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사진가 마동욱씨의 인사동 출입이 요즘 잦다.

닥아 오는 615일부터 열릴 인사동 토포하우스의 개인전 준비와 사진집 제작 때문이란다.

 

눈빛출판사에 들릴 일이 있다던 지난8, 오후6시쯤 인사동서 만나기로 했으나,

갑작스런 일거리가 생겨 두 시간이나 늦춘 것이다.

그동안 하지권, 최광호씨 사진전에도 들리고, 인사동거리를 지나는 연등행렬도 찍었다지만,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두 시간이나 기다릴까 궁금했었는데, 느닷없이 돈 봉투를 내민 것이다.

지난 번 김보섭씨 전시장에서도 촬영비 선금이라며 십 만원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이십만원이었다.

사진하는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빤히 아는 터라 받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은 부탁한 일 값이라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년 초에 살기 힘들어 유료 포스팅 문화알림방을 한다는 글을 올릴 때부터 제일 먼저 신청하더니,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선금까지 줘가며 마음 써 주는, 그 따뜻한 인정에 한 마디로 감동 먹은 것이다.

자기도 선배처럼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겨냈다며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아무튼 그 고마운 뜻에 보답하는 길은 이번 전시를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돕는 일 밖에 없었다.

 

야간열차 타려 서울역으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처다 보며 혼자 생각했다.

아직은 괜찮은 세상이구나. 저런 분이 있으니, 세상에 희망을 가져도 되겠구나!”

      

사진, / 조문호

    











어버이의 날에 즈음하여 다큐사진가 박병문의 “아버지의 그늘” 사진집(눈빛출판사) 출간과 전시회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에서 열려 애잔한 가족애를 일깨우고 있다.

5월6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박병문 사진전은 검은 분진으로 휩싸인 탄광촌 철암의 오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 사진들은 쇠퇴해가는 탄광촌의 현실에 앞서 광부였던 아버지를 그리는 사진가의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배어있다.

사진들을 보면 왠지 슬퍼진다. 그 삭막한 폐광에서 인간애를 느끼는 것은, 사진들이 주는 잔잔한 울림 때문이다.

사진가가 보여주려 한 것도 사라져가는 탄광의 빛바랜 풍경이 아니라 아버지가 힘겹게 살아 온 공간과,

그 안타까운 삶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삼방동 언덕길, 빛바랜 월급봉투, 칠흑의 냉기에 휩싸인 지하막장,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까치발 건물과 분진이 날리는 저탄장 등 아버지가 살아 온 자취들이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나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가 박병문이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들추어내며 추억 속 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록해 온지도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꾸준히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해 온 것은 아버지의 자취를 통해 탄광촌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었을 게다.

한 편으론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 보는 이의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슬픈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하였다.

여지 것 탄광을 촬영한 사진가들이 여럿 있으나 대개 한 차례의 작업으로 끝냈지만, 박병문씨는 달랐다.

탄광 바깥에서 들여다 본 사진가의 시선이 아니라, 탄광은 그가 살아온 추억의 공간이고 아버지의 혼이 박힌 곳이었다.

선탄부(여자광부)에 이어 진폐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갈 것이라는 그의 다짐은 한 개인의 가족사기 전에

우리 탄광의 소중한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박병문씨는 2010년 강원도사진대전 대상과 2013년 제1회 최민식사진상 특별상 대상을 받으며 사진계에 알려졌다.

2014년에는 “아버지는 광부였다”란 사진전을 열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사라져가는 탄광의 아픔을

슬픈 가족애로 이끌며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얼굴에 맺힌 아버지의 눈물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우리의 시대적 아픔으로 닥아 왔던 것이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작업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해 “검은 땅 우금에 서다”에 이어 또 다시 ‘아버지의 그늘’을 펼쳐 보이는 등,

아버지에게 바치는 세권의 사진집을 연이어 펴낸 것이다.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기록으로 불러들인 기억 그리고 광부 아버지“란 서평에서

박병문의 사진은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6일 오후6시에 열린 사진전 개막식에는 전시작가 박병문씨를 비롯하여 ‘갤러리 브레송’ 김남진 관장,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사진비평가 이광수, 사진가 엄상빈, 황규범, 김문호, 강제훈, 김봉규, 노형석,

강제욱, 최영진, 하지권, 성남훈, 은효진, 김재영, 김가중, 정태만, 박영환, 방종모, 남 준씨 등

많은 사진가들이 자리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가 박병문 사진집 아버지의 그늘’ (눈빛출판사) 책표지


삼방동, 2014


삼방동, 2012년


폐가, 2007년


선탄장, 2012


대한석공, 2012년


퇴근하는 선탄부, 2007


선술집, 2007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


눈 속의 광부 동상, 2015

 

철암 전경, 2012년


-전시 개막식 사진들-






















-전시 뒤풀이 사진-











































오는 21일까지 충무로 '갤러리 브레송'



▲사진가 박병문 사진집 ‘아버지의 그늘’ (눈빛출판사刊) 책표지



사진들은 쇠퇴해가는 탄광촌의 현실에 앞서 광부였던 아버지를 그리는 사진가의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배어있어 사진들을 보면 슬퍼진다. 그 삭막한 폐광에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진들이 주는 잔잔한 울림 때문이다.



