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마을] ‘전국 5일장 순례기’ 펴낸 정영신씨


 

30년간 장터 522곳 훑고 다녀


 

희망을 엮는 집어등 2010 영천장. 정영신

 

“와 이리 헐노” “아따메 징허요”
사진과 함께 현장감 넘치는 글
남편 조문호씨와 사진전도

 

“많이 변해도 추억 여전히 남아
부산 오시게장·예산장 볼만해”


30년 동안 전국의 522개 장터를 빠짐없이 훑고 다닌 정영신(58)씨의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표지)가 나왔다. ‘전국 5일장 순례기’는 2012년에 정씨가 펴낸 사진아카이브 ‘한국의 장터’의 연장선상에 있다. 경기 강화 풍물장의 “안녕하시까? 여기 세 그릇 주시겨” “오셨시까?”부터 경남 의령장의 “와 이리 헐노? 이 고추 때깔 좀 바라. 올메나 곱노”와 순천 아랫장의 “아따메 징허요, 여그 앉을 자리 없어라”를 거쳐 제주 모슬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좋쑤과. 일 킬로에 얼마우꽈”에 이르면 시장 냄새가 팍팍 난다. 책에 든 사진도 모두 정씨가 직접 찍었으므로 방방곡곡의 현장감이 100% 전해진다.

책이 나온 날에 맞춰 부부 다큐멘터리 사진가 정영신씨와 조문호(69)씨가 함께 만든 사진전 ‘장에 가자’가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개막되었다. 정영신씨는 사진가 이전에 소설가이며 조문호씨는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인사동사람들’ 등 열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최근에는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시인 천상병 추모 사진집>을 낸 베테랑 사진가다. 두 사진가를 20일 눈빛출판사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파트4단지 장터를 걷고 있는 정영신(오른쪽)·조문호씨 부부. 곽윤섭 선임기자

 

 

-5일장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언제인가? 사진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쓰다 보니 사람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는데 소설의 소재도 찾을 겸 장터를 찍기 시작했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조금만 가면 장이었고 차 타고 조금만 가면 함평장이어서 장날에는 엄마 따라 장에 가곤 해서 익숙했다. 그 후로 힘들고 뭐가 잘 안되면 장터를 찾곤 했다. 1984년에 시작했고, 조세희 선생이 쓴 <침묵의 뿌리>를 보고 ‘사진이 이런 거구나’라고 첨 생각했다. 서울 낙원동에 있는 ‘한국사진학원’에서 인화하는 것까지 배웠다.”

-30년간 장터는 어떻게 변했는가?

“가장 큰 변화는, 장옥이 다 바뀌었다. 규격화한다면서 시멘트로 발라버려서 다 망쳤다. 겨울엔 (시멘트가) 썰렁해서 사람들이 안 들어간다. 옛날엔 장이란 게 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최고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 같은 곳이었는데 텔레비전이 시골 구석구석 들어온 이후론 변했다. 기업화된 장돌뱅이가 많아져서 장에 나온 물건이 평준화되어 이 장이나 저 장이나 비슷비슷해졌다. 요즘 시골장엔 할머니들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유모차나 카트를 밀고 다니시는 것도 장터 풍경의 변화다. 80년대에 처음 찍을 때는 장보따리 이고 다녔는데 점차 가방으로 바뀌다가 이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갓을 쓰시고 장에 나오시는 멋쟁이 할아버지들도 찾아볼 수 없다.”

-장터는 어떤 곳인가?


장터 상인의 밑천 2013 순천아랫장. 정영신

 


“요즘 장터에서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들이 콩 한두 되 가져와서 가용해서 쓸려고 나왔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로 바구니를 툭 건드리면서 ‘이거 중국산이죠? 할머니’ 이러면서 지나간단다. 아니라고 해도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시장 할머니들이 자긍심이 강한 사람들인데 너무 속상해하신다. 그래서 차라리 물건끼리 바꿔가는 게 낫고 그렇게들 많이 하더라. 아는 사람하고 ‘너나 좋은 거 먹어라. 필요한 게 뭐냐?’ 이렇게 하는 게 속이 편하단다. 콩 한 되 가져와서 아는 신발 집에서 발에 맞는 구두 한 켤레 가져가는. 어떻게 보면 옛날 장터가 딱 그랬다. 오히려 좋은 현상인 것 같다. 장이란 게 꼭 판다기보다는 하루 생활이다. 구경도 하고 얘기도 하고 친구 만나 동네 소식도 듣고. 그런 역할을 하던 곳인데….”

-장터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기억나는 사람도 참 많겠다.

“지난해 5월에 팽목항에서 십여분 거리인 진도 십일시장(임회장)에 갔다. 한 상인이 ‘시방 진도가 초상집이여. 영감이 잡아오는 생선 팔아 가용도 쓰고 병원 댕기고 하는디, 요샌 뭍에도 못 나가, 장이 쪼까 휑-하지라. 젊은 여자들은 모다 팽목항으로 봉사 갔어. 첨엔 장 바닥에 퍼져앉아 아까운 새끼들 어짜쓰까 함서 막 울고 그랬제. 어찌것는가 이렇게 꼼지락거리면서 이겨내야제. 슬픔이 이 늙은이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참에 배웠당께’라고 하시더라. 가슴에 와닿았다. 2013년에 북평장에서 만난 한국에 온 지 5년 된 베트남 출신 또티호완(30)씨는 한국말도 잘했다. 직접 밭에서 키운 오이, 가지, 고추 등을 팔았는데 오이를 사가는 할머니에게 두 개나 얹어주는 우리나라 덤문화까지 알고 있어 정겨워 보였다. 영동장엔 한 열 번 갔는데 곰방대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자주 갔다. 한 장만 빼먹으면 ‘왜 안 왔니…’ 하셨다.”



 

정영신의 포토에세이집 <전국 5일장 순례기>에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가득 들어 있어 독자가 장에 직접 가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글과 사진이 술술 읽힌다.

-21세기의 5일장에 예전의 느낌이 살아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5일장 작업을 계속할 것인가?

“꼭 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 같다. 장에 가면 영동 할매가 나를 기다리고 사람이 아니라면 나물이 나를 방긋방긋 기다린다. 이달에, 어디에 가면 뭐가 나와 있을 것이고 나를 부른다. 나는 아직도 어딜 가든 옛날 장터의 모습을 본다. 머리와 옷과 가방의 스타일은 급속도로 변했지만 그래도 장이란 공간에선 어느 한구석에 반드시 그 지역이 보이는 곳이 있다. 우리 장의 정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찍을 것이고 여유가 생기면 서울의 전통시장을 찍을까 한다.”

