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이란 영화가 뜨면서 한 때 국제시장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세트장도 비슷하긴 했지만, 당시의 실제 모습은 이랬다.

나 역시 그 당시엔 가보지 못했으나 70년대 부산 남포동 살 때, 자주 다녔다.
잘하는 보신탕집이나 잡화상이 쭉 들어선 시장 길이 생각나지만,

방향감각의 착오인지 영화에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피난시절에 찍은 이경모선생의 사진을 보니 실감난 것이다.
다시 한 번 사진의 힘을 보았고,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한 것이다.

아래사진은 그 무렵의 자갈치시장인데, 참 정겹고 그리운 풍경이다.
1951년 6월에 찍은 사진으로,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이경모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옮겼다.








[1974년 중랑천 하류의 판자촌]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지은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사진은 1973년과 76년 사이 일본인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찍은 사진인데,

그는 청계천빈민들의 참상에 충격 받아 청계천변 빈민구호와 선교에 나섰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 사진가들 눈에는, 이 참혹한 현장이 왜 보이지 않았을까?

당시의 사회적 현실도 안타깝지만, 빈민들의 삶보다 모델에게나 카메라를 들이댄

당시 사진계의 구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1970년대 하반기의 청계천변 판자촌은 복개공사의 끝 지점인 마장교부터 한양대학교 뒤편까지

청계천 양쪽으로 용두동, 전농동, 답십리동, 마장동, 사근동, 용답동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웃에 길흉사가 있으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고, 더러운 물이라도 받으려고

수 십 미터씩 줄을 섰고, 공중변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의료 사각지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그들이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외치면 경찰봉과

군화발이 사정없이 짓이겨 부서진 가재도구와 함께 주저앉아 눈물 쏟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당시 사회부기자였고 지금은 사회학자인 이태호씨가 증언했다.

1977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에 휩쓸려, 이 곳 개미 촌과 판자촌은 완전 철거되었다.

청계천이 복개되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책 없이 서울 변두리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만 내몰리는 건, 변함이 없다.


노무라리포트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1973-1976 노무라 모토유키 사진집에서 옮겼다.

4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사진과 글들이 수록된 '노무라리포트'는 청계천의 역사다.

    

[1974년 개미촌 움막집 들]




[1973년 답십리 판자촌]


[1973년, 용답동 제3활빈교회 앞 김종길집사와 어린이들]






명절이 닥아 오면 몸도 마음도 바빠진다.
사흘 동안 정선으로 장터로 정신없이 떠돌다 왔다.

예전에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목욕탕과 이발관이 북새통을 이뤘으나,

요즘은 집에서 목욕을 해서 그런지 한산하다. 

늦은 시간, 설 차례에 대비해 이발소부터 찾았다.
우리 동내엔 음흉한 이발소 밖에 없어, 미용실에서 잘라야 했다.
어떻게 자를까 묻기에 아지매 마음대로 자르랬더니 일사천리다.
가위질 몇 번하고 훌훌 털어 버리니 끝이란다.

오래전, 김기찬씨가 찍은 이발소 풍경은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의자를 재키고 누워, 면도사의 손놀림에 수염 깎기는 사근 그림이 그립다,

깨진 거울 틈 사이로 그려 놓은 이발소 그림도 보고 싶고,
물 조리로 머리 감겨주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1988년 도화동이발소는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김기찬 골목안 풍경3집에서 옮겼다.

컬러 / 정영신사진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을 버린 채, 부산으로 쫓겨났을 무렵이다.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그의 집에 초대한 인사라고 한다.

무례하게 군화발로 방에 들어간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여흥을 돋우기 위해 이화여대 학생들을 불러 노래를 시키고 있다.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의 치맛바람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1951년6월 부산,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대사, 박마리아, 콜트장군
‘눈빛출판사’에서 펴낸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사진집에서 옮겼다.


1971810일 최덕천기자

눈빛출판사의 한국의 보도사진3공화국과 유신의 추억 한국사진기자협회역음-에서 옮김 



광주 대단지사건은 박통이 만들어 낸 개발독재시대의 횡포를 대표하는 민란이었다.

그 당시 사건뉴스를 접하며 놀라기는 했으나, 실상의 아픔은 뒤늦게 알았다.