▲삼방동, 2014년



사진가가 보여주려 한 것도 사라져가는 탄광의 빛바랜 풍경이 아니라 아버지가 힘겹게 살아 온 공간과, 그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삼방동 언덕길, 빛바랜 월급봉투, 칠흑의 냉기에 휩싸인 지하막장,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까치발 건물과 분진이 날리는 저탄장 등 아버지가 살아 온 자취들이 마치 한 편의 흑백영화처럼 나른하게 펼쳐지고 있다.



▲퇴근하는 선탄부, 2007년



사진가 박병문이 유년시절의 기억까지 들추어내며 추억 속 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록해 온지도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꾸준히 아버지의 흔적들을 추적해 온 것은 아버지의 자취를 통해 탄광촌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편으론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 보는 이의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슬픈 기억들을 떠 올리게 하는 것이다.



▲선술집, 2007년



여지껏 탄광을 촬영한 사진가들이 여럿 있었으나 대개 한차례의 작업으로 끝냈지만, 박병문씨는 달랐다. 탄광 바깥에서 들여다 본 사진가의 시선이 아니라, 탄광은 그가 살아온 추억의 공간이고 아버지의 혼이 박힌 곳이었다. 선탄부(여자광부)에 이어 진폐에 대한 기록으로 이어갈 것이라는 그의 다짐은 한 개인의 가족사기 전에 우리 탄광의 소중한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철거 중인 철암시장, 2014년



박병문은 2010년 강원도사진대전 대상과 2013년 제1회 최민식사진상 특별상 대상을 받으며 알려졌다. 2014년에는 “아버지는 광부였다”란 사진전을 열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사라져가는 탄광의 아픔을 슬픈 가족애로 이끌어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새까만 얼굴에 맺힌 아버지의 눈물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 우리의 시대적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눈 속의 광부 동상, 2015년


아버지를 기억하는 작업은 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해 '검은 땅 우금에 서다'에 이어 또 다시 ‘아버지의 그늘’을 펼쳐 보이는 등, 아버지에게 바치는 세권의 사진집을 연이어 펴낸 것이다.



▲사진가 박명문


사진비평가 이광수교수는 ‘기록으로 불러들인 기억 그리고 광부 아버지’란 서평에서 “박병문의 사진은 아버지께 바치는 헌시”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어디 한 번 재 봅시다”

73년 경범죄 단속법이 발효되며 아가씨들의 미니스커트와

남자의 장발이 단속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단속 첫날인 1973년 3월10일, 명동파출소 앞에서 치마길이를 재고 있다.
갑작스런 단속에 아가씨들이 울상을 짓는 등, 도처에서 웃지 못 할 헤프닝이 벌어졌다.

요즘 젊은이들 같았으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난리났을 게다.
아마 경찰은 성추행이란 올가미에 씌어 옷 벗고, 교도소 갔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도 장발로 경찰을 피해 다니다, 붙들려 구류까지 산 적이 있다.
머리를 잘리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저항의 의미가 더 컸다.


최덕천기자의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의 보도사진‘에서 옮겼다.




한정식선생님 모시고, 식사 한 끼 하자는 말을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로 부터 전해 들었다.

지난 20일 정오무렵, 선생님의 경운동 오피스텔로 찾아뵙기로 한 것이다.

인사동 '양반댁'에서 가진 그 날의 오찬 모임은 파리 도서전에 다녀 온 후, 첫 자리기도 했지만,

, 수정하고 있던 ‘87민주항쟁원고를 그 자리에서 넘겨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규상 대표는 파리 도서전에서의 성과가 무척 좋았다고 한다.

사진가는 물론 출판, 사진관계자 등 많은 분들이 부스를 방문해 우리나라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주최 측에서는 한정식선생의 북촌’, 전민조씨의 서울’, 오상조씨의 당산나무’, 정영신씨의 한국의 장터’,

임재천씨의 제주도’ 등 다섯가지 사진집을 다섯 권씩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젠 눈빛출판사도 외국 독자들을 위해 영문표기를 하는 등, 글로벌한 경영체재를 갖추겠다고 말했.

이번 도서전에는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을 비롯하여 발스총리까지 참가해 힘을 실어주었는데,

우리나라는 주빈국 임에도 불구하고 주불대사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니 귀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리고 도서전을 끝내고 귀국하며 선물로 향수까지 사왔는데, 너무 황송스러웠다.

