 없지만 말타기 놀이를 하며 친구들과 함께 뛰노는 아이들 모습은 건강해 보인다. 동무 등 위에 올라타려고 달려온 아이 얼굴엔 장난기가 그득하다.


 

엄마 대신 가게에 앉아 공부하는 이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가난해도 꿈이 있던 시절이다. 1976년 경기도 부천. /눈빛 제공

 

버스 옆을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여(女)차장의 무표정한 얼굴, 졸업식날 검은 교복에 허연 밀가루를 뒤집어쓴 남학생들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한갓 고단한 시대였다고, 단지 고통의 나날이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40여년 전 서울·경기·강원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작가는 "모두가 어려웠다. 그러나 꿈을 안고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1970년대 일상을 담은 사진집이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다.

 

조선일보 / 이한수기자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 개인 사진전 'Yesterday'

 

박신흥 킨텍스 상임이사가 13~18일 서울 정동갤러리에서 개인 사진전 'Yesterday'를 갖는다.

1970년대 경기도 일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필름 카메라 렌즈로 서정적으로 담아낸 47점이 전시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하러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말로만 듣던 카메라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까까머리 어린이,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흉내 내는 아이들 등이 공개된다. 작품의 제목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당시의 생활상이 따뜻한 아날로그의 감성으로 표현됐다


박신흥 이사가 1975년에 찍은‘턱걸이’. 한 여자 아이가 오빠들이 하던 턱걸이를 안간힘을 쓰고 흉내 내고 있다.

 

박 이사는 "70년대 학창시절에 사진기자를 꿈꾸며 찍었던 작품들"이라며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만 그려지고 보기 힘든, 이야기가 담겨있는 장면들을 골라 전시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