5일장을 찍고 싶어하는 초보자들을 위해 장터 추천을 부탁했더니 부부가 경쟁하듯 줄줄 불렀다.

“부산 노포역 맞은편 언덕에 오시게장(2, 7일장)이 규모 있게 펼쳐져서 볼만하다. 파라솔이 계절마다 다르다. 여름에는 햇볕 때문에 서 있다가 겨울에는 바람 들어오는 허리를 가려야 하니 누워 있다. 포항 송라장, 경주 건천장, 성주장도 좋았지. 12월 구례장엔 산수유가 나오고 청양장에 구기자가…. 제일 활기찬 장은 추운 겨울날 새벽이다. 추우니 활기가 차다. 여름은 햇볕도 강하지만 사람들도 늘어져서….”

2월17일일까지 열리는 전시장엔 간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정영신, 조문호 사진가가 매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관람객 모두에게 인물사진을 찍어주고 이메일로 전송해주는 행사도 준비되어 있다.

한겨레신문 /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35)전남 진도 십일시장

밭일하던 여인네도, 장터에서 마주친 여인네도…
틈만 나면 흥얼흥얼…삶을 노래로 승화시켜

열흘 간격 장 들어서 마을이름 ‘십일시’…지금은 4·10·14·20·24·30일에 열려
인근섬 사람들 드나들어 어물전 지천

 

 

진도에는 유달리 한(恨)의 노래가 많다. 삶의 희로애락에서 비롯된 소리들이 이어지는 것이 마치 유장하고 애절한 아쟁 가락 같다. 삶과 노래가 따로따로가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오메!” 하는 장터 여인네의 추임새 때문일까. 그 소리에 한바탕 어깨춤을 추면 푸르디푸른 남도 가락이 흥얼흥얼 장터 안으로 흘러가다 멈추어 선다.

 얼마 전 십일시장을 찾았을 때는 무거운 안개가 내려앉은 듯 장 안에 활기가 없었다. 농번기이기도 하지만 온 나라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 참사 현장인 팽목항이 장터에서 10여분이면 닿는 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방 진도가 초상집이여. 영감이 잡아오는 생선 팔아 가용으로 쓰고 병원 댕기고 하는디, 요샌 뭍에도 못 나가. 장이 쪼까 휑하지라? 젊은 여자들은 모다 팽목항으로 봉사 갔어. 첨엔 장바닥에 퍼져 앉아 ‘아까운 새끼들 어짜 쓰까’ 함서 막 울고 그랬제. 어쩌겄는가. 이렇게 꼼지락거리면서 이겨내야제. 슬픔이 이 늙은이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참에 배웠당께.”

 임회면 석성 인근에 사는 김순단 할머니(76)가 펼쳐놓은 쟁반 위의 문어 두 마리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할머니 말을 알아듣는 듯 꿈틀거린다.

 십일시장은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의 자연마을인 십일시리에서 열린다. 마을 이름이 십일시(十日市)인 것은 옛날에는 이 시장이 10·20·30일에 열흘 간격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세기 중엽에는 장이 한 달에 두 번이나 세 번쯤 열렸지만, 18세기 이후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대부분의 장들이 오일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오늘날 십일시장은 임회장이라고도 하며, 특이하게도 4·10·14·20·24·30일에 열린다. 고군면 고성리에 서는 고군장(이 장은 십일시장을 피해 1·5일에 열린다)과 장날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석교천이 흐르는 십일시교를 건너면 장터가 시작되고, 오른쪽 길목으로 들어서면 장옥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이어온 장터의 흔적과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십일시장은 인근에 있는 상조도·하조도·각흘도·관매도·가사도·조도군도 등의 섬사람들도 드나드는 장이란다. 장터 바닥은 그야말로 바다를 옮겨놓은 듯 어물전이 지천이었는데, 요즘은 장이 선 이래 가장 조용하다고 한다.

 어물전 멋쟁이로 유명한 김씨 할머니(71)가 “요 꽃게나 사람이나 사는 게 같당께” 하며 꽃게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꽃게는 달이 작은 그믐때는 많이 먹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아 살이 통통하게 올라오고, 반면 달이 밝은 보름에는 활동을 많이 해 살이 오르지 않는단다. 할머니는 “사람이나 꽃게나 많이 움직이면 저절로 살이 빠지는 것은 같은 이치”라며 꽃게를 들어 보인다. 그러면서 45년째 생선을 만지다 보니 소리도 좀 한다며 <진도아리랑> 한 자락을 뽑아낸다. ‘진도 가면 글씨자랑·그림자랑·노래자랑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괜한 말이 아니다.

 십일시교 앞에는 할머니들이 장보따리를 세워놓고 버스를 기다리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그는 땅 모양만 갖추어도 밭을 맹글어부러 놀고 있는 땅이 없당께. 진도 땅이 기림져서 뭐든 심기만 허믄 잘돼야. 진도 대파는 한양서도 소문 났드만. 징허게 맛나다고.”

 밭일 하던 여인네도, 장터에서 마주친 여인네도 틈만 나면 절로 터지는 노래로 삶을 승화시킨다. “이년아, 가슴에 저미는 한이 있어야 소리가 되는 벱이여.” 영화 <서편제>에 나오던 대사가 이 장터에선 여인네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진도에서는 십일시장 외에도 앞서 말했듯 고군장이 1·5·11·15·21·25일에 선다. 구기자·홍주·돌미역·돌김·대파로 유명한 진도장은 2·7일에, ‘돌아온 백구’와 ‘신비의 바닷길축제’로 알려진 의신장은 1·6일에 열린다.

 

[농민신문]

 

 

                                         구한말 동래읍내장이 사람들로 가득찬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1682년 조선정부 '감동창' 설립
- 세곡 보관해 물류 집산지 되고
- 육해로 수송 유리 조건 힘입어
- 상인과 배 몰려오며 시장 발달

- 배고픈 각설이들도 기웃기웃
- 타령으로 흥겨움 만들면
- 상인들 곡물 한 움큼 주거나
- 구포국수 한 그릇 말아줘

- 1932년 강변서 現 장소 이전
- 야시장 개설로 큰 장터 발전
- 이윤 안따지고 주는 덤 등
- 훈훈한 인심 아직도 남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구포시장

부산에는 시장이 '천지삐까리'다. 비릿한 내음이 물씬한 자갈치시장부터 새로운 밤의 명소로 떠오른 부평시장까지 부산은 시장의 바다다. 요새 화두가 전통시장이다.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마트에 맞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운동이 부산에서도 한창이다.