오늘 인사동에서 화가 장경호씨를 만나, 집을 못 구해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니,

갑자기 광주 대단지사건이 떠 올랐던 것이다. 이젠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의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이 사건은 독재정권이 왜 민주화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 빈민촌을 정리하라는 박통의 지시로 시작된다.

당시 불도저시장 김현옥이 나서서 여러 가지 이주정책을 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와우아파트라는 희대의 시민아파트 건설과, 빈민 이주계획이었다.

 

19677월 김 시장은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을 서울시 밖으로 이전시키며,

광주군(지금의 성남)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69년부터 마장동, 청계천변, 용두동의 빈민 2만 명을 광주로 이전시켰고,

얼마 안 되어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왕십리 빈민까지 광주 대단지로 몰아 넣었다.

 

수 많은 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광주로 갔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허허벌판뿐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물과 화장실도 없었고, 상업시설이라 할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15만명에서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도록 방치한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내 몰린 빈민들은 살아갈 방편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부모가 배고파 죽은 애기를 솥에 삶았고,

그 냄새에 끌려 이웃사람들이 나눠먹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진 이들이 분양권을 포기하고 다시 서울의 판자집으로 옮기는 일이 속출했다.

이곳에 대한 개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터라 건축 브로커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분양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어떤 이는 입주권을 몇 십장씩 사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기꾼들이 몰려들어

위조 등의 사기사건과 철거관련 비리 등의 범죄들이 만연했다


정부와 서울시에서는 입주권 거래를 금지시켰지만, 또 다른 편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단지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에 각 대표자들이 모여 불하가격시정대책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5천명의 서명을 받아 요구사항을 작성했는데, 평당1,500원으로 대지불하가격을 인하하고,

향후10년간 분활상환, 제 세금 5년간 면제, 구호대책과 취로사업을 보장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관청이 그들의 요구를 묵살해 버림에 더 강경한 요구를 내세우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삐라가 난립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성남 출장소는 서울시에 도움을 요청하며

밀고 당기는 협상이 오갔으나, 결국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서울시장이 직접 와서 교섭하겠다고 했으나, 차가 막혀 지체되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또 속았다, 서울시장이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궐기대회는 갑자기 폭동으로 발전하고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모두들 몰려나와 사업 출장소를 박살 내버린것이다.

 

당시 시위대에는 70대 노인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었고, 이들은 모두 식칼과 곡괭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태라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눈에 살기가 서렸다고 한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으나,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난 군중들은 지나가는 차들을 닥치는 대로 탈취하여 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일부는 서울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서, 지나가는 택시들을 세우며 우리는 배가고파 죽을 지경인데

팔자 좋게 택시를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며 승객들을 강제로 하차시키기도 했다.

이런 사태 속에서 지나가던 참외트럭이 넘어져 참외가 길바닥에 구르자 굶주린 군중들은

순식간에 한 트럭 분량의 진흙 뭍은 참외를 다 먹어 치워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성난 군중들은 광주 경찰서 성남지서를  때려 부수고, 경찰차를 불태웠다.

당시 광주 대단지를 지나는 버스는 여섯대 정도에 버스노선도 제대로 없었지만

불탄 차만 22대에 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민란은 오후 늦게서야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서울시장이 투쟁위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발표에 주민들이 해산했지만,

도시빈민투쟁으로 박정희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 

    

이 민란속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민란의 주동자로 22명이 처벌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 탄생한 도시가 바로 지금의 성남시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 게 변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정권은 이러한 소요사태를 '사회 기강의 해이와 윤리적인 타락에서 오는 병폐'라고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시위대를 더욱 더 잔학하게 탄압했다.


과연 오늘의 우리사회는 그 때의 시각에서 벗어났는가만의 말씀, 제 자리 걸음이다.

이 추운 겨울 날 이삿짐을 꾸려야 하는 사람도 있고, 편히 누울 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를 헤맨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회는 만성적인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사고 행태가 이전의 사고와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가슴 아픈 일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피할 것이 아니라 그 트라우마와 당당히 맞서 때려 부숴야 한다.

 

/ 조문호



눈빛출판사의노무라리포트청계천변 판자촌 사람들 1973-1976 노무라 모토유키 사진집에서 옮겼다.

