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최대의 환락가 ‘가부키쵸’의 20년을 밤낮으로 기록한 한국인 사진작가가 있다. 그 화려한 공간을 메꾸어 온 시간은 물론, 소외된 자들의 체온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집 <‘가부키쵸’, 고단샤>는 일본 최고의 권위있는 출판상 중 하나인 고단샤의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그가 내놓은 포토에세이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는 2014년 도쿄 북페어 지금 꼭 읽어야 할 책 3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TV출연은 물론, 그의 사진이 실리지 않은 일본의 시사지가 없을 정도다. 보도 사진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활동하며 ‘한국인 사진가로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다양한 공적을 남겨온 사진작가 권철(1967년생).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아껴 마지않는 일본을 떠나, 대한민국의 관문이라 그가 표현한 제주에서 일 년의 경유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서울 한복판에 새 둥지를 틀었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 씨의 향방이 궁금하다.    

 

 

동문시장 정신지


 
사진가 보고 왜 스나이퍼라 부르지?

일본인들은 그를 저격수 사진가라 부른다.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라는 배경도 그렇거니와, 쉽게 타협하지 않고 한번 시작한 일은 ‘제대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에 제법 어울리는 별명이다. 경상도 남자 천성을 타고나, 말수도 없고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이지만, 권철의 사진에서는 체온이 느껴진다. 무시무시한 일본 가부키쵸 야쿠자의 사진에서도, 지진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마을의 풍경에서도,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도, 보여지는 것은 욕망과 절망을 뛰어넘은 살아있음에의 ‘감사함’이다.  

 

권철과텟짱 <텟짱등에 업힌 작가>


 
어쩌다 사진을 시작했나?

원래는 토목공학과 출신이다. 하지만 대학 다니며 배운 것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만드는 사람들이 돈을 벌면 벌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부실해진다는 부조리가 전부였다. 주위의 바람대로 대학을 나와 한국에서 취직했다면 나 역시 세상을 부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이 되어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일에 가담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1994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에 가자마자 한국에서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한신대지진도 있었다. 나의 스승 히구치 켄지(1937, 일본 피폭노동자 탐사보도 사진작가)는 평생 끈질기게 원전에 관한 사진을 찍고 있는 분인데 그를 비롯한 좋은 스승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위)가부키쵸 호스트 그룹(아래)가부키쵸 야쿠자


        

가부키쵸 사진 중에서도 야쿠자 사진이 유명하다. 도대체 그런 장면들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1996년부터 찍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서워서 찍을 엄두도 안 났다. 주머니에 칼을 차고 양손에 철봉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 장도 못 찍고 들어오면 억울해서 잠이 안 왔다. 한 대 맞더라도 내일은 꼭 촬영하리라 다짐하며, 짝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매일 밤을 설치다가 결국은 성공했다. 물론 위협도 당하고, 잡혀서 야쿠자 사무실에도 끌려간 적도 있다.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카펫 위에 ‘오야붕(두목)’이 앉아 있었는데, 거기서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런데 아무리 겁을 줘도 내가 또 찾아가고 몇 마디 대화 끝에 나의 신분이 ‘사진을 배우는 유학생’이라는 걸 알고는 ‘끈질긴 놈’ 하며 웃어넘기더라.



‘가부키쵸’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끌어내기 위한 작가만의 노하우가 있었나?

가부키쵸는 일본의 심장부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권력과 욕망의 지배 하에서 돌아가는 곳이다. 야스쿠니신사도, 일본 최대 규모의 재일조선인 밀집지역도 모두 다 한동네에 있다. 365일 야쿠자와 경찰이 충돌하고,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과 노숙자 꼬마들이 공존하던 그 골목 한쪽에 내 20년의 삶도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사진 작업을 주로 했었지만 결국 모든 작업을 컬러로 마무리했다. 모든 것이 흑백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라, 아무래도 흑백보다는 컬러가 나을 법 싶었다. 그러면서 가부키쵸라는 공간에 온도를 불 어넣게 된 것 같다. 가로 36mm 세로가 24mm인 카메라의 작은 파인더에 공간이 가진 시간성을 넣는 것 또한 어려운 작업. 그건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내 책상 위에는 늘 세 개의 달력이 있다. 작년, 재작년의 오늘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작업을 한다.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은 그렇게 발품을 팔며 꾸준히 작업해야 사진에 표현되는 것 같다.   