그런데 전통시장은 단지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경제적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는 사회적 장소이자 놀이와 예술이 펼쳐지는 문화적 장터였다. 이는 전통시장이 거대 자본의 밀림을 헤쳐나가기 위해 반드시 되새김해야 할 교훈이다. 아울러 소비자를 위해 전통시장의 현대적 변용과 젊은 감각을 갖추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져 본보기가 될 만한 장터이다.

■각설이 장타령에 실린 구포장



상설시장과 오일장을 겸하는 구포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진 장터다.
오랫동안 구포에서는 오일장이 열렸다. 닷새에 한 번씩, 즉 3일과 8일에 열리는 구포장을 찾는 사람은 장돌뱅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바가지와 숟가락을 들고 구포장에 온 그들은 바로 부산의 각설이다. 각설이는 '거지' 혹은 '동냥아치'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예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동냥하면서도 각설이 타령을 불러 시장을 흥겹게 할 수 있었다. '각설이 떼에서는 장타령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속담은 각설이를 하찮은 존재로 보면서도 각설이의 정체성이 장타령에 있음을 일러준다.

장타령은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나 잘한다"로 시작하는 각설이 타령 중의 일부이다. 이 장타령에는 내로라하는 부산의 전통시장이 등장한다. 각설이가 부른 장타령에는 부산 오일장의 특징이 잘 담겨있다.

"샛바람 반지 하단장 엉덩이가 시러버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장 허리가 아파 못 오고,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부산의 여러 시장 중에서 구포장이 최고였는지 끝은 이렇게 맺는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품 각설아 이장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각설이들

시장에 못 오고 못 본다는 각설이의 타령은 믿을 게 못 되는 역설이다. 언제나 오일장과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게 그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장타령에는 부산 각설이들이 찾아가는 시장의 노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엉덩이가 시리도록 바람 찬 하단장을 거쳐, 행상과 좌판으로 뒤범벅된 복잡한 부산장을 통과했다. 부산장에서 구포까지 제법 먼 길이므로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짐 때문에 허리도 아팠지만, 구포장을 놓칠 수 없었다. 다시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장에 가는 노정은 험하디험한 길로 팍팍한 발병쯤은 견뎌야 했다.

이처럼 각설이들이 유명한 시장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오일장 체계가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지방의 향시(鄕市)가 오일 간격으로 서지 않았다. 중기 이후로 장시가 많이 늘어나면서 서로 개시 일자가 겹치지 않도록 오일 주기를 갖게 되었고, 서로 30~40리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시장이 1000곳까지 늘었으며, 우리나라 전역에 오일장 체계가 잡혔다.

부산 지역에서는 동래 읍내장을 비롯해 부산장, 구포장, 하단장, 좌수영장, 독지장 등이 대표적 오일장으로 자리 잡았다. 오일장을 따라 움직이는 보부상들의 상업 관행과 각설이들의 걸립 풍속도 이렇게 생겨났다.

■구포는 포구다

구포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구포 나루터에는 물건을 선적한 상인들의 배들이 모여들었다. 그 시절,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가 돛단배에 실려 구포 나루터까지 흘러왔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물결따라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조선시대 구포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1682년 조선 정부가 세곡을 보관하고 수송하기 위한 창고를 구포에 세우자 이곳은 곧 물류를 집산하는 근거지가 됐다. 이 창고를 '감동창(甘東倉)' 혹은 '남창(南倉)'이라 했다. 혹은 전세(田稅), 대동미, 군포 등 세 가지 조세를 징수하는 곳이라 하여 '삼세조창'이라 불렀다. 조선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책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는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영과 수영, 각 진포(鎭浦)의 사포량(射砲糧)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사포량은 수군 진영에서 근무하는 사수와 포수에게 나눠주는 식량이다. 감동창에 모인 세곡은 경상도 해안가의 수군에게 지급되는 봉급으로 주로 쓰였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구포는 양산과 동래, 김해에 이르는 교통의 결절점이자 남해로 쉽게 다다를 수 있는 수운의 시발점이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구포에 감동창을 세웠다. 창고가 들어서고 뱃길이 열리자 구포에는 상인과 배들이 몰려들었으며, 시장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구포장터, 구시장에서 신시장으로

조선시대 구포장터는 바로 남창 주변 강변에서 시작돼 안쪽 동네의 큰 마당과 골목까지 이어졌다. 강변에는 생선전과 젓갈전이 있었고, 안쪽에는 짚신전, 포목전, 잡화전을 비롯해 우시장이 있었다. 이 장터에서는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32년 구포장터는 현재 덕천역 건너편으로 옮겨왔다. 당시 구포 면장이던 장익원이 저습지를 매립한 뒤 공설시장 만드는 일을 주도했다. 장터의 이전으로 명암이 엇갈렸다. 구시장 부근 상권은 몰락했고, 평당 20원씩 하던 땅값이 1원 밑으로 폭락했다. 신시장 일대 땅값은 수십 배 폭등했다.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시장번영회를 조직하고 시장 발전을 모색했다. 이때 신시장 홍보 이벤트가 야시장 개장이다. 1934년 구포 신시장 상인들은 경부선 선로 부근에서 장터까지 70여 개 전기등을 설치하고 야시장을 개설해 손님을 끌어모았다. 구포 신시장은 일대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40여 년이 지난 1972년, 구포시장 상인들은 상설시장을 개설하고 콘크리트 건물을 세웠다. 당시에는 생선을 취급하는 선어구와 곡물을 취급하는 곡물구 등 2개 구역으로 나뉘었으며 점포 수는 100여 개였다.

현재 구포시장은 750여 개 점포가 있으며, 오일 장날에는 1500여 개로 늘어난다. 하루 5만여 명의 손님이 찾는다.

■삶의 희망을 주는 구포장터




어려운 일에 부딪혀 절망할 때면 장날에 맞춰 구포시장에 가보라. 구포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많은 물건 속에서 삶의 희망도 행복도 찾을 수 있다. 구포시장은 잡화, 야채, 과일, 생선을 파는 구포시장길 외에도 약초거리, 야채거리, 패션거리, 묵자거리, 가축거리 등 10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다. 이 거리마다 취급하는 상품이 다르다.

구포장터에서는 흥정과 덤도 볼 수 있다. 상인과 손님이 흥정하는 한편으로 이윤을 따지지 않고 모른 척 얹어주는 덤도 있다. 장터의 훈훈한 인심은 팍팍하고 어려운 삶까지 따뜻하게 해준다. 배고픈 각설이들이 구포시장을 비롯해 부산의 오일장을 떠도는 이유이다. '일자나 한자나 들구나 보니' 하고 각설이 타령을 부르면 곡물 한 움큼을 주는 싸전 상인도, 구포국수 한 그릇을 말아주는 국숫집 주인도 있었다. 이 뜨거운 정은 부산의 장터를 다시 찾게 하는 희망이 아니었을까.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장터순례(29)전북 익산 북부장


“황토밭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전국 두번째로 큰 재래시장
전주·김제·군산·완주에 둘러싸여
교통 편리하고
채소·수산물 가격 싸
언제나 문전성시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선다.

