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변치않는 것이 장터 인정이여”

 
끝자리가 4·9일 날에 열려
참깨·땅콩 등 특용작물 많고
주변에 간석지 있어
특산물 남양소금·해산물도 풍성

 


손수 키우고 거둔 호박·콩·마늘 등을 들고 장에 나온 할머니들.

카메라를 갖다 대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장터 인정”이라고 한다.(위 사진)

                                              어느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약초. 이 난전의 주인은 가시오갈피와 인삼을 들고 나왔다.(아래 사진)

 

잿빛 하늘을 무겁게 인 파라솔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삽상한 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을 끝자락에 선 화성 조암장에는 장꾼들이 산과 들에서 갖고 나온 온갖 곡식과 열매들이 알맞게 영글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처연한 사물의 형상에 콧등이 시큰거려 서리태를 다듬는 어느 할머니에게 다가가 콩 농사가 잘되었냐며 인사를 건넸다. 고씨 할머니(79)는 “도시 사람들은 책상머리에 앉아 가을 타령들을 하지만 시골에서는 한가롭게 가을 이야기 할 여유가 없다”며 웃는다. 수확철만 되면 깡통을 매달아 두드리며 새도 쫓아야 한단다. 요즘 참새들은 배짱이 두둑해져 허수아비를 우습게 알고, 먹을 것만 있으면 마구 덤벼들어 바쁜 일손을 더더욱 바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콩을 까다가 대뜸 말을 잇는다.

 “요것들은 엊그저께 서리 맞고 영근 것이라 갖고 나왔구먼. 해콩 사다 밥 해묵으면 맴도 영근다고 했어. 한사발 사 갖고 가?”

 고를 틈도 없이 장에 갖고 나와서는 정리해가며 서리태를 까는 할머니 모습이 집 마당에서 일하는 모습 그대로다.

 무더위와 장마에도 꿋꿋하게 여물면서 지난한 시간을 건너온 온갖 곡식들이 기특하게 보인다. 늦가을 서리가 내린 후에야 수확한다는 서리태의 순정한 빛깔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여름 그 뜨거운 햇살 아래 몸부림치면서 자라온 것들이 저절로 붉어질 리 만무하다. 분명 그 안에는 바람과 비와 햇볕이 스며들어 이렇듯 자연스러운 색깔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1929년 3월에 개설된 조암장(경기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은 끝자리가 4일과 9일에 열리는데, 버스터미널 뒷길로 길게 이어진다. 초창기에는 음력 칠월 백중날이면 일대의 농사꾼들이 몰려와 낮부터 밤늦도록 씨름 대회를 열어 난장판을 벌이면서 주민들을 모았다고 한다. 이렇게 형성된 조암장에는 쌀ㆍ고추ㆍ배추ㆍ무ㆍ파ㆍ마늘ㆍ당근ㆍ시금치 등의 일반 농산물과 참깨ㆍ들깨ㆍ땅콩 같은 특용작물이 많이 나온다. 근처에 간석지가 있어 특산물인 ‘남양소금’과 굴ㆍ꽃게 등의 해산물도 풍부하다.

 김두진 할아버지(83)는 고무신 구멍 때우는 신기료장수, 라이터돌 파는 장돌뱅이, 돼지기름으로 부침개 부치며 술 파는 아낙네 등이 많았던 예전의 장이 더 좋았다고 한다. 김씨 할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뻥튀기 장수와 선거철만 되면 한표라도 더 얻으려고 악수하러 다니는 높은 양반들”이라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장터는 화성갑 보궐선거를 하루 앞두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확성기 소리로 요란했지만, 장에 나온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구두를 수선하거나 톱이나 칼을 갈아주러 50년째 장에 나온다는 김씨 할아버지는 장날이면 가방 하나 둘러메고 이곳 조암장을 포함해 화성의 발안장ㆍ사강장, 오산의 오산장, 평택의 안중장 등 인근 다섯 오일장을 하루도 안 빼놓고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다. 일감이 없을 때는 하모니카로 유행가 한자락 뽑는 맛으로 산다는 김 할아버지의 차곡차곡 쌓아올린 시간들이 소중해 보인다.

 할머니 세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겨워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내게 조암리에 산다는 박씨 할머니(82)가 한마디 보탠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장터 인정이여! 가까운 사람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같이 모여 숟가락 부딪히며 음식도 나누어 먹고, 물건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서로 한동네 사람처럼 지내고….”

 문득, 경상도 장터에서 만난 젊은 장꾼의 너스레가 생각난다. “아지매요, 밑지고 팔아도 정 하나 달랑 남으면 되는 기라예.”

 할머니 따라 나온 은행과 호박, 콩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자연이 빚어놓은 색깔과 땅의 냄새,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이 장터 속으로 흘러든다. 그 정겨운 풍경들이 카메라 속에서 손짓한다.

 조암장 외에 화성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바지락ㆍ꽃게 등이 나오는 남양장(1ㆍ6일), 인근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이 많은 발안장(5ㆍ10일),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는 ‘남양석굴’로 유명한 사강장(2ㆍ7일)이 있다. 남양석굴은 알은 잘지만 맛이 좋은데, 토질병(土疾病ㆍ풍토병)에 약이 된다고 해서 해방 전까지는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이를 사러 겨울철만 되면 몰려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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