개미촌 움막집 / 청계천변 제방을 파고 판재를 얼기설기 엮어 이어진 이 움막촌은 판자촌보다 주거환경이 더 열악해 일명 개미촌으로 불렀다.

 

 출처불명 / 광주대단지에 이주한 빈민들의 천막촌


출처불명 / 허허벌판에 마련된 광주대단지


출처불명 / 차를 불태우는 빈민들

출처불명 / 경찰병력이 투입되었지만, 빈민들의 분노는 저지할 수 없었다.





 




권태균사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돕고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현 단계를 진단하는

‘한국사진과 권태균사진’이란 주제의 특강이 지난21일 오후4시 강남에 있는 ‘스페이스22’에서 열렸다.


그동안 이광수교수의 특강을 기다려 왔으나, 먹고 사는 일로 40여분이나 늦어버렸다.

30여명의 사진인들이 듣고 있었는데, 강의 중간에 들어가기가 좀 창피했다. 


이광수교수의 많은 이야기를 놓쳤지만, 강의의 요지는 가장 한국적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권태균씨의 작품세계를 놓고, 과연 한국적 다큐멘터리란 어떤 사진이냐에 모아졌다.

대개 우리의 전통적 생활관습이나 한국적 정서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교수는 우리의 두레문화에 의미를 두었다.

끈끈한 정과 한으로 뭉친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란 공동체적 삶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대동 문화를 말한 것이다. 88올림픽, 월드컵 등 스포츠에서부터 광주항쟁 등의 정치적 투쟁에 이르기 까지

다른 나라와는 또 다른 끈끈한 결집력을 보여 왔다는 점을 들었다.

다큐멘터리사진이란 주제나 소재가 정해지면 접근 방법, 즉 어떻게 찍을 것이냐에 많은 작가들이 고민하는데,

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 즉 문제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권태균씨의 80년대 작품 ‘노마드’는 그 방법론에서 갈등의 흔적이 역역하다고 말했다.

강운구선생께 체득했을 법한 자연스럽고 정갈한 구도였던, 평소의 접근방법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갑철씨 사진처럼 카메라앵글을 의도적으로 비뚤게 한다든지, 사람의 몸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등

서구스타일의 사진들도 뒤 섞인 걸 보면, 전통과 외래 사이에서 상당히 고민 했을거라는 거다.


결국 그의 사진적 관심은 우리의 삶의 자취가 사라져가는 아쉬움에 모아져 있었다.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강운구선생의 말처럼...

그러나 우리가 여지 것 본 권태균씨의 사진들은 대부분 80년대에 한정되어 있다.

그 이후의 작품세계가 어떤지는 앞으로 더 지켜보고, 연구할 문제다.

2시간 넘게 진행된 특강에서 김문호, 김봉규씨 등 여러 사진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는 등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갔다.

 

강의가 끝난 후 ‘북촌’으로 자리를 옮겨 이광수교수 표현대로, 또 한 잔 꺾었다.

그 자리에는 전시와 특강을 주관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내외를 비롯하여 이광수, 김문호, 엄상빈,

김남진, 정진호, 윤승준, 이은숙, 이유홍, 김 원, 마동욱, 장수진, 고정남, 노형석, 이규철, 성남훈씨가 함께했다.

사진, 글/ 조문호










































정초부터 좋은 사진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스페이스22’에서 개막된 권태균씨의 유작전에서다.

 

기다린 전시였으나 인사동에서 강 민 선생님을 만나 지체되었다.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30분이나 늦었다.

    



생전의 약속 따라 첫 유고사진집을 펴낸 눈빛출판사이규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많아 운신이 어려웠지만, 곳곳에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몇 번이고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던 작품도 몇 장 있었으나, 대부분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잊고 있던 80년대 추억들을 얼마나 끌어내는지 가슴이 애렸다.

나른한 자세로 앉아있는 세 가족의 모습에서, 그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땐 몸은 피곤했지만, 곳곳에 화롯불 같은 온정이 있어 행복했다.






어찌할꼬! 이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이건 곡마단 광고판에 적힌 문구다.

우린 그런 기구한 삶을 보며 웃고, 울었다.

행여 누가 볼가, 곁눈질하며 눈물도 훔쳤다.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난 권태균씨가 의령 촌놈이라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맛을 낼 수 없다.