▲익산 북부장은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이다. 이웃한 전주·김제·군산·완주 등에서 찾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배 속에 들어간 건 절대 돈 받지 않는다”는 마이크 소리를 따라 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자 파는 강성구씨(30)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6년째 장사한다는 강씨는 배 속에 들어간 것은 무조건 공짜이니 많이 먹으란다.

 젊은 장꾼의 너스레에 끌려 맛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더러는 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 밑지지 않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할매들 장 한 바퀴 돌고 다시 찾아오는 것 보믄 아직은 정이 살아 있당께요” 한다. 과자 한 뭉치 산 허씨 할머니(76)도 한마디 한다. “얻어먹기만 하고 안 사면 쓰간디. 정은 주고받는 것이여.”

 장터로 들어가는 주택가 골목에는 지역 주민들이 직접 거둔 농산물만 팔 수 있는 할머니 난전이 서 있다. 할머니들 앞에는 찹쌀·콩·고구마·땅콩·냉이와 말린 나물 등이 펼쳐져 있어 가을걷이가 끝난 시골 마당 한 귀퉁이가 이사 온 것 같다.

 고구마와 말린 나물을 펼쳐 놓은 소씨 할머니(82)는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서 왔다. 할머니는 고구마 자랑이 한창이다.

 “황토밭에서 큰 것들은 뭐시든 맛있제이. 땅이 너무 질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서 캔 것들이여. 이 고구마 맛 한번 보면 내 말 알 것이구만.”

 할머니 앞에는 고구마들이 등을 포개고 나란히 누워 햇빛과 노닐고 있다.

 1975년에 개설된 익산 북부장(익산시 남중동)은 전국에서 경기 성남 모란장 다음으로 큰 재래시장으로, 끝자리가 4·9인 날이면 오일장이 선다. 전주·김제·군산·완주가 둘러싼 지역의 중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들 지역에선 어디서든 20~30분이면 올 수 있다.

 북부장은 익산 황토밭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 군산에서 나오는 각종 수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전국에서 고구마가 세번째로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다. 자색고구마를 이용해 만든 <자주빛 고운님>은 이 지역에서 나는 천연 생막걸리다. 자수정처럼 고운 보석 빛깔을 품고 있어 익산의 자랑거리로 자리 잡는 중이다.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을 품은 천혜의 곡창지대로, 백제 시대에는 왕궁이 있던 ‘서동요의 고장’이다. 또 이웃한 군산·강경과 함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화강암의 원산지로 오래전부터 석공업이 활발했던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나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같은 석조 문화재들이 많아 근대 문명의 박물관으로 불리지만, 일제의 아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익산은 또한 102년의 철도 역사가 있는 교통 도시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보석박물관인 ‘주얼팰리스’도 있다. 주얼팰리스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유사한 모양으로 설계되었는데, 이곳에선 ‘나만의 보석 만들기 체험’도 가능해 목걸이나 휴대전화 고리 정도는 직접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콩과 마늘을 갖고 나왔다는 구씨 할머니(85)는 오랜만에 나와 시세를 잘 모르겠다며 말을 이어간다.

 “오늘 사람 구경 많이 했응께 남는 장사 했제. 옛날에 장사허는 사람들은 농사 안 지응께 필요한 것끼리 모다 바꾸고 그랬어. ‘아짐, 오늘은 뭐 갖고 나왔소?’ 함서 아는 체하고들 그랬는디, 시방은 모다 남이나 마찬가지여. 옛날 생각하믄 안 되는디 그때가 생각나서 한번씩 나오믄 사람 말을 안 믿고 ‘중국 것 아니냐?’ ‘농사진 것 맞냐?’고 자꾸 물어싸….”

 큰길가에서 김을 파는 염씨(46)는 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엠에프(IMF) 때 장돌뱅이 길에 들어섰다는 염씨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장바닥에서 흘려보냈다. 인근의 익산장과 군산 대야장, 완주 봉동장·삼례장을 도는데 사철 파는 물건이 다르다고 한다. “장터 흐름을 읽을 줄 알면 장삿길도 편하다”는 염씨는 장터에서 세상살이를 배워간다.

 익산에서 열리는 장은 이 밖에도 천년고도 마한백제가 살아 있는 금마장(2·7일), 함열장(2·7일), 여산장(1·6일), 조선 시대부터 장이 열렸다는 황등장(5·10일)이 있다.

 

 

 

  • 온 대지가 잠든 겨울의 새벽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새벽 4시 무렵, 어둠을 뚫고 한 대의 트럭이 들어와 멈춘다. 동시에 또 다른 트럭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트럭 천막 사이로 간간히 들리는 소 울음소리가 잠든 대지를 깨우자 새벽이 일어날 채비를 서두른다. 소를 실은 차량들의 전조등이 어슴푸레한 새벽을 밝히는 가운데, 구슬픈 소 울음소리가 허허로운 공간을 메운다. 우시장이 개장하는 새벽 6시 무렵에야 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소와,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인과의 사투가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6시부터 경매에 들어가 8시 30분이면 완전히 끝나는 우시장의 풍경은 서글픈 노예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을 올려보며 슬피 울어대는 어미 잃은 송아지의 애잔한 울음에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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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우시장은 1977년부터 홍천읍 갈마곡리 일대에 형성됐으나 2005년경 주거지역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북방면 하화계리로 옮겼다. 인근에 위치한 횡성이나 양양의 우시장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다. 춘천이나 인제, 철원, 양구, 고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홍천우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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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은 강원도 영서 내륙의 중앙에 자리해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동쪽과 서쪽의 말과 기후도 다르다고 한다. 동쪽 사람들은 거센 영동지방 사투리를 쓰지만, 서쪽 사람들은 경기도 말씨에 더 가깝다. 2000년대부터 홍천 전체를 대표하는 ‘늘푸른 홍천 한우’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새롭게 탄생했다. 가족처럼 키우는 한우는 외국 소에 비해 올레인산이 많아 구수한 맛이 난다고 한다. 소의 사육기간은 거세우가 30개월이고, 일반 소는 2년 정도. 치솟는 사료 값과 수입쇠고기를 감당할 수 없는 농민들의 근심이 소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울린다.