 

쓰촨성 대지진 엄마와 아기

 

        

보도사진가와 다큐멘터리사진가의 차이점은 뭔가?

보도 사진가는 ‘사실’을, 다큐 사진가는 사실을 치고 들어가 그 안에 내재하는 ‘진실’을 찍는 것이 일이다. 보도 사진은 사건이 남과 동시에 콘셉트가 정해지지만, 다큐는 그렇지 않다. 진실은 쉽게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다큐 사진가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한 순간이 한 장에 담겨야 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진실을 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한때 남들이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프리랜서 보도 사진가였다. 전 세계를 누비며 찍은 보도 사진을 팔며 도쿄 한복판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최고의 장비를 모자랄 것 없이 다 갖추고 살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버는 것도 쓰는 것도 한 순간, 배가 부르면 부른 대로 욕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이고 나 역시 그 경험을 했다. 하지만 2008년의 어느 날, 내 삶에 커다란 트라우마가 찾아왔다. 그 일을 계기로 보도사진가의 길은 접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찍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며 사진을 찍을 수도 쳐다볼 수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의 운명을 바꾼 2008년, 무슨 일이 있었나?

2008년 중국 쓰촨성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8만 명의 희생자가 났다. 아비규환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전 세계 사진가들이 쓰촨성에 모였다. 프레스 라인 안쪽에 프레스센터가 있었는데, 그 수많은 사진가들이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니 사진이 좋다, 내 사진이 좋다.’ 해가며 죽은 사람들 사진에 핏자국 선명하게 포토샵 작업을 하고 있었다. 라인 바깥쪽 세상에선 생존자들이 슬픔에 절규하고 있는데 말이다. 몰래 프레스 라인을 넘어가 마을에 잠입했다. 그곳에서 3일을 보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찍었다. 지진이 있고 5일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내에 있는 아동병원을 향했다. 후문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위급해 보이는 한 아동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몸에 모포를 두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두 다리가 없었다. 간신히 목숨만 붙은 채 들것에 실려가던 아이가 빤히 고개를 돌려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루쇄)라고 하는 열두 살 여자 아이였다. 무너진 건물에 몸이 끼어 탈출하지 못하던 그녀를 구할 길은 두 다리를 절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의사도 아닌 군인들이 톱으로 마취도 없이 꼬마의 다리를 절단했고, 절규하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어머니와 딸은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고 기적처럼 재회했다. 병원에 실려온 아이의 어머니는 나에게 딸의 잘려나간 다리를 보여주며 찍으라 했다. 이것을 꼭 찍어서 세상에 보여주라며 오열했다. 눈물 때문에 파인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면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결국, 그 사진을 데이즈 재팬(DAYS JAPAN)을 비롯한 일본내 사진 주간지들이 대서특필했고, 그들은 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돈을 루쇄의 사진과 바꿔갔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보도 사진을 찍지 않았다. 상업 사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을 피사체로 하는 사진을 찍어 팔며 나 홀로 안이하게 살아가기에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다큐 사진 역시 피사체와 작가의 숙명적인 과업과도 같은 것인데, 그 과정에서 사진작가만 상업적으로 득을 본다면 그것은 부조리한 일이 아닌가? 사진에서는 늘 피사체가 갑이 되어야 한다. 피사체를 통해 작가가 박수갈채를 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판단했다. 

 

왼쪽) <가부키쵸> 눈빛출판사 2014(오른쪽)<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눈빛출판사 2014


 
한국에서도 출판된 <텟짱-한센병에 감사한 시인, 사이류사>은 어떤 책인가?