우연히 한 두 컷이면 모를까모든 사진에 특유의 애수가 묻어 있었다.

시골다방에서 담배피우는 남정네 표정이나 다방분위기 한 번 보라.



집에서 자판기를 두드리다, 또 열불이 터졌다.

그 흔한 사진상, 이런 사람한테 안주고 대체 누굴 주었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끼리끼리 돌려먹다, 이젠 그 제자들이 돌려 먹는다.

시류에 눈치 안보고, 초지일관 떠돌며 찍은, 이토록 진솔한 언어가

어떻게  빤짝 생각들에 밀려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저승에서 잠시 내려와, 우리에게 말 걸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진짜 사진이라고...





다행스럽게 눈빛출판사의 이규상씨가 생전의 약속대로 근사한 책을 펴냈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마치 오리지널 프린트 같았다.

내 가난함을 불쌍히 여긴 한정식선생께서 책을 사 주셔서

이제 보물 상자 하나 두게 되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주요작 100여점을 실어 펴낸 사진집 <노마드> 값은 70,000원

2월22일까지 서울 강남역 1번출구에 있는 '스페이스22'에서 작품들을 볼 수 있고, 사진집도  살 수 있다.






개막식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대구서 올라 온 양성철씨와 석재현씨도 만났고,

부산의 이광수씨, 광주에 사는 오상조씨, 장흥의 마동욱씨도 만났다.

그 외에도 한정식,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성남훈, 김남진, 이기명, 안해룡, 이갑철, 이상엽,

장 숙, 김상현, 마기철, 강재욱, 남 준, 김동희, 이재갑, 견석기, 이한구, 정진호, 최재균, 김영호,

박종우, 김대수, 구본상, 안미숙, 이순심, 정영신, 이은숙, 성윤미, 노형석, 고정남, 권양수씨를 만났다.

마치 심봉사 딸년 잔치 집에 온 듯 기분 좋았다.

















































전시를 주관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내외 따라 뒤풀이 장소로 옮겼다.

술집 북촌에서 술꾼들만 남아 더 마셨다.


! 서울 이빨과 부산 이빨이 주고받는데, 막상막하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말이 짬뽕된 이광수교수 구라도 대단했다.


술좌석에서 '사진예술'이기명씨가 이렇게 물었다.

"젊은 마누라와 살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몸 안 아끼고, 최선을 다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나중엔 총알이 떨어져 사진도 찍을 수 없었지만, 김보섭씨가 먼저 가라고 눈치주네.


 

촬영 : 2016.1.4. / 사진, : 조문호






권태균씨의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왠지 애잔하고 처연한 느낌이 든다.
아름다운 꽃과 천진난만한 애기를 찍었는데, 왜 그런 느낌이 들까?
애기의 표정도 한 몫 했겠지만, 꽃이 가진 양면성도 작용한 듯 싶다.
그래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마치 권태균씨의 자화상 같았다.

권태균씨가 세상을 떠난 지가 어저께 같은데, 벌써 일 년이 되었단다.
신이 어찌 나같이 못된 놈들은 살려두고, 착한 사람들만 데려갈까?
그래서 지옥같은 이승보다는 저승이 좋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그 친구는 복 받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일찍부터 사진에 입문하여 좋은 직장에서 돈 걱정 안하고

유목민처럼 떠돌며 사진만 찍지 않았나?
사랑하는 처자식과의 잠깐 이별이 아쉬울 뿐,

더 좋은 천국을 찍을 수 있는 기회도, 일찍 준 것이다.

내일 그가 이승에 잠시 내려와 사랑하는 이들을 불러 모아 사진전을 벌인단다.
80년대에 기록했던 사람사는 모습이라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 거린다.
분명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사진들이 나를 감동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그를 만나, 저승에 먼저 가신 분들의 소식도 들어보고,

저승사자에게 와이로 쓰는 방법은 없는지, 한 번 물어봐야겠다.

글 / 조문호



권태균 1주기 추모전 "노마드"는 1월4일 오후6시에 개막되어 2월 20일까지 이어진다.

장소는 "스페이스22" 인데, 강남역 1번출구로 나가는 미진프라자22층이다.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권태균 '노마드'사진집 출판기념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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