     

     

     

     

  • 옛날부터 농가의 소는 논밭 다음으로 큰 재산이었다. 지금도 산비탈에 있는 밭이나 경운기가 들어가지 않는 땅은 소가 끄는 쟁기를 이용한다. 소는 힘든 일을 척척 해내는 든든한 일꾼이기에, 집안의 머슴처럼 사람대접 받으며 한 식구로 살았다. 남의 논밭을 가는 품앗이로 돈을 벌어주기도 하고, 소를 팔아 도시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 등록금을 해결하는 등 농촌에서의 재산목록 1호였다.
    “내 자식도 이렇게는 안 키웠어.” 소 팔러 나온 장 씨(76세)는 “방 옆 헛간에 키우며 끼니도 먼저 챙겨줄 정도로 귀하게 여겼으나, 사료값 때문에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소를 내다 팔려니 가슴이 아프다”며 한숨을 내쉰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중개인의 입만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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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시장 앞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모두들 소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이한경(84세) 할아버지는 14마리나 되는 많은 소를 몰고 나왔단다. 직접 소를 키운다는 할아버지는 젊은이와 힘을 겨루어도 이길 수 있다며 힘자랑에 열을 올린다. 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큰 힘이 된다며,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와 함께 살아서인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진 이 씨 할아버지는 점점 목소리도 소 울음을 닮아간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새끼에 대한 애정은 사람 못지않다며 말을 이어간다. “송아지가 팔려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미 소가 밥도 안 먹고, 밤낮으로 울어대서 차마 볼 수가 없어. 소가 밥을 안 먹으니, 내 입에 밥숟가락 넣는 것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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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소가 좋은 소냐는 물음에 이 씨 할아버지는 “콧등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어야 하는데, 콧등이 말라 있으면 건강한 소로 안 본다”고 답했다. 눈에는 눈곱이 없어야 하고, 배는 늘어지지 않아야 하며, 소털 또한 부드럽고 많아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너무 큰 송아지는 잘 크지 않는다며 덧붙이는 얘기가 재미있다. “소도 각선미가 있어야 허요. 앞다리 무릎 아래가 가늘어야 좋은 소 인겨.” 사계절 중 소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계절이 언제냐는 물음에는 귀신도 모른다면서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때 쯤 되면 소 값이 다소 내린단다. 또한 소 볼 줄 안다고 남의 소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다고 한다. 말 한마디에 몇 십만 원이 왔다 갔다 하기에 우시장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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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에서 소금(소값)이나 알아 볼 겸 나왔다는 최종대(59세) 씨는 “소털 셀 수 없듯이, 소 값도 알 수 없드래요. 소 살 사람은 소 콧구멍과 숨소리까지 따지는 기래요.”라며 소를 살 때 뿔이 앞으로 나왔는지, 뒤로 났는지, 옆으로 퍼졌는지까지 살핀다고 한다. 소의 좋고 나쁨을 알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살펴보는 수밖에 없단다. 이 소나 저 소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소 값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 홍천우시장이 예전만 못하다는 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은 경매가 시작되고부터다. 피를 말리는 경매를 없애고 직거래를 터야만 농민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남정네들의 푸념이 새벽공기보다 무겁게 내려앉는다. 언젠가는 소가 아닌 사람 마음도 경매할 날이 올 것이라는 농민들의 원망이 소 울음소리와 함께 허공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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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에는 소를 육용으로 키우는 것보다 일을 시키기 위해 키웠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의 운명과 역할까지 바뀌어, 일하는 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소도 사람의 주민등록증처럼 등록시켜 귀표를 하나씩 달아야 하는데, 귀표 없는 소는 팔 수도 잡을 수도 없단다. 소는 암소와 황소, 송아지와 임신한 소로 분류하여 체중에 따라 가격을 정하지만, 시세에 따라 매번 다르다. 한쪽에서는 도축장으로 갈 덩치 큰 소들이 저울에 올랐다 빠져나가기도 한다. 소가 새 주인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뒷걸음치며 뻗치다 힘에 부쳐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 순간, 그 순한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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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시장 한쪽에는 밭갈이할 소를 보러 나왔다는 나병연(53세) 씨가 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 씨의 밭은 모두 산비탈에 있어 아직도 소 두 마리로 밭갈이를 하는데, 밭갈이 소는 어려서부터 코뚜레를 꿰어 길을 잘 들여야 쟁기를 끌 수가 있단다. 나 씨가 밭갈이 소를 고르자 즉석에서 품평회가 벌어진다. “엉덩이가 암팡진 것이 쟁기질은 잘하겠어, 한 달만 길들이면 되겠구먼.” 소를 평가할 때는 먼저 소의 골격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살피고, 뿔의 모양과 소 울음소리까지 들어본다고 한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살펴야 하는 것은, 소도 주인을 닮아가기에 주인의 성격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 장터에 가면 마치 과거를 먹고 사는 것만 같다. 특히 홍천우시장에서 유명한 소몰이꾼 이야기는 몇 해 전 일인데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소몰이꾼이 산을 넘다 만난 도둑과 싸우다 의형제를 맺어 같이 소몰이꾼이 되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큰돈이 오가는 우시장에는 야바위꾼들이 모여들어 투전판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그 꾐에 빠져 소 판 돈을 몽땅 날린 사람들의 술주정은 소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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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개상인 거간꾼의 농으로 영하의 차가운 공기에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간다. “요 울음이 쌍둥이 만들 울음이요”라며 소꼬리를 잡아채자 큰 소가 움직거리며 긴 울음을 토해낸다. 잠시나마 사고파는 사람들의 무거웠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 달구지에 나무를 실은 소와 지게에 나무를 짊어진 노인이 나란히 걷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불교의 선종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으로 상징화해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소는 사람 가장 가까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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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빛 좋은 날 담벼락에 기대어 들판의 나락 익어가는 소리에 마음을 살찌웠던 곳, 언제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고향 풍경이다. 그리고 5일마다 열렸던 시골장의 정겨움은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움이다. 바쁜 일상에서 고향 찾기가 힘들다면 서울 근교에 있는 성남 모란장에 가보자. 지하철 8호선을 타고 모란역 5번 출구로 향하면 그 유명한 모란장이 나온다. 북녘땅에 홀어머니를 두고 온 아들(김창숙)이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모란이란 지명을 붙여 모란장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1962년, 황무지였던 지금의 모란시장 주변을 개간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지역민들의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5일장도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게 되었다. 성남대로변에 무질서하게 난립했던 상인들을 모아 지금의 자리인 대원천복개지 위로 옮긴 것은 1990년 9월 무렵이다. 3천 평이 넘는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에 4일과 9일이 들어간날이면 모란장이 열린다. 10만여 명의 손님들과 팔도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모란장은,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5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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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부터 도심 속의 시골장터라는 입소문이 전해지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장터에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과 팔려는 사람들로 온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길 건너 건물옥상에서 내려다본 형형색색 파라솔에 뒤덮인 풍경은 지구촌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거대한 축제장같다. 오색 파라솔 숲 속에는 만병통치약에서부터 시작해 화초와 갖가지 곡식이나 생선, 그리고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산과 들, 땅이나 바다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이 나와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지하철입구, 혹은 버스 정류장, 골목 한 귀퉁이마다 보자기만 펼쳐놓으면 곧바로 장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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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푸대를 끌고 가는 김경식(66세)씨를 불러 세워 주위 장꾼들이 짓궂은 농을 걸지만 농속에는 인정이 묻어있다. “저 사람 첨 볼 때는 코를 질질 흘리고 비실비실 웃기만 해 어디가 모자란 사람인가 했당께”, “그래도 하루에 10만 원이나 벌 때도 있다카데예”, “키가 멀대 같아도 마음이 착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불러주제. 그란디 혼자 돈 벌어서 엇다 쓰까이?” 난로 가에 모인 장꾼들이 돌아가며 김씨 이야기를 해댄다. 노숙자생활을 하던 끝에 모란장에 들어와 수레로 물건을 날라주며 살아가고 있다는 김씨는 할머니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란다. “장날 되면 짐보따리 옮겨주고 벌어들이는 돈이 5만 원이 넘어요.” 사람 좋은 웃음을 베어 문 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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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의 모란장은 추위와 싸우는 한 판 전쟁이다. 이른 아침부터 석유난로 위에서는 밥이 데워지고 찌개가 끓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장작불도 덩달아 바쁘다. 해가 뜨기 전, 푸르스름한 색깔이 장터에 깔리자 여인네들의 밥먹는 소리와, 화롯불 가에 둘러서서 날리는 장정들의 잡담들이 어우러져 훈훈한 웃음소리를 만들어 낸다. 새벽 4시부터 나와 준비 했다는 양씨(75세)가 열어놓은 2평 남짓한 난장에서 녹두전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양씨가 녹두전을 뒤집자 젓가락을 들고 기다리던 박씨(37세)가 한마디 건넨다. “고향 생각도 나고, 일이 안 풀리면 장에 나오죠. 연로하신 분들 일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절로 생기거든요. 이 맛에 장에 나옵니다.”