텟짱(1924-2011 본명 나가미네 도시조, 한센병 회복자이자 시인)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다. 1997년 한센병 회복자들이 격리 생활을 하는 라쿠센엔이라는 요양원에서 자작시를 발표하던 그와 처음 대면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누가 봐도 거부감을 일으키는 첫인상의 소유자이지만, 오랜 시간 같이 호흡하고 거리감을 좁혀가면서 이렇게 맑고 귀엽고 천재적인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에서 평생을 처박혀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87세의 나이로 텟짱이 돌아가시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것(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텟짱은 내 사진을 통해 세상에 한센병 회복자의 존엄성을 알림과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다.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눈빛출판사)>은, 그들과 세상 사이에 존재했던 벽을 허물기 위해 오랜시간 나와 텟짱이 가슴을 맞대고 공동으로 작업한 책이다. 여태까지 본 피사체의 눈빛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텟짱의 눈빛이다. 텟짱은 한센병의 치료제인 프로민의 과잉 사용으로 한쪽 눈을 잃었고 남은 한쪽도 시력이 없었다. 하지만 방에 누워 있다가 가끔 내 쪽을 보며 “곤짱~, 야키니쿠 이코우카(우리 불고기나 먹으러 갈까)?” 하며 귀엽게 말씀하시던 목소리가, 그 맑은 눈빛이 지금도 아련하다. 생전에 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텟짱이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텟짱이 책으로나마 한국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의 한센병 환자는 없다.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환자’가 아니라 ‘한센병 회복자’라 부르는 것이 맞다. 평생 그분들이 가슴에 안고 살아왔을 슬픔을, 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일본을 떠난 이유?

내가 만일 아직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뒤늦게 나타나 나를 구제해 준 아내 덕에 결혼해서 첫아들이 태어났는데, 딱 100일 만에 동북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곧바로 후쿠시마로 달려가 취재를 했고, 찍어 온 사진을 도쿄 한복판의 공원에 모아 놓아 전시하며 누구보다 빨리 사람들에게 피해의 참상을 알렸다. 하지만 사진가이기 이전에 책임져야 할 갓난아기가 있는 처지가 되고 보니, 일보다는 가족이 먼저였다. 더는 도쿄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에 짐을 풀자마자 곧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20년 전, 한국을 떠나던 해에 무너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과거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의식 수준이다.



제주생활은 어땠나? 앞으로의 계획은?

욕망이 지배하는 가부키쵸에서 20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제주가 보였다. 사실은 가족과 함께 쉬고 싶어 찾아온 곳이 제주도였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해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제주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사진으로 찍어왔고 앞으로도 찍어가겠지만, 내가 찍어야 했던 제주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평생을 일구어 온 할머님들의 땅과 바다가 중국의 거대 자본의 손에 하나 둘 팔려 나가고 있다. 제 땅과 바다를 아무렇지도 않게 중국인에게 팔면서도 극단적인 무공포증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빼앗긴 것과 팔아버린 것은 엄연히 다른데, 대책 없이 중국 자본의 물꼬가 터져버린 제주에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자본과 정책과 의식의 병폐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려나는 해녀들의 마지막 물질(해녀들의 잠수 작업)을 기록하기 위해 함께 물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빠르면 다가오는 봄과 여름 사이에 제주에서 취재한 내용을 담은 사진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15년은 한·일수교 50주년과 동시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특별한 해이다. 10년 이상 작업해온 야스쿠니신사에 관련된 사진집 출판이 예정되어있고, 나머지는 차례차례 해 나갈 예정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할 일이 너무나 많을 것 같은 서울. 새롭게 펼쳐진 캔버스에 뭘 그려나가게 될지 나 역시도 기대된다.


“내가 좋아서 해왔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누군가와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꺼? 아입니꺼? 하하하.”

인터뷰를 마친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일본인들이 사랑한 사진작가 권철의 마력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작은 것에 감사해 하며 늘 낮은 곳에 조용히 포복하고 앉아, 보여지는 것의 뒤편에 숨겨진 진실과 쉽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그는 진정한 저격수 사진가다. 얼마전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내와 전전긍긍하며 찾아낸 서울시의 한 옥탑방에 이제 막 세 식구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 군더더기 없는 소박한 시작으로 주어진 매순간에 감사하며 이 시대를 기록하는 진정한 ‘꾼’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니, 오랜만에 참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MK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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