아무튼, 반가운 소식 실어 온 즐거운 자리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처럼 책 안보는 민족이 또 있을까?

그저께 술 취해 들어가다 지하철의 책 파는 진열대를 들여다 보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소설과 수필집 세권을 묶어 만원씩 팔고 있었다. 제작비는 고사하고 종이 값 정도에 불과한 가격이었다.

당장 볼 시간도 없고, 꼭 필요한 책이 아닌데도 소주 한 잔이란 책 제목만 보고 산 것이다.

술김에 샀지만, 평소 같으면 사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술이 이것 저 것 계산하지 않고,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규상대표와 함께 가나인사아트에서 열리는 한국화가협동조합창립1주년 기념전에도 들렸다.

입구에서 이종승 화백을 만나기도 했고, 인사동을 떠도는 관광객에 휩싸여 거리를 떠돌았지만,

내 머리에 남은 건 지리산밥집 앞에서 문짝을 들어내 창호지를 바르는 모습이었다.

향수에 비롯되었겠지만, 우리나라의 생활 풍습인 이런 모습이 더 인사동답지 않을까?

 

사진, / 조문호











































1953년 추운 겨울,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린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쟁 중의 영세 상인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엄동설한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서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로 인기를 끈 국제시장은 해방되어 귀국한 동포들의 노점으로 시작되었는데,

본래는 ‘도떼기시장’으로 불렸다. 1948년 '자유시장'이란 이름으로 단층목조건물 열 두동을 지었는데,

전쟁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성시를 이루자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꾼 것이다.

그 당시는 속칭 양키시장으로 원조물자나 군용품은 물론 외제밀수품들이 판 쳤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예술가들도 국제시장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잖은데,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며 온갖 정보의 원천이었다.


이 사진은 김한용선생께서 찍었으며,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진과 리얼리즘’에서 옮겼다.







가마를 탄 신부와 조랑말을 탄 신랑이 신부집 혼례를 마치고 신랑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전날 밤에는 신방 들기 전에 꺼꾸로 매달려 혼줄 났겠지요.

옛 결혼 풍습이 그리워지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난리 통에 결혼식을 올리는 모양인데, 아마 신랑이 군인인 듯합니다,
차에다 개통식이라 쓰 놓았는데, 무슨 고속도로 개통합니까?
잘 못하면 과부 만들지도 모르는데, 엔간히 급했던 모양입니다.

이경모선생의 사진으로 처음 사진은 1948년 전남광양에서 찍었고,
두 번째는 1951년 6월 부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격동의 현장‘사진집에서 옮겼습니다.

전남순천 1948,10


무슨 철천지 원수졌다고, 같은 민족을 이토록 처참하게 죽일 수 있었을까?
공산주의가 뭐고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이

무슨 이유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만 했단 말인가.

주도권을 잡으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승만이 나쁜 놈이지만,

이를 조종하는 미국과 소련놈들은 더 나쁜 놈들이다.

긴 세월동안 중국과 일본 놈께 당한 것만도 서러운데,

끈임 없이 외세에 시달려야하는 우리민족의 이 기구한 원한을 어찌 달랠꼬?

이 여수, 순천반란사건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며 생긴 일이다.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선두로 제주도 4,3사건, “5,10 단선반대 투쟁”,

10월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 끈질긴 싸움들은,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인 처참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일어 난  무장유격투쟁이 시발점이었다.

제주도가 소요에 빠져 있을 때, 여수에서 제주도 토벌을 위해 정부군 제14연대를 보내려했으나

그 사병들이 출동을 거부하며 벌어진 사건이었다.

48년 10월 19일에 일어 난 이 반란은 약 1주일간 여수와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보성 지역을 휩쓸었다.

2,000여명의 사병들이 “일제 경찰타도, 제주도 출동거부, 남북통일 등의 구호를 내걸며

여수시내로 진입하며 불이 붙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여수,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반란군 토벌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했지만,

토벌대의 일부가 반란군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반란은  장갑차, 경비행기, 군함 등이 동원되고, 여수가 불바다가 된 후에야 진정되었다.

토벌군과  반란군 모두  2,000여명이나 죽는 이 엄청난 사태는 이승만의 욕심에 희생된 재물이었다.

토벌군에 밀려 난 일천여명의 반란군이 김지희, 홍순석의 지휘아래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도피해

일단의 막은 내렸지만, 산발적인 싸움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남과 북이 갈라지는 분단의 고착화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갈수록 그 냉전체제는 심화되고 있다.
문제는 그 지루한 싸움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정말 우리는 슬픈 민족이다.


글 / 조문호


사진은 1948년 이경모선생께서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의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사진집에서 옮겼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순천 1948,10 / 한 여인이 남편의 시신을 찾고있다.


전남 순천근교 1948,10


전남 담양 1951,2 / 부역혐의자들이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돼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연좌제에 걸려 제대로 사회생활을 해 나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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