     

  • 때때로 장터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도 만나고, 뽕짝뽕짝 박자를 맞추는 유행가 가사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장돌뱅이들도 만난다. 이곳 저곳 돌고 도는 장꾼들의 인생이야말로 길 위에 펼쳐진 난장의 삶이다. 경기도 5일장을 돌고 도는 노씨(65세)는 각종 약재를 팔며 장돌뱅이 생활을 해온 지가 15년째라고 한다. “장에 오는 사람들은 됫박에 담긴 것을 좋아하는데, 장에서는 저울만 사용하라내요. 장에서까지 그람수를 재서 팔다가 그나마 남은 정(情)까지 없어질까 걱정됩니다. 15년 동안 내 몸뚱이처럼 지니고 다녔는데 장에서 못쓰게 한다고 버리면 벌 받지요. 이 됫박이 먹고 살게 해주었는데….” 박스에 담긴 됫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는 노씨의 볼멘소리가 길 위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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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란장은 IT산업의 중심인 성남시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말을 맞은 장날이 되면, 남한산성을 거쳐 모란장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역사 속의 자연을 느끼는 남한산성 성곽 길을 둘러, 모란장의 먹거리 촌에서 음식도 즐기고 물건도 산다는 것이다. 모란시장 입구에는 많은 종류의 화분들이 꽃을 피워 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그 뒤로는 자루에 담은 곡물들이 제각각 이름표를 달고 줄지어 서있다. 곡물전에서 화롯불에 손을 녹이고 있는 이씨(75세)할머니는 새벽 5시부터 나와 전을 폈다고 한다. 추운데 일찍 나오셨다며 인사를 건넸더니 “내가 여서 장사한지가 35년째나되요, 내 고향도 잊어 버리것당께, 새끼덜 갈킨다고 나오다본께 꽃색시가 할매가 되뿌렸제. 이 검정콩은 고향땅에서 올라 온 것이여.” 농사는 땅심도 좋아야 하지만 부지런해야 한다는 이씨 할머니는 장사 또한 부지런해야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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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초전 앞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약초이름과 그 효능을 읽어보는 박씨(83세) 노인이 삼매경에 빠져있다. 장터에 갈 때마다 우리네 인간들이 먹고 사는 먹거리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물전에서는 제각각 모양을 갖춘 생선들이 누워서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둘이 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른다는 물메기가 왔어요. 물메기...” 라고 외쳐대는 김씨(53세)는 새벽에 동해 뱃사람한테 직접 받아왔다는 말로 지나가는 여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빨간 고무대야 안에서 가물치와 미꾸라지, 메기, 자라, 잉어 등이 팔딱거려 끈끈한 생명력이 그대로 전달된다. 또한 의류와 신발, 잡화 등, 잠시 백화점이 외출 나온 풍경처럼 없는 것이 없는 모란장은, 넓은데도 장보기가 무척 편리하다. 채소면 채소, 어물전이면 어물 등 모든 것이 품목별로 나누어져 있다. 전국에서 올라온 싱싱하고 질 좋은 먹거리로 오후 1시쯤 되면 사람들로 절정을 이룬다. 특히 김장철이 되면 수도권 고추시세를 판가름 할 정도로 도매와 소매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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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소한 참깨 냄새가 진동하는 기름골목에 들어서면 수십 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름집들이 즐비하다. 42곳이나 된다는 기름집에서는 참기름과 들기름은 기본이고 산초와 홍화씨 기름까지, 기름이라는 기름은 다 모여 있다. 오래된 단골들도 많아 장날이 되면 기름 사러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30년째 단골집에서만 기름을 산다는 허씨(76세) 할머니는 설날에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들기름을 사러 나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웃하며 장사해온 이들은 서로 정이 들어 의형제를 맺거나 사돈지간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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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터에서 사물들을 관찰하다 보면 주인의 손길에 의해 상품이 변해가는 모습들이 멋진 데커레이션을 연상케 한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을 수 있도록 보기 좋게 상품을 나열하는 모양새가 예술가들의 설치미술과 다를 게 없다.
      손자들 사탕이나 공책을 사주기 위해 닭장에 있는 달걀을 짚으로 엮어 장으로 향하던 어르신의 모습은 어렸을 적 보았던 눈익은 풍경이다. 충남 조치원에서 손자 방학 끝나면 책이라도 한 권 사주고 싶어 농사지은 깨와 짚으로 계란까지 엮어서 온 권씨(78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곡물전을 기웃거리며 배낭 속의 깨를 보여주고 흥정을 붙여보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깨알 속에는 가장 먼저 햇빛을 받은 놈도 있을 것이고, 한풀이한 여인네 작대기에 혼쭐난 놈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오이 하나 가지 하나도 자식처럼 정을 주면서 키운다. 그렇게 노부부가 정을 담아 키운 참깨를 짊어지고 나왔으나 할아버지 등짝에 들러붙어 내려올 줄을 모른다. 한 푼이래도 더 받으려는 권씨 할아버지의 애잔한 모습이 카메라 파인더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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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아버지이~ 가까이 가서 한번 만져 보고 싶어.” 외할아버지 따라 장 구경 나온 신환(4세)이가 장 뒤쪽에 열린 가축 전으로 박경훈(61세) 씨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다. 병아리를 낳은 어미 닭을 비롯해 토종닭, 고양이, 개 등 갖가지 가축들이 좁은 우리 안에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신기한지 쳐다보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마치 작은 동물원 같은 풍경이다. 가축 전 끝머리에는 주인 따라온 장 닭 두 마리가 한낮인데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꼬~끼오 꼬~끼오를 연발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어미 품을 떠나온 백구형제가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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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천장의 이분택(70세) 씨는 35년째 가축을 팔아 왔는데, 우리 토종닭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다. “내 얼굴이 장 닭 닮았다고 허대유.” 이 씨가 얼굴 가까이 장 닭을 갖다 대며 웃는 모습이 흑백사진 속 고향집 마당 같이 정겹다. 여름날이면 쑥으로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앉아 닭이 닭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추억은 지금도 서랍 속에 가지런히 앉아있는 풍경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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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년 9월 읍내리 장터거리에 개설된 진천장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의 백곡천 주변과 시가지 동쪽 공터에 날짜 끝자릿수가 5일과 10일이 되면 들어선다. 장날이 되면 지역 상인들과 장돌뱅이는 물론 시골 할머니들이 산이나 들에서 수확해온 갖가지 농산물들을 고만고만하게 펼쳐놓아 향수 어린 진풍경을 자아낸다. 가을이 시작된 요즘 장터에는 제철인 밤과 호박, 콩, 고추, 무, 가지 등이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며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축 전 옆에는 20여 가지의 곡식 보따리가 정물화처럼 앉아있고, 장터 한쪽으로는 국밥집이 주욱 늘어서 있다. 장옥 없이 난장으로 길게 늘어선 진천장은 옛 장터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콩을 까면서도 옆 할머니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가을 들판 소식을 콩속에 가득 담아 와 좌판을 펼친 김형언(77세) 할머니는 “병원 옴서 콩하고 도라지 갖고 왔어유. 내 손으로 농사 진 거라 팔리기만 하면 쏠쏠허구먼유”라며 가슴이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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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훈한 정이 좋아 5년째 진천장 나들이를 한다는 지암리의 공인식(72세)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진천 자랑 좀 해 달랬더니 소녀처럼 웃기만 하신다. 대신 옆에 있던 김 씨 할머니가 신이 난 듯 농다리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구먼유. 지네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여 옛날에는 지네 다리라고 했지유.” 문백면 구곡리에 있는 돌다리 진천농교(鎭川籠橋)는 고려 때 만들어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다. 농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농교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천 년 세월 동안 전해 내려온 물과 관련된 오랜 이야기들이 지금도 마을 어르신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2000년부터 천 년의 신비를 지닌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해 매년 ‘농다리 축제’를 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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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장 무렵, 배낭에 밤을 가득 채워와 장바닥에 펼쳐놓은 이성명(69세) 할머니는 산에서 곧장 장으로 왔다고 한다.
      “가을볕이 좋아 산에 올라 갔구먼유. 요즘 산에 가면 밤이 지천에 떨어져 널렸어유.” 말하기에도 지친 듯 땅바닥에 주저앉아 주섬주섬 밤을 펼쳐놓는다. 이 씨 할머니는 “혼인날 폐백 때 시부모님이 치마폭에 던져준 밤을 먹어서인지 자식이 많아유.” 설핏 웃는 모습이 왠지 애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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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날이 기다려 지구먼유, 팔 게 없을 때는 산에 나가 팔릴만한 것을 만들어유. 차비만 벌면 되니께유.” 살아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좌판에 펼쳐 놓은 물건은 몇천 원에 불과하지만 밤 한 톨도 허투루 하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 밤은 선조를 잊지 않는 나무라 하여 제사상에도 빠지지 않고, 폐백 올릴 때는 시부모가 아들을 많이 낳으라며 며느리 치마폭에 던져주는 풍습도 있다.

     

     

     

  • 한쪽에서는 구절초가 굴비처럼 엮어져 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약재상을 운영하는 박 씨(58세)는 “요즘 들어 여자들이 부인병에 좋다고 사러오기도 하고 향이 좋아 베갯속에 넣는다며 사가는 사람도 있네유”라며, 마디가 아홉이라는 구절초는 꽃과 줄기, 잎과 뿌리를 음력 9월 9일에 채취해야 약효가 가장 좋다고 한다. 장날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다는 권점선(82세) 할머니가 옆에서 듣고 있다 끼어든다. “냉장고가 없는 옛날에는 떡 시지 말라고 구절초 잎을 얹어 며칠씩 먹기도 했지유. 말려서 좀이 슬지 않도록 옷장에 넣어두기도 하고….” 상처가 났을 때 구절초 잎을 찧어 붙이면 곪지도 않았다고 한다. 약이 귀했던 옛날에는 산에서 나는 약초의 쓰임새가 컸을 것이다. 요즘 시골 장터에는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검증되지 않은 잡초가 약초로 팔려나가 안타깝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흔한 풀이었는데, 올여름부터 약초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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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씨 할머니는 장날마다 나오기에 장사하는 할머니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에다 꽃고무신이며 목걸이, 귀걸이까지 온갖 멋을 잔뜩 부렸는데, 허리가 기역으로 굽어 손수레 없이는 걷기가 힘들다고 한다. 좌판에 들러 쉬면서 말참견으로 싸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목소리로 이긴다는 권 씨 할머니가 지난 장날 열린 ‘생거진천문화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초청된 가수 노래가 좋았느니 안좋았느니 할머니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 TV 드라마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 ‘생거진천문화축제’는 진천군 대표 축제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 소통하는 생거진천’을 주제로 백곡천 둔치에서 열린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비옥한 농토, 후덕한 인심에서 붙여진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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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곡천이 끝나는 길목에서 호박과 마늘을 갖고 나온 도리원의 신천호(78세) 할아버지와 장복순(75세) 할머니를 만났다. 노부부가 농사지어 가져온 것들을 사람 왕래가 뜸한 곳에 펼쳐 놓아 파장이 돼가는데도 마수도 못했다며 울상이다. 경운기에 싣고 나온 물건을 다시 주섬주섬 담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외국에서 가이드 하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장돌뱅이로 나섰다는 성기원(38세) 씨는 여주 말린 것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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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의보감, 약초본까지 들먹이며 여주가 당뇨에 좋다는 설명을 늘어놓지만 물어만 보고 가버리기에 지칠 때도 있단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풋풋한 인심과 인정에 끌려 장이 서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처음 장에 왔을 때 느낌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할머니들 삶이 굉장히 치열하면서도 인정이 넘쳤어요. 그리고 농촌경제가 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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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년도 진천장에서 만난 등에 북을 맨 아저씨의 난전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북쟁이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에 웃으며 박수들을 치는 바람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유행가를 한 가락 뽑아 가며, 배꼽을 거머쥐는 그의 입담에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불 하나에 단돈 만 원”하고 구성진 노래를 부르다가도,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사람만 눈에 띄면 재빨리 이불을 보여주었다. 

    • 장이라는 공간은 사람과 사람의 다리가 되어, 윗마을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잊어버렸던 친척을 만나기도 한다. 홍시감 몇 개 갖고 나온 박 씨(81세) 할머니는 홍시만 한 붉은 무게로 앉아 “사람들 보고 싶어 나왔구먼유.”라고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정(情)도 붉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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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천장 외에 열리는 장은 거봉포도, 돌실사과, 꿀수박, 생거진천쌀, 진천장미, 그리고 덕산약주로 불리기도 하는 천년주가 나오는 덕산장(4일, 9일), 쌀, 이월장미, 이월관상어, 시설채소가 특산물로 나오는 이월장(1일, 6일), 관상어와 장미가 많은 광혜원장(3일, 8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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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경북 고령장


    “햇볕에 말린 고추 때깔 좀 보소 , 톡 쏘는 매븐 맛이 쥑인다카이”

    조선시대 장기리에 형성됐다가
    구한말 대홍수 인해 지산리로 옮겨와
    인근 큰 장 없어 성주·합천서도 찾아
    건고추 등 농산물 흥정 ‘시끌벅적’
    쫄깃한 식감 ‘수구레국밥’ 별미




     손수레에 토란대를 가득 실은 이씨 할머니(73)가 희미한 장터 불빛 속으로 들어온다. 새벽 3시 무렵 전등이 일제히 켜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다. 경운기 가득 실려 있던 고추 포대를 내려놓자 도매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포대를 열어젖히고 맛을 본다. 5시가 지나자 고추를 비롯해 고구마·호박·땅콩 등으로 장터는 붉고 푸른 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된다. 농민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풍족한 농산물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새벽을 깨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햇볕에 말린 내 고추 때깔 좀 보소. 하루에도 열일곱번이나 변하는 기 고추 아인기요. 혀에 닿으면 달달하고 톡 쏘는 매븐(매운) 맛이 쥑인다카이.”

     경운기 가득 고추를 싣고 나온 심씨 할아버지(82)의 자랑이다. 저울 눈금이 집에서 단 것과 다르다며 흥정하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장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대가야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북 고령은 곳곳에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또 질 좋은 고령토가 많아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토기를 재현해낸 곳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 고령읍 장기리에 형성된 고령장은 구한말 대홍수로 인해 지금의 자리인 고령읍 지산리로 옮겨왔다. 4일과 9일이 들어 있는 날이면 장이 열리는데 인근에 큰 장이 없어 장날이면 인접한 경북 성주, 대구 달성, 경남 합천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우곡수박·쌍림딸기·개진감자·성산참외·덕곡토마토 같은 고령 지방 특산품이 장터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향부자와 천궁 등의 약용작물, 은은하고 순한 민속주인 ‘국청’, 고령읍 본관리의 향토주인 ‘본관동스무주(本館洞二十日酒)’도 유명하다.

     운수면에서 토란대와 호박을 갖고 나온 김씨(65)와 부인은 달려드는 중간상들을 물리치고 “비료값이라도 건지려면 직접 팔 수밖에 없다”며 자리를 잡고는 한마디 건넨다. “운수벼루 압니꺼? 대평리에서 캔 원석으로 만드는데, 먹도 잘 갈리고 마르지도 않고 글 쓰마(쓰면) 붓도 잘 나가는…. 내가 거기 산다 아입니꺼.” 토란대 팔 생각보다는 마을 자랑에 열을 올리는 김씨의 웃음소리에 논에서 벼 익어가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장터에서 3대에 걸쳐 55년 동안 고령대장간을 이어오는 이씨 부자도 만나볼 수 있었다. “여가 어릴 때부터 울 아부지 따라 일한 데 아이가.” 반세기 동안 일해온 대장간을 집안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이상철씨(70)는 지금도 새벽 3시30분이면 어김없이 불을 지펴 하루를 시작한다. 이씨는 “쇠를 다루는 데는 담금질이 제일 중요해. 쪼매마 한눈 팔면 고마 못 쓴다카이” 하며 아들 이준희씨(40)가 구슬땀을 흘리며 낫 두드리는 모습을 찬찬히 내려다본다.

     고령장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하나가 수구레(소의 가죽 안쪽의 쫄깃한 아교질 부위)를 넣고 끓인 수구레국밥. 이 고장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가을 수확철이 되면 장바닥은 한해 동안 몸과 마음을 바쳐 가꾸고 거둔 농산물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지천으로 널린 고추 사이로 만원짜리 지폐가 흔한 종이처럼 오간다. “고추 시세가 좋지 않지만 빌린 농자금 때문에 조금이라도 건지려고 나왔는데 전국에서 고령 고추값이 제일 싸서 걱정”이라는 게 장씨 할아버지(78)의 하소연이다.

     주전자에 미꾸라지를 넣어온 김씨 할머니(87)는 가지와 오이·논우렁·토란으로 좌판을 꾸몄다. 40년째 고령장에 나온다는 할머니가 마수걸이로 미꾸라지 만원어치를 팔았다. 하얀 이가 귀에 걸릴 듯 좋아하던 할머니는 고쟁이 속에서 복주머니를 꺼내 돈을 넣더니 다시 고무줄로 묶는다. 호박 한덩이와 콩 두어되 가지고 사람 만나는 재미로 장에 마실 나오던 옛날 할머니들의 모습을 점점 보기 어렵게 된 게 요즘 시골 장터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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